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막튼 서늘한 새벽, 제 울음소리조차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갓난아기가 여인의 품에 안겨 울고 있다. 이대로라면 그 남자에게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정신없이 달려서 지금 숨어있는 이곳이 어딘지 여인은 잘 모르겠다마는 여기저기 아기의 울음소리와 섞여 들리는 가축의 울음소리와 역겨운 비료냄새가 나는 것을 보아 하니 외딴 마구간으로 추정됐다. 이곳에 숨어있는지도 벌써 한 시간 째였지만 아직까지도 그이는 연락이 없다. 설마 잡혀버린 건가 ? 라는 생각이 들던 그때 여인과 갓난아기가 숨어있던 마구간의 목재로 된 문이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여인은 몸을 움츠리며 홧김에 억지로 울고 있는 아기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윽고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 사모님, 이제 나오시죠. 다 끝났습니다. "
다 끝났다는 사내의 말이 여인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여인은 다 포기한 듯 아기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내었다. 그러자 갑작스러운 엄마의 행동에 놀란 갓난아기가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마구간 전체가 순식간에 아기의 울음소리로 번져버렸다.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구간 입구 앞에 서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검은 정장을 입고 있던 사내는 거만한 얼굴로 이쑤시개를 물고 있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경계심이 느껴졌다. 갓난아기를 안고 있던 여인의 두 팔에 더욱이 힘이 들어갔다.
" 그이는... "
" 약속을 어기셨으니 벌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갈수록 여인의 눈빛은 싸늘해져만 갔다. 그리고 그 눈은 자신을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를 응시했다.
아기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욱더 큰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01
남자의 첫 해외여행은 화려한 뉴욕의 거리도, 그렇다고 여름 최고의 휴양지인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도 아닌 미국 켄터키 주에 위치한 수많은 시골 마을 중 하나인 ' Oxton '이라는 이름의 특이한 구조를 띄고 있는 한마을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여행지가 시골 마을이라는 것에 딱히 불만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시끌벅적하고 치안도 좋지 않은 도시보다 수많은 별을 볼 수 있는 시골이 좀 더 아늑하고 편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뭐, 애초에 남자가 미국에 온 이유는 단순히 여행 목적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7시간이라는 장시간 동안 하늘을 날아와 마침내 미국에 도착한 남자는 공항 82번 게이트 앞에서 우연히 옥스턴 마을의 바로 옆 마을에 산다는 어느 미국인 농부를 만났다. 그렇게 남자는 운 좋게 미국인 농부의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점은 공항에서 옥스턴 마을까지는 도로에 차가 안 막힌다는 가정하에도 자그마치 3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남자가 지금처럼 이렇게 간간이 보이는 도로 표지판과 양옆으로 펼쳐진 넓은 들판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켄터키 주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안에 있는 것도 어느덧 2시간 30분이 지났다. 차가 막힐 거라는 우려는 어떻게든 피했지만 조수석에 앉아있는 남자의 얼굴은 샛노랗게 질려 누가 봐도 아픈 사람이었다. 안색이 안 좋은 남자는 간혹 고개를 돌려 창밖 풍경을 쳐다보기도 했지만 무한한 것보다 더 빨리 질리는 것은 없다고, 도로를 중심으로 양옆에 펼쳐진 끝이 없을 것 같은 들판을 경치삼아 구경하는 것도 이제는 지겨워 미칠 지경이었다.
허나, 이보다 남자를 더 미치게 하는 것은 공항 게이트 빠져나온 후로는 형식적인 대화 하나도 없이 운전석에만 앉아 묵묵히 단지 정말 운전만 하고 있는 이 미국인 농부였다. 이럴 거면 그냥 말 많은 택시 운전사의 택시를 타는 편이 심적으로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운전만 하던 과묵한 미국인 농부가 차에 탄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준비하도록 해요. 곧 있으면 마을에 도착할테니. "
" 그전에 차 좀 잠시 세워줄 수 있을까요 ? 속이 안 좋아서... "
남자는 이제는 정말 한계에 이를었다. 지금까지 설명했던 구구절절의 사족보다 남자의 더 큰 문제점이 바로 남자가 심한 차멀미를 한다는 것이었다.
02
<Welcome to Oxton>이라고 쓰여있는 대형 간판 앞으로 남자가 타고 있던 미국인 농부의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밟고 멈춰 섰다. 이윽고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 비행기 7시간, 자동차 3시간 끝에 남자는 드디어 옥스턴 마을의 땅을 밟았다. 남자는 약 30분 전 갓길에 토를 하고 나서부터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울렁이는 자신의 배를 붙잡고 있었고 심지어 차에서 내릴 때마저도 그는 자신의 배를 붙잡은 채 시들시들 차에서 내렸다. 날 때부터 심한 차 멀미를 앓고 있는 남자에게 7시간의 비행기와 3시간의 자동차는 그야말로 역경이었다.
비록 속이 너무 안 좋았던 탓에 남자는 지금 자신이 서있는 이곳이 한국인지 미국인지조차 분간을 할 수 없었던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이곳까지 태워 준 미국인 농부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는 것은 잊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미국인 농부에게 인사를 건넸다.
