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요하강 (5) 청나라 보정군관학교 2부
1861년경 시작된 양무운동에도 불구하고 1894년경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전한 후,
1895년경 청나라 신건 육군이 조직되었고
1901년경 청나라의 권력자가 된 원세개는 북양6진을 편성하기 시작한다.
청나라 내 여러 곳의 육군 장교양성기관을 통합한 성격의 보정군관학교는
1902년(청나라 광서2년)경에 설립되어 1923년(중화민국 12년)에 폐교된다.
교육방식은 대부분 일본식과 독일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보정육군군관학교(일명 보정군관학교)의 명칭은 대략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다.
광서28년(1902) 북양행영장판학당
광서29년(1903) 보정속성무비학당
1904년에는 청나라 땅에서 러일전쟁이 발생한다.
광서32년(1906) 보정육군속성학당
선통원년(1909) 보정육군군관학당
선통3년(1911) 보정예비대학당 등등
중화민국원년(1912) 정식창판 보정군교
일명 보정군관학교의
수업과정은 단기교육과정인 속성 과정부터 2년 이상 걸리는 정규과정 등이 있었으며, 오늘날 한국의 육군사관학교와 같이 4년제 장교 육성기관은 아니었다.
조선인중 월북했다는 김00 이 나온 과정이 속성 과정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나왔는지 안나왔는지 확인하기 곤란한 과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청나라는 1906년 군사제도를 통일하고 군사력을 중앙정부가 가지기 위해 육군부를 설치했고, 같은 해 8월 북양속성무비학당을 폐지하고,
같은 부지에 중앙정부 관할 아래 전국 육군속성무비학당을 설치한다.
1906년부터 1911년까지 보정군관학교 부지에 각각 육군부 육군속성학당, 육군군관학당, 육군대학당이 개설되었다.
1912년 원세개가 중화민국 총통이 된 뒤 단기서를 육군 총장으로 임명했고, 그해 7월 육군부의 승인을 받아 육군예비대학당을 베이징으로 이전하고 육군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10월에는 보정군관학교의 원래 자리에 육군 장교 학교가 문을 열었고, 첫 교장은 단기서의 측근인 조리태였다.
1913년 7월 2차 혁명이 발생한다.
광동, 광서, 강서, 안휘, 강소, 복건, 사천의 군관학교(사관학교)들의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해 강서 등지로 가서 반원운동(원세개 반대운동)에 참가한 후 귀환한다.
1920년 직환전쟁이 발발하자 직례군벌들은 항복한 안후이성 제15사단 장교, 병사들을 보정군관학교로 데려갔으나, 녹봉 등을 제 때 받지 못한 제15사단 장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보정군관학교를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조곤은 군대를 보내 공격을 진압할 때 기회를 이용하여 소총 2,000자루와 노새와 말 300마리를 훔쳤다.
결과적으로 학교는 수업을 재개할 수 없었다.
보정군관학교는 1923년 8월에 폐쇄된다.
보정군관학교가 폐쇄된 후, 조하에 있던 조곤의 무비학당이 옛 보정군관학교 자리로 이전되었다.
군벌 다툼중 조곤이 몰락하자 무비학당은 폐쇄되었고 군관학교 부지는 직례군, 봉군(친일 장작림군), 국민당군 등의 막사가 되었고, 방어가 바뀔 때마다 학교 건물은 파손된다.
1937년 중일전쟁(7·7사변) 이후 일본 침략군은 보정군관학교 부지에 일본군의 중요 기지를 설치한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군관학교 건물은 철거됐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후 보정군관학교 부지는 농장으로 전환되었다가 축산농장으로 다시 변경되었다.
1993년에 보정군관학교 유적지는 하북성 문화재 보호단위로 공표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보정군관학교 기념관 준비처가 설치되었다.
2003년 보정군관학교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보정육군 군관학교의 교육방법
보정군관학교는 기본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청나라 말기에 각 성에 3년 교육과정의 육군소학(직례성의 육군소학은 정흥현 요촌에 있었다.)이 설치되었다. 육군소학의 학생들은 처음에는 주로 각지에 주둔한 기인의 자제에서 선발하였다.
14세에서 15세 사이중 체력과 성적이 우수한 1명을 선발하여 학비를 지원하였다.
육군소학교를 졸업하면 우수자는 2년 교육과정의 육군중학교로 진학한다.
청나라 말엽에는 전국에 육군중학교가 4개 설치되는데,
제1육군 중학은 북경 청하진에 있었고, 제2 육군중학은 남경, 제3중학은 무창, 제4중학은 서안에 있었다.
육군중학을 졸업한 이들은 '입오생대'로 편성돼 보정군관학교 분교에서 반년 동안 군 생활을 한다.
따라서 군인의 자질은 상대적으로 균일하였다.
엄격한 훈련과 평가를 거쳐 시험에 합격한 자만이 군관학교로 진학을 할 수 있었다.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각 성의 육군 소학은 학생 모집을 중단했다.
보정군관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고, 그해 입학한 학생들을 보정육군군관학교 1기로 지정했다.
중화민국 원년(서기 1912년)에 4개의 육군 중학이 2개의 육군 군관예비학교(하나는 베이징 칭하진에, 하나는 호북성 무창에 있음)로 통합된다.
중화민국 6년(서기 1917년), 육군 소학교에 나온 마지막 학생들은 이미 학교에 입학했고, 육군 예비학교에는 신입생이 없었다.
그해 여름 방학에 칭하진 제1 군관예비학교와 일반 중학교(4년제) 학생중 2학년 이상으로부터 신입생을 모집해 모두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한다.
중화민국 7년(서기 1918년) 봄, 구 육군소학에서 보정군관학교로 진급한 학생들은 모두 졸업했고, 육군부는 입학제도를 바꾼다.
보정군관학교는 일반 중학 졸업생들로부터 직접 훈련생을 모집한다.
이들은 1차로 사단 이하 중대에 파견돼 9개월 동안 병사로 복무했으며, 기간 만료 후 시험에 합격해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중화민국 6년(서기 1917년)에 모집된 육군예비군관학교 학생들은 중화민국 10년(서기 1921년)에 보정군관학교에 입학한다.
※오탈자와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가 다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권성욱 저, <중국군벌전쟁>
신불해 저, <최강의 군벌>, <이야기 중국사>
쉬처 저, <만주군벌 장작림>
동아일보, 조선일보 보도내용
등
첫댓글 우여곡절이 많은 보정군관학교네요
근대화를 추진하던 청나라가 여러 사관학교를 통합한
최초의 육군사관학교 격이었으나,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망했습니다. ㅎㅎ
사진 맨마지막의 당생지는 중국근현대사나 군벌관련 글에서 본 적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