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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룡스님 수행담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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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5해방 후 내가 해인사로 출가했을 무렵에는 어른들이 공부 방법에 대해 특별히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옛날 어른들은 이렇게 공부하셨다 저렇게 공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을 뿐, 화두 공부가 어떤건지 주력 공부가 어떤건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강원에서 처음 글을 배울 때는 30명 가량이 함께 출발하여 초심반과 치문반으로 나뉘어졌는데, 당시 강사를 맡았던 나의 은사 고봉 스님께서는 마을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는 식으로 그날 배운 글을 그날 암송시켰습니다. 예불의식도 책을 갖고 가면 어른들이 한 번 읽어 주시고 '따라 읽어라' 하면 따라 읽고 '여기까지 외워라'하면 그 다음날까지 암송하는 식으로 공부를 배웠습니다.
그 당시 해인사에는 우리 용성 문중의 사숙님 되시는 월주스님이 계셨습니다. 예식에 밝고 경에도 밝으셨고 정진을 아주 잘하신 분이셨는데 강원의 학인들이 글을 못 외워 쩔쩔매고 하루종일 책상머리에서 끙끙거려도 암송을 못 하는 학인들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에 태어나서 업장이 두텁고 박복한 중생들이 업장 참회할 생각은 않고 까불거리고 있으니까 공부에 무슨 진척이 있겠느냐? 옛날 어른들은 천수다라니를 해서 업장소멸 하셨다."
그리고는 수월스님께서 천수주하여 깨달음을 이룬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수월스님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셨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세 살 안에 돌아가셔서 외삼촌 집에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모두가 가난했던 조선 말기에 내 가족들도 못 먹여 살리는 형편이었으므로 외삼촌은 남의 눈도 있고 하여 생질을 데려다 놓았지만 부담도 되고 힘도 들어 머슴처럼 부렸습니다.
20세가 넘어가면서 스님은 동네 사람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결혼을 하여 아이를 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산골로 들어가 중노릇을 하며 살리라' 결심을 한 그는 서산 천장사로 출가하여 성원스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배우지 못한데다 머리까지 둔하여 불경을 배워도 쉽게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성원스님이 예불문을 일러주면서 '따라 읽어라'고 하면 따라 읽었지만 '혼자서 읽어보라'고 하면 한 구절도 못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해보다가 은사 성원스님은 글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땔나무를 해오는 부목, 밥을 짓는 공양주등의 소임을 3년 동안 맡겼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월스님이 불공할 때 올릴 마지를 지어 법당으로 갔을 때 마침 부전스님(불공을 주관하는 스님)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송하고 있었습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 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스님은 이를 한 번 듣고 모두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머리가 좋지 않다고 구박을 받았는데 총 422 글자의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저절로 외워진 것입니다. 이후 스님은 나무를 하러 가거나 밥을 짓거나 마냥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흥얼거리며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사 성원스님이 법당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마지 오기를 기다리는데 당연히 제시간에 와야 할 마지는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고 밥 타는 냄새만 절 안에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부엌으로 찾아간 성원스님은 전혀 예상 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수월스님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면서 계속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밥이 까맣게 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솥이 벌겋게 달아 곧 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속에서 대다라니를 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본 성원스님은 수월스님에게 방을 하나 내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오늘부터 너에게 이 방을 줄 터이니 마음껏 대다라니를 외워 보아라. 배가 고프면 나와서 밥을 먹고 잠이 오면 마음대로 자거라 나무하고 밥 짓는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수월스님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가마니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짝에 달았습니다. 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방 밖으로는 밤낮없이 대다라니를 외우는 소리가 울려 나왔을 뿐, 물 한 모금 마시러 나오는 일도 없고 화장실 가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8일째 새벽 성원스님이 예불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그 소리가 딱 그쳤습니다.
그때 수월스님이 방을 뛰쳐나오 더니 소리쳤습니다.
"스님 스님! 이겼어요"
"뭐라고 했느냐"?"
"스님 제가 이겼어요. 잠 귀신이 '너한테 붙어 있다가는 본전 못 찾겠다'고 하면서 멀리 가버렸어요. 잠 귀신도 도망갔어요. 스님 제가 이겼어요."