" 감사했습니다. "
그러나 남자의 인사에도 미국인 농부는 헤어지는 순간까지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처음엔 그가 돈을 원하고 있는 줄만 알고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달러 지폐 몇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지만 미국인 농부는 고개를 저었다. 돈은 아니었다. 돈이 아니라면 단지 문을 닫으라는 것인가, 하고 엉거주춤 미국인 농부의 눈치를 보며 자동차의 문을 닫았지만 다시금 미국인 농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마저도 아니었던 것이었다. 뻘쭘해진 남자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정적이 이어질 수록 남자의 속은 더욱 더 썩어들어만 가는데 이제는 자신을 여기까지 태워다준 은혜는 다 집어치우고 짜증이 솟구칠 것만 같았다. 결국 미국인 농부와 대화하는 것은 이만 포기하고 몸을 돌리려는데 이따금 자동차 창문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닫혀있던 조수석 방면의 창문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뒤이어 활짝 열린 조수석 방면의 창문으로 미국인 농부의 험상궂은 얼굴이 남자의 이름을 물었다.
" 당신, 이름이 뭐요 ? "
" 이름 ? 아 , 전... "
미국인 농부의 물음에 남자가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문을 막은 이유는 불현듯 며칠 전 한국 호스피스 병실에서 '미국에 간다면 절대로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히지 말라'라고 하시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농부에게 자신의 실명 대신 뭐라고 둘러대야 될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각종 멀미란 멀미는 죄다 앓고 있는 남자에게 해외여행이란 정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해외에 갈 일도, 그렇다고 갈 마음도 없었던 남자였기에 다른 형제들처럼 미국식 이름을 따로 만들어 놓은 것도 없었다. 남자는 연신 '그러니까'라는 말만 반복하였다. 그 와중에도 남자의 고개와 눈은 바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눈을 좌우로 두 세번쯤 움직였을 때 마침 옥스턴 마을 입구 바로 앞에 위치한 'Vincent'라는 주점의 이름이 남자의 눈에 들어왔고 이윽고 남자는 미국인 농부에게 대충 얼버무리는 식으로 대답했다.
" 'Vincent'예요. "
" 그럼 자네도 빈센트의 환생인가 ? "
" ... ... "
" ... 좋아, 그렇다면 'Vincent'. 당신은 이곳에 며칠 동안 머물 생각이오 ? "
" 지금 당장 정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때가 되면 돌아갈 겁니다. "
" 그래요 ? 참고로 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이 마을을 지나쳐가니 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
미국인 농부는 이내 창문을 올리며 시끄러운 시동 소리와 함께 남자가 서있는 이곳, 옥스턴 마을을 떠나갔다. 그제야 남자는 차멀미 때문에 미국인 농부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것이 떠올랐지만 아까 그가 했던 말처럼 인연이 닿아서 다시 만나게 될 그때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도 같았다.
한 번은 우연, 두 번부터가 인연이니까.
결국 남자가 미국인 농부에 대해 알아낸 정보라고는 자그맣게 보이는 그 자동차 밑에 적힌 차량번호 [SG13 7IU]가 전부였다. 남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미국인 농부의 차량번호를 휴대폰 메모장에 새겨두었다.
S G 1 3 7 I U
03
' 옥스턴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인구 수 108 명 '
옥스턴 마을은 인구 수가 고작 108 명인 작은 마을이었지만 하나의 관광지로도 유명했다. 보통 시골 마을과는 다르게 마을 전체가 둥근 원형식 구조를 띄고 있었고, 옥스턴 마을의 정중앙에 있는 광장을 중심으로 12시, 3시, 6시, 9시의 거리가 각각 나누어져 있는, 마치 마을 전체가 하나의 아날로그시계 형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옥스턴 마을이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다름 아닌 바로 이 옥스턴 마을에 '빈센트 반 고흐의 환생'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인 화가 ' Chabot Emmanue '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까 남자가 변명거리로 썼었던 마을 입구에 있는 12시의 거리의 작은 주점의 이름이 'Vincent'인 것도 옥스턴 마을의 주민이 된 샤보 엠마누엘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었다.
유명한 화가가 살고 있어서 유명해진 마을. 허나 정작 남자는 예술, 그중에서도 미술이라는 장르에는 젬병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굳이 왜 10시간이라는 시간을 걸쳐서 옥스턴 마을에 왔느냐. 불과 며칠 전 시한부인 제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 때문이었다.
그것이 남자가 옥스턴 마을에 가게 된 최초의 시발점이었다.
