|
fog 안개
폭 복 목 모
푹 북 부 우 북경어 한자음
푹 북 묵 무 霧안개,무 한자음
字頭聲符韻部對應廣韻小韻擬音註解
霧 | 矛 | 竇 | 務 | moɡs | 見爾雅,說文作霚 |
霧 | 矛 | 東 | 蒙 | moːŋ | 見史記 |
한자상고음
時代 | 聲韻系統名稱 | 韻部 | 聲母 | 韻母 | 備註 |
先秦 | 高本漢系統 | m | i̯uɡ | ||
先秦 | 王力系統 | 侯 | m | ǐwɔ | |
先秦 | 周法高系統 | 侯 | m | jew |
우리말에 까망 까맣다
이 말은 어떻게 생겼을까?
까맠 까맣다.
앞이 참 막막하다
kh ch sch sh
khmaukh
크멐 츠멐 스멐
rGyalrongic
smək'pe | fog | rGyalrong (Aba Rongan Menggucun) | Nagano 2013 rGyDB | 1277 | ||
smək̚'nak̚ | fog | rGyalrong (Rangtang Shili Erguowucun) | Nagano 2013 rGyDB | 1277 | ||
smək̚'pa | fog | rGyalrong (Rangtang Puxicun) | Nagano 2013 rGyDB | 1277 | ||
smək̚'pe | fog | rGyalrong (Aba Kehe Shuiricun) | Nagano 2013 rGyDB | 1277 |
독일어
schmauchen [ʃmáʊxǝn]
1.자동사 짙은{검은} 연기를 내다
2.타동사 느긋하게{즐기며} (담배를) 피우다
3.타동사 연기를 피우다
mukh 墨묵
Musche [mʊ́ʃǝ]
1.여성형 명사 (과녁 따위의) 흑점, (애교로 얼굴에 붙이는) 검은 점.
2.여성형 명사 (obd.) 창녀.
어근 quem 컴
컴컴하다 캄캄하다
스페인어
quemado 꺼멓다
1.형용사 검은
2.형용사 탄, 그을린
3.형용사 흑인의
2.3 Kiranti | ||||||
mak | black | *Kiranti | Opgenort 11 Tilung | |||
2.3.1 Eastern Kiranti | ||||||
kha makt- | become night <dark> | Limbu | Michailovsky 89 Lm | |||
mak | black | Limbu | Michailovsky 89 Lm | |||
2.3.2 Southern Kiranti | ||||||
mak | black, be | Bantawa | Rai 85 BnDs |
Tibetan (previously published reconstructions) | ||||||
s-mak ⪤ s-maŋ | ink / black | *Sino-Tibetan | Matisoff 83 TIL | 37 | ||
smək | black / dark | *Sino-Tibetan | Coblin 86 | 45 | ||
0.1 Tibeto-Burman (previously published reconstructions) | ||||||
s-maŋ ⪤ s-mak | black / dark / ink | *Tibeto-Burman | Matisoff 03 HPTB | 601 | ||
1 NE Indian Areal Group | ||||||
1.1 “North Assam” | ||||||
1.1.2 Deng | ||||||
ma: | black | Darang [Taraon] | Anonymous xx Tar | |||
mɑŋ⁵³ | black | Darang [Taraon] | Huang and Dai 92 TBL | 1005.22 | ||
mɑŋ⁵³ | black | Darang [Taraon] | Sun H 91 ZMYY | 841.49 |
Old Chinese | ||||||
mək | ink | Chinese (Old/Mid) | Chou 72 | 904c | ||
xmək | black | Chinese (Old/Mid) | Chou 72 | 904a-b | ||
hmɨk | black | Chinese (Old) | Baxter 92 | 1323 | ||
mək | ink / black | Chinese (Old) | Matisoff 83 TIL | 37 |
Chinese comparandum
墨 OC *mək, GSR #904c ‘ink’; Schuessler 2007:277 *mə̂k; B & S 2011: *C.mˁək; Mand. mò
黑 OC *xmək, GSR #904a-b ‘black’; Schuessler 2007:277 *hmə̂k; B & S 2011: *m̥ˁək (dial. *m̥ˁ‑ > *xˁ‑); Mand. hēi.
