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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원수, 나의 사장님
< 1화 >
#. 01 안녕. 나의 원수, 나의 사장님.
“후우........이제야 좀 앉아서 쉬네.”
화이트 셔츠에 블랙 정장 치마를 입고 지친 표정으로 데스크 의자에 앉아 굽 있는 구두를 벗는 그녀.
굵은 웨이브가 들어가 있는 칠흑 같은 어두운 검정색 머리와 반대로 투명하리만큼 하얀 피부, 분홍색 립밤으로 인한 반짝거리는 도톰한 입술이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다 들어가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을 만한 얼굴을 완성시킨다.
화장을 부담스럽게 한 것도 아니고 반짝거리는 액세서리로 과하게 치장 한 것도 아니지만, 그녀의 매혹적인 분위기와 몸에서 흩날리는 장미 향기가 남자들 꽤나 울렸을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실장님, 퇴근하시게요?”
회장님 전속 비서라는 직업으로 인해 부지런 떨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두로 인해 다리 아픈 줄 모르고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밤만 되면 퉁퉁 부어있는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는데 회장실에 들어가셨던 실장님이 서류가방을 들고 나오시느라 난 잠시 벗어 두었던 구두를 대충 신고선 일어났다.
“응. 세희 씨는?”
“저는 회장님이 퇴근 전에 잠깐 이야기 좀 하자 하셔서요.”
“아.....그럼, 이거 세희 씨 줄게.”
대충 구겨 신은 구두 때문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실장님이 양복 주머니에서 하늘색 손수건을 꺼내서 내 앞으로 뻗으셨다.
손수건? 무슨 뜻이지?
“이걸 저한테 왜........”
“이따가 필요할 거야. 그럼, 내일 봐.”
받으라고 한 번 더 건네셔서 꽤나 멍청한 표정으로 받긴 받았는데 왠지 기분이 오묘하다. 회장실에서 나오시던 실장님의 빨간 코도, 오늘따라 축 처지신 어깨도, 구름 모양이 들어가 있는 이 손수건도 모두 이상하다.
삐빅
“윤 비서, 들어와.”
“아.....알겠습니다, 회장님.”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은 생각에 잠겨 멍하니 서 있는데 그때, 회장님의 호출 소리로 정신을 차린 난 실장님의 하늘색 손수건을 치마 주머니에 서둘러 구겨 넣고선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똑 똑
“회장님, 들어가겠습니다.”
늘 똑같이 나는 회장님의 부름에 회장실로 들어갔지만 내 눈이 지금 잘못된 건지 한결같던 블랙커피 냄새와 부드럽고 포근했던 내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어 있다. 성재성 회장님이라 적혀 있던 명패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주변엔 베이지색 박스가 널려있을 뿐이다.
“.......회...회장님....”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은 내가 당혹감에 울먹거리자 회장님께선 난감하다는 얼굴로 앞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신다. 한 발자국씩 떼는 발걸음이 무겁고 북받쳐 오르는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다.
“윤 비서......아니, 세희 양.”
“가....갑자기 왜....왜......”
몇 년 전부터, 청렴과 친절로 이름을 알려 지금까지도 별 문제 없이 유명세를 타고 있는 S 호텔인데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로 뉴스에 나오기를 한 것도 아니고, 어제까지 아니, 오늘 일정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늘 봐왔던 회장실이었는데 내 앞에서 날 안타깝게 쳐다보시는 회장님의 얼굴이 두렵고 무섭다.
회장님의 비서로 일한 지 5년인데........
중학교 때, 돌아가셨던 아버지의 그리움을 채워주셨던 분이 바로 회장님인데.........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이 하나둘씩 떨어지더니 입을 막아도 흐느끼는 게 새어 나올 정도로 울음을 멈출 수 없게 되었다.
“아..아니, 이렇게까지 울면......”
“.....흑....회..회장님.....저.....회장님 없으면 안돼요......”
“아니, 그게 아니라.”
“흐윽.....저....두고 가지 마세요......”
성 회장이 울고 있는 그녀를 달래보려고 손을 뻗어 토닥여보지만, 어깨까지 들썩여 가며 서럽게 우는 그녀를 그치게 할 순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성 회장이 이제는 통곡까지 하려는 그녀의 모습에 서둘러 한 마디 하자 마법처럼 세희의 흐느낌이 멈추었다.
“세희 양....!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나 호텔 그만두는 거 아니야.”