04
경기도 한 병원의 특실에서 암 투병 중인 남자의 아버지이자 모 중소기업의 회장이었던 김재호 회장은 다음날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진다. 그것은 김재호 회장이 직접 결정한 일이었으며 김재호 회장의 자식인 남자를 포함한 4남매 모두 이 일을 진작에 예상했었다. 그 탓일까, 제 아버지가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진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이를 슬퍼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4남매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달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했던 한마디로 '호칭상 아버지'의 죽음을 그 누가 슬퍼하겠냐면서도 한편으로 남자는 슬퍼하지 않은 자신이 무섭기도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4남매는 아버지에 대한 가족애가 무뎌져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자각에 김재호 회장은 다음날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지자마자 자신의 죽음을 슬퍼해줄 리가 없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김재호 회장이 4남매 중 막내였던 남자에게 줄 편지에 마침표를 찍기까지는 무려 일주일이라는 상당 시간이 걸렸다. 4남매에게 줄 편지를 다 쓴 김재호 회장은 곧바로 4남매를 자신의 병실로 호출시켰고 시한부 아버지의 호출로 4남매는 다시금 일주일 만에 호스피스 병동 입구 앞에서 다시 만났으나 정작 김재호 회장은 병동 입구가 아닌 자신의 병실로 4남매를 불렀었다. 그런 4남매가 굳이 김재호 회장의 병실이 아닌 입구에서 따로 모인 이유는 바로 그들은 첫째인 김호석 중소기업 사장의 호출을 우선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약속 시간은 오후 12시, 마지막으로 막내인 남자가 호스피스 병동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10분이었다. 막내의 지각에 제일 먼저 남자를 발견한 첫째 김호석 사장이 남자에게 비아냥대며 말했다.
" 김세원, 네가 아직 사회생활에 익숙하지 않다는 건 이해하겠다만 윗사람이 이렇게 기다려야 되겠어 ? "
'Vincent', 남자의 실명은 '김세원'이었다.
물론 세원은 자신 때문에 형제들이 기다렸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제 눈앞에 있는 형제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기껏 들었던 미안한 마음이 화장실 변기물 내리듯 시원하게 내려가 버렸다. 가관, 가관 중 가관이었다.
일단 중소기업에서 사장 자리를 맡은 것에 모자라 이번에는 '대주주 자리'까지 탐내고 있는 첫째 김호석은 뒤늦게 도착한 세원을 팔짱을 낀 자세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어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빛은 늦게 온 세원이 아니꼬웠다라기보다는 '대주주 자리'의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었던 세원에 대한 경계심에 더 가까웠다.
다음으로는 짝다리를 짚으며 누군가와 바쁘게 문자를 주고받고 있는 현재 모 대표 브랜드 CEO인 둘째 김서영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그 옆에 있는 현재는 모 방송국의 국장인 셋째 김호원도 보였다. 그는 대화도 몇 번 나누어보지 않았던 형제들과 함께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불편하고 또한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다.
지금처럼 4남매가 모일 때마다, 화려한 직업을 가진 형제들 사이에서 평범한 대학생인 세원은 가시방석에 앉은 신세였다.
" 뭐, 어디 알바라도 갔다오는 거야 ? "
첫째 김호석이 다시금 세원을 비꼬았다. 아무튼 이 사람 옛날부터 사람 비꼬는 것은 정말로 좋아했다.
중소기업 회장의 자식들이었던 4남매, 그중 세원을 제외한 3남매는 여태껏, 그리고 지금까지도 ' 젊은이들의 아르바이트 '를 그저 감옥을 탈출하겠다며 녹이 슨 숟가락으로 평생 땅바닥이나 긁어대는 죄수들의 행위라고 치부했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가 싫다던 첫째 김호석부터, 아버지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던 셋째 김호원까지, 그들은 여태껏 그토록 김재호 회장의 흉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돈만을 목적으로 그렇게 싫어하는 김재호 회장의 도움을 받아 사장, 국장이라는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4남매 중에서도 늦둥이였던 막내 세원은 돈에 대한 사상 자체가 다른 형제들과는 달랐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형, 누나가 아무런 노력 없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봐지만 그런 형제들을 부러워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노력없이 결과만 얻으려는 형제들의 꼴이 보기가 싫었고, 무엇보다 자신도 그렇게 돈이 조종하는 꼭두각시가 될까 봐 진작에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세원은 오로지 '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자신의 부유한 환경 '만 자신의 유일한 이익으로 둔 채 어떠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공부해서 특례 없이 대학교를 가고, 대학교를 가서도 학비 역시 직접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벌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은 이러한 세원의 노력을 단지 세원이 김재호 회장의 눈에 띄기 위한 하나의 쇼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모두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새고 샜다. 형제들의 이런 경계심은 말이다.
