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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달칵-. 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풍겨오는 고소한 냄새와 함께 달그락 거리는 소리들.
부엌에서 누리가 뭘하고 있는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갈 수록 군침을 돌게 하는 음식의 향이 지혁이 후각을 자극했다.
"어라? 일찍 왔네요?"
"어어."
지혁은 말 없이 분주히 움직이는 누리를 쳐다보았다. 다리를 치료받고 붕대를 감고오긴 했다만 저렇게 움직여도 되는 건가 싶었다.
"응? 얼른 옷 갈아입고 와요. 거의 다 됐어요."
"어."
그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누리는 벌렁 거리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자신에게 무슨 용기가 나서 갑자기 저녁을 만들고 있는 걸까? 늘 회사에서 모든 끼니를 다 떼우고 오는 사람이었다.
이 집에서 밥을 만드는게 가끔은 너무도 비참한 것처럼 느껴져서 늘 인스턴트로 떼울때가 많았다.
넓은 집에서 남편 없이 혼자서 밥을 먹는건 몇 번을 겪어도 외롭고 씁쓸했으니까.
하지만 어제 이후로 어쩐지 그가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지금까지 무심했던 만큼 더 많이 더 빠르게.
그래서일까, 이렇게 저녁을 준비하게 된 일이.
사실 그가 집에 일찍 들어올지도 복불복이었다. 회사에 다시 갔으면 새벽에 퇴근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다.
결국 이렇게 저녁을 만들어도 혼자 먹게 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손은 분주히 요리를 하고 있었다.
같이 먹지는 못해도, 이 사람에게 직접 요리를 해주고 싶었다.
그러고보니 회사에서는 어떻게 밥을 챙기는지도 모르네…. 다음에 한 번 물어봐야겠다.
"얼른 앉아요. 아, 찝찝해요? 샤워하고 먹을래요? 아니면 그냥 지금 차려줄게요."
"… …."
누가봐도 당황한 티가 드러났다. 마주치지 못하는 눈은 허공을 방황하고 있었고, 맞잡은 손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무엇보다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입 밖으로 내뱉어지고 있었으니까. 그 모습이 생소한 지혁은 샤워를 하고 밥을 먹을까 했지만 묵묵히 식탁 앞에 앉았다.
여기서 샤워를 하고 먹는다고 하면 무안해할 누리가 훤히 보였다. 그런 표정은, 왠지 짓게 하고 싶지 않았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은 되는대로 만들어 본다는게 식탁이 풍성해졌다. 된장찌개, 계란말이, 콩나물무침, 시금치 무침, 고등어찜.
다리상이 부러질 듯한 상차림에 놀란 건 지혁이었다. 대체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것들을 만들어낸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 나물이랑 무침은 어머님께서 보내주셨던 것들이에요."
"…그렇군."
지혁은 자신의 어머니가 이런 반찬을 집으로 보내오는지도 몰랐다. 집 냉장고를 열어볼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누리가 말해오는 일도 없었으니까.
심하긴 했다는 생각에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혹시, 다 안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아, 그런거 아니야."
"다행이다."
"당신은?"
"네?"
앞치마를 두른채 식탁을 꽉 채우도록 요리를 했지만 정작 밥공기는 지혁의 것 딱 하나였다.
"안 먹나?"
"아, 저는… 입맛이 별로 없어서."
"… …."
그가 금세 표저을 찌푸렸다. 저녁약을 먹으려면 밥을 먹어야 하는데 입맛이 없다고 안 먹는다니. 그렇구나 하고 넘길 그가 아니었다.
결국 직접 일어나 그릇에 밥을 퍼담은 그는 식탁 의자 위에 누리를 조심스럽게 앉혔다.
"지혁 씨?"
"먹어. 약 먹어야 되잖아."
"… …."
그걸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게 또 새삼스럽게 감동이었다. 이런 사소한게 감동일 정도로 우린 정말 서로에게 무관심했구나 싶었다.
지난 일들을 떠올려봐도 그 어디에 그와 함께하는 모습은 추억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1년이나 같이 지냈는데….
"먹지."
"응."
그 이후로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말 없이 밥을 먹는게 체할법하기도 한데 어쩐지 누리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 떠올라 있었다.
예상치도 못하게 그와 시간을 보내게 돼서겠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들이 갑자기 현실로 일어나니 꿈처럼 느껴졌다.
"당분간은 일찍 퇴근할거야."
"네? 왜요?"
"내가 집에 일찍 오면 안 되는 건가?"
