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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이사 48,17-19
복 음 : 마태 11,16-19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온전한 구원의 삶
-개방, 경청, 공감, 수용, 지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화두처럼 생각납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잘 듣는 경청은 우리 일상의 삶은 물론 영성생활에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분도 규칙도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됩니다.
참으로 제자들의 자세로 우선적인 것이 잘 듣는 것입니다.
잘 듣기 위한 침묵이요 잘 들을 때 온전한 소통의 대화요 기도입니다.
경청이 생활화되어 있는 삶은 그대로 깨어 있는 삶의 실현입니다.
순종과 겸손 역시 잘 경청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덕입니다.
참으로 얼마나 잘 귀 기울여 듣는지요?
귀가 있다고 온전히 듣는 것이 아닙니다.
왜곡되지 않는 편견과 선입견이 없는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의 귀로 들을 때
온전히 듣는 것이고 경청하는 마음은 그대로 순수한 마음의 반영입니다.
경청을 한자로 하면 그 뜻이 분명해집니다.
경청傾聽, 온전히 집중하여 귀기울여 듣는 마음을 뜻합니다.
경청敬聽,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건히 집중하여 듣는 것을 뜻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몸에 밴 겸손한 자세입니다.
아주 예전 수도형제의 방을 방문했을 때,
좌우명처럼 액자에 들어있던 한자 敬聽(경청)에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생생합니다.
참으로 이런 경청의 자세보다 진지하고 겸손한, 아름다운 모습도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 연중 피정, 영어 OLYMPICS(올림픽스)의 한자 풀이 피정 강의 중
맨 먼저 나온 O는 Open(개방)으로 활짝 열린 마음을 뜻하며,
이어지는 L은 Listen(경청)으로, 개방과 경청이 영성생활에 얼마나 본질적인지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이 맨 마지막 말씀 역시 화두처럼 들립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완고하게 굴어도 지혜로운 인격인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옳다는 것은
그분의 일들로 분명히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바로 경청과 지혜가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경청과 지혜의 사람이 될 것이며
이보다 더 좋은 무지에 대한 처방도 없을 것입니다.
얼마전 마음의 병에 대한 동방 영성에 대한 소개가 생각납니다.
중요한 내용이라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싶습니다.
첫째가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요,
둘째는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망각’이요,
셋째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의 ‘완고함’이요,
넷째는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멈’이요,
다섯째는 ‘오염’된 불순한 마음이요,
여섯째는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무분별’입니다.
이런 마음의 병은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와 망각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바로 이런 무지에 대한 근본 대책이 우선 주님의 말씀에 대한 경청이요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분명해 집니다.
이사야서의 경청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거룩하신 구원자 주님의 탄식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경각심을 줍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대로 오늘날 우리에 대한 예언처럼 생각되어 섬뜻한 느낌도 듭니다.
바로 개방의 경청이 지혜의 샘임은 물론 평화와 의로움, 축복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돌아와 회개와 개방, 경청의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음이 모든 불행의 근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떠날 때 우리는 얼마나 편견과 선입견으로
왜곡되고 변질될 수 있는지 오늘 복음은 잘 보여줍니다.
경청할 때 공감과 배려요 존중인데 그렇지 못한 세대에 대한 오늘 복음의 주님의 탄식은
그대로 우리에 대한 탄식처럼 들립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이와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는다.”
경청의 상실과 편견으로 완고해진 공감과 수용능력을 상실한 비인간화된 세대를 상징합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불행한 인간 현실입니다.
하여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왜곡 굴절된 시각을 보여줍니다.
하여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낙인찍어 버립니다.
겉으로 드러난 일부를 전체인 것처럼 왜곡하니
그대로 온전한 영적 시야를 상실한 병든 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입니다.
참으로 개방과 경청, 공감과 수용의 온전하고 지혜로운 삶을 사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우리 무지의 마음병에 대한 근원적 처방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에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개방과 경청, 공감과 수용의
온전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도 일맥상통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시편1,1-3참조).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애초에 완전한 동그라미는 없으며, 있다고 한다면 이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라캉’의 말입니다.