暮 OC *mɑ̂g, GSR #802d ‘evening, sunset; late in season’; Schuessler 2007:393 *mâkh; B & S 2011: (*C.mˁak‑s); Mand. mù.
墓 OC *mɑ̂g, GSR #802f ‘tomb, graveyard’; Schuessler 2007:393 *mâkh; B & S 2011: *C.mˁak‑s; Mand. mù.
큭 킥 컥--> 측 칙 척 발음변화
칙칙한 색
#6964 | tsik | BLACK |
어둠의 둠
#4062 | ɗum | BLACK / BLUE |
黑흑의 한자상고음은
khmk 크멐 꺼멐 크맠 까맠-->흐멐 허멐-->흨 흑
時代 | 聲韻系統名稱 | 韻部 | 聲母 | 韻母 | 備註 |
先秦 | 高本漢系統 | xm | ək | ||
先秦 | 王力系統 | 職 | h | ək | |
先秦 | 董同龢系統 | 之 | m̥ | uə̂k | |
先秦 | 周法高系統 | 職 | xm | ək | |
先秦 | 李方桂系統 | 之 | hm | ək |
#6130 | s-ma(ŋ/k) | BLACK / INK / DEEP |
크맠 츠막 스막 스목 smog/smoke
크멐 크멓 꺼멓 까맣
黑墨흑묵 크멐 꺼멓 꺼멍 까맣 까망 어원이 같다.
国际音标 xei˥ 唐代读音 *xək日语读音 KUROI KURO韩语罗马 HUK现代韩语 흑越南语 hắc
客家话 [海陆腔] het7 [客英字典] het7 [沙头角腔] het7 hek7 [客语拼音字汇] hed5 [东莞腔] het7 [台湾四县腔] het7 [梅县腔] het8 [陆丰腔] het7 [宝安腔] het7粤语 haak1 hak1
字頭聲符韻部對應廣韻小韻擬音註解
黑 | 黑 | 職 | 黑 | hmlɯːɡ |
廣韻
字頭小韻反切聲母韻母韻目調等呼韻系韻攝廣韻目次高本漢王力李榮邵榮芬鄭張尚芳潘悟雲蒲立本推導現代漢語古韻羅馬字有女羅馬字註解
黑 | 黑 | hu北 | 曉 | 德開 | 德 | 入聲 | 一等 | 開口 | 登 | 曾 | 入二十五德 | xək | xək | xək | xək | hək | hək | hək | he | hok | xok | 北方色呼北切三 |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왔다.
그 이름과 말은 백제가 오월을 정복하면서 부터 베트남과 광동성 등 중국 남부를
담로를 두었는데 이때 파견된 인물이 흑치상지다.
그곳에 가서 성을 새로 바꾼 것이다.
흑치상지묘지명에는 그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봉지와 호주를 승계하여 달솔로 제수되었다고 적고 있다.
증조 문대, 고조 덕현, 부 사차, 모두 대대로 달솔을 역임했다.
부친 사차가 그때 돌아가셨고, 집안의 장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흑치부(黑齒府)의 군장(君長)이 되었다.
선조는 원래 부여씨(夫餘氏)로부터 나왔다.
흑치에 봉해졌으므로 흑치의 성을 갖게 되었다.
검색을 하다보면 흑치상지를 이방인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남방의 번족 출신이라는 것이다.
우리민족과는 이질적인 ‘흑치’라는 지명.
공통점은 양서와 송서의 ‘요서에 진평이군을 설치했다‘는 기록과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의 ‘남으로는 오와 월, 북으로는 유와 연과 제와 노를 괴롭혔다’는 기록을 근거한다.
중국 남해의 광주 일대
그는 2002년 그곳을 답사했다.
광서장족자치구 남녕에 백제향이 있다.
