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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58,7-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2,1-5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폭탄선언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언합니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나오리라.”
(이사 58,8)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이사 58,10)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 5,14)
사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참으로 당혹스럽게도 ‘우리의 빛’, 더 나아가서 ‘우리가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곧 ‘우리 안’에 빛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곧 ‘빛’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단지 빛을 들고서 비추는 것도 아니고 빛을 반조해서 비추는 것도 아닌 우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존재입니까?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빛의 자녀”(요한 12,36; 에페 5,8)이니 ‘빛의 존재’임에는 틀림없고, 그리고 “세상의 빛”임에도 분명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세상에 타오르는 않고 있는 불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빛은 타올라야 빛이 되는데, 그리고 타오르려면 자신을 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직 밝게 환히 타오르지 못하고 있는 불이고 맙니다.
소금이 타인 안으로 들어가 녹아야 부패를 막고 맛을 돋우고, 빛은 자신을 태워야 세상을 품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함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원을 말해줍니다.
곧 ‘소금’은 타인 안에서 녹고, 빛은 타인을 품고 비춥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의 정신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정신, 곧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영혼”(<디오그네투스에게>)으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저 ‘피안의 세상’이 아닌, 바로 이곳의 이 세상에 당신을 내어주시어 빛의 하늘나라를 건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촉구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이러한 ‘세상의 빛’에 대해서 제1독서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이사 58,10)
이러한 착한 행실에 우리의 사명이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사명이 단지 어둠을 피하거나 막거나 몰아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선을 보호하고 행하고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이 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불꽃으로 삼으십니다.’(히브 1,7 참조)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여전히 세상에서 타오르지 않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이 불은 바로 말씀이요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불이요, 빛입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서도 말씀의 불꽃이 타올라야 할 일입니다.
마치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그렇게 성령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코린 2,4)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마태 5,16)
주님!
빛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 안에 심으신 심지에 불을 붙이시고 제 몸을 녹여 빛이 되게 하소서.
어둠을 피하지만 말고 막고 부수게 하소서.
빛을 비추지만 말고 껴안고 이끌게 하소서.
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고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초승달이든, 보름달이든 달과 같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아주 짧고 그만큼 주제도 명확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는 착한 행실', 이것이 오늘 주제입니다.
착한 행실, 이것은 정말 세상을 밝게 하는 빛입니다.
악한 행위가 세상을 어둡게 하고 우리 맘을 절망케 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착한 행위가 무슨 세상의 빛이고, 세상을 밝게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작은 빛일 뿐 어둠이 아니고 세상을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의 착한 행위 곧 선행이 대단하다면 세상을 그만큼 더 넓게 그리고 더 밝게 비추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의 착한 행위는 작게나마 세상을 비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의 착한 행위는 그리 대단치 않고 오히려 작습니다.
그럴지라도 나의 착한 행실을 무시하지도 말고 과시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자주 양극단의 잘못을 범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 조금 하고 그것을 대단히 자랑하고 과시하는 한 극단과 이까짓 선행은 선행도 아니고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다른 한 극단이 있는데, 과소평가할 경우, 오늘 주님 말씀처럼 선행을 함지로 덮어두거나 더 나아가 선행을 하려는 의지마저 꺾어버릴 수도 있으니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은 크고 작음으로 인해 하거나 말거나 하지 말고, 크거나 작거나 해야 할 것이기에 하고, 사명이기에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선행은 겸손으로 할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어둠은 참 빛이신 주님께서 없애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우리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당신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빛이라고 하시고, 세례자 요한과 우리는 그 빛의 증언자라고 하는데, 이것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은 착한 행위는 참 빛을 증언하는 빛이고, 그 빛에서 빛을 받아 비추는 빛이기에 겸손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선행은 초승달이든 보름달이든 달과 같습니다.
