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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위분명(涇渭分明)
경수와 위수가 뚜렷이 구별된다는 뜻으로,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이 분명하게 구별됨을 의미하는 말이다.
涇 : 통할 경(氵/7)
渭 : 물 이름 위(氵/9)
分 : 나눌 분(刀/2)
明 : 밝을 명(日/4)
(유의어)
명명백백(明明白白)
흑백논리(黑白論理)
출전 : 문선(文選) 등 고전 문헌
경수와 위수가 분명하게 나뉜다는 뜻으로, 이 표현은 중국의 실존하는 두 강에서 유래했다. 맑은 물의 경수(涇水)와 흐린 물의 위수(渭水)는 두 강이 만나는 지점에서도 물빛이 쉽게 섞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후에 옳고 그름이 분명하게 구별됨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출처로는 문선(文選) 등의 고전 문헌에서 등장하며, 주로 정치적 또는 도덕적 판단에서 사용되었다. 즉, 명확한 판단과 기준이 필요한 상황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 옳고 그름이 뚜렷이 구별됨, 선과 악이 명확히 나뉨, 명확한 기준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경위분명(涇渭分明)의 활용 예문으로는 '그는 원칙을 중요하게 여겨 모든 일에서 경위분명하게 판단한다', '이번 사건은 경위분명하여 논란의 여지가 없다', '지도자는 경위분명한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등에 쓰이고, 비슷한 성어로는 명명백백(明明白白: 매우 명확하고 분명함), 흑백논리(黑白論理: 옳고 그름을 확실히 구별하는 논리), 대명천지(大明天地: 매우 밝고 분명한 세상) 등이 있다.
경위분명(涇渭分明)
중국의 경수(涇水)는 항상 흐리고, 위수(渭水)는 항상 맑아 구별이 분명한 데서 사리의 옳고 그름과 시비의 분간을 이르는 말이다. 이 표현은 중국의 경수(涇水)와 위수(渭水)라는 두 강에서 유래했다. 경수는 맑고, 위수는 흐린데, 두 강이 합쳐져도 물빛이 쉽게 섞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명확한 구분이 가능할 때 쓰는 말이 되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경위가 분명하다' 라는 말은 사리의 옳고 그름과 시비의 분간을 뜻하는 어원에서 유래 되었다. 맑은 경수(涇水)와 탁한 위수(渭水)가 만나는 곳에서 보면 양쪽의 맑고 탁한 강물이 뚜렷이 구별되기 때문에 여기서 '경위분명(涇渭分明)'이라는 말이 나왔다.
말의 어원을 알면 흥미롭고 보다 더 정확히 사용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경위가 분명하다'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필자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으나 중국 시안(西安)에서 근무하면서 사리의 옳고 그름과 시비의 분간을 뜻하는 '경위분명(涇渭分明)'의 어원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관중평원의 중심에 있는 시안은 주위에 여덟 개의 강이 흐르며, 가장 큰 강은 위수(渭水)로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 중의 하나가 경수(涇水)다. 위수는 경수와 만나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황하에 합쳐지는데, 맑은 경수(涇水)와 탁한 위수(渭水)가 만나는 곳에서 보면 양쪽의 맑고 탁한 강물이 뚜렷이 구별되기 때문에 여기서 경위분명(涇渭分明)이라는 말이 나왔다.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나라, 당(唐)니라 등 고대 중국을 수놓은 왕조들이 도읍지를 정한 곳으로 당나라 때 장안(長安)으로 불리었던 시안은 실크로드가 시작되고 끝나는 기점으로서 동서양 문명이 만나 융합, 창조되고 확산되는 원천이었다.
국제적인 대도시였던 장안은 문화적 영향력이 대단하였으며, 일상생활에서 쓰였던 많은 말들도 다른 나라로 퍼졌다. 경위분명(涇渭分明)이라는 말은 의상 대사, 최치원 선생, 김가기 선인 등 우리의 선각자들이 장안에 와서 활동함으로써 한중간 인적, 문물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통일 신라 시기에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옛날에는 위수(渭水)도 수량이 풍부하여 큰 배가 다녔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 진(晉)의 왕자인 중이(重耳)가 19년 동안 각국을 떠도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60세가 넘어 조국으로 진격할 때 진(秦) 목공은 위수를 통해 군사와 물자를 실어 날라 이제 막 자신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된 중이(重耳)를 지원하였다. 중이는 결국 왕위에 올라 진(晉) 문공(文公)이 되며, 춘추 5패의 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세월이 흘러 위수 강물의 수량이 줄어들어 배가 다니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구가 급속히 늘어(현재 시안 인구 약 1000만)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되었지만 대안으로 진령(秦嶺)산맥에 거대한 흑하(黑河)라는 저수지를 만들어 공업용수와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공장입지를 정할 때 흑하(黑河) 저수지를 보고나서 시안에는 물 문제가 절대 없겠다고 안심하면서 공장 건설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풍부하고 깨끗한 물은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경위가 바라야 한다
발표한 글이 법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제재를 받는 일이 필화(筆禍)다. 사전에서나 보던 일이 내게 터졌다. 어둑한 골목길을 걸어 집 앞에 이르자 나를 본 낯선 두 남자가 다가섰다. 내 이름을 불러 본인임을 확인한 그들이 커피 한잔하자고 했다. 다방으로 갈 때 한 사람은 내 뒤를 바짝 쫓았다.