현지 주민들은 오늘날에도 현대 한국어발음으로 ‘대백제’라고 부르고 있다.
거기에 검은 이의 원인인 빈랑을 씹던 풍속과 뱀 요리, 벼농사를 덧붙인다.
중국 「Baidu지도」라는 사이트에서 沙泮(사반)을 치면, 광동성 광주에서 남해로 물길이 빠지는 길목에 36개가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인근 바다는 동사군도, 중사군도, 서사군도, 삼사, 모두 沙(사)를 넣어 동서남북을 표시하고 있다.
웅진도독부가 671년 신라에 의해 완전히 해체된 이후 흑치상지가 672년 이후에 받은 직책이 행대방주장사에 이어 사반주제군사 사반주자사였다.
사학계에서는 사반을 영광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광주와 영광은 소부리 땅보다 신라에 더욱 가깝다.
신라는 나당전쟁에 돌입하기 전 671년에 후환이 될 만한 백제의 80여 성을 모두 함락시켰다.
그때 웅진성도 뿌리 뽑히고 가림성 등 서부 일부 지역만 남아있었다.
한반도라고 가정해보았을 때 신라가 북쪽의 웅진성까지 짓밟으면서, 도성에서 보다 가까운
영광 일대를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리 없다.
배후를 공격당할 위험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흑치상지의 행적을 좇다보면 그의 국제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치른 전투는 대체로 국제전이었다.
당나라, 토번, 돌궐. 언어와 풍습은 물론이요 해발 3천 미터 이상의 고산과
고비사막이라는 환경조건 역시 극과 극을 달린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오가면서 그는 전투를 했고, 불패의 신화를 남겼다.
병법은 궤도라고 했다. 적을 속이는 것이다.
적을 내 손바닥에 두었을 때에야 가능하다.
지형파악이 그 첫째다.
그가 유년 시절부터 국제적인 교류의 장소에서 성장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적의 위세에 기죽지 않는 의연함이 있다.
그는 소정방, 김유신, 가르친링, 골돌록이라는 당대의 동아시아 맹장들과 전장에서 마주쳤다.
해발 3,4천이라는 고산지대의 명장 가르친링, 혹독하고 광활한 북방의 패자 골돌록.
그들을 어린아이 다루듯 제압했다는 것은,
좁은 한반도 안에 갇혀 살았던 무장이 벌인 판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흑치상지의 아들 흑치준의 묘지명에는 고향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흑치준은 당나라에서 태어났다. 백제가 망한지도 거의 50여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아비와 같은 흑치부군(黑齒府君)이다.
그도 역시 아비의 뒤를 이어 흑치부 군장의 직위를 계승했다.
흑치준의 묘지명을 읽으면 그가 생전 고향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묘지명의 찬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흑치준과 함께 흑치를 오갔고 흑치준이 고향을 그리워했고 고향을 자랑스러워했던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 심정을 묘지명에 담았다.
목화의 「해부」를 통해 고향의 아름다움을, 진나라 자사의 「삼도부」를 인용해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했다.
삼도부에는 전국책 조책의 ‘흑치조제 제관출봉’을 인용했다.
이를 검게 물들이고 이마에 문신을 하는 오(吳)의 풍습.
주(周) 태왕(太王)의 아들 태백이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고자
형(荊) 땅으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오(吳)의 시조가 되었다.
묘지명의 찬자는 흑치준의 윗대를 슬며시 드러내어
모두 주 태백이 일구었던 형 땅의 옥과 같았던 분들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흑치준의 묘지명에 기록된 그의 고향은
일본서기와 양서의 기록, 무엇보다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의 백제강역과 일치한다.
구당서에는 백제국이 5부 37군 200성 76만 호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176성 69만7천 호를 능가한다.
인구수는 곡창지대의 인구밀집 때문이더라도 성(城)의 수는 강역과 관계된다.
오히려 고구려의 성이 더 많아야 한다.
강역에 있어서 2, 3배의 차이를 보인다.