태양 빛을 받아 비추는 달 말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선행은 사랑으로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 만족으로 선행을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간혹 우리는 선행을 했다는 자기만족을 얻기 위해 선행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선행은 어쩌면 선행도 아니고 세상의 빛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 선행은 그리스도를 낳는 선행이 되어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라고 하면서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라고 얘기하는데, 우리의 선행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악행이 근근이 주님을 믿던 사람을 교회로부터 떠나게도 하고, 우리의 선행이 주님을 믿게도 하는데, 그것은 그 선행이 비록 아무리 작아도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작은 착한 행실로라도 그리스도를 낳는 어머니들이 되시길 빕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의 소금과 빛>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간 본성을 취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봅니다.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라고 말씀하셨고, 동시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테살 5,4-5)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에페 5,8)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로마 13,12)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소금이며 빛입니다.
이미 소금이요 빛이거늘 짠맛을 내지 못하고 밝게 비추지 못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이미 존재 이유를 잃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바 없어 결국은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이 되고, 빛을 비추어 주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비추어진 모습은 “착한 행실”입니다.
의도적인 착한 행실이 아니라 삶에 젖어있는 나의 모습이 다른 이의 모범과 표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구체적 실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명함은 사랑입니다.
착한 행실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보면, 첫째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58,8)입니다.
각자의 삶 안에서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본당에서 준비한 자선함은 1년 내내 운영됩니다.
이웃을 생각하는 구체적 행동이 바로 빛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들이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큰 힘과 위로와 희망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위로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
(이사 60,19)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비추임을 받아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과한 욕심을 내려놓은 맑은 영혼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십니다.
둘째는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58,10)입니다.
"네 가운데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시기, 질투, 미움으로 흉보고, 비난하고 험담하며 모함하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직도 뒷담화를 하나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
(콜로 4,6)
하느님께서는 말 많은 것을 싫어하고, 말꼬리 잡는 것도 싫어하며, 말을 뒤집는 것도 싫어하십니다.
헛된 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품격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주 하느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을 채우고 영감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나눔과 말조심에 마음을 써야 하겠습니다.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희생의 봉헌을 하고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한다면 그 자체가 소금이요, 빛입니다.
소금의 역할이 뭡니까?
자신을 녹여 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부패하지도 않고 세상의 부패를 막습니다.
또한 소금은 절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향력을 말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불평, 불만이 많고 교만한 사람을 감사의 사람,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소금의 절정은 맛을 내는 데 있습니다.
소금은 일단 사용이 되면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 기능은 여전합니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제맛은 드러나지 않게 이웃 안에서 사랑으로 녹아나야 합니다.
희생과 봉사를 통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생명의 가치를 알게 해 주며 가치 있는 삶, 안락함이 아니라 충만함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금의 삶입니다.
인생의 맛을 잃었던 이들이 우리들의 기도와 헌신적인 사랑으로 삶의 맛을 회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여기 촛불을 보십시오.
자신을 녹이지 않고서는 결코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헌신과 희생이 없이는 세상을 비출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사회가 밝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둡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둡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빛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의 세상을 어둡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풍족해졌는데 말입니다.
과거에 비해 소비는 늘어났지만, 더 가난해졌고, 기쁨도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정은 무너졌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는지 모르지만 소중한 가치는 줄어들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고민도 줄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천주교나 개신교, 불교등 제도 종교의 의례와 가르침 그리고 계율은 따르지 않으면서 개인적 취향에 따라 종교 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늬만 신자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까닭에 밝지 않습니다.
신앙이 아니라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음을 각성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두운 것은 의롭고 밝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알면서도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됨이 적어서입니다.
진리가 부족해서입니다.
정의가 바로 서 있지 않고 사랑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빛을 비추지 않고,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이 더 필요합니다.
소금의 역할이 간절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필리 2,15)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구체적 사랑의 실천으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도록 합시다.
하늘의 별은 어두운 밤에 더 빛나게 보입니다.
사회가 어둡다고 생각될수록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져야 합니다.
세상이 부패했다고 생각될수록 소금의 역할에 대한 소명을 일깨워야 합니다.