먼저 자리에 앉은 이가 태릉경찰서 보안과장이라고 자기 신원을 밝히며 내 신원을 다시 확인했다. 내 옆자리 앉은 이가 내가 내민 주민등록증을 꼼꼼하게 뒷면까지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마시라며 담배를 피워문 과장이 한 말은 간단했다. 성북서에서 이첩받은 건이다.
학내 소요가 큰 모양이다. 학생이 쓴 성명서로 소요 사태가 커졌다고 한다. 학교를 개혁하자는 학생의 생각에는 일견 동의한다. 그러나 4학년이다. 이제 곧 졸업이다. 더 나은 다른 방법을 찾을 기회다. 공부에 전념해라. "소요가 진정될 때까지 당분간 학교에 나가지 마라. 학교에서 알아서 다해줄 거다."
그는 자신도 그런 때가 있었지만, "그때 어른 말씀 듣고 공부했다. 경찰에 들어와 애 둘 낳고 산다. 현실을 직시해라. 인생 별거 아니다"라면서 내가 반박할 틈을 주지 않았다. 말을 마칠 동안 내 옆에 앉은 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며칠 지나 아버지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손으로 내 머리를 쳤다. 그렇게 아프게 맞아본 일은 오랜만이었다. 노여움은 컸다. 경찰에 있는 지인이 줬다면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내가 쓴 글이었다.
며칠 전 경찰이 찾아와 알려준 학내 소요 사태를 일으킨 그 성명서였다. '대학을 혁신해야 한다'로 시작되는 글은 '우리의 요구' 부분 맨 끝에 '재단 회장 부친 파묘 이전'이 들어 있었다. 내가 쓴 게 아니라 덧붙인 거였다.
아버지는 앞에 쓴 글은 잘 지적했다면서 유독 그 부분을 문제 삼으며 무슨 생각으로 쓴 거냐고 따져 물었다.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쓴 글이 아니라고 강변하기도 두려웠다. 고인과 교분이 있어 사정을 잘 아는 아버지는 "대학을 인수해 육영의 뜻을 펼친 학교 주인의 묘가 그 대학에 있는 게 뭐가 잘못인 거냐?"고 물었다.
대답을 바라지도 않은 아버지는 오히려 그게 "죽어서도 육영의 뜻을 가지런히 하려는 고매한 뜻이 있지 않느냐. 그 때문에 그룹에서도 대학에 더 신경 쓸 일이 아니냐. 그게 학생이 할 요구냐"라고 소리쳤다. 이어 "글은 말을 옮긴 거다. 사실 파악을 먼저 했어야 한다. 그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걸 생략한 채 넘겨짚지 마라"라고 했다.
한참 만에야 진정된 아버지는 "학교 다니지 말라"고 엄명했다. 끝나며 아버지는 "사람은 경위가 바라야 한다"면서 든 고사성어가 '경위분명(涇渭分明)'이다. 아버지는 먼저 "직물의 씨실(가로실)과 날실(세로실)을 아울러 이르는 말인 ‘경위(經緯)’는 사건이 진행되어 온 과정을 의미하는 말로 쓴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위(涇渭)가 바르다'가 맞고, '경우(境遇)가 바르다'는 잘 못 쓴 말이다"라고 했다. "흔히 사리에 옳고 그름과 시비의 분간이 뚜렷한 사람을 경우가 바른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경위가 바른 사람을 잘못 쓴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우(境遇)는 "어떤 조건이 있는 특별한 형편이나 사정이라는 뜻이고, 경위는 사리의 옳고 그름과 시비의 분간이라는 뜻이라"고 구분 지어 두 번 강조했다.
경위(涇渭)는 중국 황하의 지류인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두 물줄기는 서안 부근에서 만나 합쳐진다. 경수는 항상 흐리고, 위수는 항상 맑아 두 물이 섞여 흐르는 동안에도 구별이 분명하다고 해서 그런 뜻이 되었다. 천자문(千字文)에 나온다. '(낙양은) 망산을 뒤에 두고 낙수를 옆에 두었으며, (장안은) 위수에 띄고 경수를 의지하고 있다(背邙面洛 浮渭據涇).'
