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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묵상 스크랩 [시끄러운 광장같은 내 자아에 복음의 소리를] (행17:24~34)
a pencil 추천 0 조회 28 18.07.19 12: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기도

아버지, 그리스도를 붙잡게 해 주세요. 내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전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붙잡게 해 주세요. 제 영혼의 양식이자 제 삶의 존재법인 당신의 말씀을 들음.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으로 아버지를 향한 저의 사랑, 갈망, 경배를 표현합니다. 아버지.. 불쌍히 여기셔서 말씀해 주세요.

 

* 본문묵상(17:24~34)

 

오늘 본문은 철학의 도시 아테네, 그곳 광장에서 사도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의 기록이다. 많은 신과 사상으로 넘실대는 철학의 성 한 복판에서 바울은 그것들이 참 신이 아니며 참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몰라서 못 믿었던 과거는 하나님이 묵과하셨으나 이제는 들었으니 지금까지의 삶을 버리고, 아들 예수를 통해 대신 심판을 받게 하시고 부활을 증표삼아 인류를 구원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류에게 이미 예정되어 있던 하나님의 심판을 고스란히 받아야 할 것이라고도 말한다.

 

가끔 우리 집을 찾아오는 기독교 이단종교의 전도자 분들이 건네주는 팜플렛을 읽고 있으면 혹은 그들과 대화를 할라치면,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쩜 성경을 몰라도 저렇게 모를까?’ ‘내가 알고 있는 걸 확 다 얘기해 줘?’ ‘아 피곤하다. 빨리 보내자. 어차피 안 들을거야 이 사람들..’ 등등.

 

아마 오늘 바울의 설교를 듣는 아테네 사람들의 심정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자기들이 더 많이 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철학의 도시에서 나고 자라 밥을 먹고 잔뼈가 굵어진 사람들인데. 근거도 빈약해 보이는 이깟 사설 하나 쯤 얼마나 금새 사이즈가 나왔을지.

 

바울이 제시한 새로운 신앙이 참되다는 결정적 증거(근거)예수의 부활이다(17:31). 과학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참 믿을만하지 못한 이야기다. 인간의 부활이란 것을 자기 눈으로 봤어도 믿기 힘들 판에, 직접 확인하지도 못한 걸 사실이라고 믿어야 한다니 얼마나 황당무계한 발언이었을까.

 

게다가 그 불확실한 사건에 기대어 예수라는 이가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어야하며, 나아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며 유일하신 하나님인 것 까지 받아들이라니... 정신이 돌아도 한참 돈 사람들로 보이는 게 너무너무 당연하다. 심지어 기분 나쁘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멸망을 당해야 마땅한 정도의 죄인들이라 전제를 떡하니 깔아놓고 시작하니.

 

2018년 지금. 2천년 전 헬라문화의 한복판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논리와 철학의 시대에. 정보의 바다를 누구나 마음껏 헤엄칠 수 있는 시대에. 2천년 전에도 먹히기 힘들었던 예수의 부활 소식은 오늘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쉽게 복음으로 다가올 수 없으리라. 그들이 바라보는 종교인이란 사리분별이 힘들 정도로 정신이 미욱하거나 뭐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나 넘어가는 종자들에 불과하지 않은가. 와서 북치고 장구치고 쓸데없는 데모하는 등의 패악질이나 안하면 다행이다 싶어 한다.

 

그러니 삶으로 전도한다는 것이 과연 실효성이 있는 일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착하게 살면, 과연 사람들이 그걸 보고 예수를 믿을까? 우리가 주변에 온정을 나누고 베풀면, 과연 사람들이 감복하여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일까? 우리가 그들의 사정을 알아주고, 참아주고, 인내하면, 그들이 결국 예수를 믿게 될까? 그런데 왜 신약성경에는 그런 사건들이 한 건도 안 나오지?? 좀 이상한데.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기는 하다.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잘 읽어보면, 이는 신자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신 맥락이지 전도의 수단으로서의 생활 모습을 말하신 것은 아닌 듯 하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을 보고 감화가 되어 예수를 믿기로 마음이 열린 사람들도 실제로 많다. 나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성경적 가치관)과 자신들의 필요(자기들의 가치관)가 상충하는 순간이 오면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급하고 싸늘하게 식어버리는지. “그딴 식으로 예수 믿지 말라는 말이 어김없이 튀어나온다.

 

제사를 지내지 않겠노라고 했을 때 그런 말을 들었다. 예수 믿는 것들은 효()도 모르냐? 제사라는 게 부모님 공경하는 수단인건데, 네가 믿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디? 하지만 내가 볼 때 한국의 제사는 명백한 초혼의식인데... 향과 초를 피워 을 부르고, 그 대상이 앞에 좌정했다고 전제하고 젓가락 숟가락을 뚝뚝 두드려 드시게하고, 상 앞에서 부모님을 향하여공손히 절까지 하지 않나.

 

부모공경의 수단인 것도 맞는데 귀신 부르는 초혼의식인 것도 맞으니 나는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아니 예수 믿고 돌아가신 멀쩡한 우리 아버지를 왜 귀신을 만들어. 우리 아버지가 그런 자리에 오실 리도 없는데.

 

하나 더. 예수님 시대 이후, 아직 유대나라가 명목상으로 존재하던 시기. 유대인들이 국가존폐의 위기상황에서 결사의 최후 항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주장한 사람이 나타났다. 시내산 언약을 믿는 유대교인들에게 있어 절체절명의 극적인 그 순간에 메시야의 등장이란 얼마나 사기진작의 요인이 되었을까.