" 죄송해요. 과제가 워낙 많아서... 형님도 대학시절에 과제 같은 거 많이 해보셔서 알 거 아니에요 ? "
첫째 김호석과 막내 김세원의 나이는 무려 18살 차이가 났다. 거기다 세원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늦둥이인지라 처음 말을 배웠을 때부터 현재까지 형제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 너 지금 나 비꼬는 거냐 ? "
" 제가요 ? 제가 형님한테 무슨... "
" 싸움은 나중에 따로 니들끼리 하시고. 지금 좀 바빠서 그런데 본론만 간단히 얘기할까 ? "
두 사람의 신경전에 끼어든 사람은 아까까지만 해도 계속 휴대폰만 만져대던 둘째 김서영이었다. 최근 둘째 김서영의 모 브랜드 회사는 현재 김재호 회장의 회사와 동등할 정도로 성과를 보이고 있는 기업이었다. 단지 그것. 그것이 다혈질인 첫째 김호석이 화를 억누른 이유였다. 첫째 김호석의 이유는 대부분 거의 '돈'과 얽혀있었다. 둘째 김서영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첫째 김호석을 바라보며 이따금 제 휴대폰을 자신의 정장 바지에 넣었다. 그러고는 이내 팔짱을 끼더니 짚고 있던 짝다리의 방향을 바꾸었다. 마지막으로 첫째 김호석을 비웃는 듯한 콧방귀까지. 첫째 김호석은 다시금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억지로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대신 홍당무처럼 벌겋게 된 그의 콧구멍이 심히 벌렁거렸다. 이윽고 간신히 화를 참아낸 첫째 김호석이 헛기침을 하며 입고 있던 정장을 추스르며 말했다.
"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따로 부른 이유는 너희들도 잘 알 거야. "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첫째 김호석은 사장이라는 높은 자리에 비해 언제나 예상대로 움직이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첫째 김호석의 말을 듣고 있던 세원은 벌써부터 첫째 김호석이 무엇을 말할지 뻔히 알겠다는 듯 지겨움에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입모양으로 소리 없이 입을 움직였다. 그의 입은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바로, ' 재산 상속 문제 '를.
" 재산 상속 문제. "
그러자 첫째 김호원이 세원의 지겨움이 한가득 묻어나있던 소리 없는 말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재산 상속 문제를 입 밖에꺼냈다. 세원과 같이 첫째 김호석의 말을 듣고 있던 둘째, 셋째 역시 그의 말이 지겨운 듯 제각기 머리를 긁적이거나 짝다리의 방향을 바꾸는 둥 지겨움을 온몸으로 표현해냈지만 첫째 김호석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 일단 아버지께서는 재산을 우리에게 골고루 배분해주실거야. 하지만 , 대주주 자리는 누구에게 넘겨줄 건가. 그게 관건이지. "
" 잠깐 그건 이미 형으로 결정된 사항 아니었어 ? "
" 물론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버지한테 뒤통수 제대로 맞았어. "
" 그럼 누가 되는 건데 ? "
" 그것까지는 몰라. 하지만... "
말을 흐리던 첫째 김호석의 시선이 이따금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세원에게로 멈춰 섰다. 그러자 둘째와 셋째가 놀란 얼굴을 하며 뒤따라 세원을 바라보았다.
" 형제 중 누군가에게 반드시 대주주 자리를 물려주겠지. "
" ... ... "
" 가장 성실하고, 또 돈 욕심이 전혀 없는 사람한테 말이야. "
누가 들어도 세원을 겨냥하는 말이었다. 세원이 미간을 찌푸린 채 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허나 반박은 할 수가 없었다.
세원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가장 유력한 대주주 자리의 후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며칠 전 김재호 회장이 다른 형제들은 제쳐두고 세원만 따로 자신의 병실로 불렀을 때부터였다.
05
며칠 전,
김재호 회장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지고 난 후로 다시 찾아뵌 김재호 회장의 몸은 몇 달 굶주린 사람처럼 뼈만 앙상이 남아있었다. 또한 양쪽 뺨이 안으로 쏙 들어간 그의 얼굴은 짙은 황달 색을 띠고 있었다. 여태껏 아버지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세원은 막상 죽어가는 아버지의 모습과 마주치자마자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과 함께 처음으로 심장의 철렁임을 느꼈다.
세원은 병실 문 앞에서 세걸음만 움직이고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김재호 회장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저의 최선이었다.
" 세원이구나... "
그러나 난생처음 들어보는 김재호 회장의 다정한 부름에, 감정을 앞서간 발걸음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느새 김재호 회장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 앞까지 향하고 있었다. 세원이 김재호 회장과의 거리를 좁힐수록 어째선지 심장은 긴박하게 뛰어왔고, 속은 뒤집힌 것처럼 울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세원은 느꼈다. 차 멀미, 뱃멀미, 비행기 멀미에 이어서 이제는 아버지 멀미까지 앓을 지경이라고.
마침내 무거운 발걸음이 김재호 회장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 앞에 멈춰 섰다. 정작 아버지에게 다가간 것은 자신이 건만 차마 김재호 회장과 눈을 똑바로 마주칠 수가 없었던 세원의 끝 시선은 김재호 회장의 수명처럼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투명 팩의 링거액이었다. 이윽고 나지막이 김재호 회장의 목소리가 잔잔히 투명 팩을 응시하던 세원의 귀에 들려왔다.
