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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손을 들려고 했다. 곧이어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말 그대로 칼처럼 후벼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 작은 손으로 그 남자애를 밀칠 수 없으리란 사실은 잘 알았다. 사실 난 그를 안아주려 한 것이었다. 칼을 들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에게 달려오는 그를.
나는 그를 알았다. 그는 날 더 잘 알았다. 오년 전 나와 내 친구들이 지독하게 따돌리고 괴롭힌 체구가 작은 소년이었다. 나는 그들 중 유일하게 소년의 고발 목록에 이름이 적히지 않았다. 내가 화장실에서 변기물을 마시고 얻어맞은 그에게 마지막에 돌아와 갈아입을 체육복을 줘서? 그가 심하게 맞을 예정일 날 몰래 그에게 미리 귀띔해줘서?
아마 아닐 거다. 내 입으로 이런말 하긴 그렇지만, 내가 예뻐서 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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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제외한 모두가 끌려가 부모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자세한 과정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 이제 그들의 표적은 내가 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는 울었다. 많이 울었다. 부모님은 보통 내가 우는 것을 모르거나 알아도 무시했다. 그들을 탓할 마음은 없다. 진정으로 내 마음을 이해해 줄 사람은 없다. 수지조차 무겁게 내 얘기를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동정하는 빛은 보였지만, 진심으로 나의 슬픔을 흡수하는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 자신조차 나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어쨌건 남은 친구는 수지 뿐이었다. 나는 수지에겐 버려지지 않으려 열심히 그녀를 쫓아다녔다.
시현이는, 수면에 중력을 거스르고 이유없이 떠오른 조약돌처럼 갑작스러운 존재였다. 수지가 상기된 얼굴로 웃으며 우리반의 훈남을 언급하며 내 번호를 그에게 주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즉시 수지의 마음을 알아챘다. 아마 수지도 내가 알아챈 것을 알았을 것이다. 시현이는 밝은 애였다. 멍청하지만 정말로 사랑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한달을 어중간한 상태로 지냈다. 시현이는 키가 컸고, 언제나 내 옆에 서면 뜨거운 태양처럼 밝게 빛났다. 수지는 점점 어두워졌다. 살도 좀 찐것 같았다. 물론 수지에게 쥐어박히고 싶지 않다면 그런 말을 하면 안됀다. 애들은 나더러 피부가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내가 봐도 훨씬 예뻐졌다. 아마 매일 밤 울면서 자던 것을 그쳐서 그랬을 것이다.
어느날 나는 수지보다 시현이에게 모든 것을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 보기에도 우스울 정도로 나는 나약했다. 하지만 수지는 이정도 일로 무너질 아이가 아니었다. 그것이 샘이 날 정도로 부러웠다. 따라서 나는 시현이와 사귀기로 했다. 그렇다고 내가 고백한 건 아니고. 뭐 간단했다. 내가 마음을 먹고 사흘도 안돼서 시현이는 불타는 눈으로 나에게 고백했다.
그런데 여기서부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이 끔찍하게 옛날으로 돌아갔다. 수지는 나에게 화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나와 사이는 전보다 미묘하게 멀어졌다. 나는 전보다 훨씬 자주 웃었다. 그러나 그 속엔 아무 기쁨도 담겨있지 않았다. 덩달아 내 인기도 높아졌다. 그것도 종말 발표 후 일년 정도 까지의 일이었다. 예고된 죽음은. 모든 본성을 해체해서 드러내는 진열장처럼, 혹은 짐승의 털을 비추는 달빛처럼.
반애서 첫번째 여자애가 평소에 문제가 있던 남자애에게 끌려가 억지로 당했다. 그 날 이후로 학교는 딱 일주일을 더 운영하고 휴교했다. 나 다음으로 예뻤던 애가, 당한 것 뿐만 아니라 목이 졸려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게다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맘 때 즈음에 우리 모두의 부모님이 마을을 지키다 죽었다. 부모 잃은 자식들은 광기와 제어없는 일탈에 끝없이 날뛰었다. 시현이와 수지가 우리 집에 와서 그날부터 같이 살았다. 실제로 남자애들 여럿이 나를 노리고 창문을 깨려 했었다. 시현이가 놀랍게도 도끼를 들고 그들을 내쫓았다. 그런 일이 남은 이 년동안 몇 번 있었다. 그리고 난 그들보다 오년 전 그 남자애를 언제나 두려워했다. 내가 그였다면. 나는 더 일찍 칼을 들고 날 찾아왔을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 밑에 끝없는 복수의 쾌락을 즐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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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현이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는 나에게 낮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괜찮다. 나는 언제나 이런 끝을 생각했다. 울며 잠이 든 매일 밤마다, 이보다 더 끔찍한 결말도 생각했었다. 어차피 세시간 뒤면 죽지 않나.
나와 사귀었던 어떤 남자애들도 나에게 진정한 사랑을 주진 않았다. 내 얼굴과 내 가슴에 눈이 돌았던 걸 거다.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그 여자의 얼굴과 그 가슴을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그나마 시현이 그럭저럭 괜찮은 애였다. 나는 한숨을 쉰다. 머리가 팽팽 도는 느낌이다. 이제 곧 어두워질 것이다. 수지는? 아. 수지가 시현에게 달려든다. 그녀의 매서운 주먹이 시현이를 갈긴다. 그리고... 시현이가 수지를 끌어안는다. 나는 애처럼 그에게 한팔로 업힌다.
