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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7일 월요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이사 35,1-10
복 음 : 루카 5,17-26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 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지상에서 천국을 삽시다
-형제적 사랑과 믿음, 주님의 용서와 치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도 살아있는 느낌이 드는 친밀한 성인들은
우리 가톨릭 교회의 자랑이자 보물이 됩니다.
성인들보다 더 확실히 하느님을 증거하는 분들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삶의 좌표가 되고 끊임없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성인들입니다.
만 57세 선종하기까지 참 치열히 사셨던 성인은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주교로 추천된 후 세례 받고 주교품에 올랐습니다.
‘로마인 이야기’ 14권 표지는 ‘그리스도의 승리’란 표제에
처음으로 로마 황제가 아닌 ‘성 암브로시오’ 초상화가 나오며
마침내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를 능가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교황 그레고리오와 함께
서방 4대 교부중 한 분입니다. 네 분 교부 하나하나가 참 불가사의한 분들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 안에 이렇게 무한한 능력을 주셨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어지러웠던 시절에 혼란에 휩싸이지 않고
세상 한복판에서 독야청청獨也靑靑 천국을 살았던 성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에 나오는
놀라운 인물, 성 암브로시오와의 만남에 관한 생생한 일화를 나눕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습니다만,
꼭 필요한 요기로 몸을 돌보거나 독서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가 책을 읽을 때에도 눈은 책갈피를 더듬어 나가고
마음은 터득한 바를 되씹고 있었지만 목소리와 혀는 쉬고 있었습니다.
가끔 저희가 그를 찾아 갔는데 누구든지 들어가지 못하게 금하는 법도 없었고
또 누가 찾아왔다고 자기에게 알리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소리 없이 책을 묵독하고 있음을 보았고, 그럴 때면 저희도 하릴없이 소리 내지 않고
한참동안 말없이 그냥 앉아 있다가 가만히 자리를 뜨곤 하였습니다.
그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번거로움을 끼칠 엄두가 나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노의 증언입니다.
생활 속의 관상가 성 암브로시오에게는 독서가 관상적 휴식시간 이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렉시오 디비나 성독을 일상화했던 성인이었습니다.
구두점과 띄어쓰기가 없어서 소리 내어 읽음으로써 단어와 문장을 구분하던 시대에
주교는 눈으로 묵독했던 것이며, 성 아우구스티노에 충격적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소리 내어 책을 낭독하였기에 눈으로 하는 묵독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지요.
성인의 마지막 임종어도 그가 얼마나 치열한 휴식 없는 삶을 살았는지 보여 줍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단 말인가!
오,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하시지 마시고 저를 거절하지 마옵소서”
연옥 같은 세상에서 천국을 살았던 성인들입니다.
결코 환경을 탓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천국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그 모범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이사야의 하늘 나라 꿈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지요.
이런 꿈을 앞당겨 현실화하여 살았던 이사야 예언자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빛나는 꿈이 있었기에 엄혹한 현실에 압도되지 않고 기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한 문장 생략할 수 없을 정도로 빛과 생명이 넘치는 내용들입니다.
내면이 광야처럼 사막처럼 메말라진, 또 현실에 좌절한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 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이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의 사라지리라.”
이런 아름답고 황홀한 이사야의 예언은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중풍병자 및 그 동료들간이 만남을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이어 대림시기 이 거룩한 공동체 미사전례를 통해서도 그대로 실현됩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중풍병자 동료들의 형제애와 믿음입니다.
공동체의 사랑과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켰고 치유에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중풍병자 동료들 공동체의 일련의 눈물겨운 형제적 사랑과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1차 치유가 죄의 용서 선언입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죄의 용서에 전제되는 공동체의 믿음이요,
우선 죄의 용서를 통해 영혼을 치유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충격에 빠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반응에 관계없이 중풍병자에 육신의 치유를 감행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대로 미사장면을 압축한 듯 합니다.
공동체 형제들의 사랑과 믿음 덕분에 주님을 만나 영육의 전인적 치유를 받아 구원된 중풍병자입니다.
불운의 사슬에서 벗어나 완전 부활의 새 삶을 살게 된 중풍병자입니다.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고, 놀라움과 두려움에 찬 사람들은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대로 제1독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중풍병자의 치유과정이 상징하는 바 그대로 공동미사전례의 은총입니다.
공동체 형제들의 사랑과 믿음 덕분에 주님으로부터 죄의 용서와 더불어 육신의 치유로
전인적 구원을 받는 우리들 또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고백하게 됩니다.
영성체전 사제의 기도문 역시 공동체 믿음의 결정적 역할에 대한 은혜로운 대목도 생각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공동체 형제들의 사랑과 믿음을 보시고
죄의 용서와 더불어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께서 옷차림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는 아무도 할아버지께서 자신의 외모에 신경 쓸 것으로 생각하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러자 어떤 분이 말합니다.