은사스님은 수월스님이 기도를 하다가 미친 것이라 생각하고 호된 꾸중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수월스님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 합장을 하고 서 있는 뜻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걸 모른다."
"어딜 가야 답을 들을 수 있습니까?
"동학사에 가면 경허 사숙님이 계신다. 그 스님께 여쭈어 보아라."
"가도 됩니까?"
"도시락은 내가 싸줄 테니 짚신은 네가 삼아라."
수월스님은 서산의 천장암에서 동학사까지 걸어가 경허스님의 방문을 열고는 여쭈었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 합장을 하고 서 있는 뜻이 무엇입니까?"
경허스님이 답을 해주시는데 뜻이 서로 상통하였고, 거기에서 수월스님은 천수삼매를 증득하여 무명을 깨트리고 깨달음을 얻었을 뿐 아니라 불망념지를 증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글을 몰라서 경전을 읽지도 못하고 신도들의 축원도 쓰지 못하였지만 불망념지를 이룬 후부터는 어떤 경전을 놓고 뜻을 물어도 막힘이 없게 되었으며 수백 명의 축원자 이름도 귀로 한번 들으면 불공을 드릴 때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수삼매를 얻은 뒤에도 참선정진을 꾸준히 계속하였는데 잠을 쫓았다는 그 말씀대로 일평생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년에는 백두산 간도 지방 등에서 오고가는 길손들에게 짚신과 음식을 제공하며 보살행을 실천했던 수월스님! 오늘까지 자비보살이요 숨은 도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수월스님의 도력은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수월스님의 이야기를 감명깊게 들은 다음 주력을 하여 업장소멸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혼자 생각에 천수다라니는 너무 긴 것 같아 옴마니반메훔 육자주를 선택했습니다. 곁의 어른들께 상의도 하지 않고 나 혼자 옴마니반메훔을 선택한 다음 사람들이 없으면 소리내어 외웠고 사람들이 있으면 속으로만 했습니다.
절 마당을 거닐든 밭에 가든 예불하러 가든 밥을 먹든 경전공부를 하는 틈틈이 나는 언제나 육자주를 놓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얼마를 계속하였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겨울에 접어들 무렵이었습니다.
해인사 강원인 궁현당에서 예불을 마치고 속으로 육자주를 외우며 각 법당 예불을 하기 위해 대웅전 축대 위에 올라서서 극락전 쪽을 바라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사라진 듯하였고 갑자기 눈앞의 모든 것도 사라졌습니다.
앞에 있던 산도 없고 옆의 대적광전, 밑의 마당, 뒤쪽의 건물 모두가 없어지고 수천만리의 평평한 평지가 펼쳐졌습니다. 약간 옅은 황금색을 띤 누르스름한 대지가 수천만 리 펼쳐져 있는데, 그 대지의 끄트머리에 옴마니반메훔 여섯 글자가 범자로 해돋이처럼 빨갛게 땅에서 솟아나 공중에 똑바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서 있다는 생각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해처럼 빨갛게 솟아 있는 여 섯 글자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나에게는 굉장히 긴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 밑에서 올라온 도반스님이 내 등을 두드렸습니다. "여기서 뭐하고 서 있니? 빨리 예불하러 가야지." 순간 나는 번쩍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잠시 깜깜해지더니 산과 건물과 마당이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그 시간이 나한테는 한없이 긴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불과 5분도 못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는 일상생활에 이상한 일들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도반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 혼자 엉뚱한 짓을 더러 하였습니다. 그 무렵에는 절에서 향로에 불을 담아 사용했습니다. 향나무 열매를 따서 말려두거나 뿔나무를 썰어 말려두었다가 그것을 향으로 사용했습니다.
하루 세 차례 곧 아침예불 때와 사시마지 때와 저녁 예불에 불을 담아 써야 하기 때문에 부전 스님이 저녁에 방에 있는 화로에 불을 담아 놓으면 그 불이 하루종일 가거나 적어도 다음날 새벽까지는 갔습니다.