나는 반항하고 싶어 팔다리를 버둥거리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문득 피가 철철 나는데도 옆구리에서 고통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정말로 죽는가 보다. 수지 쟤는 지금 뭐하는거야? 둘은 꼭 입맞춤하려는 것처럼 얼굴을 맞대고 있다. 그리고 시현이 날 업은 채 뛰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씨발같은 고통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날 내버려 둬.
무언가 움직이는 것에 태워진 것 같다. 이맘때 쯤 나는 거의 의식이 혼미했다. 나를 태우고 미친듯이 질주하는 것은 저승으로 데려가는 배같이 둥둥 뜬 느낌이었다. 수지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선 불꽃이 튀는 것 같이 빛났다. 나를 살리겠다는 정신나간 의지. 미친년...... 나는 널... 너무... 미안해...
입에서 무언가 튀어나온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미안해 인줄 알았지만, 마지막 내 감각은 그것이 말 대신 끔찍한 피토임을 알려주었다. 모든 것이 캄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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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내린 피투성이의 여자애 두명과 훤칠하니 잘생긴 남자애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나가 하나를 업고 있었는데, 둘 다 거의 시체같은 얼굴이었다. 업혀있는 여자애 옆구리에서 심한 자상이 눈에 들어왔고, 힐끗 쳐다본 시계가 종말 전 46분을 가리키는 가운데 나는 곧장 부하 간호사들과 머리에 피도 안마른 의대생들을 집합시켰다.
그 새끼들 그냥 치고 가라고 했잖아, 병신아!
너무 많았어! 씨발, 씨발! 너무 많았다고!
도대체 얼마나 거기서 시간을 버린거야, 아아!
그만 입 닥쳐!
이름 지아에요! 피가 너무 많이 났어요! 제 혈액형이 지아랑 같아요, 어떻게 안 될까요, 간호사님?
침착, 침착해요. 상태를 좀 봅시다. 여기 눕히세요.
그들은 얼른 말을 따랐다. 간호사 재형과 의대생 지희, 현이가 달려왔다. 그들은 방금 눈을 감은 노인의 심박수를 재고 이불을 덮어준 직후였다.
재형이 중얼거렸다.
맥박이 없는데요...
지희와 현이는 벌써 심장세동기와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 남은 링거를 선반에서 덥석 집어 꺼내 그녀의 손목에 꽃았다. 흘러나온 피는 벌써 응고하고 있었다. 이미 자상을 입은 지 시간이 꽤 지난 듯 했다. 손목에선 재형의 말 대로 맥박이 잡히지 않았다.
재형이 거울을 지아 앞에다 대었다. 김이 서리지 않았다. 지아의 퀭하게 뜬 눈은 이미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시현이 의대생 현이를 밀치고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현이는 주저없이 달려나가 아드레날린과 약물들을 준비했다.
나는 환자의 발을 주므르며 윗도리와 속옷을 벗겼다. 그것들은 경련하면서 몸을 조르거나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남자 재형과 현이, 시현이가 있었지만 별로 신경쓸 때는 아니었다. 나는 거침없이 지아를 벗겼다. 그들 중 누구도 움찔하지 않았다. 현이가 달려와 주사를 가슴에 콱 놓았다.
피를 많이 흘린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심장세동기가 작동하고 지희가 질척한 액을 지아의 몸에 발랐다. 그리고 가슴에 대고 쿵쿵 전기 충격을 주었다. 재형이 모니터를 가져와 연결했다. 심장 박동은 없었다. 이십분을 반복했다. 그 말은, 시간을 보니 종말 십분 전이었다. 둘러보니 다들 비슷한 생각으로 시계를 보았다. 시계를 보지 않는 이는 오직 시현과 수지 뿐이었다. 그들은 초조하게 수지 위에 올라타다시피 한 지희를 지켜보았다.
나는 힐끔 현이와 재형이를 보았다. 그들 모두 피곤하고 지친 눈이었다. 종말을 앞두고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이들이 죽었고, 그들은 그들 꺼져가는 생명 모두의 마지막을 지켰다. 그들 역시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했다. 지희도 눈치로 알아차리고 세동기를 그만 멈추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고 숨을 크게 쉰 뒤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박지아, 사망했습니다.
여자애가 천천히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망울에는 사람같지 않은 눈물이 맺혀있었다.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현이가 그자리에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펑펑 울었다. 천막 밖으로 운석이 달보다 더 커져서 긴 불꽃을 남기며 다가왔다. 동해에 용처럼 쳐박힐 그 운명은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공연을 잘 즐겼다는 듯이 비웃고 있었다. 지희는 지아의 시신 위에 그대로 앉았다. 재형은 무겁게 고개를 떨구었다.
수지가 뒤돌아 성큼성큼 천막 밖으로 나갔다. 시현이는 지아가 뉘인 침대의 들보를 붙잡고 고개를 떨군 채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그만 여자친구에게 가 보세요.
시현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다시 나에게 인사하고, 지희, 현, 재형이에게 인사한 뒤,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천막 밖으로 나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천막에 누운 모든 이름없는 시체들을 죽 둘러보았다. 지희야, 내려와라. 그리고 지아의 얼굴에 흰 시트를 덮었다.
(마지막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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