“할아버지! 좋아하는 분 생겼어요?”
오래전에 아내를 잃고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대학에서 정말로 마음에 드는 할머니를 만난 것입니다.
그분께 더 마음에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말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었습니다.
당연히 옷차림도 바꿨더니 사람들이 젊어진 것 같다고 말합니다.
할아버지의 모습에 ‘나이 들어 무슨 주책?’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의 큰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나이를 들면 사랑에 빠지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더 큰 실수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늙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젊어지게 합니다. 몸에 활력을 주고, 긍정적인 마음을 줍니다.
따라서 죽기 전까지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늘 설렘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이 사랑은 이성 간의 에로스적인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누군가를 돕는 사랑의 실천은 사람을 젊게 만드는 것 이상의 커다란 변화가 동시에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사랑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친구들이 친구인 중풍 병자를 데리고 와서
지붕을 뜯고 주님 앞으로 내려보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했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복음에서는 특별한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서 중풍 병자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친구들은 중풍 병자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사랑했기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가질 수 있었고, 그 사랑의 마음이 놀라운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모든 병자와 죄인들에게는 그를 주님께 데리고 갈
사랑의 중재자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랑 중재자의 모습을 갖추면서 살고 계십니까?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주님의 놀라운 기적도 함께 따라옵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루카 5, 24)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 5,21)
참으로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루카 5,24)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5,24-25)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일 있습니다.
그것은 치유 받았어도 “들것”을 여전히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치료되었다고 해서, 몸을 버려두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이요, 이미 용서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또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들것'에 메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할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할 일입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인류를 태워,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루카 5,24)
주님!
평상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평상을 들고 가게 하소서.
평상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셨듯이,
저도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20년 코로나19는 고인이 되신 분들을 위한 장례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사랑하는 남편의 손을 잡지 못하고, 창 밖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화상으로 인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저도 한국에 가지 못하고 미국에서 연도와 미사를 하였습니다.
동창신부님이 어머니 마지막 가는 길을 영상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영상으로 어머니의 입관 예절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구장님께서 집전하시는 장례미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위한 동창 신부님의 강론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와서 일상의 소중함을 함께 느끼면 좋겠습니다.
고인이 되신 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빈소에는 가지 못하지만 조의금을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빈소에 와서 고인을 위해 연도를 바치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례미사에 와서 고인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인이 묻히는 장지까지 가서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친할지라도, 사랑하는 가족일지라도 거기까지입니다.
고인과 함께 무덤에 묻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떠난 고인이 천상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겨 드립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 돌아 갈 것을 믿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하느님께서는 비록 우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하얗게 하시고,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희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절망은 희망으로, 어둠은 빛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죄인으로 멸시받고, 공동체로부터 쫓겨났던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았고,
공동체로부터 다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화려하고, 커다란 건물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어도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부님들과 함께 뉴저지에 있는 ‘Worthington State Forest Park'엘 다녀왔습니다.
델라웨어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공원입니다.
조금 무리하게 걸었더니 다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약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챙겨오지 못했습니다.
말은 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함께 했던 신부님이 어디 아픈지 물어보았습니다.
다리가 조금 아프다고 말했더니 기꺼이 약국까지 같이 가 주었습니다.
다행히 약을 구할 수 있었고, 남은 일정을 차질 없이 보낼 수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아픈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갔던 따듯한 이웃 같았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도움으로 걸을 수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이웃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걷게 해 주셨습니다.
꿈과 희망은 혼자일 때는 그대로 꿈과 희망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함께 할 때면 꿈과 희망은 현실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함께하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루카 5, 26)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의 오늘은 어떠한가?
이웃과 이웃사이에
필요한 믿음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필요한 믿음이다.
믿음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사람을 위한
가장 존귀한 일이
바로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도
병들 때가 있다.
믿음이 병들면
믿음으로 풀어야 한다.
믿음은
주님의 것이다.
믿음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에 있다.
좌절하고 상처 입은 이들이
주님을 만나도록 도와주는 데
깊은 믿음의 의미가 있다.
믿음의 가치는
오늘의 의미이다.
믿음으로
오늘을 성찰하게 된다.
믿음은
우리의 인격으로 실천하는 오늘에
참된 의미가 있다.
새날이 밝아온다.
같이 살아가며
함께하는 믿음이 필요한 시간이다.
믿음이 중심이 되어야 할
우리의 관계이다.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믿음에 따른 삶을
오늘도 산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고 실천이다.
우리의 믿음과 실천이
누군가에게는
신기한 오늘이 되게 할 것이다.
