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년에 한번 국립묘지를 참배는 하지만 단체 일정이 바뻐서 장군 묘역까지만 올라가고 역대 대통령묘소가 있는 곳은 아직 한 번 가보지 못했다
군대갔다 온 사람은 그당시 군인의 유일한 벗인 전우신문은 잘 알지만 국방일보란 신문은 잘 모르는 사람이 있을 텐데 국방일보는 전우신문의 다른이름(?)이다
나는 눈이 나뻐서 통상 신문의 큰 제목만 보는데 어제는 도봉산 산행인데 안산에서 도봉산 역 까지는 장장 두시간 반의 긴 電鐵 여행이라 國防日報랑 신문 뭉치를 들고 敬老席 한 구석에 앉아 국방일보를 보든 중 "국립묘지 한가운데 웬 後宮의묘?"란 제목이 눈에 띄어 처음 보는 이야기기라 읽어 보고 내용을 모르는 다른 사람을 위해 여기에 옮겨본다
말하려고 하는 後宮의 묘의 위치는 李承晩 대통령묘소와 金아무개 대통령 묘 중간에 위치해 있는데 서울시 유형문화재54호로 지정 되어 있다고한다
그 묘의 주인공은 조선 중종의 후궁이였던 창빈安씨라고하는데 安山 安씨였던 창빈은 안산에서 아버지 안탄대의 딸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중종反正때 原從공신으로 공을 세워 적순부위(종7품)가 되어 9세인 딸을 궁녀로 들여 보냈다고 한다
그 당시는反正功臣 들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고져 자기 누이나 딸을 임금의 후궁으로 바쳤다고 한다 그래서 中宗은 廢妃 1명,繼妃 2명,後宮7명을 거느렸는데 9남11녀를 두었다고 한다 참고로 중종은 우리가 2호선 전철을 타고 가다보면 선릉역(선정릉)에 묻혀 있다
安씨는 중종의 생모인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를 侍奉하던 중 중종의 눈에 들어 19세때 중종의 聖恩을 입어 후궁이 된후 30세에숙원(종4품),41세때 숙옹(종3품)으로 종3품이면 오늘날 정부의 국장 급이나 준장급이라고 한다
안씨는 2남1녀를 두었는데 다른 후궁들은 자기 소생으로 代統을 이으려 하다가 모두 자식들은 죽음을 당하거나 자신도 死藥을 받았는데 安씨는 자비로운 성품과 근검 절약하는 절제 행동으로 덕망이 높아 자신의 지위와 분수를 알았던 덕분에무사했다고 한다 中宗이 재위 38년만에 승하하자 위기를 느낀 안씨는 소생을 불러 눈물로 당부 하기를
"권력과 재물은 사람이 얻고자 해서 취해지는 것이 아니다. 때가 난세이니 만큼 너희는 탐욕을 내려 놓고匹夫匹婦로 살아감이 마땅할것이다.모(角)가 나면 깍이는 법임을 명심하라고 하였단다
그후 安씨는 궁중의 권력의 소용도리속에서 빠져나와 仁修寺라는 절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는데 자녀들이 절로 찾아 갔는데도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無念無慾의 행보가 궁중에 전해지자 朝鮮朝 최대의 惡后인 文貞王后도 安씨를 가상히 여겼다고 한다(문정왕후의묘는 泰陵에 있다)
安씨가 50세로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양주 장흥리에 묻었는데 산소 자리가 兇地라는 소문이 떠돌아 19세인 아들 덕흥군이 이듬해 3월 현재 위치로 옮겼는데 세간에서는 銅雀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당대地官이 보니 君王之地 였다고 한다
그당시 만일 朝庭君臣에게 발각 되면 꼼짝없이 逆謨行爲로 몰려 살아 남지 못 할 판이였다고 하는데 다행이 이 묘를 쓴 후 4년후 덕성군에게 셋째 아들 하성군이태어 났는데 이사람이 후에 후사가 없는 명종의 뒤를 이어 14대 선조가 되었다고 하니 세상사는 참 아이로니하다
여담이지만 金아무게는 자기 아버지(?)묘를 용인으로 옮겨 대통령되었다고 하던데 그 걸보고 李아무게도 대통령 할려고 이장까지 했는데 안 되었지만 그런데 왜김아무개가 죽어서도 욕 먹으면서 남의 무덤 사이에 파고 들라고 했는지 이제 그 이유를 조금 알것 같다 죽으면 그만인데 사람 욕심은 한이없는 것 같다
각설하고 그러니까 후궁 안씨는 선조의 친할머니가 된다 조선 시대는 아들이 왕이 되면 죽은 할아버지까지 추존을 하니 선조가 친할머니를 창빈으로 추존하니 창빈 묘로 불리게되고 아버지 덕흥군은 조선 최초로 덕흥대원군에 추봉되었고 이후 360년간 이여인의 혈손으로 王室代統이 이어졌다고 한다 선조는 正妃 출생이 아닌 後宮소생 庶子로 최초로 龍床에 오른 임금이며 창빈은 후궁 출신으로 최초의 왕의 할머니가 된다고 한다 숙종 10년에는 후궁으로는 드물게 무덤앞에 신도비가 세워 졌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립묘지를 선정시 여러기지 입지조간을 고려 해서 동작동 현위치를 지정했다고 한다 하여튼 동작동 국립묘지는 명당중 명당 자리에는 틀림이없는것 같다 역사에 관심을 많이 가진 나도 처음 보는 내용이라 이런 사실을 모르 는 분들과 함게 하고져 다이제스트해서 옮겨 보았네요
출처 :국방일보 2012년 6월7일자 우리고장 명인 명당(42)-국립현충원과 창빈묘 의 주재경기자의 편집기사 ▶ 글쓴이 : daumho 景福高 34回 同窓會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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