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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말씀 : 붙잡히신 예수님(마태복음 26:47~56)
* 본문요약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옵니다.
가룟 유다는 그들에게 누가 예수님이신지를 알리기 위해 거짓 입맞춤을 합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잡으려 하자 제자 중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를 떨어뜨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하게 된다고 말씀하시고는
성경이 예언된 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시면서 스스로 잡혀가십니다.
찬 양 : 404장(새 304)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415장(새 292)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 본문해설
1. 가룟 유다의 거짓된 입맞춤(47~49절)
47) 예수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낸 큰 무리가
칼과 몽치(몽둥이)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님을 파는(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줄) 자가
그들과 미리 군호(軍號, 암호)를 짜고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49) 유다가 곧바로 예수께로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고 입을 맞추니
-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47절) :
요한복음 18:2에서는 ‘로마의 군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통상 로마 군대의 1개 중대가 200~300명쯤 되므로
이때 약 200명 정도의 로마 군사들과 성전 수비대와 깡패들을 합해서
약 500~600명의 군사들이 무기를 들고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몽치’는 나무로 만든 무기인 곤봉을 말합니다.
검을 가진 자들은 로마의 군사와 성전 수비대들이고, 몽치를 든 자들은 깡패들입니다.
- 군호(軍號)(48절) :
밤에 잡아야 할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지적하기 위한 암호를 말합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이 입 맞추는 자가 예수님이라고 서로 암호를 정했습니다.
- 입을 맞추다(48, 49절) : 48절과 49절의 ‘입 맞추다’라는 단어가 다릅니다.
➀ 48절의 입 맞추다(필레오)
유다가 군인들과 암호를 정할 때 ‘입 맞추다’는 단어는 ‘필레오’로
보통 뺨이나 목, 혹은 손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부모나 자녀, 형제와 자매, 친척이나 친구와 같은 가까운 사이에 나누는
당시에는 널리 행하여진 흔한 인사법이었습니다.
➁ 49절의 입 맞추다(카타필레오)
그런데 49절에서 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출 때 사용된 ‘카타필레오’란 단어는
애인과 같이 아주 사랑하는 자에게 하듯
반복해서 아주 격렬하게 입술을 맞추는 행위를 말합니다.
유다의 이 입맞춤은 아주 가증스러운 것이었고,
마귀는 유다의 이런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2. 네 검을 도로 꽂으라(50~56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이에 그 사람들이 나아와(달려들어)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그때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뻗어 자기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
칼을 쓰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당장 열두 영(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리라고 한 성경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 그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듯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서 앉아 가르치고 있을 때에는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이 기록한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그때에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니라.
- 친구여(50절) :
‘동료’, ‘친구’, ‘동무’를 일컫는 말로 친밀하고 환대하는 관계를 뜻합니다.
- 열두 영(군단, 53절) : 레기온
당시 로마의 군단(레기온)은 6,000명의 군사로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때든 필요하면 72,000명보다 더 많은 천사들을 보내실 수 있습니다.
* 묵상 point
1. 거짓된 배반의 입맞춤과 예수님의 침착한 대응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가룟 유다는
적어도 500명이 넘는 군사와 강패들을 이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예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무리와 서로 정한 신호대로 예수께로 와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런데 위의 단어해설에서 보듯 48절과 49절의 입맞춤의 단어 뜻이 다릅니다.
유다가 군인들과 암호를 정할 때의 입맞춤(48절)의 뜻은
보통 인사로 하는 입맞춤은 뺨이나 목이나 손에 가볍게 한 번 입맞춤을 뜻하는 말이고,
가룟 유다 예수께 한 입맞춤(49절)은 애인처럼 사랑하는 이에게 하듯
여러 번 반복해서 아주 격렬하게 하는 입맞춤입니다.
➠ 유다가 예수께 이렇게 격렬하게 입맞춤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1) 군인들이 못 알아볼까 싶은 마음에 반복해서 한 것
가룟 유다가 예수께 이렇게 반복해서 입맞춤을 한 이유는
평소처럼 한 번만 했다가 뒤에 있는 군인들이
혹시 못 알아볼까 싶은 마음에 반복해서 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반복해서 예수님과 입맞춤을 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그들에게 팔아넘기려는 마음이 그만큼 강렬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2) 사탄의 숨은 전략 : 십자가를 헛된 것이 되게 하려는 것
그러나 그렇게 반복해서 입맞춤을 하더라도 애인에게 하듯
그렇게 격렬하고 강렬한 입맞춤을 반복해서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것은 유다의 의도가 아니라 사탄의 의도였습니다.
이때 유다는 완전한 사탄의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가룟 유다로 하여금 아주 비열한 입맞춤을 하게 하여
예수님의 감정을 아주 상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감정이 흐트러져 혹시 죄라도 범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더라도 우리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침착한 대응 : “친구여~”
그러나 가룟 유다의 이런 비열한 입맞춤에 대하여
예수님은 “친구여~”하고 따뜻한 말로 응답하셨습니다.