지혁이 밥을 먹다 말고 누리를 쳐다봤다. 동그래진 눈으로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그녀를 보자니 누리의 진심이 이곳까지 전해져왔다.
"그럼 앞으로 매일 저녁 준비 해야겠다."
"무리하지 마. 당신 무리시키기 싫어서 일찍 퇴근하는 거니까."
누리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일찍 퇴근하는 이유가 그거 때문이었어?
그저 쉬고 싶어서도, 집밥이 먹고 싶어서도 아닌 집에서 혼자 무리하고 있을 까봐 걱정해서였던 거야?
지혁은 무심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말이 누리의 가뭄진 마음에 내리는 단비었다. 정말 현실감 없다.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좋은일만 일어나도 되는 걸까? 어쩐지 정말 꿈일 것만 같기도 했다.
밥을 같이 먹었을 뿐인데 집 안에는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이후로는 별반 다를게 없었지만.
지혁은 그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고 다래는 약을 먹고 나서 소파에서 티비시청을 했다.
그러다 힐끔힐끔 그의 방문을 쳐다보곤 했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지혁은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리는 이미 그와 함께 밥을 먹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실실 웃다가 약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누리에게는 더 이상 이곳이 소파이든 침대이든 상관 없었다. 오늘 있었던 일중에 제일 중요한 일은 그와 함께 밥먹은 일이었기에 머리속에는 온통 그 일만이 둥둥 떠다녔다.
몇 십분이 지나고, 지혁은 뒷목을 잡고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거실로 나왔다.
작게 들려오는 티비소리에 걸음을 멈췄지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방문은 소파를 등지고 있었고, 티비는 정면으로 보이고 있었기에 소파에 누워잠든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지혁은 의외로 누리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많았다. 꼼꼼하다든가, 낭비를 하지 않는다든가, 특히 이렇게 티비를 틀어놓고 방 안으로 들어갈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잊어먹을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다는 건….
지혁의 걸음이 소파로 다가왔고 곧 역시나, 하는 말과 함께 한숨을 쉬었다.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새하얀 종아리. 몸집이 작은 누리는 소파에서 웅크리고 자도 편하게 잘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모습이 또 자신과는 달라 신기해 한참을 바라보던 지혁은 곧 추운지 부르르 떠는 누리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혹시나 그녀의 상처를 건들까 신경쓰면서 누리의 방 안 침대위에 눕혀주었다.
이불까지 꼼꼼히 잘 덮어준 그는 그제서야 그녀의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처음보는 방. 단 한번도 문을 열어보지 않았던 방이었다. 그게 처음 결혼할 때 서로의 약속이었으니까.
사생활 존중. 서로에게 폐가 되는 일들은 하지 않을 것.
고작 그 두 조항에 찬성했기에 그들은 결혼했던 것이다. 물론 결국 결혼의 이유는 기울어져 가는 누리의 집안때문이었지만.
에메랄드 빛의 색깔이 방 안을 감돌고 있었고, 천장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나무로 놓인 가구들 사이에 간간히 보이는 기계들.
이 사람이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나?
문 옆에 있는 큰 나무책상 위에는 미싱을 할 수 있는 재봉틀이 보였다. 설마 이런 취미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정말 예상외의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는군.
누리에 대해 사소한 것 하나라도 더 알아낼 수 있었던 방에서 빠져나온 지혁은 부엌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그러고보니 언제부터인가 집에서 커피냄새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늘 퇴근하고 나서도 서류에 파묻혀 사는 자신의 옆에는 커피가 동반자인 것 마냥 따라왔었는데.
그 덕에 집에서도 커피향이 가득 베어나왔다. 가끔 옷에서도 커피향이 난다며 강산이 그만 좀 마시라는 잔소리를 한 적도 있었지.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향이 나지 않게 된 건.
꽤 오래전부터 집에서는 커피향이 아닌 다른 향긋한 냄새로 가득찼다. 섬유유연제? 아니면 화분이라도 키우는 걸까?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전보다 훨씬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 향 덕분인지, 자신의 기분이 좋기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지혁은 지금 기분이 무척 좋았다.
무방비한 상태로 웃음을 흘리는 그의 모습을 누리가 봤어야 하는데.
*
*
"사모님."
"아, 강산 씨."
누리는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작은 체구에 작게 손을 흔드는게 꽤나 귀엽게 보여 지나가던 남자들의 시선이 여럿 사로잡혔다.