더는 대학에 다니지 못해 잡지사에서 편집 일을 거들었다. 아버지는 가끔 전화해 근무하는 걸 확인했다. 훗날 아버지는 "경위는 분별력(分別力)에서 나온다. 분별력은 서로 다른 일이나 사물을 구별하여 가르는 능력을 말한다. 나아가 세상 물정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걸 배우지 못할 대학은 다닐 필요가 없다"라고 몇 번 더 말씀했다. 필화는 오래 갔다. 리포트를 내 대학 졸업장은 받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공부에 졸업은 없다"며 졸업식마저 가지 못하게 했다.
사리분별(事理分別)은 인간이 성장하면서 논리와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후천적 능력이다. 사회 규범 준수, 상황 판단 능력, 융통성 등이 사리분별의 일종이다. 분별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한다. 그런 분별력은 머리가 굵어지기 전부터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손주들에게도 물려주어야 할 어느 것보다 시급한 성품이다. 그때 배운 분별력으로 평생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黃河는 그래도 굽이굽이 동쪽으로 흘러가야 한다
황하는 굽이굽이 곡절 많은 중국 역사의 상징
황하는 5,464㎞이지만 발원지인 황하원두(黃河源頭:河源)에서 바다까지의 직선거리는 2,160㎞이니 그 물길에 곡절이 얼마나 많은지 쉽게 짐작이 간다. '동서로 구주를 관통하고 남북으로 백천을 꿴다(東西貫九州 南北串百川)'고 하듯 청해· 사천· 감숙· 영하· 내몽고· 섬서· 산서· 하남· 산동 등 9개성을 통과하면서 집수(集水)하는 면적만 75만㎢의 대하다. 하원과 하류의 낙차는 자그마치 4,831m이다.
중국의 각종 '지리서'에서는 통상 '하(河)'라 지칭되지만, 이 강은 약 200만년동안 퇴적을 거듭해 이제는 두께 10∼200m나 되는 황토층을 가지게 된 황토고원(黃土高原: 해발 800∼2,000m) 지대를 지나면서 황색으로 변하므로 '황하'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세계의 용마루(屋脊)라는 청장고원(靑藏高原)의 동북부에 있는 바얀카르(巴顔喀拉) 산맥 북쪽 기슭, 별이 잠드는 바다(星宿海)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하원에서 흘러나온 황하는 동쪽으로 바다를 향해 굽이굽이 흘러간다.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찾아간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전설에는 우(禹)임금이 치수사업을 통해 황하의 물길을 인도하였다(導河)고 한다. 우임금이 없었다면 황하는 지금도 저 넓은 중국 대륙을 헤매고 있을지 모르지만, '구곡황하(九曲黃河)'라는 말이 있듯 사실 황하의 하도를 살펴보면 정말 굽이굽이 곡절도 많다. 중국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황하가 동류(東流)한다고 보면, 이 말과 가장 맞지 않는 부분이 중류지역이다. 하원에서부터 '지(之)'자 걸음을 하던 황하는 감숙성 수도 난주(蘭州)를 통과하면서 북쪽으로 방향을 튼다. 고도가 높은 북방 몽고고원을 향하다 보니 힘이 부쳤던지 이제껏 안고 왔던 황토를 유역에 내려놓고 흘러간다.
그래서 영하회족자치주(寧夏回族自治州) 수도 은천(銀川) 근방에 '새상(塞上)의 강남'이라는 광활한 평야가 생겼다. 그리고는 내몽고자치주 임하(臨河)에서 90도로 꺾어 동으로 흐른다. 이렇게 하도가 90도로 꺾이는 것을 '절(折)'이라 하는데 황하에는 삼절(三折: 臨河折· 托克托折· 潼關折)이 있다.
동류하던 황하는 산서성의 운중산(雲中山)과 여량산맥(呂梁山脈)에 막혀 그 물길을 다시 남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내몽고 수도 호화호특(呼和浩特) 부근 지역(前套)에 비옥한 토지와 적당한 관개를 제공하니 예부터 '황하는 100곳에 해를 주었지만 오직 일투에 부유함을 가져다 주었다(黃河百海 惟富一套)'는 말이 생긴 것이다.
섬서성과 산서성을 가르는 진섬(晉陝)계곡에 들어서면서 황하의 물은 갑자기 숨결이 가빠진다. 이 700여㎞의 남향길에서 중국 제2대 폭포인 절경 호구폭포(壺口瀑布)를 만난다. 그리고는 다시 우임금의 치수사업장의 하나였던 용문(龍門)의 우문구(혐)까지 종종걸음을 쳐야 한다.
