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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면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강화도는 선사 시대 이래 우리나라 역사의 아이콘을 모두 품은 ‘보물섬’입니다. 고인돌, 고려궁지, 외규장각, 광성보, 천주교성지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엔 지금 반만년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뚜껑 없는 박물관, 역사의 보고. 강화도를 얘기할 때면 언제나처럼 거창한 수식어가 붙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죠.
봄맞이 개편과 함께 i-View가 새 연재를 시작하는 ‘길 위의 강화도’는 5000년 강화도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에피소드(episode) 중심으로 전개해 나갈 강화도의 신비로운 유적과 유물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왕이 첫 발을 디뎠던 자리엔 돌거북 한 마리가 거대한 비석을 등에 업고 있다. 高麗高宗事績碑(고려고종사적비).
‘이 곳 승천포(昇天浦)는 고려 제23대 고종이 몽골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서기 1232년 7월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할 때 바다를 건너와 배에서 내리신 곳이다.’
비석 옆면에 새겨진 음각은 이 자리가 어떤 의미가 있는 장소인지를 알려준다. 철조망 너머로 염하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 뒤로 보이는 땅은 북한 ‘개풍’이다.
▲ 승천포는 1232년 음력 7월 고려 23대 임금 고종이 강화천도를 위해 수도 개경을 떠나 강화도로 들어온 지점이다. 강화군은 이곳을 ‘고려천도공원’으로 조성했다. 공원에 있는 천도문.
1232년 7월 6일 고종임금은 종묘사직이 있는 수도 개경을 떠나 개풍 ‘승천부’에 이른다. 이튿날 승천부에서 닻을 올린 배는 강화도 ‘제포’(지금의 승천포)에 닿는다.
그렇게 ‘강화객관’에 입어한 고려의 국왕은 강화읍으로 가서 새로운 황궁을 건설한다. 몽골과 싸우기 위해 수도를 옮긴 천도의 역사, 즉 강도(江都)시기(1232~1270)의 시작이었다.
▲ 고종임금이 강화도로 들어온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고려고종사적비.
고려왕조가 강화도를 전시 수도로 정한 것은 수도인 개경(개성)과 가깝고 다른 지역과의 연결이나 조운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빠른 데다 갯벌이 있어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쉽지 않은 것도 강화천도의 한 이유였다.
고려 23대 고종임금이 입어한 승천포, 고려천도공원 재탄생
고려의 임금을 맞은 승천포는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397, 399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이곳은 강화도의 많은 다른 지역처럼 간척사업을 통해 논밭이 조성돼 있다. 북한 승천부와 마주보고 있는 승천포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매우 번성한 포구였다.
강도시기엔 고려와 몽골의 외교협상이 이뤄진 대몽교섭창구이기도 했다. 고려는 이곳에서 몽골과 만나 협상을 벌였다. 한마디로 요충지이자 경제적인 가치가 높은 포구였다.
고려 임금이 첫 발을 디딘 승천포는 지금 고려천도공원(송해면 당산리 388-1번지) 조성이 한창이다. 공원엔 천도문과 광장, 수변정자, 팔만대장경 기념탑 등이 들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늘고 있다.
▲ 강화도 송해면은 고려시대 이래 전국 유일의 왕골공예가 발전한 곳이다. 화문석문화관은 화문석을 비롯해 왕골공예품을 보거나 체험하는 문화공간이다. 지금은 코로나19방역을 위해 잠시 휴관 중이다. 화문석문화관 전경.
왕골로 짠 생활예술용품을 만나다, 화문석마을과 화문석 문화관
차 한 대 정도만 지나갈 수 있는 농로를 따라 동남쪽 방향으로 나오면 화문석마을을 지나 ‘화문석문화관’(송해면 장정양오길 413)을 만난다. 양오리에 화문석문화관이 있는 이유는 화문석의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화문석은 강화도 사람들의 중요한 생계유지수단이었다. 양오리, 당산리 사람들은 대대로 ‘자리(화문석)를 매어(짜)’ 먹고 살았고 자식을 교육시켰다.
화문석문화관은 화문석의 모든 것을 씨줄날줄로 엮어 놓은 곳이다. 무지개처럼 화려하고 색동저고리처럼 알록달록한 무늬를 수놓은 화문석과 왕골제품이 즐비하다.
▲ 화문석문화관에 있는 왕골공예
작품들.
화문석은 고려 중엽부터 가내 수공업형태로 발전돼 왔다. 특히 강도 시기, 왕실과 관료들을 위한 화문석을 만들면서 품질이 높아졌으며 조선시대엔 왕실로부터 도안을 특별하게 제작하라는 어명을 받은 한충교가 다양한 디자인 개발에 성공,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섬세한 문양을 넣은 화문석은 완벽한 구도를 지닌 그림처럼 느껴질 정도로 정교하다.
