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헤로데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정적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임금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 무렵 왕권에 위협을 느껴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교회는 오래전부터 순교로 보고 기억하여 오다가 중세 이후에는 더욱 성대한 축일로 지내고 있다. 아기 예수님을 대신하여 죄 없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본기도
하느님,
죄 없이 살해된 아기 순교자들이 말도 배우기 전에
죽음으로 주님을 찬미하였으니
저희도 오늘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제1독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1,5―2,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5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6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7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2,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복음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18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유의지도 없이 죽임당한 아기들이 어떻게 순교자가 될까?
아기가 태어나려면 엄마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 피 흘림이 아기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어떤 생명이든 피의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 흘림은 본인들의 선택입니다. 반면 오늘 아기 순교자들은 본인들의 선택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본인들이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순교자로 인정될 수 있는 걸까요?
그렇다면 구약의 모세가 파라오의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일강에서 죽어야만 했던 아기들도 순교자라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들은 모세의 길을 닦았습니다. 어떻게 본인의 선택이 아닌데도 하느님께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는 데도 그 피의 길이 필요 없었을까요? 가장 먼저 순교의 길을 가셨던 분이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그다음이 베들레헴의 아기들입니다. 그들은 헤로데가 메시아가 죽었다고 믿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는 엄마의 역할을 한 이들입니다.
누구나 하느님 참 생명의 길을 자기 피로 포장하는 이들은 구원받습니다. 단지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칼뱅이 주장하는 대로 심판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은 없습니다.
‘터미네이터’(1984)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SF 영화입니다. 줄거리에서는 터미네이터로 알려진 사이보그 암살자가 사라 코너를 죽이기 위해 2029년부터 1984년까지 과거로 보내집니다. 사라는 미래의 아들인 존 코너가 종말 이후의 미래 기계에 대항하는 저항군을 이끌게 될 것이기 때문에 목표가 됩니다.
한편, 인간 쪽에서도 존 코너는 자기 어머니 사라를 보호하기 위해 군인 카일 리스도 과거로 보냅니다. 영화는 터미네이터가 사라를 끈질기게 쫓는 동안 긴장감 넘치는 추격전을 펼치고, 카일은 그녀를 보호하고 미래의 위험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과정에서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카일은 결국 자신도 모르게 자기 상관인 존 코너의 아버지가 됩니다.
카일 리스는 사라 코너를 보호하기 위해 터미네이터와의 마지막 대결에서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 행동은 사라를 구할 뿐만 아니라 기계에 대한 저항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존 코너의 미래 탄생을 보장합니다.
존 코너가 자신을 과거로 보낼 때 카일 리스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이력을 알고 있는 존은 자신의 존재도 보장하는 임무를 위해 리스를 선택합니다. 이는 리스의 과거 여행이 미래의 존 코너 탄생에 필수적이라는 역설을 형성합니다. 존 코너는 카일 리스를 보며 이미 과거에 자기 어머니를 위해 희생할 존재로 여기고 그를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 눈엔 잠깐 나타났다가 죽는 존재들일지라도 하느님은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 무언가가 있어서 선택받았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교회를 박해한 것은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자비를 입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3)
모르고 한 일이라면 용서받기 쉽습니다. 그래도 바오로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1티모 1,15-16)
분명히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합당한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죄인인 줄 알기에 부르심을 받았고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려는 목적으로 선택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1티모 1,12)
바로 ‘성실성’입니다. 이 단어는 ‘믿을만한’이란 뜻입니다. 하느님께 충실하여지려는, 옳은 일이면 목숨을 바치려는 충실성을 보고 주님께서 바오로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미리 정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심판받는다면 그 가장 중요한 기준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가’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러한 ‘착한 뜻’을 가진 이들에게 평화가 주어집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무엇인가를 적절한 대가나 노력 없이 거저 얻으려는 사람을 향해 우리는 ‘도둑놈 심보’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시험공부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우수한 성적 맞기를 바라는 것은 어떨까요? 근면 절약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벼락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또 어떨까요? 그렇다면 100의 노력을 했는데, 결과는 20밖에 나오지 않는다면 당연히 불평불만을 가져야 할까요?
이곳저곳에서 강의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 있는 본당에서는 매주 금요일마다 성경 특강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준비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까요? 아닙니다. 한 번의 강의를 위해 10시간 이상의 시간을 소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치고 나면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으면서, 더 좋은 강의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매번 깨닫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결과만 나오길 바라는 모든 것이 ‘도둑놈 심보’입니다. 주님께 최선을 다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한한 존재 앞에서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완벽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좋은 결과만을 바라는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노력만으로는 그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고 또 함께하시기에 그래도 이만큼의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도둑놈 심보에서 벗어나 겸손함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내는 오늘입니다. 헤로데는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은 뒤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께서 장차 유다의 왕이 되시리라는 예언을 듣고는 없애려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찾지 못하자 급기야 갓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자기 왕위를 지키기 위해 이런 엄청난 짓을 한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의 아픔은 상관없다는 생각이 역사에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왕으로 기록되게 했습니다. 특히 자기는 중요하고 어린아이의 생명은 별것 없다고 생각하는 헤로데 왕의 모습이 ‘도둑놈 심보’를 가진 못된 사람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왕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려야 하는 의무는 잊어버리고, 자기가 누릴 것만 찾고 있음은 그가 진짜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남의 아픔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저 자기만 편하고 많은 것을 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헤로데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잘 살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살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며, 사랑을 서로 나누며 사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이제 시간이 정말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느끼고 나서야 사람들은 뒤늦게 시간을 아끼려고 하지(에라스무스).
사진설명: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