까만 밤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더욱 빛나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눈길이 예수님의 눈길을 닮고, 나의 손과 발이 그분의 손과 발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면 무엇이 좋을까?>
‘특파원 K’라는 한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된 내용입니다.
최근 한 프랑스 방송사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파리 한복판에서 한 여성이 여자아이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며 데려가려 할 때 시민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실험에서 단 두 사람만이 “저 사람 엄마 맞니?”라고 물으며 아이를 보호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한국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도와주려는 마음이 들었느냐 질문하니 보통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모르는 사람은 아이에게 “엄마 어딨니?”라고 묻는데 그 사람은 바로 아이를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는 것 같아서 자기가 나서야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빛과 소금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은총과 진리를 주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은총은 사랑이고 소금입니다.
소금은 자신이 녹아서 어떤 것에 맛을 더하고 부패하지 않게 합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빛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위 이야기에서 두 한국 청년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주었습니다.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을 보호하는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소금입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본 모든 프랑스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이 빛입니다.
그런데 빛과 소금이 되려면 먼저 자신이 짠맛과 빛을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가진 것만 줄 수 있습니다.
두 한국 청년들은 한국에서 그러한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그러한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당신의 가르침을 주었고 십자가의 희생으로 피를 쏟아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은총과 진리로 새로 태어났고 그러니 당연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는 별개의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청년일 때 한 본당 선배도 군대 첫 휴가를 나와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이러한 상황에 마주쳤습니다.
친구들은 그 선배를 사창가로 데려갔고 자신들도 들어가려 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 선배는 몸부림을 쳤고 그 과정에서 옷도 찢어지고 안경도 깨졌습니다.
그러다 결국 어쩔 수 없게 되자 친구들도 술만 한잔 더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 선배도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친구들에게 소외당할 두려움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한다는 두려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견뎌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부활로 그러다 죽어도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된다고 무엇이 좋을까요?
바로 ‘창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은총과 진리를 주는 이는 창조자입니다.
창조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창조자가 됨은 생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결혼도 실패하고 말기 암 환자로서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열심히 살다가 생을 마친 일명 ‘풀빵 엄마’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자녀들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자녀들을 위해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아이들은 죽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점차 알아갈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신들의 빛과 소금이었다는 것을.
어머니가 끓여준 새해 첫날 떡국이 그들에겐 소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보여준 가르침이 그들에겐 빛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들도 자녀를 낳으면 그렇게 부모가 될 것입니다.
받지 않으면 줄 수 없습니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 진리와 은총을 준다는 것.
이것은 어머니가 되는 길입니다.
창조자가 되는 길입니다.
왜 하느님은 우리가 창조자가 되기를 원하실까요?
피조물은 소멸하지만, 창조자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창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창조자는 능력자이기도 하지만 그 능력은 에너지에서 나옵니다.
생명이 에너지입니다.
에너지의 소유자만이 영원히 자신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자만이 영원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오늘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떤 어머니가 되는 것일까요?
자녀에게 인간이란 믿음을 주는 부모를 넘어서서 하느님이란 믿음을 주는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각자가 가진 믿음을 줍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 자녀임을 믿어 하느님 자녀처럼 은총과 진리를 흘려주면 나에게서 또 다른 하느님 자녀들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 자녀의 어머니가 됩니다.
인간을 낳은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피조물이기에 영원할 수 없지만, 하느님 자녀를 낳는 어머니는 창조자 하느님의 협조자가 되어 영원히 삽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주는 이들이 영원히 삽니다.
그 믿음을 주는 방식이 은총과 진리를 흘려주는 것입니다.
은총은 하느님 생명이고 진리는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하느님이란 믿음을 가진 자녀를 낳는 어머니들이 됩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음식물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 눈에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음식의 맛을 더해주는 소금의 역할>
건장한 청년들이 줄줄이 들이닥쳤습니다.
먼길 오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한 분위기여서 주특기인 치즈·계란 라면을 열심히 끓여댔습니다.
