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방에 올리는 공부글의 내용을 바꾸었습니다.(자료가 날아가버린 탓에)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팔공산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책도 냈고, 팔공산 답사팀을 꾸려서 찾악다니기도 한 곳이라서 조금은 익숙해서 입니다.
이제는,, 직접적인 문학 공부보다는 주변 이야기를 , 그래서 그림, 신화 그리고 미국사를. 미국사는 현재의 우리를 아는데 가장 좋은 역사 자료라는 생각이 들어서------.
간간이 좋은 수필도 올리겠습니다.
제가 낸 책입니다. 이 책은 수정본입니다. 그 전의 책에서 많이 수정하였으며,
이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저와 다른 의견을 주셔도 환영합니다.
1. 세월이 흘러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산 이름이나 강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팔공산의 이름을 언제부터 불렀을까?
가장 오래 된 문헌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고려사에서는 공산(公山)이라고 하였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중종 25년(1530)에 발간한 신동국여지승람에서 비로소 팔공산이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불렀는가에 대하여 두어 가지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하나는 팔공산의 아래에 여덟 고을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가장 믿고 있다. 또 하나는 전설이다. 팔공산의 굴에서 여덟 스님이 수행하여 해탈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전설을 주목하면 동굴이 나오고, 스님이 나온다. 동굴은 토속 신앙적인 면이 강하고, 스님이야 말할 것도 없이 불교적인 내용이다. 이 전설은 적어도 팔공산이 불교의 신앙지가 된 이후에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팔공산의 신앙적 요소를 암시하는 것이 많다.
다음은 중악(中岳)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오악(五岳)에 제사를 지냈다면서 토함산, 지리산, 계룡산, 태백산 그리고 중악으로 팔공산을 꼽았다. 신라는 명산대천을 대, 중, 소(大 , 中, 小)로 나누어서 제사를 지냈다. 팔공산은 중사를 지낸 산이었다.
전라도 김제에 있는 모악산에 대비하여 부악(父岳)이라 불렀다 한다. 공(公)이 부(父)로 전이된 것이 아닐까 라며 근거가 없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동화사의 창건과 연관 지어 보면 전혀 근거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동화사는 법상종 사찰로 미륵불을 모시는 모악산의 금산사와 관련 있다. 금산사 진표 율사의 미륵신앙을 심지 대사가 받아 온 창건설화를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1931년에 발간한 달성군지에는 동수산(桐藪山)이라고 하였다.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굳이 찾는다면 고려사에 왕건이 견훤과 전투에서 패배한 사실을 두고 ‘공산공수대전불리(公山桐藪大戰不利)라는 기록이다. 그러나 앞에 공산이라는 말이 있어 이것도 근거가 미약하다. 그러나 ’대구의 향기‘와 ’동아세계대백과‘에 동수산으로 인용하여 나오므로 근거 없이 산 이름을 붙이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공적 자료 형식인 책에서, 함부로 글로 나타내는 것은 부작용도 있습니다. 사적인 글이 아니고, 공적인 글에는 유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곰에서 공으로, 또는 치산(雉꿩山)에서 전이된 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역시 근거가 약하다.
삼국사기의 기록만으로는 중사를 지낸 장소는 알 수 없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토속신앙에서는 자연신에 제사를 지냈으므로 일정한 장소를 정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뿐만 아니고 의례를 지내는 곳으로 인공적인 성소로서 건물이나 제단을 남기기 않았으리라 추축한다. 우리의 무속을 통해서 토속신앙의 자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오늘의 무속 제의에는 의례만 있을 뿐 영구성을 지닌 신전 같은 성소가 없다. 따라서 신라 시대의 기도처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그렇더라도 팔공산의 어디에서 중사의 제사를 올렸다는 것은 틀림없다. 제사 터로서 밀대라는 기록이 있다. 윤 교수(경북대에서 은퇴하신 원로 사학자이십니다.)는 밀대의 위치를 찾을 수 있으면 제사를 지낸 곳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臺)라는 글자의 뜻대로 설명하면 제사를 지낸 장소에 제단을 쌓았다는 의미도 된다. 그렇다면 밀대의 위치를 찾는 것은 무의미 하다.. 왜냐면 단을 쌓아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장소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