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학자 마재 정충량 선생의 의미를 새기며] 정병경.
ㅡ광주의 인물 동래정씨 16세손 염간공 제향일에ㅡ
갑진년에 맞는 가을은 시련을 감내하는 계절이다. 여름 장마로 비가 자주 내리고 늦더위로 인해 다른 해에 비해서 유별나게 재해를 입은 편이다. 광주의 인물 마재 정충량(1480~1523) 선생 제향일이 있는 음력 9월 초사흘이다. 장지동 담안마을 영모재에는 마재선생 후손과 광주문화원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가을에 접어들었어도 햇빛이 강렬해 여전히 여름을 방불케한다.
광주시 장지동(담안길34)에는 영모재永慕齋와 정충량鄭忠樑 선생 묘역이 500여 년의 세월을 이어오고 있다. 묘지와 석물은 잘 보존되어 있다. 마재 선생의 위패가 봉안된 영모재 건축물도 여전히 양호한 상태로 세월을 이어오고 있다. 동래정씨東萊鄭氏 소평공파昭平公派 직계인 염간공廉簡公 선생은 올곧고 정직한 선비로서 세간에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마재磨齋는 정충량 선생의 호號이며 염간공은 시호諡號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字는 숙간叔幹이다. 성종成宗 11년(1480) 한양의 남부 고화방高化坊에서 태어났다. 동래정씨 집의공파執義公派 16세손이며 부친은 형조판서를 지낸 정광세鄭光世이다. 모친은 흥해배씨興海裵氏이며 충찬위忠贊尉 배조裵稠의 딸이다.
22세 되는 해에 사마시에서 생원시 일등과 진사시 3등으로 합격한다. 27세 되는 해 문과에 급제한다.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관직생활에 접어든다.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기묘사화 1년 전(1518) 39세에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된다.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이 화를 당하는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사간원의 탄핵을 받은 마재 선생이 공조참의로 좌천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광주廣州로 낙향한다. 사림파 세력의 마재선생은 44세 되는 해(1523 중조18년)에 생을 마감해 주위로부터 안타까움을 사게된다.
기묘명현己卯名賢에 오른 마재선생은 사헌부 대사헌에 증직된다. 훈구파와의 대립 관계에서 피해를 입은 인물 영의정 정광필鄭光弼(1462~1538)이 당숙이다. 마재선생과 둘도 없는 사이로 지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묘갈명墓碣銘을 짓는다. 내용 중 몇구절 옮겨본다.
"군의 가장 절친한 벗인 나 의성義城 김안국이 바야흐로 전리田里에서 허물을 반성하는 중이어서 미처 몸소 함습含襲하는 상사喪事에 참여하지 못하여, 슬프고 애닲은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중략)
"비록 그러나 하늘이 군에게 보답해 준 바가 어찌 이에 그치고 말겠는가? 군의 맏아들을 보건대, 학문을 좋아하는데다가 단정하고 근실하니, 반드시 그 가업을 계승하여 떨칠 것이므로 군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군은 광주廣州의 치소治所 안에 있는 경안리慶安里 마산馬山 건좌 손향乾坐巽向의 언덕을 골라 장사지냈으니, 이때가 군이 죽은 지 이듬해 봄이었다."(생략)
성품이 침착하고 행동은 곧기로 이름난 학자로서 근검함이 몸에 배어있다. 남의 부당함을 용납하지 않으며 명리에 휩쓸리지 않는 청렴인이다. 제향일에 참여한 후손들의 모습에서도 읽는다. 후대들도 선친으로부터 배려와 겸손함을 본받고 있다.
동래정씨의 시조는 신라시대에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이다. 조선시대에 배출된 정승이 안동김씨와 전주이씨 다음으로 기록되는 17명이다. 대제학 3명과 대과 급제자 198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학자가 많은 반면에 각종 대사에 화를 많이 입게된다. 연산군 중엽의 무오사화ㆍ갑자사화 때 정형창과 17세손인 정윤강은 기묘사화에 연루되기도 한다.