라면 끓이는 데는 제 나름대로 신조가 있습니다.
국물이 한강이거나 퉁퉁 불어터진 라면은 절대로 용서가 안됩니다.
조리 설명서에 따른 적정량의 물에 치즈 한쪽, 파 송송 계란 탁! 불어터지기 전에 신속·정확·공정한 배분!
눈이 휘둥그래진 청년들이 후후 불어가며, 맛있다 맛있다 하며 폭풍 흡입하는 모습에 제 마음이 제 마음이 얼마나 흐뭇해졌는지 모릅니다.
조리에 있어서 적절한 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소금을 주제로 한 가지 가르침을 건네고 계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도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마태오 복음 5장 13절)
어촌에 살다 보니 새삼 소금의 위력을 확인하게 됩니다.
물고기를 아무리 많이 잡아 와도 시간을 조금만 지체해도 상하게 되고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게 됩니다.
신속히 손질을 해서 적정량의 소금을 뿌리고 해풍에 말리게 되면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합니다.
갓 잡아 올린 생선을 구워 먹을 때는 또 어떻습니까?
잘 손질해서 소금을 뿌려준 후, 숯불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익혀 먹으면 그 맛이 일품입니다.
따지고 보니 소금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음식물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 눈에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음식의 맛을 더해주는 소금의 역할,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역할입니다.
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말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고민하던 중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성인(聖人)이 될 것이며, 군인은 군대에서 성인이 될 것이며, 환자는 병원에서 성인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학생은 자신의 공부를 통해서, 농부는 논과 밭에서, 사제는 사제로서 사목의 현장에서, 공무원은 사무실에서 성인이 될 것입니다.
성인의 길로 나아가는 모든 발걸음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바치는 희생의 발걸음, 바로 그것입니다.”
(희망의 길, 가톨릭출판사)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제 맛을 잃은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씀은 세상의 악을 막고,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라는 명령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또 그리스도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고, 소금과 빛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사도 2,46-47)
믿음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신앙인들의 모습과 사랑이 가득 넘치는 공동체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소금과 빛이 되었습니다.
삶 자체가 곧 복음 선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라는 말은 신앙인 공동체의 삶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감화시켰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라는 말은 날마다 신자가 계속 늘어났다는 뜻인데, 이 말에는 자기 발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요한 13,34-35) 실천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 실천’은 그 자체로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고, 소금과 빛으로서 사는 일입니다.
따라서 신앙인 공동체가 실천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세속의 단체나 집단과는 분명히 다른 공동체라는 것을, 즉 ‘거룩한’ 공동체라는 것을 드러내는 중요한 특징이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랑이 없으면’ 신앙인 공동체라고 말할 자격을 잃게 되고, 복음 선포는 거짓 선포가 되고, ‘제 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함지 속에 감춘 등불’이 되어버립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가 결코 아닙니다.
우선 먼저 공동체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지만, 그 사랑은 반드시 밖으로 흘러 넘쳐야 합니다.
만일에 사랑이 밖으로 향하지 않고 안에만 있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심일 뿐이고, 그 공동체는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들끼리만 뭉쳐 있는 이기적인 집단일 뿐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안티오키아 교회를 주목하게 됩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도 11,20ㄴ.26ㄷ)
'그 기근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 일어났다.
그래서 제자들은 저마다 형편에 따라 유다에 사는 형제들에게 구호 헌금을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그대로 실행하여 그것을 바르나바와 사울 편에 원로들에게 보냈다.'
(사도 11,28ㄴ-30)
안티오키아 교회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인’(크리스천. Christian)이라고 불린 첫 신자들이고, 그들이 대기근 때에 유다 지역의 신자들을 도와준 일은 사도행전에서는 한 지역 교회가 다른 지역 교회를 도와준 첫 사례입니다.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말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는 구분되는 다른 종교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받았음을 나타내는 말인데, 이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신앙인들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입니다.