" 너는 가족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욕심이 없는 사람이지. 그건 누구보다 잘 안단다. "
" ... 단지 아버지가 내어준 자리를 뿌리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요 ? "
" 그게 가장 큰 이유기도 하지. 그 누구도 감히 그 자리를 쉽게 못 뿌리치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넌 네 엄마의 유일한 핏줄이기도 하잖니. "
" 집 나간 어머니 얘기를 왜 굳이 저한테 꺼내시는 거죠 ? "
"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단다. "
김재호 회장은 그 야윈 황달 빛의 손을 겨우 뻗어 세원의 손을 대뜸 붙잡았다. 항상 자신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아버지의 낯선 행동에 세원은 흠칫 놀라며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렸으나 정작 김재호 회장이 붙잡은 그 손은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 네가 내 아들이라 정말 다행이란다 세원아. 안심하고 그 전보다 더 큰 자리를 네게 맡길 수 있으니. "
오늘날로 세원은 김재호 회장이 언급한 '더 큰 자리'가 분명 '대주주 자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세원은 그 큰 자리에 감히 어찌할 수가 없어 대신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두 눈동자를 흔들었다.
06
옥스턴 마을이 하나의 관광지가 되고 난 이후로 가장 편리해진 사항은 아마 마을에 여관이 많이 생겼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마을 안에 많고 많은 여관 중 세원이 예약한 'Omelas 여관' 만 당최 보이지가 않았다. 분명 지도에 따르면 오멜라스 여관은 시계의 중심 역할을 하는 마을 광장을 중심으로 'Street of the Three o'clock', 즉 3시 방향에 있는 '3시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고 했는데 그러나 쨍쨍 찌는 여름의 햇빛 아래, 미국인 농부와 헤어지고 난 뒤 벌써 1 시간 째 세원은 자신의 휴대폰 화면에 떠있는 지도를 쳐다보며 아직까지도 오멜라스 여관을 찾아 그다지 넓지도 않은 3시의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세원은 오로지 휴대폰 화면에만 집중한 채 오멜라스 여관을 찾아 3시의 거리를 헤매다가 'Ovia'라는 이름의 허름한 정비소를 지나쳤다. 그가 지나쳐간 오비아 정비소 앞 원형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라디오에서는 일기예보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다음 주면 장마철에 들어선다는 켄터키의 이번주 여름은 작년보다 더 덥고 더욱 습하다는 소식이었다.
07
옥스턴 마을은 미국의 시골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건물은 하나같이 죄다 19세기 런던식 건물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더군다나 건물 색마저도 언뜻 보아서는 구별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갈색 계열의 색상인지라 이렇게 지도를 보면서도 건물의 간판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서는 금방 길을 헤매기 십상이었다. 엎친 대 덮친 격으로 형식적인 순서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는 옥스턴 마을은 마을 가장 정중앙에 있는 광장을 중심으로 길게 늘어진 논밭 사이마다 12시부터 9시의 거리까지 일정한 형식으로 주점, 주유소, 작은 식당, 정비소, 여관 등이 있었고 그것이 끝나면 또다시 논밭의 연속이었다.
지도를 유심히 보며 오멜라스 여관을 찾던 세원의 발걸음이 1시간의 헤맴 끝에 드디어 3시의 거리 끝자락에 세워져 있는 6층 높이의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세원은 고개를 들여 6층 정도 높이인 건물의 간판을 확인했다. 'Omelas'였다. 드디어 여관을 찾은 것이다. 세원이 제 고개와 동시에 휴대폰을 위로 올려 오멜라스 여관과 자신의 휴대폰 화면 속 건물을 번갈아 쳐다보며 비교하였다. 땀에 젖은 그의 눈동자가 좌우로 연신 반복하여 움직였다. 이윽고 휴대폰 화면 속 건물이 이곳 오멜라스 여관이라는 것을 확신한 세원이 만족스러운 듯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이내 여관 안으로 발을 들어섰다.
08
오멜라스 여관의 문을 열자 여관 문에 달려있는 방울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그 방울 소리와 동시에 오멜라스 여관에 곳곳에 퍼져있는 진한 커피향이 세원의 코를 찔렀다. 커피향의 원인은 오멜라스 여관 입구 앞 카운터에 떡하니 놓여있는 커피가루를 보관하는 박스였다. 그러나 정작 카운터에는 사람이 없었다. 세원은 발걸음을 옮겨 오멜라스 여관을 대충 둘러보았다.
단순한 구조로 되어있는 여관 건물은 건물 자체가 허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설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옥스턴 마을이 유명해지기 전부터 운영하던 여관으로 추정되었다. 페인트가 약간 벗겨져 있는 짙은 녹색의 벽 여기저기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그림 액자가 몇 장 걸려있었다. 액자를 둘러보다가 때 문득 바라본 천장 구석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었고 작은 크기의 유령집거미가 그 거미줄을 타고 오르내리고 있었다. 세원은 거미줄을 타고 내려가는 유령집거미를 따라 시선을 천천히 내려 바로 밑에 걸려있는 간판을 바라보았다. 간판에는 '식당'이라고 쓰여있었으나 아무래도 요즘 같은 비성수기에는 여관에 투숙하는 손님이 별로 없었던 모양인지 식당 안에서는 음식을 요리하는 어떠한 소리도, 냄새도 나지 않았다.