많은 이가 자신의 삶이 완전한 동그라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판타지, 즉 실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을 완전한 동그라미처럼 만들겠다고 불철주야 일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60대에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이제 그의 가정은 완전한 동그라미가 되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일하느라 가족과 함께 한 시간이 없어서 은퇴 후 함께 하는 것을 서로 너무나 힘들어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 종합검진을 통해 커다란 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 가족과 더 함께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이 형제님처럼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려나가서 완성하는 것이 인생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완전한 동그라미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완전하지 않은 동그라미라도 서로 인정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약간 찌그러진 동그라미도, 때로는 동그라미가 아니라 각진 네모 같아도
이 역시 그 사람의 고유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야말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 당시의 사람들을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무조건 부정하고 본 것이 아니었을까요?
조금이라도 자기 생각에서 벗어난다면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즉, 완벽하지 않은 동그라미라면서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와서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살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라고 말했고,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하면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말하면서 거부했습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동그라미만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동그라미도 틀렸습니다.
그래서 완벽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기준에서 벗어난다면서 부정한다면, 그만큼 자기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완전한 동그라미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모습을 인정하는 가운데, 완전한 주님과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완전한 주님만이 완전한 동그라미를 만드십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혹 우리도 뉘우침의 눈물도, 복음의 기쁨도 없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무지를 넘어,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지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고함’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아픔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시는데,
우리도 하느님이 피리를 부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하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자신을 ‘깨뜨려’ 찢고 나누어 건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먹고
자신도 ‘부서져’ 쪼개고 나누어져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리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는’ 일이요, 진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가 ‘부서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리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하여,
변화와 성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을 내 마음에 들게 맞추기보다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태 11,17)
주님!
제 마음이 무디어 져 있습니다.
아니, 빛보다 어둠에 치우쳐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을 헐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모범생’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말을 잘 듣고, 집에서는 부모님의 말을 잘 듣는 학생입니다.
회사와 집밖에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약간은 답답해 보이지만 세상은 그런 분들이 있기에 질서와 조화를 이루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칸트를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일주일에 7일을 일하셨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하루에 12시간 일하는 것이 기본이었다고 합니다.
60이 훌쩍 넘은 지금도 일주일에 6일을 일하신다고 합니다.
말과 행동에 성실이 묻어나는 분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공은 아니지만 작은 집을 마련하였고, 가족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분입니다.
결코 허황된 꿈을 꾸지 않는 분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면서 언제나 감사하면서 사는 분입니다.
성서를 보면 길이 아닌 곳으로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법을 어기면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이웃에서도 늘 말썽을 부리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계나 로봇으로 만드시지 않고,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인간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이 문제였습니다.
카인은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동생만 없으면 된다는 ‘시기’가 문제였습니다.
아합은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문제였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죽게 하고 바세바를 취하였습니다.
꺼지지 않는 ‘욕정’이 문제였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릇된 ‘신념’이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 같은 삶에 대한 ‘갈망’과 ‘두려움’이 문제였습니다.
성서를 보면 언제나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법을 따르면서 사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이웃에서도 모범이 되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고,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욥은 시련과 고난이 찾아왔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혼인 전에 임신한 것이 드러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성령으로 인한 잉태라는 천사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요셉의 거친 손이 아기 예수님을 받아 주었습니다.
밤을 새운 가난한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는 인간을 추하게도, 악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의지’는 시간과 공간에 신화와 역사를 만들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라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지난날의 허물을 묻지도 않으시고,
따지지도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마태 11,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
따뜻한 온기가 그리운 때이다.
공감(共感)과 공생(共生)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는 대림이다.
공감해야 할 것을
공감하지 않는
비정한 우리들 이 세대이다.
사람을 춤추게 하고
아픈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우리의 공감이다.
서로를 살리는 공감은
서로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여는
경청에서 시작한다.
말씀을
경청하지 않기에
공감도 교감도
소통도 없는 것이다.
경청이 없기에
알맹이가 없는
빈껍데기들만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공감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핵심이다.
공감이 사라진 공동체는
이미 죽은 거나 같은
아프고 절망스러운 공동체이다.
삶의 현장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우리는 들어야한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함께 살아가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공감으로 보여주셨다.
공감이 빠져버린
진리는 허무하다.
공감의 예수님
소통의 예수님이셨다.
이렇듯
모든 영성과 모든 신심은
삶의 현장을 대변한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
세상은
변화되고 따듯하여 진다.
대림시기는
공감을 되찾는 시기이다.
우리의 공감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것이다.
누가 사기꾼인지 알아내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도 믿지 않고
당신도 믿지 않는 이 세대를 이렇게 비유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분명 요한이나 예수님은 이 세대에 도움을 주러 오신 분들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분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러면 이래서 싫다고 하고 저러면 저래서 싫다고 합니다.