한번은 우연히 향로에 불을 담으러 부엌에 갔다가 장난이 벌어졌습니다. 공양주 스님이 큰 목탁을 탁탁치며 밥물이 넘었다 불을 끄집어 내어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나는 밤새도록 쓸 벌건 숯불을 화로에 담고 난 다음 느닷없이 그 숯불을 손으로 만져봤습니다.
벌건 숯불을 만지고 그 숯불을 손에 드니 곁에 있던 공양주와 어른들이 놀라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불이 조금도 뜨겁지 않았습니다. 손도 전혀 데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른들이 놀라고 꾸지람을 하셨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 다음 나는 나에게 다른 어떤 기운의 충동 때문에 가만히 있지를 못했습니다. 죄스럽지만 생각만 나면 해인사 대적광전 지붕을 수시로 올라갔습니다. 6.25사변 직전인 그때는 경제 사정이 어려워 평소에는 고무신도 운동화도 신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멀리 출타를 할 때는 고무신을 신었지만 집안에 있을 때는 타이어 찌꺼기로 만들어 발가락만 끼우는 게다짝을 신고 다녔습니다.
그 게다를 신고 시도 때도 없이 스르르 방을 빠져나가 발로 땅을 한번 툭 치면 나의 몸은 이미 대적광전지붕 위에 올라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게다를 신은 채로 지붕 위와 용마루 위를 평지처럼 밟고 뛰어 다녔습니다. 보통사람은 맨발로 다녀도 경사가 급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지붕 위를 게다를 신고 평지처럼 왔다갔다하고 막 뛰어다녔습니다.
나와 같이 있던 도반들은 이러한 나를 보고 밑에서 소리쳤습니다.
"야, 저것 봐라 미쳤다. 저것 봐라 미쳤어."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가야산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가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가야산 중허리의 마애불까지 순식간에 다녀왔고 가야산 꼭대기와 매화산과 미륵봉 등을 한 바퀴 도는데 불과 10분 내지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축지법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훌쩍 뛰어올라 첫 봉우리만 나의 발에 닿으면 전체 산봉우리가 다 나의 발 밑에 들어 있었습니다. 이 산봉우리 밟고 한번 뛰어 저 산봉우리 밟으며 가야면 일대를, 가야산 전체를 다 둘러보며 다녔습니다.
또 한번은 마애불 근처로 가서 집채만한 바위를 밀어보았더니 바위가 그냥 밀려갔고 주먹을 불끈 쥐고 바위를 쳤더니 마치 물 속으로 들어가듯 팔이 바위 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상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한편으로 나는 나 자신이 점점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원만하게 지냈는데 나 자신이 날카로워지면서 거슬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자꾸만 톡톡 쏘아붙였습니다.
나 자신이 어른들께 그 당시의 이상한 기운에 대해 소상하게 말씀을 드리지 않았고 어른들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유심히 살피지 않고 지내다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고비를 그렇게 넘기고 있었다. 까딱하면 마구니나 외도의 차원에 도착할 뻔했습니다.
다행히 나 자신이 신경이 자꾸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고 어른들한테도 마구 대하였으며, 곁에서 저 아이 좀 이상해졌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여 육자주를 그만두었습니다. 6.25사변 직전까지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가 해인사 강원에 있을 때였습니다. <우룡 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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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강원에서 공부를 배울 때는 그날 배운 것을 다음날 공부 시간에 암송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잠들기 전까지 미처 암송이 안 된 글은 다음날 자꾸 더듬거리게 되고 특히 강사스님께서 한번씩 소리를 지르시면 기가 죽어 막혀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그래서 밤 9시에 잠자리에 누우면 일단 배운 것을 한번 암송해 보고 자는데 그때까지 외우지 못하였으면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을 느겼습니다.
그런데 육자주를 외우던 무렵, 밤마다 꿈을 꾸면 천정이나 벽이나 방바닥이 온통 글로 가득하고, 그 글 속에서 내가 뱅뱅 돌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 미처 암송되지 않은 글이 몇 장 몇째줄 몇째 글자라는 것이 꿈에 또렷하게 기억이 되면서 그 글자가 그대로 외워지는 현상이 자꾸 나타났습니다.