나와 너를
이어주는 믿음이다.
고해성사가 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과정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내용은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시며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십니다.
당시 ‘병’과 ‘죄’는 하나였습니다. 병이 죄에서 기인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낫게 하는 것이나 죄를 용서하는 것이나 매한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병을 고칠 기적을 할 수 있음은 믿어도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없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사람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것일까요?
그러면 너무 쉽게 죄를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용서받으면 자신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핑계가 없어집니다.
용서받으면 용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더는 죄를 짓지 못할 것을 압니다.
죄를 짓는 것 안에는 반드시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근저에 깔려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가서 운전병 훈련을 받을 때 어떤 바람둥이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수십 명의 여자와 잠자리한 것을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온 저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이 스물이 갓 넘어서 50명 넘는 여자와 사귄 것입니다.
그의 집은 꽤 부자였고 부모는 커다란 식당을 몇 개 하고 있었으므로
밤늦게까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자들을 집에 데려와서 그런 삶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어 보였습니다.
제가 그러면 첫 경험은 언제냐고 물으니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마구 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가 당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누나가 자신을 데리고 가서 첫 경험을 했는데
그 누나는 아무 남자나 데리고 가서 잠자리하는 평판이 아주 안 좋은 그런 여자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첫 경험이 그런 여자에게 빼앗긴 것이 그의 마음속에 큰 분노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 누나와 똑같은, 아니면 더 나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언젠가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야 할까요?
자신의 결심으로 그런 삶에서 되돌아올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먼저 죄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가 그런 문란한 삶을 사는 힘은 자신을 더럽혔다고 믿는 그 누나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자신이 지금 짓는 죄들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누나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항상 그 분노가 또 다른 죄를 쉽게 짓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누나를 용서하면 그런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먼저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그 죄의 원인인 누나를 용서하겠다는 말은,
마치 속옷이 더러워서 겉옷으로 그것이 나타나는데
겉옷을 벗지 않고 속옷을 갈아입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겉옷을 벗어야 속옷도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여자에게 다 찾아다니며 용서를 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 찾지도 못할뿐더러 모두에게 용서를 얻어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가서 용서를 청해야 할까요?
이때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표징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하였을 때 용서를 청할 용기를 내려면
그 사람이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 그 표징을 먼저 찾습니다.
아내와 다투었다면 남편은 장인·장모에게 먼저 용돈을 드리고 옵니다.
그러면 그 소식을 들은 아내는 남편이 들어올 때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맞이합니다.
그때 남편은 자신이 잘못한 것의 용서를 청합니다. 아내의 용서 사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거절당할 수도 있기에 그러한 사인이 없이 무조건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표징은 바로 ‘병이 치유되는 기적’입니다.
그런 기적을 인간에게 맡겼다면 인간을 통해서도 죄를 용서해주시겠다는 표징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병을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고 그것을 믿으라고 기적을 행하는 권한도 주셨습니다.
자녀가 부모가 주는 밥은 매일 먹으면서
부모가 자신은 용서하지 않는 분이시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를 보면 둘을 알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었어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인간에게 주실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의 힘으로 기적도 일으키고 죄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는 분께서 그 안에 앙꼬와 같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빼고 주셨다고 말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깎아내리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개신교도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병을 치유하는 기적의 능력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쉬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주시지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사실 기적을 행하기보다 더 쉬움을 압니다.
우리는 기적은 못 해도 이웃의 잘못을 많이도 용서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더 쉬운 것은 안 주시고 더 어려운 기적의 능력만 주셨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다 주시지 못하는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여기며 직접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청합니다.
이런 오류를 통해 진짜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지금 지은 죄를 분명히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또 누군가를 용서하는 힘이 됩니다.
대부분 우리가 짓는 죄의 근저에는 부모가 마땅히 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랑을
받지 못한 분노가 있습니다.
결국, 그 분노의 불을 끄기 전까지는 지금 짓는 죄들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 분노 때문에 지은 죄들부터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뿌리도 용서할 힘이 생깁니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체험하고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완벽한 하느님이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사랑도 주셨지만 분명 상처도 주셨을 것입니다.
교회에 기적을 행하는 능력인 성령을 주셨으면
그 같은 성령의 힘으로 죄도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깨끗이 용서받아야 합니다.
이 힘이 내 근저에 있는 죄의 핑계거리를 용서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죄에서 해방됩니다.
예수님은 이 죄의 값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가 고통임을 알고 벗어나고 싶다면 우선 죄의 용서를 믿고 죄를 온전히 용서받읍시다.
그리고 그 목적이 내 안에서도 미움이 남아 있지 않게 하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나에게 상처를 준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면 결국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핑계가 사라지고 용서해주신 분에 대한 감사가 나를 지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