 

그런데 모두가 이 인물의 등장에 환호하며 결의를 다질 때, 이른바 같은 조국, 같은 민족의 애국애족심 아래서 함께 싸워왔던 유대 기독교인들이 그렇지 않다며 창을 내려놨다는 역사기록이 있다. 아무리 국가적 위기상황이라도 가짜 메시야를 대장으로 모시고 성전(聖戰)을 수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다시피 이스라엘은 패망했다.

 

그렇게 하는 것보다, 같이 힘을 합해 싸우고 난 뒤 슬그머니 전도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질 때 지더라도, 도망갈 때 가더라도, 함께 고락을 겪은 뒤 그 끈끈함 아래서 전도하는 게 더 아름답고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승패와 관계없이 욕 정도가 아니라 저주의 말, 원망의 말을 자기 민족으로부터 두고두고 들어야 했다.

 

전도는 진리의 말씀으로 하는 것이고, 사랑으로 사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존재양식일 뿐이다. 믿음은 말씀을 들은 사람들 마음 속에서 깨닫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주권적 은혜가 이루어내는 사건이지 선행으로 감화 받은 사람들이 믿어주게되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깨달아서 믿어지게 되는그런 참 믿음이 아니라, 사람들을 보고 감동해서 나도 그 클럽에 속하기로 마음먹은 것일 뿐이다. 이들은 이 클럽이 난장판이 되거나 작은 비리라도 발견되면, 혹은 자기가 보기에 참을 수 없는 부분이 발견되면 언제든지 매몰차게 공격하거나 뛰쳐나올 준비가 되어있다. 클럽회원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우리가 가진 신앙이란 애초에 믿어지지 않는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의 몸으로 왔다는 것도 전혀 그럴 듯 하지 않은데, 그 인간이 모든 사람의 죄 값을 대신 지고 죽었다니. 게다가 죽은 지 사흘 후에 부활한 게 그 증거라니. 이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근거인데 이게 어디 믿을만한 사건인가. 성령의 개입 없이는 신화적 사건에 불과하고, 사람이 사랑의 손길로 개입해 봤자 어느 정도 믿어주는 척만 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좀 착하게 살아보려고, 마음 좀 다스려 보려고 종교에 의지할 생각을 갖는다. 그래서 착한 사람 많은 동네를 찾는다. 혹은 착한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종교에 기웃기웃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구원이 아니다. 애초에 그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그곳이 착한 곳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면 지체없이 나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생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겪는 슬픔이다.

 

나는 더 이상 삶으로 전도하려 하지 않는다. 삶은 주님 뜻대로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지 전도의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부가적인 축복으로 여기면 될 뿐. 내게 전도란 바울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나가서 전하는 것이다. 어디로 갈지는 성령께서 정하실 일이다. 얼마나 거둘지도 성령께서 하실 일이다. 언제 거둘지도 성령께서 하실 일이다.

 

우리는 결과를 예측하고 움직이도록 부름 받지 않았고 자기 기질에 따라 움직이도록 부름 받지도 않았다. 광야 40년을 거치며 자신 없고 소극적으로 변한 모세는 나이 80에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만 했고 유목부족의 귀염 받는 막내아들이었던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눈을 감아야만 했다. 베드로는 그가 원치 않던 곳으로 돌아다니며 생각지 못하던 곳에서 죽어야 할 것임을 예수님께 직접 들었다. 성경에는 자기 기질과 성품, 원하는 것에 따라 일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면 나는 오늘 왜 말씀을 편 것일까. 나의 생각과 주장과 의지가 가득한 광장. 내 마음 안에도 그런 광장이 있다. 아니, 내 마음이 곧 아고라 광장이다. 그런 광장에 실낱같은 빛을 비추기 위해 말씀을 편 것이다. 그런 광장에 그리스도의 구원을 다시금 선포하고 알리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다른 이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늘 아니었다. 하루도 한 시간도. 이러한 시간이라도 갖지 않으면 결코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살아낼 수 없는 광장 속 내 자아를 내가 알기 때문이다. 내가 지은 죄들과 허물이 그것을 여실히 증명하지 않은가.

 

아테네인들에게는 실낱같이 하찮고 근거없어 허망해 보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게는 유일한 소망이다. 나의 지은 죄, 나의 죄성, 나의 어리석고 연약함, 광장같은 내 자아... 나에게 유일한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합하여 함께 처리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함께 연합하여 함께 살리심을 입는 것 뿐이다. 지금 말씀묵상의 시간을 통해, 그 바램이 오늘도 사실로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많은 광장의 인파 중에서 단 몇 사람이 눈을 뜨고 바울을 따라 예수를 믿었듯, 내 영혼도 오늘 하루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의 이 작은 시간만이라도 아버지의 품 안에 노니는 시간이 되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 기도

아버지.. 마음에 품은 것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묵은 먼지가 털리듯, 동굴에 빛이 비추듯 나의 본래모습을 어제보다 좀 더 목격하게 됩니다. 아버지.. 저를 아버지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깨끗하게 씻어주십시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 된 우리를 위해 구하신 기도 아닙니까. 그 간구가 오늘 저에게도 적용되기를 원합니다. 제 영혼을 씻어 깨끗하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말씀으로. 말씀 안에 거하는 이 시간을 사용하셔서. 광장에서 영혼에 눈 뜬 자들처럼, 다시 아버지의 뒤를 좇아 살게 해 주세요. IpiJn.amen.

 

2018.7.19. Timothy Ch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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