어른들 말씀이 '그럴 때에 재주가 는다 지혜가 는다'고 하셨는데 사미과에서 사집과 초기까지 그와 같은 일을 꿈 속에서 많이 겪었습니다. 또한 이 경험과 함께 주력을 계속하면서 정신적으로 무언가 날카로워졌지만 외우는 것이 분명 쉬워졌던 것을 보면 글공부와 주력공부가 따로 떨어져서 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공부하는 도중에 앞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차원이 나타나는 것을 식이 발동한다고 하여 식광이라고 합니다. 그와 같은 식광은 공부를 지어나가는 과정에서 흔히 겪는 일입니다.
어른들께서는 그런 고비를 식광의 고비라고 표현하셨고 그런 체험을 말씀드리면 식광은 겪었구나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식광에 대해서는 나중에 관련된 부분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식광의 고비는 의식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상태라고 해야할까? 의식을 가지고 체험이 되지 않는 제3의 시간 공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불자들에게 늘 부탁을 합니다. "의식의 세계로는 안되는 제3의 세계를 체험해보라" 염불이든 주력이든 화두든 한 가지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체험하고 나면 공부가 깊어진 만큼 불교에 대한 확신이 서고 자신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일본 점령기 말기에 용성 노스님은 안위에 화과원이라는 농장을 만들어 농사도 짓고 과수원도 경영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독립군들에게 군자금을 조달하셨습니다. 그 시절에 나의 은사이신 고봉스님께서는 강원에서 대교까지 다 마치고 화과원에 가서 용성노스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점심공양 후에 바람좀 쏘이러 가자는 노스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용성 노스님은 복숭아꽃이 활짝 핀 것을 보시며 말했습니다.
"네가 직접 한마디 일러보아라"
"화과원리도화발"
이에 노스님은 시치미 뚝 떼고 정색을 하며 호통을 쳤습니다.
"이놈이 공부하는 중인 줄 알았더니 천하의 마구니새끼구나 그러고도 네가 절밥을 먹고 있느냐!"
이에 고봉스님은 기가 죽어 대꾸를 못하고 되물었습니다.
"스님께서 한말씀 일러 주십시오"
"화과원리도화발이니라"
은사 스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내가 자신이 있었으면 용성 노스님께서 욕을 하든 꾸지람을 하든 한마디 더 걸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이 없으니까 당한 것이야."
무슨 일이든지 자신이 서야 합니다. 내가 자신이 서지 않으면 어른들 수단에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스님의 경우 화과원에서 "화과원리도화발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으면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용성노스님의 호통에 자신을 잃어 한마디 더 걸치지 못하고 물러나 버린 것입니다. 도를 닦는 집안에서는 이런 상태로는 안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확신이 있어야 하고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자신이 뭔가를 체험하여 확신이 서야 함을 불교집안에서는 그만큼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경, 주력, 참선, 염불 등 어떤 공부로 정진을 하든 체험을 하고 확신을 이룰 때까지 밀고나가야 합니다. 분명히 체험이 있고 나면 자신감이 생겨 공부가 크게 향상이 됩니다.