또 안티오키아 신자들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인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인답게 충실하게 살아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니라, 소금과 등불 구실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제 맛을 잃은 소금은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힌다는 말씀은 신앙인답게 살지 않은 사람은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으니’ 라는 말씀은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은 하느님에게도,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 자신에게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또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라는 말씀은 신앙을 감추지 말고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증언하라는 명령입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감추어진 등불은 제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스스로 ‘제 맛을 잃은 소금’이 된 사람이고, 스스로 등불을 끈 사람입니다.
그의 배반은 그 자신이 멸망을 향해서 가게 된 일이면서, 동시에 교회 전체에, 또 사도들의 활동에 큰 타격을 준 일이었습니다.
성경에 특별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사도들 안에서 배반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사도들의 위신을 추락시킨 일이었고,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 계속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인이 소금과 등불 구실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그 자신이 구원을 못 받는 것으로만 그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방해하는 ‘악한 일’이 됩니다.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가로막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 멋지고 매력적인 삶 -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삽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바로 우리 믿는 모든 이의 신원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신자들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살아갈 때 참 멋지고 매력적인 삶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세상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이 한결같이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이 짓밟힐 따름이다.”
설명이 필요없는 너무 자명한 말씀입니다.
참으로 변질, 변절, 변심하지 않은 한결같은 제맛을 지닌 삶인지요.
늘 제맛을 지닐 때 참 멋지고 매력적인 삶입니다.
부패로 맛이간 변질된 삶이라면 원상복구는 참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제맛의 소금으로 살아가기 위한 항구한 수행의 노력이 필수이겠습니다.
“음식이 맛이 가면 버리기라도 하겠는데 사람은 맛이가면 버릴 수도 없고 참 난감합니다.”
오래전에 들은 말마디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제맛을 잃지 않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소금은 조미료나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있을때면 모르지만 적절량이 없으면 금방 맛이 드러납니다.
또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입니다.
그러니 소금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합니다.
음식 맛을 내기 위한 소금이요 음식의 부패를 막기 위한 소금입니다.
또 소금은 보이지 않으면서 자신은 점차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면서 서서히 녹아 사라집니다.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작용하면서 자신은 서서히 사라지니 그대로 한결같고 묵묵한 희생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소금이라 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세상과 단절 격리된 소금같은 존재라면 참 무의미한 삶일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존재라면 말그대로 존재 이유의 상실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단수이면서 복수입니다.
참으로 변질되지 않고 한결같은 제맛을 지닌 세상의 소금같은 개인이요 교회공동체인지, 수도공동체, 가정공동체인지 묻게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듯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같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과연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같은 개인이요 공동체의 삶인지요?
서서히 꺼져가는 희미한 빛은 아닌지요?
늘 한결같이 세상을 은은히, 환히 밝히는 개인이요 공동체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인 삶일까요.
촛불의 이치가 소금의 이치와 똑같습니다.
마지막 끝나는 순간까지 서서히 녹아 사라지며 세상을 밝히는 촛불같은 사랑과 헌신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삶이겠는지요.
오늘 마태복음 소금과 빛의 상징어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계속되는 예수님 산상설교에 나오는 일부입니다.
바로 산상설교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 몸소 산상설교의 말씀을 사셨기에 이렇게 힘차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처럼 앞의 참행복의 진복팔단에 이어지는 산상설교 말씀의 수행에 한곁같은 분투의 노력과 공부를 다할 때 비로소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같은 삶이겠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진짜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의 빛나는 모범이자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예수님에 계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따랐던 숱한 성인성녀 신자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벌써 부패로 변질되어 사라졌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따랐던 선의의 무수한 성인성녀들이 신자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이미 캄캄한 어둠속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른다는 교회공동체가, 또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해야 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제반 종교공동체들이나, 수도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세상에 동화, 속화되어 제맛을 잃고 부패된다면, 또 제빛을 잃는다면 그 폐해가 얼마나 크겠는지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면서 세상을 성화聖化해야 할 종교공동체가 속화俗化된다면 참으로 절망적일 것입니다.
