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실수하지 마."
"안 해요."
차갑고 낮게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픽 웃은 여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대답했다.
익숙하게 팔짱을 낀 그들은 더 이상의 대화 없이 파티회장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문 밖에서 관심 없다는 듯이 툭툭 말을 내뱉던 그들은 사라지고 신혼부부처럼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는 그들이 있었다.
사람들 눈에는 그저 사랑 넘치는 부부로만 보였다. 사실은 그런게 전혀 아님에도 말이다.
"잠깐 여기 있어."
"다녀와요."
머리까지 쓰다듬으며 가는 남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걱정말라는 어투로 답을 하는 여자. 누가봐도 이들은 사랑하는 연인사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저 모습들은 전부 그들이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 척. 좋은 배우자인 척.
남자가 높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러 발을 떼자마자 여자는 예의상의 미소만 걸친채 한숨을 쉬었다.
늘 그렇듯, 파티 회장은 불편했고 답답했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이곳에서 오래 머물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누리야!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던 하랑과 다율이었다.
친한 사람 없는 이곳에 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누리를 안심시켰다.
"어쩐 일이야? 이런 데 싫어하면서."
"네가 온다길래 심심할까봐 아빠한테 졸라서 왔지."
하랑이 자랑스럽게 웃으며 손으로 V자를 해보였다. 그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해 보여 누리는 잘했다며 웃음으로 답했다.
평소에도 치렁치렁한 복장을 좋아하지 않는 그들이었기에 늘 파티라면 질색을 하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소꿉친구인 누리조차도 파티에서 그들의 얼굴을 보는건 힘들었으니까. 물론 그녀 역시 파티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잘 참석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결혼 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런 자리에 나오면 몇 시간 내내 미소를 짓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입가가 저려왔다.
무엇보다 웃으면서도 뒤에서는 범죄행위도 서스럼없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기에 이 자리에 오는게 늘 거북했다.
가식적인 사람들. 하지만… 자신도 사이좋은 부부 행세를 하며 남들의 눈을 속이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뭐라할 입장이 될까?
"어때? 응? 지혁씨랑은 좀 어때?"
"뭐야. 왜 이래?"
팔꿈치로 팔을 치며 속삭이듯 물어보는 하랑을 피한 누리는 슬금슬금 다율의 뒤로 가 숨었다.
다율보다 키가 작았던 누리는 그녀의 뒤에 딱 알맞게 숨겨졌다. 하랑은 누리를 졸졸 쫓아다니며 끊임없이 물었지만 누리는 그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피해다니기 바빴다.
결국 승자는 누리였다. 대답 듣기를 포기한 하랑은 다율의 곁으로 와서 툴툴 거렸고 다율은 맏언니 마냥 하랑을 쓰다듬었다.
익숙한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 누리는 천천히 걸음을 그들에게로 옮겼다.
툭-. 누군가가 누리와 부딪히며 지나갔고 사과하려던 누리는 다리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느낌에 비명을 지르려던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실수하지 마.'
이곳은 유명 인사들이 많이 온 파티였다. 이곳에서 소리를 질러 이목을 끌어봐야 좋은 이미지는 주지 못할 게 분명했다.
거기다 이런 꼴이라면 더더욱.
이빨에 뭉개진 입술에서는 조금씩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뜨거움은 곧 말할 수 없는 따끔함으로 번졌다.
그러나 그 역시 참아야 했기에 누리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어머, 괜찮으세요? 그러게 왜 앞을 안 보고 다니세요."
"… …."
말문이 턱 막혔다. 옆에서 갑자기 부딪혀 온 걸 피할정도로 그녀는 민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성질대로 삐딱하게 굴 수 없었던 누리는 그저 웃으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누가봐도 그 여인은 누리에게 일부로 접근한 게 보였고, 표정 역시 비웃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멀리서 지켜보다 놀란 다율과 하랑이 급하게 누리에게 다가왔고 그녀의 앞에 서있던 여인은 누리를 지나치며 회장 한 가운데로 향했다.
"그러게 왜 넘봐선 안 될 사람을 넘 봐."
"… …."
시기였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걸 다른 여자가 가졌으니. 그것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이었다.
간혹 파티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었기에 누리에게는 그 어떤 말이 날아와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만, 오늘처럼 뜨거운 물을 가져와 부을 정도로 선을 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누리는 다리에서 느껴지는 따끔함을 참지 못하고 빠르게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를 따라가려던 다율은 하랑을 데리고 자리에서 멈춰섰고 잠시 회장안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 듯 하더니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가? 누리는?"
"일단 따라와."
무작정 다율에게 끌려가는 하랑의 얼굴에는 물음표만 가득 떠올랐다.
그녀의 팔을 잡고 걷던 다율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누리의 남편인 지혁의 앞이었다.
*
"젠장."
화장실 칸 안에서 급하게 다리에 엉겨붙은 드레스를 걷어올렸다.
힘겹게 물에 젖은 드레스를 끌어올리니 허벅지부터 무릎까지 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물집이 잡히려는 듯이 노란색의 무언가가 여기저기 부풀어 오른게 보였다.
망할, 머리 끄댕이라도 잡아서 물에 쳐박았어야 했는데.
혀를 찬 누리는 이런 다리 상태로는 다시 회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손대기만 해도 따가움에 눈물이 핑 도는데 다시 이 드레스를 입고 돌아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을 하고 나올 걸 그랬나.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때문에 생각할 틈도 없었지만.
"아, 전화."
그러나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클러치백은 어디론가로 가버린지 오래였다.
결국 누군가를 불러낼 수도, 다시 돌아갈수도 없게 된 누리는 치밀어오르는 짜증에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이래서 오기 싫었던 것이다. 이런 곳에 참석하면 꼭 참기 힘든 말 몇 마디는 듣고 돌아가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모두 같았다. 단지 반지혁과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억울했지만 억울하다고 말 못하는 게 그와 누리의 관계였다. 아마 지혁은 누리가 이렇게 당하고 다닌다는 것도 모를게 분명했다.
머리카락을 고정시킨 핀을 빼 드레스를 찢어버린 누리는 허벅지 아래에서 나풀거리는 치마를 무시한 채 화장실을 나왔다.
일단 어떻게든 집에 가면 해결책은 있겠지.
다리가 욱신거렸다. 이런 꼴을 당하고도 한 마디도 되받아칠 수 없는게 화가 났다.
하지만 그 화를 풀어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걸 알기에 누리는 묵묵히 호텔을 빠져나왔다.
"… …."
"타."
호텔입구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있었다.
반갑지만 반갑지 않은 사람.
자신의 남편이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명작을 발견해서 보게되네요, ㅠㅠ
이제서야 읽게됨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