어떤 공부를 하든 체험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스승과 선배들의 지도를 받으며 부지런히 정진하십시오. 혼자서는 안 됩니다. 지도를 받아야 옆길로 가지 않습니다. 그래야만 도가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도 한 과정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집착하지 말고 놓아버려야 합니다. 놓아버리고 또 새롭게 나아가면 깨달음이 더욱 깊어지고 해탈이 가까워진다는 것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룡 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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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강원에 있을 무렵 '옴 마니 반메 훔' 육자주를 외워 식광의 고비를 체험하면서 강원에서 배우는 글 공부는 깊어졌지만 나가 아닌듯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육자주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6.25사변을 맞았습니다. 빨치산의 점령으로 해인사에도 큰 사건이 생겼고 은사이신 고봉 스님도 모함을 받아 수난을 당하는 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여러 고비를 넘기며 마무리를 다한 다음 나는 오대산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전란 때문에 오대산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청화 보경사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나는 보경사 서운암에서 능엄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스님들이 아침 시간에 지금 많은 불자들이 하고 있는 능엄경의 대능엄주를 하지 않고 대능엄주의 마지막 부분의 70여자로 된 아주 짧은 것을 외웠습니다. 이 능엄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무 대불정 여래밀인 수증요의 제보살만행 수능엄신주
"다냐타 옴 아나례 비사제 비라 바아라 다리 반다 반다니 바아라 바니반 호움 다로옹박 사바하"
나도 백일 목표로 이 능엄주 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식사는 일체의 부식 없이 소금간만으로 밥을 먹었는데 한 2주쯤 지나자 밥 생각만 하여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의 백일기도였으므로 신체적으로 너무 무리를 주는 것은 좋지 않겠다고 판단하여 법당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하루 8시간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주로 보행을 하면서 능엄주를 마음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60일을 넘기고 70일쯤 되었을 때부터 심한 장난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녘이 되어 눈을 뜨면 '오늘 몇시에 어디에 사는 누가 온다'라는 생각이 드는 데 정말 그때가 되면 그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이 더 지나자 가만히 방에 앉아 이십 리 삼십 리 밖의 신도들 집이 다 보이는 것입니다. 공부가 완전히 마무리된 단계에서 생긴 일이 아니라. 공부를 지어나가는 과정에 이 장난이 붙은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생각만 일으키며 내 눈 앞의 텔레비젼을 보듯이 동네의 모든 집이 보이고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도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밥상 위의 반찬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가 낱낱이 보였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느날 아침, 어머니가 아이와 다투는 것이 다 보이고 다 들렸습니다.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오늘까지 월사금을 가져가지 않으면 선생님이 혼을 낸댔어, 빨리 줘."
"오늘 구해 놓을테니 내일 가져가거라."
"오늘 가져가지 않으면 혼나, 학교가지 않을거야."
"그러지 말고 가거라."
"싫어"
"이 놈의 자식이!"
이렇게 모든 내용이 생생하게 보이고 표정까지 또렷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어떤 사람이 내 앞에 서면 그 사람의 몸이 마치 투명체처럼 다 들여다 보이고, 뼈 마디마디 까지 그대로 보였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아무 것도 못 느끼고 있건만, 병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까지 진행 되었으며 얼마 후면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아픈 상태가 벌어진다는 것이 내 눈에는 다 읽혀졌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아픈 사람에게 내 생각대로 앞에 있는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주면서 '이것을 씹어서 잡수시'라든지 이파리를 따서 '이걸 달여 먹으면 낫는다'고 하면 약도 아닌데 분명히 그 사람이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그와 같은 장난이 붙는 시간이 이어지자 호기심이 자꾸만 일어났고, 마지막 20여일은 기도를 하였으나 제대로 집중을 하지 않고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 해 겨울을 보경사에서 나고, 이듬해인 덕숭산 정혜사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도를 깨달은 금봉 노스님이 계셨고, 그때 나는 도인이라 하고 도를 통한다고 하는 것을 내가 체험한 것인가?'하는 헛생각이 들어 그 일들을 노스님께 자랑처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금봉스님은 대뜸 호통부터 치셨습니다.
"이 죽을놈 ! 마구니의 자식새끼! 중노릇을 한게 아니고 마구니 노릇을 했구나 너 같은 놈은 당장 죽여버려야 된다. 너 같은 놈 살려놓으면 여러 사람을 망쳐놓는다. 당장 주문을 버리든지 이 자리에서 죽든지 택해라."
그날부터 스님께서는 일체 바깥 출입을 못하게 하셨고, 곁에 두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 또한 의식적으로 능엄주를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무의식 중에 능엄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노스님께서 "지금 뭐하노?" 하시면, 깜짝 놀라며 "아무 것도 안합니다"고 답하였지만 나도 모르게 능엄주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금봉 노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참말로 아무 것도 안하나? 그거 뗄려면 죽기보다 더 힘이 들거다."
정말 그랬습니다. 막상 눈 앞에서 전개되는 신통한 일에 호기심이 붙고 재미가 붙은 상태에서는 뗄려고 해도 참으로 떼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노스님의 '죽기 보다 더 힘들거다' 하시는 말씀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우룡 큰 스님>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억!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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