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잃을 수록 좋고, 길을 잃어야 새로운 길을 찾는다.
길은 잃을 수록 좋고, 길을 잃어야 새로운 길을 찾는다.
어제 횡성에서 평창으로 이어지는 길 관동대로를 거꾸로 걸었다. 수없이 걸었던 길이다. 그래서 횡성군 안흥에 사는 분에게 물었다. 이 길을 걸어 봤냐고, 걸었단다.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다. 안흥에서 방림면으로 이어지는 문제 길을 다 걸어야 하는데, 자기 면 지역만 걸은 것이다.
문제 너머에서 방림면에서 230여 명의 사람들에게 흥인지문(동대문)에서 울진군 평해읍까지 열사흘에 걸었던 관동대로를 설명하고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터널이 뚫리기 전 사람들이 다녔던 관동대로는 고즈넉하고 한가로웠다. 휘파람 불며 걸어가는데, 두 갈래 길이 나타나고, 나는 습관적으로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다.
길은 더 아스라하게 이어지고, 그런데 문제 정상에서 자꾸 멀어져가는 것이었다. 한석희 선생과 일행들에게 GPX를 보라고 했더니 그 길은 다시 평창으로 가는 길이었다.
내 지론은 “길은 잃을수록 좋다” 길을 잃어야 새로운 길은 찾는다고 하지만 지금은 230여 명이 사람들이 점심시간을 목전에 둔 시간이다.
이러다가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고, 길이 없는 숲길을 곧바로 치고 올라가자 둔덕이 나타나고, 옛 시절 강릉에서 새말 거쳐 서울로 가던 신작로 길이 나타났다.내 직감이 맞은 것이다.
오래 전 2000년 대 초반에 나는 금강. 섬진강. 한강. 낙동강. 영산강. 만경강. 동진강. 한탄강. 등의 10대 강을 발원지에서 하구까지 두 번 세 번씩 걸어서 5대강(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을 책으로 펴냈다.
그런 일들을 벌이면서 절감했던 것이 사심私心과 공심公心이었다.
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에게 얄팍한 야심이 있는 한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일을 추진할 때 조금이라도 사심을 가지고 일을 하면 잘 되지 않았는데, 사심 없이 공심을 가지고 일을 하면 아무런 탈 없이 일이 성사되는 것이었다.
나더러 왜 그렇게 아이디어가 많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아이디어가 많은 것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을 잘했던 것 같다. 길을 걸을 때 나의 지론은 “길은 잃을수록 좋다” 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의 지혜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 라는 것이다.
길지 않은 논문 한 편 쓰고, 남의 글 몇 권 번역하고 나서 순전히 자기 것인 양 앵무새처럼 떠벌이며, 먹고살고, 잰체하는 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방은 가장 성실한 아첨이다.” 라는 누군가의 말이 얼마나 함축적이고 맞는 말인가?
남이 가지 말라는 길을 기어코 갔고, 출입금지出入禁止나 입산금지入山禁止를 거꾸로 읽고 들어간 나의 말도 안 되는 발상이 나를 이렇게 걷게 만든 원동력이었고, 또 하나 발상의 전환으로 횡성과 평창이 힘을 합해서 매년 관동대로 문재 축제를 열 것을 담당자에게 제안했다. 전북 정읍과 전남 장성이 갈재 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하고 조심하며 살자.
무사히 관동대로를 걷고 횡성 소머리 곰탕을 먹은 뒤 다시 길을 나서서 보았던 원주 문막 반계리 은행나무, 아직은 파란 잎들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벗 삼아 노닐고 있었는데, 지금 이 새벽은 무엇을 벗 삼아 노닐고 있을까?
2024년 10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