화문석문화관에선 왕골공예 체험학습, 취미교양교육, 주문제작 판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나 지금은 코로나방역을 위해 잠시 휴관한 상태다.
강화도 만석꾼의 집 솔정리 고씨 가옥 옛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오롯이
화문석문화관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강화도 옛 갑부의 집이 있다. 솔정리 고씨 가옥(송해면 강화대로 674번길 23-4번지)은 1941년 지은 ‘아흔아홉칸’짜리 기와집이다. 옛날 아흔아홉칸은 ‘만석꾼’(갑부)의 집을 의미했다. 100칸 이상의 건물은 왕이 거처하는 궁궐만 가능했기 때문에 부자들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최대한 아흔아홉칸을 넘을 수 없었다.
▲ 솔정리 고씨 가옥은 1941년 지은 아흔아홉칸 짜리 기와집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60호 지정돼 있다. 현재 보수공사를 진행 중이다.
고씨 가옥은 정면과 좌우측 3면에 문을 낸 ㅁ자형 반가형 주택으로 사고석 담장을 두르고 정문은 한 칸 솟을대문으로 이뤄졌다.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로 중정을 오가는 출입구가 있으며 건물 안에는 남녀가 사용하는 복도를 구분해 놓았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60로 지정됐으며 현재 보수공사 중이다. 강화도엔 지금도 지붕이 양철지붕으로 바뀌거나 외양만 살짝 변형됐을 뿐 150년 이상 된 기와집이 많이 남아 있다.
민통선 최전방 지역으로 친환경쌀, 고구마 고추 등 생산하는 전형적 농촌
송해면은 5개리가 민통선에 속한 최전방으로 4.2km의 해안선을 갖고 있다. 화문석의 재료인 왕골과 함께 친환경쌀, 옥수수, 고구마, 고추 등을 생산하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다. 민통선 가까운 휴식공간인 강화평화빌리지, 조선중기 시인인 석주 권필의 유허비, 1948년 강화 출생 작가 전원 유광상 화백의 작품 120점을 전시한 전원미술관, 하도저수지 등이 있다.
조선시대 이래 송정포(松亭浦)의 이름을 따서 송정면(松亭面)으로 부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송정면(松亭面)과 삼해면(三海面)을 병합하고 송정면의 송(松)자와 삼해면의 해(海)자를 따서 송해면이라 명명했다.
- 왕골공예마을 가는 길
고려 임금의 발자국 따라 걷다 왕골공예 감상하는 길
▲ 왕골공예마을 가는 길은 강화역사박물관을 출발, 전국 유일의 왕골공예인 화문석의 향기를 맡고, 고려의 강화천도 당시 임금이 들어온 포구(승천포)를 찾아가는 길이다. 사진은 화문석마을 입구. 이 길을 따라 해안방향으로 가면 고려천도공원을 만난다.
조미전쟁(신미양요, 1871) 때 최신무기로 무장한 미 함대를 맞아 불굴의 의지로 전투를 치르다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향기 그윽한 강화역사박물관에서 시작해 다시 박물관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강화역사박물관엔 조미전쟁 당시 어재연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의 군기인 ‘수자기’가 보관돼 있으며 당시 상황을 디오라마로 재현해 놓아 19세기 후반 정세를 공부할 수 있다.
박물관을 나와 장정리 방향 마을길을 따라 걷다보면 장정리 ‘5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을 만난다. 두 보물 모두 고려시대의 것으로 시대적 특징이 잘 반영돼 있다.
탁 트인 양오저수지를 지나 조금 더 걷다보면 전국 유일의 왕골공예품인 강화 화문석마을에 닿는다. 화문석은 왕골로 짜는 돗자리로 고려시대 이래 전국에서 유일하게 강화도에서만 생산하는 예술품이자 생활용품이다. 화문석마을 건너편 화문석문화관에선 왕골공예품 전시는 물론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 왕골공예마을 가는 길(강화역사박물관~강화역사박물관 15km, 소요시간 4시간30분)
강화역사박물관->석조여래입상->양오저수지->화문석문화관->강화역사박물
문의 032-934-1906
글·사진 김진국 본지총괄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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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강화도 중3때 배타고 수학여행가본게 다인데 ᆢ그때가 언제입니까 ᆢㅉ
왕골화문석이 - 유명했죠! 사적지며 역사의 흔적이 많은 강화도입니다.!
가을여행지로 추천합니다.
화문석에 대해 잘보고 갑니다
지금도 강화의 왕골 화문석 하면 유명 합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잘보고갑니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