우문구를 지나면 일단 가쁜 숨을 고르고, 은천을 지나면서부터 사막과 황토고원에서 다시 모아 품고 온 진흙과 모래(泥沙) 일부를 풀어놓는다. 사마천(司馬遷)의 고향 한성(韓城)의 풍요한 평야는 황하가 준 또 하나의 선물이다.
우문구를 나서면 수세가 평류하여 인자한 어머니가 아이를 무육(撫育)하는 것 같다. 유역이 넓으니 황하의 유동은 산만해진다. 그래서 그 물길이 '삼십년은 하동(산서)에, 삼십년은 하서(섬서)에 있다(三十年河東 三十年河西)'는 말이 생긴 것이다.
다시 남향하던 황하의 물길은 중국 문명의 요람 관중평원을 달려온 황하의 최대 지류로 '팔백리진천(八百里秦川)'이라 불리는 위수(渭水)를 품에 넣고 흐른다. 당대 왕지환(王之渙)의 천고의 명구 '천리를 한눈에 다 넣기 위해 누각을 다시 한층 오른다(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登觀雀樓)'는 데서 보듯 이곳에서는 황하와 서쪽 관중평원의 광활한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남행 길을 막고 선 진령산맥(秦嶺山脈) 때문에 황하는 다시 물길을 90도 바꿈으로써 비로소 동쪽으로의 흐름을 찾게 된다. 그 지점이 그 옛날 중국을 동서로 나누던 전략적 요충이었던 함곡관(函谷關)이 위치하기도 했고 '삼성의 닭소리가 들린다(鷄鳴聞三省: 陝晉豫: 陝西· 山西· 河南)'는 교계(交界) 동관(潼關)이다.
동관에서의 급커브 때문인지 황하는 역시 숨이 가쁘다. 황하는 흐름을 재촉하는 마지막 협곡인 삼문협(三門峽)을 지나 낙양 근방의 맹진(孟津)을 통과 하고서야 비로소 숨을 돌린다. 여기서부터 만리장성, 대운하와 비견되는 중국인이 만든 대공정 중 하나인 1,300여㎞의 긴 제방 황하대제(黃河大堤)가 시작된다.
황하수는 그를 둘러싼 제방 너머에 있는 해발 50m의 화북평원을 넘겨다보기 위해 얼굴을 쳐들면서 점차 게으름과 심술(이것을 決徙라 한다)을 부리기 시작한다. 하상(河床)은 양안(兩岸)의 지면보다 평균 3∼5m나 높다. 심지어 10m나 높은 곳도 있어 이로 인해 소위 '지상하(地上河)'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황하가 이 지역에서 부린 심술 때문에 중국인들은 숱하게 눈물을 흘렸고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심술부려 보았자 황하수가 가야 할 곳은 역시 대해(大海)일 뿐이다.
황하는 통상 상류· 중류· 하류 세 지역으로 구분한다. 하원에서 내몽고자치구 탁극탁현의 하구진(河口鎭)까지가 상류로 3,472㎞에 그 낙차가 3,846m나 된다. 중류는 하구진에서 하남성 정주(鄭州) 도하욕(桃花頒)까지인데 1,206㎞에 낙차는 890m이다. 그 가운데 하구진에서 용문 우문구까지의 소위 진섬계곡 718㎞의 낙차는 자그마치 611m이다. 하류는 도화욕에서 산동성 간리현(懇利縣)까지로 786㎞에 낙차는 95m에 불과하다.
발원지 부근의 황하는 황토물이 결코 아니었다. 어디에서부터 황하의 이름에 걸맞게 황토색이 되는지는 시대에 따라 다르고 학자에 따라 해석도 가지각색이다. 황토고원을 지나야 비로소 황색의 진흙강으로 변한다고들 하지만, 선진(先秦) 시대에는 황하의 물이 황색이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황토지대에 수목이 많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토고원이 형성된 것은 지질시대이기 때문에 황토고원을 통과한다고 해서 반드시 황색이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황하의 지류인 위수와 경수(涇水)의 수색이 대조적이어서 '경위분명(涇渭分明)'이라는 말이 예부터 전한다. 황토고원에서 발원하는 경수의 물은 황색의 위수와는 달리 푸른 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국(戰國) 시대에는 황하를 '탁하(濁河)'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진한시대 이후 황하수가 황색으로 변했다는 설을 그냥 믿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현재 황하 하류에 퇴적되는 니사를 주로 제공하는 지역은 하구진에서 우문구까지의 진섬황토고원이다.
