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kyilbo.com/sub_read.html?uid=328991§ion=sc30§ion2=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 방침을 세우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하자 전공의들이 반발해 집단행동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의대 정원 거부가 명분 없는 집단 이기주의의 발로라며, 필수ㆍ지역 의료 정상화에 동참하라는 여론에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와 반대로 대학에서 줄줄이 사라지는 인문학과에 대한 우려도 이어지고 있다. 대학이 추구해야 할 학문의 다양성을 도외시한 채 수익성과 취업률이 낮은 학과를 없애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대학 알리미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전국 대학에서 1천118개 학과가 사라졌다. 현 재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현행 과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폐과 조치를 단행한 경우만 집계한 것이다. 신입생이 없거나 재학생이 한 명도 없어 완전히 폐과된 경우까지 더하면 실제 수치는 더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부 대학이나 학과는 환영받고, 일부 학과는 배척되는 한국의 교육 현상에 대해 관계자들의 의견과 대안 방안은 여러 가지이다. 정치권에서도 지방 국립대학을 서울대 수준으로 지원을 하고 이를 통해서 서울대 수준의 거점 국립대를 10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지방 거점 국립대 육성 방안을 위한 법을 제정하고 예산 증액 방안을 마련하여 지방 거점 국립대의 경쟁력 강화와 지역 소멸과 지방대 붕괴를 막겠다는 의견이다.
의대 증원, 지방대 붕괴에 따른 지방 거점 국립대 육성 등의 현실을 꼼꼼하게 따져보면 공통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이 `실용주의` 맥락이다. 속된 말로 돈이 되는 학교나 학과는 늘어나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자연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절대적 진리나 궁극적 진리를 주장하지 않고, 절차나 과정을 완전히 무시하진 않지만, 실천적 효과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다분히 결과주의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개념, 지식, 사고, 이론은 하나의 수단이나 도구일 뿐이며, 지식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작용능력, 즉 사용된 결과에 나타나는 유효성에 있다고 본다. 진정한 지식은 장소,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고 보고, 영구불변한 진리에 의문점을 제시한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한계를 가진다. 물질적인 축적과 서구 문명의 모방 등의 물질적인 목표는 채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과 국가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아무런 원칙을 제시하지 못하고 `실용주의 타락`으로 변질하기 쉽다. 특히 한국에서 사용되는 실용주의는 개인 편의주의로 오도되었다. 우리도 한때 `잘살아보세` `부자 되세요` 등으로 맹목적인 물질 추구를 강조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물질적 대국, 정신적 소국이 됐다. 그리고 정신적 소국은 철학과 사상의 빈곤으로 이어지고 문화의 척박함, 인간관계에서의 소홀함으로 연결되었다. 우리가 처한 분단 상황과 맞물리면서 우리의 실용주의는 아노미 현상을 불러왔다. 우리 속내는 보편적 종교나 보편적 윤리를 추구하고 싶고, 누구나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사회 구성 원리를 갖고 싶어 한다. 나아가 국제 사회에서 적극적인 일원으로 봉사할 정신적 토대도 충만하다. 그런데 나를 옥죄는 거부감 또한 만만치 않아서 꿈과 희망을 접는 경우도 많은 게 사실이다.
의대 정원 확대 방침도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게 해선 안 된다. 어느 한쪽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킨다해도 자칫 그 결과가 공동체 내부의 파탄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과의 철폐나 통폐합, 지방 거점 국립대 육성도 그 알맹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의사 결정 과정과 결론에 이르는 실천 과정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과정과 절차에서 소외되거나 배척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기본 원칙에서 모든 일을 구상하고 풀어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실용주의 타락에서 벗어나 인간과 국가의 보편적 가치의 원칙을 세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