거룩한 것이 부패하면 그 악취는 대책이 없습니다.
불가의 성철 큰 스님이 수좌에게 줬다는 평생 좌우명이 소박하나 결코 잊지 못합니다.
'속이지 마라' 입니다.
남은 물론 자기도 속이지 마라, 진실하라, 정직하라는 말씀인데, 평범하나 얼마나 공감이 가는 말씀인지요!
거창한 거룩함이 아니라 이런 정직하고 진실한 수행자의 삶자체가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입니다.
또 어제 도반형제의 말에 참 반가웠습니다.
"우리 수도원에는 아부하는 형제가 없다"
정말 수도자다운 순수한 모습입니다.
아부한다는 것은 수도자의 정서에 너무 안어울릴뿐 아니라 이러면 결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역할을 못합니다.
이런 가르침이 깨달음이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에 속한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다시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어 살게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그 아득한 옛날에 우리를 위한 참 귀한 가르침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참된 단식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좋아하는 단식은 밥을 굶는 단식의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 있음을 역설하십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좋아하셨던 이사야 예언자가 그대로 예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은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다음 같은 구체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참으로 말뿐, 마음뿐, 실천이 결여된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도 생략할 수 없는, 단숨에 읽혀지는 내용이라 제1독서 전문을 그대로 다 인용합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저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넔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흙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어찌 수천년전에 오늘날에도 그대로 공감이 가는 이런 진리 말씀이 선포됐는지 참 불가사의한 하느님의 예언자 이사야입니다.
이런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 없는 삶과 유리된 단식이나 전례행위는 얼마나 공허하겠는지요!
어떻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을까요?
답은 단 하나, 진짜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대로 온힘을 다해 살아내는 것입니다.
바로 제2독서의 바오로가 그 모범입니다.
참으로 겸허한 미음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파스카의 삶을 살아갔던 바오로 사도입니다.
“나는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애오라지 이런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된 삶이라면 그 삶 자체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같은 삶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파스카 예수님과 하나되어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빛은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하나될수록 비로소 우리 또한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날마다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우리가 변질 부패되는 것을 막아 한결같은 제맛을 내는 세상의 소금으로, 또 한결같이 세상을 밝히는 환한 빛으로 살게 하십니다.
참으로 다음 제 좌우명 기도시처럼,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 살아갈 때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의 삶일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이민자들의 삶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삶은 견딜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타향도 정이 들어 고향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잘 이겨낼 수 있지만 이민자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식의 문제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자식의 신앙 문제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을 따라서 성당에 가고, 주일학교에도 다니고, 복사도 합니다.
그러나 대학에 가면서부터 많은 자녀들은 성당을 멀리하고,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부모님들은 성당에서 봉사를 많이 했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는데 어째서 자녀들은 신앙의 등불이 점점 꺼져갈까요?
대화와 소통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은 잘 찾아주고 도와주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시와 명령은 있었지만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대화하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컴퓨터 게임만 하는 아들에게 엄마가 밖에서 놀고, 친구들도 만나라고 했답니다.
아들이 엄마에게 컴퓨터 게임에도 나름 스토리가 있고, 그 안에서도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엄마의 시대에는 밖에서 친구를 만나고 놀았지만 우리들의 시대에는 컴퓨터 온라인에서 친구를 만나고 논답니다.
학업에 지장이 있지 않느냐는 엄마의 말에 아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즘 대부분의 직업은 컴퓨터와 관련된 직업입니다.
쇼핑도, 은행업무도, 예약도 대부분 컴퓨터로 하는 세상입니다.
컴퓨터 게임 때문에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과장된 말이라고 합니다.