중국사 가운데 어느 시대를 공부하든 황하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황하는 중국 역사를 추동시켜 온 원동력이었다. 영향력이 큰 만큼 관심도 커서 황하 자체의 역사가 성립했다. '황하사(黃河史)' 혹은 '황하하도사(黃河河道史)'라는 것이 그것이다.
황하는 '(제방이) 잘 터지고 (하도가) 잘 변하는 것(善決善徙)'이 특징이었다. 황하에 대한 기록이 시작된 이후 2,500여년간 개도(改道: 大徙)가 26차례나 있었다고 하니 평균 100년만에 한차례 꼴인 셈이다. 개도의 범위(황하의 行迹)도 산동반도를 사이에 두고 북쪽 천진(天津)에서 남쪽 강회(江淮)지역까지 25만㎢나 되어 남북한을 합친 면적보다 넓다.
그러나 필자가 전공하는 위진남북조에서 수·당(隋唐)시대에 이르는 800년간 황하의 하도(河道)는 몇차례 터지고 넘치는 일(決溢)은 있었으나 개도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일러 '황하안류(黃河安流)'라 하지만, 이것을 황하 사상 일대 사건으로 학계에서는 여기고 있다.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하도의 변화가 없었던 이유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크게 보아 두가지 설이 있다.
첫째, 후한시대 왕경(王景)이라는 사람의 소위 '치하(治河)'에 공로를 돌리는 학설이다.
이런 관점에 선 학자는 청대의 위원(魏源)에서 최근에는 영국의 중국과학사가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에 이르기까지 상당수 된다. 즉, 왕경은 '10리 수문지법(水門之法)으로 제방을 튼튼히 하고 하조(河槽)를 깊게 하고, 또 소도지법(疏導之法)으로 흐름을 다양화하여 하류의 수량을 적게 함으로써 그 궤결(潰決)의 우환(憂患)을 점차 줄였다. 이 두 법을 지킴으로써 황하가 크게 다스려지고 진(晉)에서 수·당(隋唐)까지 800여년간에는 하익(河溢)이 16차례나 있었으나 결사지환(決徙之患)은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최근 새로이 제기된 학설이다.
전국시대 이전에도 황하 하류의 소위 결사가 적었는데 원시림의 대량 파괴가 없어 수토의 유실이 경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秦)과 전한(前漢)에 들어 관중을 충실히 하고(實關中) 북방의 흉노족을 방비하기 위해 변방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소위 수변군(戍邊郡) 정책을 수행함에 따라 자연히 대규모 사민조치가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황토지대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농지개발(墾田) 또한 급속도로 진행돼 황토가 대량으로 씻겨 내려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하류에 결사가 더욱 빈번해지고 더욱 흉폭해진 것이다. 한대(漢代)에 '황하의 물이 혼탁하여 물 한 석에 여섯 말의 진흙이 들어 있다(河水重濁 號爲一石水而六斗泥)'는 기록이 나온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러나 후한말 이후 북방 유목민족이 대거 남방으로 이동해 옴에 따라 농경민족인 한족은 점차 화북평원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황하 중류지역에 유목민과 농경민 거주지역의 분계선이 생겼으니 북방의 운중산과 여량산맥에서 섬북고원(陝北高原)을 거쳐 남쪽의 진령산맥(秦嶺山脈)으로 연결되는 선이 그것이다.
이 분계선을 경계로 동쪽과 남쪽은 농업구로, 서쪽과 북쪽은 유목구로 변하기 시작했다. 즉, 농업 인구의 동남으로의 후퇴와 유목인구의 내지 진출로 황하 중류지역 황토지대의 토지이용 상황이 크게 달라지게 된 것이다. 즉, 황토지대의 목장화 진전으로 하류지역의 홍수량과 니사량(泥沙量)이 크게 감소되었다. 위진남북조에서 수·당까지 '하환(河患)'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은 유목민의 중국 내지로의 이동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방면에는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어느 학설에 동조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필자가 연구하던 시대는 중국 역사상 난세 중의 난세였다. 인재(人災)로 그렇게 살기 괴로웠던 시대에 자연마저 혹독했다면 어떠했을까?
황하는 하(夏)나라 우(禹)임금을 떼어놓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우임금의 황하 치수 치적은 상서(尙書) 우공편(禹貢編)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에 대한 전설도 많다. 우는 그 신체의 우람함이 마치 높은 산(高山)을 보는 것과 같아 키도 크고 손도 커 일보를 내디디면 2리 반을 가고, 손으로 1,000석의 돌덩어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대우(大禹)'라 칭하는 것이다.