마침내 카운터 앞에 다가선 세원이 카운터 위에 놓여있는 차임벨을 울렸다. 그러자 쥐 죽은 듯 고요했던 여관이 시끄러운 차임벨 소리로 가득해졌다. 그러자 이윽고 식당 안에서 어느 중년 여성의 까칠한 목소리가 차임벨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 내 참!!! 차임벨 좀 바꾸자니까 !!! 시끄럽게... "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중년 여성이 이내 두꺼운 다리를 이끌며 식당에서 나와 제 모습을 보였다. 초고도비만의 오멜리아 여관 주인의 이름은 ' Elisha Young '. 하얀색 낡은 앞치마를 허리에 둘러매고 있는 엘리샤의 입에는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가 물려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시력이 안 좋은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인상이 험악한 건지는 몰라도 모처럼 손님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갑지 않다는 듯 한껏 일그러져있었다. 그 일그러진 얼굴은 마침내 그녀가 카운터에 도착할 때까지 도저히 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엘리샤는 연신 세원을 계속해서 노려보더니 이윽고 카운터 위로 살이 출렁이는 팔뚝을 얹으며 따지는 듯한 어투로 세원에게 물었다.
" 무슨 용건이오 ? "
" 아 , 그게 며칠 전에 전화로 예약했는데요. 'Korea'라는 이름으로... "
" 'Korea ?', 당신 이름인가 ? "
" 아뇨, 제가 살고 있는 나라입니다. "
" 사서 고생하는 타입인가 보군. 그냥 이름으로 하면 될 것을 뭐 하러 귀찮구로... "
엘리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카운터에 올려놓았던 팔을 다시금 아래로 내려 예약자 명단이 적혀있는 공책을 집어 들었다. 그다음 손톱에 때가 잔뜩 껴있는 검은 손가락으로 'Korea'라는 이름의 예약자를 찾기 시작했다.
" Korea... Korea... 아, 여기있구만. "
마침내 공책 어느 한곳에 멈춰선 손가락이 이따금 카운터에 놓여있던 볼펜 한 자루를 집어들었다. 엘리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세원에게 물었다.
" 며칠 동안 묵을 건지 안 적혀있는데, 며칠 묵을 생각이오 ? "
" 아직 정해진 날짜가 없어요. "
" 오래 있을 생각이신가 ? "
" 아마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을 겁니다. "
" 음... 그럼 일주일로 합시다. 비성수기니까 값싸게 쳐줄 테니. "
" 그러죠 그럼. 어느 방에서 지내면 되죠 ? "
" 아무 방에서나 지내시오. 원하는 방 있는지 한번 둘러보고. "
엘리샤는 귀찮다는 듯 손에 들려있는 볼펜으로 식당 옆에 있는 계단을 가리켰다. 동시에 세원의 고개도 엘리샤가 볼펜으로 가리키고 있는 계단으로 향하자, 방을 정하면 그때 다시 부르시오. 청소를 해둘 테니라며 엘리샤는 마치 남 일인 마냥 뒤뚱뒤뚱 다시금 식당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의 모습이 세원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세원은 그제야 식당 옆 계단으로 향할 수가 있었다.
09
오멜라스 여관 6층, 목재로 된 커다란 여닫이 창문이 활짝 열리자 이따금 창문을 열고 있는 세원의 모습이 바깥으로 보였다. 결국 세원이 고른 방은 오멜라스 여관 맨 꼭대기 층인 6층 가장 구석에 위치해있는 602호실이었다.
세원은 창문을 통해 제 눈앞에 펼쳐진 옥스턴 마을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제일 먼저 세원의 눈에 띈 것은 옥스턴 마을 정중앙에 있는 광장이었다. 마을 광장에는 옥스턴 마을의 주민과 상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리고 메인 광장을 중심으로 각 시간들의 거리 사이에는 논밭이 펼쳐져 있고, 각 시간들의 거리에는 건물들이 일정한 간격에 맞춰 세워져 있었다. 때 마침 12시의 거리에는 낡은 자전거를 타고 신문 배달을 하고 있는 베레모의 10대 소년이 집집마다 신문배달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을 입구에서는 여관부터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옥스턴 마을을 유심히 둘러보지 못했었지만 막상 이렇게 옥스턴 마을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세원은 옥스턴 마을의 전체 분위기는 여러 영화에서 흔히 나오던 미국의 시골보다 평소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19세기 런던의 거리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세원은 갑작스레 한쪽 눈을 질끈 감더니 이윽고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직각으로 세워 옥스턴 마을 광장에 자신의 상상 속 대형 시계탑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세원의 상상은 여관 맞은편 건물 옥상에서 들리는 요란한 문소리로 인해 끝이 나고 말았다. 세원은 감고 있던 한쪽 눈을 뜨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상상을 방해한 원흉인 지금 제 눈앞에서 빨래 바구니를 든 채 빨래를 널고 있는 한 젊은 여성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데 옥스턴 마을 대부분의 건물은 지붕형으로 되어 있어서 옥상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저 건물만은 달랐다는 것이었다. 저 건물은 언뜻 한국의 옥탑방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짜증도 잠시, 세원은 창문 틀에 턱을 괸 채 한참 동안이나 빨래를 널고 있는 젊은 여성을 응시했다. 물론 젊은 여성의 행동에 집중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자신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젊은 여성에게 향해있었을 뿐이었다. 허나, 그걸 알리가 없었던 젊은 여성은 맞은편 여관에서 불현듯 발견한 낯선 남자, 세원의 시선을 느끼고는 하고 있던 빨래를 멈추더니 경계의 눈초리로 맞은편 건물의 창문으로 보이는 세원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 이봐요 ! "
옥상에 있던 젊은 여성이 큰 목소리로 세원을 불렀다. 하지만 한번 다른 생각에 잠기면 좀처럼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던 세원의 귀에는 지금 아무것도 들리는 게 없었다. 그러자 젊은 여성은 들고 있던 빨래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자신의 양팔을 위로 휘저으며 다시금 세원을 불러보았으나 이번에도 결과는 똑같았다.