세조와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鄭昌孫(1402~1487)은 조선시대에 동래정씨로는 처음 정승으로 배출된 인물이다.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을 비롯해 정승을 지낸 후손은 왕조시대에 정승의 입지를 굳힌 집안이다.
3세 정목의 셋째 아들 정택의 손자 대에서 정보의 교서랑공파와 정필의 첨사공파로 크게 나뉘며 이후 70여 공파로 이어져 오고 있다. 나는 군수공파 32세손으로 세거지가 경산이다.
무오사화(1498. 연산군4)는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으로 발단된다.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해 사림파가 화를 입게된다. 갑자사화(1504.연산군10)는 정충량이 진사시에 급제할 무렵이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많은 관료들이 피해를 당한 사건이다. 마재선생은 당시 19세로서 관직에 입문하기 전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해인 1506년 마재선생은 문과에 급제해 관직으로 진출할 시기이다. 왕의 측근에서 사초史草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게된다. 마재의 첫 번째 상소는 무오ㆍ갑자사화의 주동자 훈구세력 유자광 탄핵이다. 중종반정의 공신인 유자광을 처벌하라는 상소이다.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에서도 강력하게 건의한다. 중종 초기에 마재는 김안국을 비롯해 신진사류들이 훈구세력과 맞섰다. 유자광과 자손들이 중형에 처해 귀양 가기에 이르고 평해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정충량은 예문관 봉교로서 하급관료지만 실력을 인정받게된다. 김종직을 반역으로 처벌하고, 김일손을 극형에 처한것은 사관의 사초를 왜곡함으로써 유자광 일파가 연산군에게 분노를 사게 한 것이다. 사화가 일어난 사건으로 인한 재발의 의미에서 정충량을 비롯한 한림들이 건의한 것이다.
정충량이 왕에게 상소한 것이 가납되지 않은 사항이다. 무오사화에 신진사류들이 화를 입은 동기는 유자광과 이극돈 등이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초를 김종직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작성했다. 성종실록 편찬 때 이극돈의 불미스런 행동을 삭제하려했다. 사관들이 불만을 보이자, 조의제문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방한 것이라 하여 무오사화의 빌미로 만든 것이 이극돈의 짓이니 비록 죽었으나 관작을 삭탈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중종이 가납하지 않자 사직 상소를 올린것이다.
조의제문은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계유정란으로 왕위에 오른 걸 빗대어 비판한 것이다. 중국 진나라 말기에 황제인 의제를 폐하고 신하인 항우가 서초 패왕이 된 예이다.
조정에서 유자광이 서자 출신이라고 배척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유자광의 상소로 김일손을 심문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하고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충량은 중종11년에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고 정난공신定難功臣이 과다하다고 상소한다. 왕실과 유신儒臣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중종은 결국 뜻을 굽히고 만다. 중종 13년 김정국을 좌승지左承旨로, 정충량을 우승지右承旨로 발령한다. 유인숙,박영 등 신진사류들이 대거 발탁되자 훈구파에서 트집을 잡아 상소하기에 이른다. 도승지에 오른 정충량을 중종 14년 파직 상소가 올라와도 중중은 윤허하지 않는다.
정충량은 세상을 떠나고 22년만인 1545년(인종1) 조정에서 기묘명현己卯名賢에 대한 복권과 증직 및 시호를 내린다. 증자헌대부 사헌부대사헌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시 염간공贈資憲大夫 司憲府大司憲 兼 五衛都摠府都摠管 諡 廉簡公이다.
마재 선생은 독특한 기질이 있어 만인에게 존경의 대상이다. 자신만의 아집이 있고 비리를 못 참는 성격을 지녔다. 성품이 청렴하여 관직 생활에서 모범을 보인 학자로 정평이 나있다. 후대들에게 교훈을 남긴 인물이다. 담안마을 영모재에서 연주한 제례악을 연상하며 발길을 돌린다.
2024.10.05.
첫댓글 영모재와 정충량(鄭忠樑) 선생 묘역에 다녀오셨네요.
사진과 내용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