우는 도산씨(塗山氏)와 결혼한 지 4일만에 순(舜)임금의 명령을 받고 치수를 위해 집을 떠났다. 그가 '13년간 집 앞을 세번 지났으나 한번도 들어가지 않았다(三過家門而不入)'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우의 치수지역은 하원 근방의 적석산(積石山)에서 하류까지에 걸친 전 지역으로 손대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지만, 특히 어려운 공정은 용문을 개착하고(鑿龍門), 지주의 험을 나누고(析底柱), 이궐을 연 것(闢伊闕) 등이었다. 홍수를 다스린 후 전국을 구주(九州)를 나누니 중국이 온전한 행정단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차례 황하 답사길에 나섰지만 인상에 진하게 남아 있는 곳은 역시 필자가 연구하는 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이었다. 그 가운데 이 글에서는 호구폭포에서 삼문협까지의 역사와 그에 대한 필자의 여행기록을 소개하려 한다. 호구폭포는 섬서성 의천현(宜川縣)과 산서성 길현(吉縣) 사이에 있는 황하의 본류가 갑자기 폭포가 된 지역을 말한다.
그림으로만 접하던 호구폭포를 볼 기회를 얻었다. 오르도스 지역 답사를 끝낸 여행단은 홍군(紅軍) 대장정(大長征)의 종착지인 연안(延安)에서 일박하고 버스편으로 호구로 향하였다. 철강도시 포두(包頭)의 황하대교 아래로 유유히 흐르던 황하의 물이 어찌하여 폭포가 될 수 있는가가 가장 의아했던 부분이었다.
의천을 지나자 산세가 갑자기 달라진다. 날카로운 칼로 동강낸 것처럼 산들은 모두 큰 단애(斷崖)를 이루고 있다.
문득 눈앞에 나타난 천길 낭떠러지, 그 아래에 황하수가 거대한 바위 위에 노란 선을 긋고 있는 것이 가물가물 보였다. 산의 주름에 의지해 간신히 만들어진 좁고 굽은 도로 위로 전세 버스가 길을 찾아간다. 모두 앞 의자에 달린 손잡이를 다시 굳게 다잡고 그저 말이 없다. 그런 길을 달리기를 10여분만에 호구폭포에 닿았다.
이 호구폭포도 역시 우임금의 치적의 하나로 되어 있다. 황하는 중국 하천 가운데 황제라 하지만 호구는 황관(皇冠)에 달린 한 알의 명주(明珠)에 비유된다. 상류 300여m의 강 흐름이 갑자기 50여m로 줄어들더니 낙차 50여m의 깊은 돌웅덩이(石潭)로 떨어진다. 유량은 일반적으로 초당 300~500㎥이지만, 홍수 때는 초당 2,000㎥의 황토물이 마치 거꾸로 세운 항아리 주둥이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듯 한다고 하여 호구폭포란 이름을 얻었다.
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는 몇십리 밖에서도 들린다는 말이 실감난다. 호구폭포는 소원침식(溯源侵蝕) 작용에 의해 매년 평균 3∼4m씩 상류로 이동한다. 하구진에서 시작되는 진섬협곡이 거의 이런 V자형 석조(石漕)라 하니 호구폭포가 700여㎞ 상류에 위치한 하구진까지 닿은 데는 몇 년이나 걸릴까?
한성에서 일박한 이튿날 북쪽으로 30㎞ 떨어진 진섬협곡의 최남단 용문을 지나게 되었다. 호구폭포로부터 남방 65㎞지점이다. 그날 일정이 매우 바빠 구경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버스 차창 밖으로 용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금도 유감이다.
용문은 자고로 진진(秦晉: 關中과 山西)을 연결하는 요충으로 병가필쟁(兵家必爭)의 땅이었다. 지금도 용문 아래로 108국도와 서후선(西侯線: 西安∼ 侯馬) 철로가 놓여 있어 그 역할은 예나 다름없어 보인다. 수(隋) 양제(煬帝) 말기(617) 당나라 태조 이연(李淵)이 태원(太原)에서 병을 일으킨 후 군사를 이끌고 관중땅을 선점함으로써 대당제국(大唐帝國) 건설의 기초를 닦기 위해 이 용문나루를 건넜던 것이다.
수환이 심한 곳으로는 황하만한 것이 없고, 황하 가운데 험하기로는 용문만한 곳이 없다(水患莫甚於河 河莫險於龍門)고 했듯이 우임금의 공사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용문의 개착이었다. 우임금이 만민을 거느리고 한성 용문산에 오니 산은 용마루같이 가로질러 황하를 막고 있고 온 평지가 홍수로 범람해 있었다.