현재 발견되는 성(城)도 고구려가 압도적으로 많다.
백제의 영토가 고구려 못지않았다면, 해외에 백제관할지가 있었다고 해야 한다.
밖으로 여섯 대방과 10군이 있었다는 기록을 허구로 돌릴 수 없는 이유이다.
일본의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백제를 일본에서 ‘구다라’라고 표기하는 이유에 대해, 한국의 ‘큰 나라’라는 말이 ‘구다라’가 되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말한다.
『산해경』 해외동경에 흑치국이 있다.
‘이가 검고 벼를 먹고 뱀을 먹는다.’
해외동경의 북쪽에 있다는 기록으로 흑룡강변으로 흑치국을 잡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해외북경에는 황하가 나오고, 적석산(積石山)이 나온다.
황하와 위수(渭水)가 있는 곳에 등림이 있고, 등림의 동쪽에 우(禹)가 살았던 적석산이 있다.
적석산은 청해성에 있다. 곤륜산에서 발원한 황하는 적석산을 지난다.
흑치상지가 토번경략으로 하원(河源)에 머물 때 당항을 토벌하려고 하였는데 그곳에 적석산이 있다.
적석산을 기점으로 동쪽을 잡아 흑치국의 풍습이 일치하는 곳을 찾으면 광동성 광주(廣州) 일대가 된다.
한국의 개 요리에 비견될 중국의 뱀 요리, 서차이는 광동의 대표 요리이다.
뱀이 크고 육질이 풍부하다. 2천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미판(쌀밥), 니앤까오(떡) 등 쌀로 만든 음식을 즐긴다.
빈랑열매를 씹었고, 사반(沙泮)의 지명이 있는 곳이다.
백제금동대향로에는 무수한 동물이 새겨져있다.
원숭이, 악어, 코끼리, 사자, 낙타도 있다.
『일본서기』에는 스이코 천황 이후
백제로부터 낙타, 앵무새, 코끼리 등의 동물이 전해졌다고 했다.
천무천황은 아스카 궁에 백금후원을 만들고 이들을 길렀다.
이런 동물들은 중국 광주의 서쪽 운남성에서나 볼 수 있다.
운남성 장족자치주에는 지상의 유토피아 샹그릴라가 있다.
곤륜산맥의 등줄기로 해발 3,200미터이건만 독특한 지형구조로 인해 아열대에 속한다.
때문에 기이한 동물과 식물이 많다.
백제금동대향로는 그곳의 풍경을 보는 듯하다.
아열대의 조류와 동물들과 산과 계곡의 형태.
산해경 해외동경의 인면수신(人面獸身)에 뱀을 늘어뜨린 사비의 형태도 있다.
흑치국도 해외동경에 있다.
해외동경에 뱀이 제일 많이 나온다.
티벳으로 향하는 차마고도(茶馬古道)는
국제교역항 광주에서 리강, 샹그릴라로 이어진다.
높은 고도에 토번의 사람들, 토번의 정보가 자연스럽게 흐르는 곳이다.
구당서 동이편에는 백제의 서쪽으로는 월국(越國)에 이른다고 했다.
월국은 베트남의 땅으로, 월남의 월은 월국에서 유래했다.
양자강 하류에 세워졌던 월나라는 백제가 생길 무렵 이미 베트남 지역으로 옮겨간 뒤였다.
백제인들은 물과 돌에 능했다.
물과 돌은 불가분의 관계다.
신라 무영탑을 세운 백제 아사달의 이야기는,
돌을 다루는 백제장인들의 뛰어난 솜싸를 은연중 드러낸다.
그리고 유네스코에 등재하려는 벽골제가 있다.
벽골제는 축조 당시 동양제일을 자랑했다고 한다.
지금도 건축이 힘들다는 일본 가츠라가와 협곡의 사루하시 다리는,
백제인의 석공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오사카의 사야마이케(협산지)는 물과 돌에 능했던 백제인이 남긴 불후의 작품이다.