컴퓨터 게임이 있기 전에도 폭력과 전쟁은 있었고, 폭력과 전쟁을 하는 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들의 말에 엄마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엄마도 예전에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었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하는 컴퓨터 게임에서 우승을 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건강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가끔 나가서 운동을 하겠다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화는 마무리 되었다고 합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나는 견진성사 안 받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아버지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견진성사는 내가 확신이 있어야 받는 것인데,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신앙에 확신이 서면 그때 ‘Confirmation’을 받겠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 교리 시간에 배운 것과 실제 역사에서 드러난 교회의 모습이 다릅니다.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공헌한 것도 많지만 교회가 잘못한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유 있는 답변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지만 안심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다시 신앙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네가 나의 집에서 사는 동안은 내가 정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내가 정한 규칙은 주일에는 성당에 가는 것이다.
집안에 기일이 있으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아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대화를 마쳤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머니는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 ‘수제비’를 해 주셨습니다.
수제비는 밀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을 만들면서 시작됩니다.
어머니는 찰지게 반죽을 하였습니다.
물이 밀가루에 완전히 스며들어 반죽이 찰져야만 수제비는 끓여도 잘 풀어지지 않고, 맛이 쫀득쫀득 했습니다.
수제비는 어머니의 손맛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구수한 육수와 호박과 감자가 들어간 수제비는 비오는 날 저녁 별미였습니다.
시장에 가서 새로운 부식을 사오지 못한 날에는 ‘비빔밥’을 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양푼에 야채와 밥을 넣고 구수한 들기름을 넣고 비벼 주었습니다.
맛을 더하기 위해서 고추장을 넣기도 했습니다.
수제비가 밀가루와 물이 하나 된 작품이라면 비빔밥은 야채와 밥이 기름에 어우러져서 각자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기름도 자신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비빔밥의 고소한 맛을 더해 줍니다.
저는 신앙에는 두 가지의 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물이 스며들어 밀가루를 맛있는 반죽으로 만들어주는 수제비의 영성입니다.
다른 하나는 들기름처럼 밥과 야채의 풍미를 살려주면서 조화를 이루는 비빔밥의 영성입니다.
가정에 문제와 어려움이 있다면 자녀들의 고유한 인격과 품성을 생각하지 않고 부모의 방식대로 하나가 되도록 강제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뿌리가 땅 속에서 양분을 끌어 올려 꽃이 피게 하듯이 부모의 사랑이 자녀들에게 스며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며 이를 행하여라.”
저는 이것이 스며듦의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각자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기름이 제자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각자의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가정이 건강하고 화목하기 위해서는 ‘반죽’이 되기보다는 ‘비빔밥’이 되어야 합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기름이 되어 아이들의 삶을 더욱 빛나고 풍요롭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금은 스스로 녹아서 맛을 내는 스며듦의 영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빛은 각자의 품격을 잃지 않지만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비빔밥의 영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연구에 의하면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의 행복은 1년을 채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고로 다리를 잃은 사람은 어떨까요?
다리를 잃는 순간부터 큰 좌절감 속에서 힘든 시간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한 1년을 넘어가면 불행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개척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1년 뒤의 행복도가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보다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그래서 영원히 행복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우리 몸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즉,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 어느 쪽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우리 몸 안의 유전자가 그 역할을 하는데, 행복감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게을러지고 나태해져서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는 의지가 약해질 것이고, 반대로 불행에 빠져 우울감이 너무 길어지면 삶을 포기하게 되어 유전자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행복이든 불행이든 어느 한 곳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수백만 년 동안 진화됐고 또 앞으로도 진화될 인간이기에 계속된 변화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삶 자체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할 때 불행의 순간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으며, 자기 삶에 더 충실할 수 있습니다.
늘 행복하길 원하는 우리이지만, 이는 욕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신 어떤 삶이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출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세상 안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빛나는 사람, 세상 안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단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 5,13.14)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춰주신 것도 아닙니다.
분명하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로 태어났고,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이 아닌, 또 불행 안에서 헤어나지 못해 좌절과 절망을 반복하는 삶도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으로 꼭 필요하고 거룩한 삶입니다.
그래서 이 모습에 맞게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우리의 빛이 새벽빛처럼 세상에 터져 나올 것입니다(이사 58,8 참조).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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