그걸 본 강산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반지혁 짜식, 긴장 좀 해야겠는데?
"어쩐일이세요? 지혁이라면 이 위에…."
"아뇨아뇨! 지혁 씨 보러 온 게 아니고, 강산 씨께 물어볼 게 좀 있어서요."
"제게요?"
"네."
몇 번 만난 적 없는 상대가 자신에게 뭘 물어보러 온걸까? 지혁에게 내연녀라도 있는지 물어보러 온건가?
"요즘 지혁 씨가 일찍 퇴근하는데…."
"아아, 네. 그거 누리 씨가 다리에 화상 입어서라는데. 다리는 좀 괜찮아요?"
"네. 병원에 잘 가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누리는 웃음으로 답했지만 어쩐지 대화가 끊긴 느낌에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다시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눈을 굴리는 그녀를 본 강산은 풋, 하고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이거군. 여기에 내 친구 반지혁이 무너졌어.
확실히 누리는 하나하나 세심히 보면 지혁의 이상형과 거의 비슷했다.
아담한 키며, 어느정도 보기 좋은 체형, 숨기려고 한 것 같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볼륨감.
그런 여자가 저렇게 알게 모르게 귀여움까지 갖추면 자신의 친구가 끔뻑 죽을만도 했다.
아, 아직 그정도까진 아니지.
"그래서 제게 물어볼 건 뭐예요?"
"그게요, 요즘 지혁 씨 저녁밥을 만들어 주고 있는데…."
"사모님이요? 이야, 부럽네요. 전 언제쯤 여친이 만들어주는 밥을 먹어볼 수 있는건지."
"아, 강산 씨도 곧 좋은 사람 생길 거예요. 걱정 말아요."
"고마워요."
그리고 또 다시 침묵.
대화가 이어지질 않자 누리는 한껏 풀이죽은 모습으로 또 다시 어쩔 줄 몰라했다.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하지? 그냥 지금 돌아갈까? 아니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질문도 안 하고 돌아가는 건 싫었다.
"아, 참. 물어볼 거. 그래서 그게 뭐예요?"
결국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 강산의 말에 활짝 웃은 누리.
"지혁 씨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지금까지는 그냥 이것저것 만들었는데 이제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만들어주고 싶어서요."
"뭘 좋아하는 지 물으러 온 거군요?"
"네."
"좋아하는 거라…."
그 자식이 뭘 좋아하더라….
"아. 안 어울리게 단걸 좋아하긴 해요."
"단 거요?"
"초콜릿이나 케이크 사탕 뭐 이런 거요."
"그렇구나."
주머니에서 펜과 메모를 꺼내 받아적는 누리의 모습은 흡사 모범생인 것 같았다.
직업체험을 와서 질문을 하고 답을 받아적는 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 뭘 좋아하더라."
"아무거나 다 상관없어요."
곰곰히 고민을 하던 강산은 하나, 둘 씩 생각이 나기 시작하는지 천천히 그녀에게 말을 해주기 시작했고 누리의 손은 바쁘게 써내려가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더 이상 기억이 안 난다는 강산의 말에 누리는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감사합니다."
"어우, 이러지 마세요. 제가 그렇게 큰 도움을 드린 것도 아닌데요 뭐."
"그래도요!"
베시시 웃는 누리의 웃음 속에서는 퓨어한 천사의 미소가 느껴졌다.
이상하게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에 강산 역시 웃어주었고, 둘은 한참이나 그렇게 웃은 채 서로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 때, 그 사이로 불쑥 나타난 큰 키의 정장을 입은 남자.
"뭐야? 왜 둘이 시시덕 거려?"
첫댓글 잘 보고 가요
네네!감사합니다~
다래가 누리인가요?
아뇨아뇨, 다래는 누리 친구예요~ 혹시 어디 오타가 있나요ㅠㅠ?
@몽글랑 지혁이 밥 먹고 방에 들어가고 다래는 약먹은 뒤에 소파에서 티비 시청 했다고 하는 부분이 이해가 안 됐었어요! 다래가 누리인가 싶어서용~
@지니4U 앗 그렇네요 지적해주셔서 감사해요ㅠㅠㅠ다래가 아니고 누리입니당 고쳐야겠어요..!
@몽글랑 도움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당~
질투인가요~ㅎㅎ
이 구역의 질투왕 등장'
크으~ 누리도 마음이 예쁘고, 지혁이도 질투하는 모습이 귀엽고 ㅋㅋㅋㅋㅋㅋ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