사야마이케는 616년 다니 강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어 농수와 식수를 동시에 해결했다.
저수지로부터 지하수로를 거미줄 망처럼 연결하여 오사카 전역에 물을 공급했다.
돌을 사각으로 잘라 틈 없이 잇대어 연결한 지하수로,
수로의 물 조절장치, 댐 축조 방식 등 당시의 혁명적인 대토목공사였다.
1천4백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오사카는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
동양의 베니스라는 운남성 리강 고성(故城)을 보았을 때,
일본의 사야마이케와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성의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진사강을 고성 안으로 끌어들여 도시 전체에 수로를 연결했다.
수많은 물줄기가 거미줄처럼 종횡으로 교차되며 도시 전체를 연결한다.
한 줄기를 세 줄기로 나누고, 세 줄기를 아홉 줄기로 나누어가며 사방팔방으로 물길을 내었다.
물길을 따라 집들이 들어서 있어 마치 물위에 지어진 도시처럼 보인다.
물은 사계절 변함없이 일정한 양으로 그 도시를 흘렀다.
건기와 우기에 따른 수로의 각도가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중국의 설명이다.
단언하건대 사야마이케를 건설해 오사카의 수로망을 건설했던 토목공사 달인들의 솜씨가 아니면 불가능한 걸작품이다.
백제인들 외에 그런 기술을 지녔다는 민족에 대한 기록이 없다.
백제인들의 동남해양 교역로를 보면 거점도시 중의 하나가 광주였다.
광주는 서양 상인들도 제일 먼저 거점으로 삼은 곳이다.
그래서 혼란기에는 해적이 많았던 곳.
중국 해적의 역사는 광주와 함께 한다.
물길이 복잡하여 소탕하기도 쉽지 않았다.
흑치준묘비명에는 고향을 일러 ‘택국’으로 칭했다.
차마고도가 활기찼던 시절에는 광주와 리강, 샹그릴라를 따라 오갔던 티벳인들로 붐볐을 것이다.
일본서기 642년조에는 백제에서 곤륜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다는 기록이 보인다.
곤륜은 운남을 말한다.
운남이 곤륜산맥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고대에는 운남을 곤륜이라 했다.
흑치의 풍습은 양자강 이남에서 동남아일대에 걸쳐 널리 분포되어 있다.
흑치의 풍습이 있었던 곳에 흑치의 봉지가 있었을 것이다.
흑치준묘지명(黑齒俊墓誌銘)에는 그곳에서 추장으로 불렸으며,
‘먼 미개의 땅에서 그들을 교화시켰다(熾種落於遐荒)’로 나온다.
흑치상지는 그런 풍경 속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국제적인 시각과 감각을 몸으로 익혔을 것이다.
백제금동대향로는 그들의 국제적 감각을 여실히 반영한다.
베네치아인들에게 뻘밭이라는 악조건이 건축술과 항해술을 발달시켰듯이,
백제인들 역시 택국(澤國)으로 인해 대규모 저수지와 수리시설을 발달시켰으며,
물과 돌을 다루는 첨단기술을 낳았다.
숱한 물길은 배를 만들게 했고, 배는 항해술을 발달시켰다.
항해술로 무역로를 개척했다.
중계무역이 발달하고, 장거리 항해에 따른 중간 기착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곳은 거점도시로 발달했다.
이탈리아 베니스의 발달과정을 닮았다.
베니스와 백제는 그렇게 해양 중계무역을 통해 부를 구축했다.
한반도 백제지역에만 존재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3후6왕의 봉지.
팔중후, 불사후, 불중후, 면중왕, 도한왕, 아착왕, 매로왕, 매라왕, 벽중왕은 모두 어디에 존재했던 것일까.
왕의 봉지는 최소 사방 1백 리를 기준 한다. 여기에 6대방과 서하, 광양, 조선, 광릉, 청하, 대방, 낙랑, 성양 등의 10군.
어쩌면 수면위로 드러난 백제보다,
물 속에 깊이 잠긴 백제의 강역이 더 넓었는지도 모른다.