우임금은 산정에 올라 아버지 곤(嫩)이 그에 앞서 하도를 개착한 유적을 보고 용문산을 개착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발이 닿은 곳은 땅이 꺼지고 손이 닿은 곳은 단단한 돌이 물렁하게 변하여 하루만에 하나의 큰 구멍을 팔 수가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우가 그곳 부근 백성들에게 물었더니 "황포(黃袍)를 입은 노인 한 사람(산신령)이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는 이 산은 원래 한 마리의 큰 용이었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우는 이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풍우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개착함으로써 용이 숨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끝내 용의 허리를 잘라 물이 흐르도록 하니 일대에 범람했던 물이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이리하여 생긴 석문(石門)을 '용문'이라 하고, 후인들이 우가 용문을 개착한 공로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우문(禹門)' 혹은 '우문구(禹門口)'라 한 것이다.
▶️ 涇(통할 경)은 형성문자로 泾(경)은 간체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巠(경)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涇(통할 경)은 ①통하다(通--), 흐르다 ②곧다, 곧게 흐르다 ③대변(大便) ④월경(月經) ⑤물의 이름 ⑥곧게 흐르는 물살 ⑦고을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徹(통할 철), 通(통할 통) 등이다. 용례로는 대변과 소변을 아울러 이르는 말 또는 소변을 한방에서 이르는 말을 경수(涇溲), 중국의 경수는 항상 흐리고 위수는 항상 맑아 구별이 분명한 데서 사리의 옳고 그름과 시비의 분간을 이르는 말을 경위(涇渭), 입을 벌리려고 하면 할수록 입이 다물어 지는 증상을 교경(咬涇), 엉클어진 일의 내용에서 가뼉내는 옳음과 그름의 구별이 전혀 없음을 일컫는 말을 몰경위(沒涇渭), 경위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무경위(無涇渭), 위수에 뜨고 경수를 눌렀으니 장안은 서북에 위수와 경수 두 물이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부위거경(浮渭據涇) 등에 쓰인다.
▶️ 渭(물 이름 위)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胃(위)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渭(위)는 ①물의 이름 ②강(江)의 이름 ③(떠돌다) 흩어지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중국 황허강의 큰 지류로 웨이수이 강을 위수(渭水), 중국의 경수는 항상 흐리고 위수는 항상 맑아 구별이 분명한 데서 사리의 옳고 그름과 시비의 분간을 이르는 말을 경위(涇渭), 엉클어진 일의 내용에서 가뼉내는 옳음과 그름의 구별이 전혀 없음을 일컫는 말을 몰경위(沒涇渭), 경위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무경위(無涇渭), 위수에 있는 나무와 위수를 지나와 강수 위에 떠 있는 구름이라는 뜻으로 떨어져 있는 두 곳의 거리가 먼 것을 이르는 말로서 멀리 떨어져 있는 벗이 서로 그리워함을 이르는 말을 위수강운(渭樹江雲), 위수에 뜨고 경수를 눌렀으니 장안은 서북에 위수와 경수 두 물이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부위거경(浮渭據涇) 등에 쓰인다.
▶️ 分(나눌 분, 푼 푼)은 ❶회의문자로 푼의 뜻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된다. 刀(도; 칼)와 八(팔; 나눔)의 합자(合字)로 물건을 나눔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分자는 '나누다'나 '베풀어 주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分자는 八(여덟 팔)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八자는 사물이 반으로 갈린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사물이 나누어진 모습을 그린 八자에 刀자가 결합한 分자가 물건을 반으로 나누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分자는 사물을 반으로 나눈 모습에서 '나누어 주다'나 '베풀어 주다'라는 뜻을 갖게 됐지만, 물건이 나뉜 후에는 사물의 내부가 보인다는 의미에서 '구별하다'나 '명백하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分(분, 푼)은 (1)분세(分稅) (2)분수(分數) (3)십진(十進) 급수(級數)의 단위의 하나. 곧 하나를 열에 나눈 것의 하나. 1의 1/10. 시간(時間)의 단위. 한 시간을 60으로 나눈 그 하나 (4)각도(角度). 