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맞아! 우리 인간은 진실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못된 본능이 있지....자기중
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합리화 집단을 만들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최면을
당하며 죽으면서 까지도 거짓 의미를 만들지. 죽는 순간부터 모두의 기억에서 서서
히 사라지는 데도....그래...'
상징과 은유의 글인 성서가 해석되기 시작한 때부터 근엄하고 저명한 학자들의 추
론 해석들, 해탈의 경지에 든 고승들이 이루어 낸 불경의 수많은 해석서들. 이 모두는
그들의 해석에 따라 종파의 갈래가 세월만큼 생겨났고,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이
론이 옳다며 상대방을 비난하며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일삼아왔다. 지구상의 수많은
나라들의 성문화된 법이나 관습법들, 공산주의 이론이 그러했고, 민족의 문화가
그러했으며 작게는 가풍까지 내세우며 타인에게 벽을 싸고 흠집을 냈다. 전형적인
불완전한 인간의 이기심의 표류이다.
서울가정법원 협의이혼 법정인 703호 입구에 다다른 그는 3주 전에 협의이혼 신청
절차를 밟으려고 방문했던 분위기와 지금의 상황이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다고 생각
했다.
법정 앞 복도는 그때처럼 어수선했다.
아직도 자신이 억울하다며 주장하는 사람,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삿대질
을 하며 목소리를 키우는 배우자들, 서로 다른 의자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상대편에
게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는 당사자의 가족들. 자신들의 문제는 잠시 잊은 채 여기저
기 고개를 돌리며 구경하는 사람들...
잠시 후, 법정 대기실의 분위기는 복도의 그것과 조금 달랐다. 서로 낮게 이야기하
거나 냉기가 흐르는 부부, 저 사람들 정말 이혼하러 온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
답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조금 전에 복도에서 소란을 피운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
고, 역시 그때도 그랬다.
두터운 먹구름 틈새로 온전한 붉은 해가 보였다. 주황색 계열의 노을이 조금 더 멀
리 번져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가벼운 인기척이 들렸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남녀 한 쌍이
두터운 옷으로 세찬 바람을 막으며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는 그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그들 역시 그의 외면을 무시하고 방파제 끝인 그 자리에 서로를 반쯤 감싸
안고 앉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그들이 내심 부러웠지만, 그 감정을 부정하려 애쓰며 그들에게서 10여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법정 서기가 자신들의 이름을 빨리 호명해 주기를 바랬다. 옆에서 아내가 조용
히 흐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지금 무엇 때문에 울고 있을까? 조금 전까지 당당했었는데...그동안 살가운
마음 한 번 내주지 않은 남편과 보낸 시간이 아까워서일까? 앞으로 혼자 살기에 팍팍
해서일까? 친정 주변의 식구들이나 친구들에게 면목이 없음일까? 아니면 이혼녀란
불쾌한 꼬리가 서글픔을 만들었을까?...어쩌면 모두인지 모른다. 그런데 왜?...'
그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녀의 흐느낌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근래에 들어와서
는 그녀가 더 적극적으로 이혼해달라고 싸움을 걸어왔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막연하게 추론하는 그녀의 요구는 여권을 수호하기 위한, 이혼을 권
유하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했다고 생각했다. 이혼을 분류별로 나누어 테마화시켜 방
영하는 드라마들, 주변에 혼자된 사람들의 자유 이야기, 부풀려진 일방적인 이야기
만 듣고 충동질하는 주변인들의 가세... 어쩌면 자신을 중심으로 그 모두가 공범이라
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아내가 이혼할 정도로 싫지는 않았다.
수유기를 동생들에게 빼앗긴 엄마의 젖무덤과 따사로운 품이 닮지 않았다는 이유
로 경솔하게 별거할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 필요한 것은 퇴근하고 집에 돌아
오면 친구와 같은 그녀의 감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가 잠들 수 있는 공감의 정이 가
득 흐르고, 두 마음이 함께 뛰어놀 수 있는 그녀의 젖무덤이 결여되었다. 개념의 합치
가 너무 빗나갔고, 고치기에는 자신들의 어긋난 평행선이 너무 길었다고 생각한 그
는 잠시 별거라는 휴지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새로운 마음으로, 동반자 의식이 충
전되기를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뿐이었다.
그는 먹을 것 없는 일몰의 잔치집을 떠나면서, 자신의 외로움의 실체를 정리하기 위
해 방파제 난간에 걸터앉았다.
노을을 따라 나간 바닷물 자리에는 회색 갯벌이 펼쳐졌다. 희미한 그림자를 동반한
회색 갈매기들이 몰려와 먹이를 줍고 있었다. 방파제 경사면에서 낚시하던 사람들이
돌아갈 채비를 하거나 발을 걷어 부치고 갯벌에서 무언가를 캐낸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각각 필요한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필요한 만큼 저마다 다른
가치관을 갖는다. 그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고독을 달래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정리한 외로움의 실체가 복잡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단순함
에 놀랐다. 그 원인은 10개월도 안되어 어머니 품을 빼앗긴 영아기 때부터 시작된 근
원적 외로움, 그 외로움을 아내의 젖무덤과 이기적인 애정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
다. 아내와의 이별 후에는 그녀의 품도 그의 마음에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는 이미 늦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의 많은
것들이 주검을 준비하는 황량한 이 가을의 중심에서 자신이 홀로 남겨졌다는 것이다
법정 서기의 호명으로 판사가 이혼 결정을 하는 방으로 아내와 함께 들어간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긴 테이블에 앉았다. 이혼신고서에 기재되어 있는 형식적인 말 몇
마디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오라했던가? 그는 젊은 판사에게 곱지 않은 표정을 보냈
다. 판사는 약간 당황해하며 몇 마디 얼버무리고 그와 그의 아내에게 협의이혼의사
확인서 1부씩을 건네주며 마지막으로 해당 본적지나 주소지 호적계에 신고해야만 한
다고 했다. 3개월이 넘으면 이혼은 무효라고 했다. 그에게 그 말은 3개월 이내에 이혼
을 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아내는 젊은 판사 앞에서 또 흐느끼기 시작했다.