671년 웅진도독부가 무너지고 672년에 흑치상지가 제수되었던 충무장군행대방주장사,
그 이후 직책이었던 사반주제군사 사반주자사를 볼 때,
여섯 대방 중의 한 대방과 사반(沙泮)은 서로 이웃하거나 포괄된 지역이었을 것이다.
소진철 교수의 주장처럼 광주와 남녕, 이강과 샹그릴라 일대를 포괄하는
‘큰 나라’ 대백제의 한 거점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https://blog.naver.com/rsl308/221503324026
의자왕이 항복하고 백제가 멸망했을 때 주위의 장군 1백 여명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한 장수가 흑치상지다.
‘흑치’란 검은 이빨을 뜻하는 한자어이기 때문에 이 사람의 치아가 검었음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남방 유구열도나 베트남 원주민들은 치아가 부패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열대림에서 나오는 열매의 검은 액즙을 이빨에 바르는 습속이 있었다.
이빨을 검게 칠하고 다니는 이 장수의
특징을 본 따 ‘흑치’란 이름을 지었을 것이란 추리가 가능하다.
출처:울산 제일일보
치아를 검게 칠하는 대표적인 부족으로 미얀마의 Ann 족이 있습니다.
과거 베트남도 치아가 변색되고 착색되면 건강한 치아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쪽 열대지방에서는 '까우'라는 '빈랑수' 나무열매 씨를 말려 물로 반죽하여 붙이고 다시 칡 나무류 나뭇잎으로 싸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씹으면 침이 빨갛게 되고 입에는 약간 쓴맛이 들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주는데, 많이 씹으면 치아가 갈색 내지 검은색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과거 백제의 왕족 출신인 흑치상지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백제인으로서 당나라의 장군이 된 사람인데 성은 부여씨인데 흑치라는 땅을 다스리게 되면서 성이 흑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곳 사람들은 남방에서 많이
생산되는 과일을 먹고 치아가 검게 변했다고 하여 흑치(黑齒)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전해집니다.
카리브해 연안의 인디언들은 충치 예방을 위해 사춘기 때 치아가 숯처럼 검게 될 때까지 나뭇잎을 씹어
치통과 충치를 예방했다고 합니다. 특히 남미의 일부 부족들은 '야나무코'라는 나뭇잎으로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잎에는 놀랍게도 충치를 방지하는 성분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출처:https://blog.naver.com/23hyunsj/221811379301
백제의 장수중 ‘흑치상지’란 장수 있었는데 본명은 백제 왕족인“부여씨”이다.
고향은 조상이 봉을 받은 나라 ‘흑치국(黑齒國)’즉 ‘베트남’과 ‘장족’자치구 쪽 이었다.
특수 나뭇 잎을 씹는 습관 때문에 이빨이 검게 물들어서 ‘흑치’라고도 하였다.
이곳에도 백제라는 지명과 말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몽골어
ухаагч
1. 불그스레한2. 불그레한 갈색을 띤3. 엷은 황갈색의
발음 [ 오하악치 ]검을,오/까마귀,오 烏 +黑검을,흑
흑치와 관련된 지명이 중국에만 존재한다.
백제는 산뚱반도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치아를 검게 하는 풍습은 이웃 일본에서도 발견됩니다. 옛날 일본에는 '오하구로(Ohaguro)'라고
일본 드라마 <지옥선생 누베>의 한 장면 (나무위키)
하는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화장법이 있었습니다. 고대 일본에서는 귀족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했으며
중세 이후에는 신분이 높은 화 족이나 그에 버금가는 귀족 계급의 여성들이 많이 하던 풍습이었습니다.
'오하구로'에 쓰이는 염료를 '카네(철장)'라고 하는데, 이 카네의
주성분은 철을 초산에 녹인
'카네미즈(철장수)'라고 하는 용액이며, 일상적으로는 식초, 청주, 물엿, 녹차를 석은 것에다 못을 넣고 카네미즈를 만들었는데, 여기에 탄닌산을 다량 함유한 분말을 섞은 것이 카네이다.