그들이 요한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그분들 때문에 자신들이 변화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누군가가 피리를 불 때 춤을 추게 되고 곡을 할 때 가슴을 쳐야 합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하고 받아들이면 그 누군가 때문에 변화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그분을 닮을까 봐 두려워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단순하게 나누자면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사람들은 남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남들에게 이익을 주려는 사람이고,
나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비유적으로 남에게 이익을 주려는 사람을 예수님이라 표현하고
남을 이용하는 이들을 모기라 표현합니다. 피를 내어주고, 피를 빨아먹는 차이입니다.
‘애덤 그랜트’의 『기브앤테이크』란 책에 보면 한 회사에 모기는 90%,
예수님과 같은 사람들은 10%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현재 90% 정도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이 또 나타나시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서 그분들을 배척하고 박해할 것입니다.
남을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믿음을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리는 ‘사랑’만이 행복임을 믿습니다.
그러면 모기와 같은 90% 사람을 좋아하기보다는 10%의 선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눈이 가려져서 누가 좋은 사람인지, 누가 나쁜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케네스 레이’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열심히 노력한 끝에 자수성가한 대단한 사람입니다.
엔론이란 회사의 CEO가 되었을 때는 자선재단을 설립해 250개가 넘는 단체에
2,500만 달러 이상을 지원하고 연간 순이익의 1%도 사회에 기부하였습니다.
90%의 미국인들은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레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기꾼이었습니다.
레이가 운영하던 회사인 엔론은 그동안 매출 기록을 조작해 투자자를 속이는 한편,
10억 달러 이상의 부채를 숨겨왔습니다.
외국 정부에 뇌물을 주고 부당하게 국제거래를 해왔고
캘리포니아와 텍사스의 에너지 시장을 조작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렸습니다.
회사가 부도 당해 망할 때도 일자리를 잃는 수만 명의 직원은 무시한 채
자신만 몰래 미리 돈을 빼내서 엄청난 이익을 챙겼습니다.
결국, 케네스 레이는 6건의 사기 혐의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레이를 좋은 사람으로 여겼지만 사실 그는 정체를 숨긴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애덤 그랜트’의 『기브앤테이크』에서는 같은 시기 같은 가난한 집 출신으로
같은 닉슨 정부에서 일했고 자신의 회사를 설립해 CEO가 되어
많은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한 또 다른 사람, ‘존 헌츠먼 시니어’도 소개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진을 올려놓고 표정과 옷 입은 모습으로 누가 누구인지 맞혀보라고 합니다.
아무리 봐도 외향으로는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사진은 연례보고서에 나온 사진이었는데, 그 연례보고서를 보니 명확해졌습니다.
헌츠먼은 연례보고서에 자신의 사진을 한 페이지의 10% 정도 크기로 넣었고
레이는 100% 꽉 차게 자신만 보이게 넣었습니다.
헌츠먼은 자신을 작게 하여 직원들의 노고가 더 큼을 드러내었고,
레이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자신을 알아 달라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전문가들은 레이가 분명 사고를 터뜨릴 것을 예상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을 너무 과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모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윗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자신이 아랫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거의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윗사람들보다는 아랫사람들에게 신임을 얻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아랫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또 그 사람이 하는 말에서 ‘우리는’ ‘우리를’ ‘우리의’ ‘우리의 것’ 등의 복수형 대명사 보다,
‘나는’ ‘나를’ ‘나의’ ‘내 것’ ‘나 스스로’ 등
단수형 대명사 표현을 즐겨 사용하면 나쁜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세례자 요한이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일을 하시며 사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며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했고,
예수님은 아버지만이 선하시고 아버지가 당신보다 크신 분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아버지께 들은 대로만 이야기하고
아버지께서 하라는 대로만 하는 로봇과 같은 역할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도 그분이 좋은 분인지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모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모기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축구경기를 보면 골을 넣은 선수들이 먼저 자신에게 어시스트해준 동료를 가리키며
영광을 돌리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리고 그런 선수는 오래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지만
혼자 잘나서 넣었다고 좋아하는 선수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를 자주 봅니다.
대부분 경기력이 좋은 선수들은 자신의 골을 동료들에게 돌립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면 나쁜 사람이고 사기꾼일 가능성이 크고,
다른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이들은 좋은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누구를 받아들이고 누구와 사귀어야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사귀는 사람들이 결국 나를 그렇게 변화시킵니다.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에게 피를 내어주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좋은 분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