그런 세원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세원의 주머니 속 휴대폰에서 이따금 벨소리가 603호실에 가득 울렸을 때였다. 세원은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다음 발신자를 확인했다. 휴대폰 화면 속에 비친 [아버지]라는 이름 석자에 세원은 통화 버튼을 눌러 이내 휴대폰을 귀에 갖다대었고, 김재호 회장의 전화를 받으면서 반대 손으로는 열어놓았던 여닫이 창문을 닫았다.
" 네, 아버지... "
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젊은 여성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10
여관의 여닫이 창문을 닫자 환했던 503호실의 안이 다시금 밤처럼 어두워졌다. 세원은 통화를 하는내내 몸을 여기저기 움직였다. 어쩔 때는 603호실의 실내등을 켰다가 끄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그것은 전부 무의식 속에 하는 행동들이었다.
- 그래, 지로는 찾았니 ?
" 저 이제 막 마을에 도착했어요. "
- 자꾸 이렇게 재촉해서 미안하다만
" 알아요. 시간이 얼마 안 남으셨다는 거. "
- ... 최대한 서둘러줬으면 좋겠구나.
김재호 회장은 세원의 상태는 둘째치고 오직 세원이 해낸 성과만 물어본 뒤 제멋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딱히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던 세원은 입을 비죽이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통화 내내 세원이 무의식적으로 반복하여 눌러대던 실내등은 마침 밝게 켜져 있었다. 세원은 밝게 켜진 실내등 바로 아래에 있는 싱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한참을 천장만 바라보다가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원이 다시 여닫이 창문을 열었을 때는 옥상에서 빨래를 널던 젊은 여성은 빨래를 다 널었는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세원은 마을 광장을 쳐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12시의 거리에서 신문배달을 하던 베레모의 신문 배달부가 이번에는 마침 세원의 목적지이기도한 6시의 거리에서 신문을 배달하고 있었다. 세원은 베레모의 신문 배달부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베레모의 신문 배달부는 집 곳곳마다 신문을 배달하다가 마을 주민을 마주치면 친절하게 인사를 했다. 이번에도 역시 마을 주민에게 인사를 하는데 때 마침 타고 있던 자전거의 페달이 엉켰는지 베레모의 신문 배달부는 그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땅에 넘어져 버렸고 신문배달부의 가방에 들어있는 신문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11
신문을 바닥에 떨어뜨렸다는 것은 베레모의 신문배달부, ' Tom Burton '이 신문사에서 옥스턴 마을의 주간신문을 발간하는 아버지에게 혼나기 딱 좋은 최악의 실수였다. 톰은 무릎에 난 상처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재빨리 바닥에 널브러진 신문들을 신문 가방에 주워 담았다. 그때 마을 광장에서 장거리를 사 왔는지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3시의 거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40대 여성 ' Cindy Connelly '이 톰이 떨어뜨린 나머지 신문을 들고 오며 톰에게 물었다.
" 톰, 괜찮니 ? 심하게 넘어진 거 같던데. "
" 아니에요. 괜찮아요. "
" 자, 신문 여기 있단다. "
" 감사합니다. 신디 아줌마. "
톰은 신디가 건넨 신문을 건네받았다. 신디는 톰에게 건넨 신문 중 제일 심하게 찢어진 신문 하나를 다시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 여기 돌고 3시의 거리에 갈 예정이지 ? 우리건 내가 챙겨가마. "
" 그치만 많이 찢어졌는데... "
" 괜찮아. 그이는 원래 앞면은 잘 안 읽으니까. 난 이만 가마. 배달 열심히 하렴. "
" 안녕히 가세요. 신디 아줌마. "
톰이 신디에게 인사를 하자 신디는 찢어진 신문을 들고 있는 손을 흔들며 가던 길을 갔다. 톰은 삐뚤어진 베레모를 다시 고쳐 쓴 뒤 바닥에 쓰러진 낡은 자전거를 일으켜 세워 자전거에 올라탔다. 딸랑 - , 이윽고 자전거 벨 상태까지 확인한 톰은 다시금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12
6시의 거리 제일 끝에는 ' 예술가의 산책로 (Walking path of Artist)' 라고 불리는 샤봇 엠마누엘이 옥스턴 마을에 이사 왔을 때 설치한 작은 산책로가 있다. 그리고 이 산책로를 따라 쭉 가면 그곳에 'Emmanuel 저택'이 있다. 톰이 가야 할 6시의 거리 마지막 배달 장소가 바로 그곳, 예술가의 산책로의 끝에 있는 엠마누엘 저택이었다.