화를 내지도 않으시고, 이게 무슨 짓이냐며 가룟 유다를 밀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룟 유다를 불쌍히 여기시고
“친구여,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하러 왔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지금 네가 하려는 일을 속히 하라”는 뜻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그보다는 “친구여 네가 이 일을 꼭 했어야 했느냐?”하는
안타까움이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끝까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끝까지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4)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토록 철저하게 예수님을 배반하게 하려 한 것일까요?
돈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마태복음 26:1~16 큐티의 묵상포인트 6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로마에 저항하도록 하기 위한 그의 고육지책이었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든 간에 그는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을 가장 앞장서서 방해한 사탄의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는 차라리 나지 않은 것만 못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2. 가룟 유다의 비극 : 절정의 시간이 지나고
예수님을 배반하려는 가룟 유다의 악행은
아주 비열하게 예수님과 입맞춤을 할 때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가룟 유다는 자기가 하는 일이 아주 잘하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는 아주 당당했습니다.
1) 가룟 유다에게 일어난 반전
그러나 바로 그다음 순간 예수님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끌려가셔서
가룟 유다의 일이 끝났을 때 반전이 일어납니다.
가룟 유다의 악행이 예수님과의 입맞춤으로 최고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뒤에 있던 군인들과 깡패들이 예수님을 붙잡자 가룟 유다의 역할은 끝이 났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붙잡혀 가기의 역할이 끝난 바로 그 순간
가룟 유다의 마음은 후회와 허무함과 두려움의 마음으로 바뀝니다.
2) 악의 절정에서 몰락으로
우리는 이런 일을
다윗의 아들 암논과 그의 이복 여동생 다말과의 사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암논이 다말을 범하려 할 때
암논은 다말과 사랑을 나누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는 그 악의 절정이 끝난 바로 그 순간
갑자기 그 다말이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는 울부짖는 여동생을 내쫓았고,
그 일로 2년 후 다말의 오빠 압살롬의 칼에 죽임을 당합니다.
3) 사탄은 악의 절정의 순간 사람을 파멸로 몰아갑니다.
사탄은 악의 절정에 이르기까지는
사람에게 그 악을 향한 간절함을 갖게 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까지는
그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점점 증폭되었습니다.
마귀가 그의 마음에 악을 향한 간절함을 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따먹고 난 후에는
그 악의 절정에 있던 그 즐거움과 쾌락의 자리에는 후회와 번뇌와 두려움만 남습니다.
4) 그러나 이 죄악의 순간에도 마지막 회개의 기회는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이미 배반했고,
그것도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하였을지라도
아직 기회는 하나 남아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주여,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내가 용서받지 못 할 짓을 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하고
눈물로 회개하였더라면 그가 사도의 위치는 회복하지 못했을지 모르나,
최소한 지옥에 빠지는 자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 묵상 :
➀ 가룟 유다의 최대의 실수 : 회개를 하지 않은 것
가룟유다의 최대의 실수는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자살을 한 것입니다.
가룟유다보다 더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일지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주께서 이를 받아주십니다.
어떤 일을 한 자이든, 어떤 고통에 처한 자들이든 간에 자살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살은 더욱 큰 고통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➁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말고,
다만 악에서 구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영적인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늘 주님의 신령한 은혜 가운데 거하여 악에 오염되지 않는 자가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러다 혹시 가룟 유다처럼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다시 회개할 수 있는 자는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3. 스스로 붙잡히신 예수님
➠ 예수님은 스스로 그곳으로 오셨고, 스스로 붙잡히셨습니다(53절)
예수님의 말씀처럼 지금이라도 아버지께 구하여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모두 동원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지만,
그러나 그 권세를 사용하지 않고,
연약한 보통의 사람들처럼 순순히 그렇게 포박을 당하고 끌려가셨습니다.
그래야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세상 만민이 구원을 받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 사랑으로 가룟 유다의 그 비열한 입맞춤도 이기셨습니다.
4. 검으로 흥한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
1) 네 칼을 칼집에 다시 꽂으라(52절)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하인인 말고의 귀를 자르자
예수께서 그에게 검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고 하시면서
검으로 흥한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검을 처음 사용한 자는 아벨을 죽인 가인이었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은 후에 가인이 믿을 것은 오직 칼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칼은 저주받은 자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면서 검을 들으니
주께서 그것을 도로 집에 꽂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의 무기는 칼이 아니라 사랑과 신실함과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핍박에 대하여
동일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복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처럼 칼로 표현되는 폭력으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무기는 성(城)이나 물질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신실함과 믿음입니다.
● 묵상 :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런 저런 문제로 서로를 공격하다가
사회 법정에까지 가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해결되지 않고 사회 밖으로까지 나가서
결국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에게까지 그 피해가 가고 있습니다.
혹시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습니까?
그 미움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지 말고, 주 안에서 해결하십시오.
“차라리 손해 볼 수는 없습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애타게 부르짖던 바울의 호소를 기억합시다.
* 기도제목
1. 가룟유다처럼 거짓된 일에 빠진 자들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2. 하나님의 일을 자기를 과시하려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행하려 하지 말게 하옵소서.
3. 우리는 오직 주를 높이려는 열망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