이렇게 하면 카네미즈의 성분이 탄닌산과 결합되어 색이 검어지고 물에 녹지 않는 성분으로 변한다는 것이죠. 카네는 다른 이름으로 '후시코'로도 불리는데, 오하구로 이외에도
착색용으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충치 예방 효과도 있어 꽤나 과학적이었던 같습니다.
이 흑치의 진정한 의미는 남편에게 영원한 순종과 충성을 맹세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본의 구시대 풍습은 1700년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고 전해집니다.
https://blog.naver.com/23hyunsj/221811379301
이렇게 했던 이유는 당시의 미적 감각에 의하면 새까맣게 물들인 치아가 아름답다는 인식에서였습니다.
당시 일본 여성의 화장법은 얼굴에 새하얗게 분칠을 하고, 검고 두껍게 그린 가짜 눈썹과 붉은 입술로
포인트를 주는 방식이었는데, 아무래도 새하얀 얼굴에 비해 치과위생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이가 상대적으로 누렇게 보일 수밖에 없어서 아예 검게 칠해버린 것이지요.
치열이 고르지 않은 사람의 경우 치열이 잘 보이지 않게 하는 효과도 있었겠지요.
단순히 미용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오하구로를 하게 되면 충치 예방 등의 실용적인
효과 또한 있었죠. 하지만, 이런 검은 이는 영구적으로 색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고
물에 잘 녹지 않는 성분을 이에 칠한 것에 불과해 수시로 칠해줘야 했지요.
주류성은 무너지고 홀로 남은 것은 지수진이 지키는 임존성 뿐이었다. 이 임존성을 무너트린 장수는 흑치상지라는 백제 장수인데 그는 이제껏 부흥군에 앞장서서 나당 연합군에 맞서 싸워온 인물이다. 그는 누구인가?
70여 년 전 중국 낙양에서 발굴된 그의 묘지에 따르면, 그는 증조할아버지 대에 중국 흑치나라에 백제가 보낸 다무로 확고 집안의 후손이었다. 대대로 달솔이라는 벼슬을 지낸 백제 왕족이며, 원래 성씨가 부여였으나 흑치나라를 다스리면서 흑치라는 성씨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 강남에 있던 백제 다무로에서 달려온 것이다.
바람과 같이 나타난 이 장수 밑에 도망갔던 백제 군사들이 모여들어 열흘만에 3만 명아나 모였다고 한다. 사비성 함락 후에 일어난 일이다. 소정방은 군사를 보내 이들을 쳤으나 크게 진다. 이 당군을 물리친 흑치 장수가 이끄는 부흥군은 여러 백제성을 되차지했고 그 기세가 당당하여 소정방의 당군도 손을 못 썼다고 한다.
흑치상지는 별부장 사타 상여와 함께 험준한 요지에서 부흥전을 이끌어 갔다. 그러나 당으로 끌려갔던 태자 융을 백제도독으로 내세우는 당군에게 포섭되어 무슨 이유에선지 변절하게 된다. 복신을 따르던 흑치상지였기에 복신이 참사되자 부흥군을 떠났다고도 한다.
주류성이 당에게 함락된 뒤, 흑치는 사타상여와 함께 지수진이 지키던 임존성을 빼앗는데 성공한다. 이로써 백제 부흥군은 백제패망 3년 만에 완전히 꺾기게 된다. 그 뒤 흑치는 백제를 다스리던 도독부 안에서 요직을 거쳐 당나라에 가서는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나중에는 모함으로 비운에 간다.
그러나 그가 다스리던 흑치나라였던 고장은 그 일부가 현재 중국 광서성 장족 자치구 내에 있는 '백제허'라는 고을에 남아 있고, 대백제의 후손임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고 한다. (백제와 다무로였던 왜나라들, 김영덕, 글로벌콘텐츠, 2013, 228~235쪽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