법원 정문 앞을 나온 그녀가 집으로 가는 길을 따로 하지고 제안했다. 그는 기념이
될 날은 아니지만 아쉬운 식사라도 함께하자고 했다. 그녀는 밥이 넘어갈 것 같으냐
며 반문하며 먼저 간다고 했고,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내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자신과 아내 중 누가 협의이혼의사확인서등본을
구청에 제출할 것인가와 판사가 말한 3개월 이내라는 그 기간 동안에 아내와 좋아지
는 방법은 없을까를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신이 구청에 이혼서류 제출했으며 그냥 친
정에나 잠시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법으로 정한 부부의 끝이 되었다. 물
론 그들이 20년 이상을 쌓아놓은 부부의 인연은 실 끊어진 연처럼 그렇게 허망하게
멀어져갔다.
방파제 입구에 다다른 그는 주머니에서 울고 있는 벨소리를 들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남궁철이란 이름이 어둠을 배경으로 또렷하게 보였다.
“여보세요, 철이구나!...”
그의 목소리는 차가울 정도로 차분했다.
“응, 나 철이야! 너 지금 어디에 있어?”
그의 친구가 다소 불안정하고 흥분된 말투로 물어왔다.
“궁평항에...”
“거기가 어딘데? 바닷가야?... ”
“응. 제부도 인근에 있는 궁평항이야.”
그는 잘못하다 걸린 사람처럼 약간은 자신 없는 말투로 응했다.
“...여자랑 같이 있어?...사귀는...”
“아니! 그냥 혼자...노을이 멋있다고 해서 바람 쐬러 왔어.”
“미-친놈! 청승하고는... 잔말 말고, 지금 빨리 서울로 올라와! 너한테 소개시켜줄
여자가 있어.”
“하하하! 웃기는 녀석일세! 뜬금없이 갑자기 여자는 왜?...”
“시간 없으니까, 자세한 것은 움직이면서 통화해! 우선...조금 뒤 7시에 모임이 있
는 데, 거기 회원 중에 한 여자가 갑자기 생각이 나는 거야. 모임이니까, 자연스럽게
인사하면서 관심 가져봐! 빨리 움직여! 자세한 얘기는 이따가 해줄게.”
그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의외로 담담했다. 그곳에 간다는 것은 어쩌면 또 다른 외
로움의 사냥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있을 수 있다고 희미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제는 단순하게 살 거야. 주중에는 이 세상에 태어난 죄로 일하고, 주말에
는 마음 닿는 대로 자연과 더불어서 살 거야. 산으로 바다로... 마음을 함께할 수 있는
미지의 그녀라는 사람과 함께라면 좋을 텐데...
어느새 그의 머리에는 친구가 소개시켜 준다는 여자가 막연히 자리 잡고 있었다.
주차장으로 돌아온 그는 차 시동을 켰다.
그리고 발안나들목이 아니라, 서평택나들목으로 나가기로 했다. 복잡한 마음을
지니고 들어온 나들목이 아닌,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로운 길목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댓글 다른 방들은 시월의 마지막밤이다 뭐다...하는데ㅡ 이 방은 뭐여? 하긴...쥔이 없으니... 벙개 함 때려요, 없으면 나캉 둘이서라도 한 잔 하자구요!!
그러게요. 한 잔 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
실패한 이혼 이군요. 성공한 이혼 이바구 한번 시켜 봤지요.
ㅎ 그러셨군요. 성공한 이혼이라...ㅎㅎㅎ 감이 안잡힙니다.^^*
사람들이 삶을 덜살았기때문에 이혼을 하겠지요 ..이혼한다해서 결코 지금보다 행복하진 않을텐데요....한가지 부족한점을 불평하지말고 주신것 가지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수고하셨읍니다.잘읽었읍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누구나 한 두 번쯤은 시행착오를 겪나 봅니다. ㅎㅎㅎ그치만 이런 일로 시행착오를 겪으면 안되겠지요.^^*
이제는 외롭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옆에 아무도 없더라도 무서워하거나 외롭다고 하지 마세요.
옙! 주인공에게 그 말씀 전하겠습니다.^^*
잘 읽었어요.. 다 잊혀진 기억이 한꺼번에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되네요. 아주 힘들게 한결정을 실천하러 갔을때...웃읍게도..너무나젊은판사가 너무나짧은시간에 내 인생을 정리해주는데 당황했었지요...살면서 우리는 늘 선택이라는 숙제를 안고고민하지만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은 시간이 훨씬 지난담에야 알게되는것같아요..현재 마음이 편하다면 그 선택은 옳았다라고 생각해요
인생은 최면입니다. 항상 살고 있는 그 상태가 최선인 줄 알죠. 깨어보면 다른 세상도 있고요. 주인공과 같은 마음을 느끼겠군요. 마음이 편하시다니 잘 됐습니다.^^*
애 많이 쓰셨내요!
감사합니다. 생각은 머리에는 맴돌고, 글은 안 써지고...더군다나 시간에 쫓겨서 혼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