응......? 아니라고.......?
내 예상과는 다른 회장님의 말씀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다 말고 멍하니 바라보는데 회장님이 허허 웃으며 주머니에서 분홍색 손수건을 건네신다.
“계속 버텨왔던 몸이 안 좋아져서 이번 기회에 부인이랑 시골에 내려가서 쉬려고 해.”
“그럼......호텔은.......”
눈물을 닦느라 축축해진 나의 손바닥을 회장님께서 잡으시더니 그 위에 아까 실장님이 주셨던 똑같은 구름 모양이 박힌 손수건이 색깔만 분홍으로 바뀌어서 내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
“호텔은 내 아들한테 맡기려해. 그러니까, 윤 비서가 잘 좀 봐줘, 부탁할게.”
혼자 멋대로 생각해서 오열 아닌 오열을 한 게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분홍색 손수건만 만지작거리는데 부탁한다는 회장님의 말씀에 난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부탁이라뇨, 회장님.....! 근데, 제가......처음 보는 아드님 분을 어떻게......저보다는 오히려 실장님이 나으실거 같으신데요.....?”
솔직히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과 당장 내일부터 일을 해야 하고, 그리고 이미 호텔 안에서 회장님 속 썩이기로 유명한 외동 아드님이 날 얼마나 괴롭힐까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실장님 실드를 쳐 보려 했지만 회장님께선 인자하게 웃으시며 고개를 저으셨다.
하아.......저 웃음은 이미 다 결정하셨다는 건데.........
“그래도......”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애써 감추어보려 해도 얼굴로 다 드러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 버릇이 콤플렉스여서 고치려고 노력을 해 보아도 지금처럼 당황스럽고, 복잡하고, 불편한 감정들이 얼굴에 다 보였는지 회장님이 내게 뭘 망설이느냐고 물으신다.
“저는 내일부터 일해야 하는데......그 분이 회장님 아드님이고.....또, 만나 본 적도 없어서.......”
구름 모양을 꾹꾹 눌러가며 쭈뼛쭈뼛 정리 되지 않은 말을 하는 날 보시더니 소파에서 일어나신 회장님이 서랍장에서 무언가 꺼내시곤 유리 탁자에 내려놓으셨다.
“받아. 5년 동안 딸 같이 나와 놀아준 거, 열심히 일해준 거 보상금이야.”
“.......회장님, 저는......”
탁자 앞에 놓인 건 은행 이름이 써져 있는 통장이었고 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내 대답을 생각해 놓으셨는지 먼저 말을 가로채셨다.
“보상금으로 위장한 뇌물이기도 해. 이거 이왕 나랑 연 맺은 김에 내 아들 좀 잘 봐달라는 뜻이니까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 말고. 그리고......우리 아들과 세희 양은 구면이니까 걱정하지 마. 그동안 고마웠어, 윤 비서, 우리 딸.”
* * *
“미쳤어, 윤세희. 새벽 3시에 자는 년이 어딨어.....!”
회장님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집에 들어와 뜨거운 물로 목욕한 다음, 여느 직장인들처럼 내일의 출근을 위해 자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처음 보는 회장님의 아드님에 대한 기대 반, 불안 반으로 결국 평소 하지도 않는 스케줄 플래너를 싹 정리하고 그래도 쿵 쿵 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즐겨보지 않는 로맨스 영화를 보고 나서야 난 잠자리에 들었다.
잠든 시각이 새벽 3시.
내가 출근하기 위해 일어나야 하는 시간은 아침 6시.
내가 어제 잔 시간은 총 3시간.
“아........죽겠네......”
잠이 유독 많아 아무리 야근과 회식을 하더라고 적어도 6시간 정도는 자려고 노력하는데 오늘은 이미 틀린 것 같다. 한 손에 편의점에서 산 에너지 드링크를 들고 쭉쭉 들이켜 봐도 눈꺼풀이 무겁다.
비서실과 회장실, 회의실은 20층에 있어서 평소엔 엘리베이터로 20층까지 올라갈 때까지 지루할 정도로 오래 걸리는 거 같더니만 오늘은 잠깐 올라가는 중에서라도 눈 좀 감고 있을까 하니 벌써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 나쁜 엘리베.......어? 실장님, 안녕하세요.”
“세희 씨, 왔어? 어제는.......많이 울었어?”
“아....어제는 제가 오해를 좀 해가지구.......아! 맞다. 이거 돌려드릴게요.”