예술가의 산책로는 말만 산책로지, 마치 하나의 숲 속이었다. 나무가 우거지로 자라나있는 그 중앙에 산책로는 딱 하나만 있다. 톰의 자전거는 마침 그 산책로 위를 바퀴로 굴리고 있었다. 그런 톰의 얼굴은 어째선지 설렘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엠마누엘 저택에 가까워질 수록 올라간 톰의 입꼬리는 당최 내겨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18세 순수한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엠마누엘 저택의 철창으로 된 대문 앞에 다가선 톰이 제 자전거를 대문 옆에 세워둔 뒤 엠마누엘 저택의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엠마누엘 저택의 집사 ' Chris Hudson '이 백발 이 된 머리를 흩날리며 이상할 정도로 헐레벌떡 저택 대문으로 달려왔다. 이윽고 대문 앞에 도착한 크리스는 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톰은 익숙하다는 듯 철창 사이로 신문을 건네주었다.
" 오늘도 열심히구나. 톰. "
" 방학 동안 돈 많이 벌어두려고요. 할아버지는 잘 지내셨어요 ? "
" 나야 늘 상 똑같지 뭐. 언제 한번 우리 집에 오려무나. 그땐 차 한잔 대접할 테니. "
" 할아버지가 시간 되면요. "
톰은 크리스와 대화하는 동안 힐끔힐끔 엠마누엘 저택의 대문 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톰은 자신이 찾는 사람이 엠마누엘 저택 정원에 없는 모양인지 다시금 베레모를 눌러쓰며 크리스에게 인사했다.
" 이만 가볼게요. 할아버지. "
" 그래, 다음에 보자꾸나. "
톰과 크리스는 철창 사이로 손을 뻗어 악수를 하였다. 이윽고 크리스가 다시금 백발을 휘날리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톰은 크리스의 모습이 완전히 저택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마침내 도둑놈처럼 주위를 살피며 몰래 엠마누엘 저택의 뒤편으로 향하였다.
엠마누엘 저택의 벽돌로 된 담은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175센티미터의 톰과 머리 하나 차이였다. 그러나 톰은 담을 넘지 않았다. 대신 까치발을 들어 담 너머에 있는 엠마누엘 저택의 굳게 닫혀 있는 2층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땅에서 작은 돌멩이를 하나 주워 창문에 던지려는데 마침 하얗고 가녀린 손가락 하나가 톰의 뺨을 찔렀다. 톰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바닥에 떨어뜨려버렸다. 그런 톰의 눈앞에는 톰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갈색 머리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동양인 소녀가 서있었다. 동양인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톰에게 물었다.
" 토미,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 "
톰을 토미라고 부르는 이 동양인 소녀의 이름은 'Wendy Emmanuel '. 그녀는 엠마누엘 부부의 양딸이었다.
13
싱글침대에 누운 채 한참을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세원이 잠시 후 주머니 안에서 한 10대 소녀가 찍혀있는 사진 한 장을 꺼내 그것을 천장 위로 뻗었다. 사진 속에 찍힌 10대 소녀는 엠마누엘 부부의 양딸이었다.
이 소녀가 세원이 옥스턴 마을에 온 이유였다. 소녀의 이름은 '김지로', 김재호 회장이 그토록 찾고 있는 아이이며, 세원도 몰랐던 세원의 친동생이었다.
14
경기도, 호스피스 병동 VIP 병실.
" 너라면 안심하고 이 부탁을 할 수가 있겠지. "
김재호 회장은 이 말을 끝으로 잡고 있던 세원의 손을 놓더니 자신이 베고 있던 베개 밑으로 손을 넣었다. 이따금 김재호 회장은 베게 밑에 있는 사진 한 장을 꺼내 그것을 다짜고짜 세원에게 건네었다. 세원은 얼떨결에 사진을 건네받았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사진 속 10대 소녀는 세원은 난생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사진의 의미를 당최 모르겠던 세원이 나지막이 김재호 회장에게 물었다.
" 누구죠 ? "
" 김지로. 올해로 18살이고 지금은 미국 옥스턴 마을에 살고 있다. "
" 전 지금 왜 이걸 저한테 보여주는지 묻는 겁니다. "
" ... 저 아이는 네 여동생이란다. "
여동생 ?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여동생의 존재에 세원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세원은 김재호 회장이 세원의 친여동생이라고 밝힌 사진 속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미세하게 떨려오는 세원의 손. 그 앞으로 김재호 회장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 모를 만도 하겠지. 다른 남자랑 바람을 피웠던 네 엄마가 내 눈을 피해 몰래 낳은 아이였으니까. "
" 지금 그걸 저더러 믿으라는 겁니까 ? "
" 하지만 책임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이 여자가 내게 아이를 들키자 그대로 아이를 입양시켜버렸지. 미국에 사는 어느 한 예술가 부부에게 입양이 되었다더구나. "
첫댓글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