오늘따라 순식간에 뿅 하고 도착 해버린 엘리베이터한테 투정 좀 부리려 하는 도중, 실장님과 만나 인사를 하다 어제 받았던 손수건이 떠올라 난 핸드백에서 하늘색 손수건을 꺼냈다.
“이거 저도 받았거든요. 분홍색으로.”
반듯하게 사각형으로 접힌 손수건을 건네받으신 실장님이 푸근하게 미소를 지으시면서 벌써부터 매일 뵈던 회장님이 안 계시니 섭섭하다는 말씀을 하신다.
회장님이 실장님도 참 아들같이 챙기셨는데..........
‘맞아요’라는 말보단 나도 실장님을 따라 살풋 웃어 보이니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으시고선 새로운 사장님께서 기다리신다는 말과 함께 힘내라는 말을 해주시곤 가셨다.
“.......그래, 힘내야지. 뭐가 두려워서 이러고 있어, 윤세희.”
에너지 드링크를 데스크 아래에 내려놓고 회사 내에서 신고 다니는 구두로 갈아 신은 다음, 난 오늘 해야 할 일정표를 들고 어느새 회장실에서 사장실로 바뀌어 있는 문 앞에 섰다.
똑 똑
“사장님, 들어가겠습니다.”
숨을 한 번 내쉬었다가 문고리를 돌리는데 그동안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내가 5년째 익숙했던 방의 분위기와 향이 들어가면서부터 달라져있다. 블랙커피 냄새와 회장님이 쓰시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사라지고 아무리 1월이라 해도 어느 정도 날씨가 풀렸건만 방 안에서는 서늘함과 그에 어울리는 남자 향수가 짙게 풍겨진다.
“.......성 준.....?”
문을 닫고 눈으로 방 안을 훑어보는데 검은색 명패에 흰색으로 박혀 있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
내가 아는 성 준은 미국에서 다닌 중학교 때, 만난 남자 아이인데........
그 애와는 일부러 약속한 것도 아니지만 내가 중학교에 다닌 3년 내내 서로에게는 영어 이름 대신 한국 이름으로 불렀다.
그 아이는 날 세희, 난 그 아이를 성 준이라고.
두 글자 이름부터가 흔한 것도 아니고, 나는 내가 29살이 되는 지금까지도 만나온 사람 중에 딱, 성 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당황하는 마음에 그만 머리로 곱씹어 본다는 이름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순간적으로 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지만, 그 작은 소리도 들렸는지 뒤돌아 창밖을 내려다보던 그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서로의 시선이 거미줄처럼 어지럽고 촘촘하게 엉킨 그 순간, 그가 입을 떼었다.
“그쪽이”
가느다란 입술 사이에서는 저음의 낮은 목소리가 나오고, 슈트를 입었지만 감추어지지 않는 탄탄한 몸과 넓은 어깨가 투시라도 되는 것 마냥 그려지고, 마치 나의 숨을 끊어 놓을 것만 같은 시린 눈빛이 본능적으로 어깨를 부르르 떨게 한다.
나보다 키도 작고, 덩치도 작고 그냥 얼굴이 하얗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장난꾸러기 여자애 같았던 내가 아는 성 준이와 앞머리를 올려 시원하게 이마를 내놓고, 그 아래로 머리색만큼이나 까만 눈동자와 오똑하게 올라간 코, 베일 듯한 날카로운 턱, 부드러운 초콜릿 색 피부를 가진 이 남자는 분위기나 느낌, 외형 모든 것이 다르다.
차가운 그의 모습에 저절로 침이 꼴깍 삼켜지고 내 앞으로 걸어오는 그가 이상하게시리 두려우면서 오묘하다.
“내 비서?”
주머니에 손을 꼽고 날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 남자는 뭘까.
어디 가서 기 하나로는 꿀리지 않는 내가 그를 보며 떨고 있는 이유는 뭘까.
파릇한 새싹 같았던 중학생 성 준이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닮은 구석이 없는데 나는 오직 내 기대감 하나로 이 남자가 나의 단짝친구였던 성 준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는 걸까?
반항아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 사람이 나는 머리 아플 정도로 궁금해진다.
* 회사건 호텔이건 뭐든지 청렴해야죠!*
첫댓글 동일인물 맞는데 준이는 세희 못 알아보는 듯해요ㅋㅋ
그런가요 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잘보고가용
감사해용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