경위도 등의 1도를 60으로 나눈 단위의 하나 (5)길이의 단위 1치를 10으로 나눈 그 하나 (6)1돈을 10으로 나눈 그 하나 (7)1할(割)을 10으로 나눈 그 하나 (푼)으로 읽힐 때, ㊀옛날 엽전의 단위. 한돈의 1/10 ㊁무게의 단위. 한돈의 1/10 ㊂길이의 단위. 한 치의 1/10, 등의 뜻으로 ①나누다 ②나누어 주다, 베풀어 주다 ③나누어지다, 몇 개의 부분(部分)으로 갈라지다 ④구별(區別)하다, 명백(明白)하게 하다 ⑤헤어지다, 떨어져 나가다 ⑥구별(區別), 다름 ⑦나누어 맡은 것, 몫 ⑧분수(分數) ⑨운명(運命), 인연(因緣) ⑩신분(身分), 직분(職分) ⑪길이, 무게, 시간(時間), 각도(角度), 화폐(貨幣) 따위의 단위 ⑫24절기(節氣)의 하나,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을 때, 그리고 ⓐ푼(엽전의 단위)(푼)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구분할 구(區), 나눌 반(班), 나눌 배(配), 나눌 반(頒),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합할 합(合)이다. 용례로는 어떤 사물을 이루고 있는 각 성분이나 요소를 갈라냄을 분석(分析), 어떤 갈래에 달린 범위나 부문을 분야(分野), 틀림없이 또는 확실하게를 분명(分明), 나누어서 넘겨 줌을 분양(分讓), 서로 나뉘어서 떨어지거나 떨어지게 함을 분리(分離), 찢어져 갈라짐을 분열(分裂), 생산에 참가한 개개인이 생산물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나누는 일을 분배(分配), 일을 나누어서 맡음을 분담(分擔), 종류를 따라서 나눔을 분류(分類), 따로따로 흩어짐을 분산(分散), 서로 구별을 지어 가르는 것을 분별(分別), 분량이 적적하여 모자람이 없음을 충분(充分), 전체를 몇으로 나눈 것의 하나하나를 부분(部分), 처리하여 다룸을 처분(處分), 명목이 구별된 대로 그 사이에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나 분수를 명분(名分), 따로따로 갈라 나눔을 구분(區分), 개인의 사회적인 지위 또는 계급을 신분(身分), 몫몫이 나누어 줌을 배분(配分), 남에게 어질고 고마운 짓을 베푸는 일을 덕분(德分), 마음에 생기는 유쾌 불쾌 우울 따위의 주관적이고 단순한 감정 상태를 기분(氣分), 화합물을 조성하는 각 원소를 성분(成分), 자기에게 알맞은 신분 또는 의무로 마땅히 하여야 할 직분을 본분(本分), 영양이 되는 성분을 양분(養分), 서로 소매를 나누고 헤어짐이란 말로 이별을 뜻하는 말을 분수작별(分手作別), 분가함 또는 별거함을 일컫는 말을 분문이호(分門異戶), 얼마 안 되는 돈과 곡식을 일컫는 말을 분전승량(分錢升量), 사리를 분별하는 마음가짐을 일컫는 말을 분별사식(分別事識), 자기 분수에 만족하여 다른 데 마음을 두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안분지족(安分知足), 두 과부가 슬픔을 서로 나눈다는 뜻으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동정한다는 말을 양과분비(兩寡分悲), 한번 서로 인사를 한 정도로 아는 친분을 일컫는 말을 일면지분(一面之分),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중대한 의리와 명분을 일컫는 말을 대의명분(大義名分) 등에 쓰인다.
▶️ 明(밝을 명)은 ❶회의문자로 날 일(日; 해)部와 月(월; 달)의 합해져서 밝다는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明자는 '밝다'나 '나타나다', '명료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明자는 日(날 일)자와 月(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낮을 밝히는 태양(日)과 밤을 밝히는 달(月)을 함께 그린 것이니 글자생성의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밝은 빛이 있는 곳에서는 사물의 실체가 잘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明자는 '밝다'라는 뜻 외에도 '명료하게 드러나다'나 '하얗다', '똑똑하다'와 같은 뜻까지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明(명)은 (1)번뇌(煩惱)의 어둠을 없앤다는 뜻에서 지혜 (2)진언(眞言)의 딴 이름 (3)사물의 이치를 판별하는 지력(智力)으로 이치가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 것 (4)성(姓)의 하나 (5)중국 원(元)나라에 뒤이어 세워진 왕조(王朝)로 태조(太祖)는 주원장(朱元璋) 등의 뜻으로 ①밝다 ②밝히다 ③날새다 ④나타나다, 명료하게 드러나다 ⑤똑똑하다 ⑥깨끗하다, 결백하다 ⑦희다, 하얗다 ⑧질서가 서다 ⑨갖추어지다 ⑩높이다, 숭상하다, 존중하다 ⑪맹세하다 ⑫밝게, 환하게, 확실하게 ⑬이승, 현세(現世) ⑭나라의 이름 ⑮왕조(王朝)의 이름 ⑯낮, 주간(晝間) ⑰빛, 광채(光彩) ⑱밝은 곳, 양지(陽地) ⑲밝고 환한 모양 ⑳성(盛)한 모양 ㉑밝음 ㉒새벽 ㉓해, 달, 별 ㉔신령(神靈) ㉕시력(視力) ㉖밖, 겉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밝을 금(昑), 밝을 돈(旽), 밝을 방(昉), 밝을 오(旿), 밝을 소(昭), 밝을 앙(昻), 밝을 성(晟), 밝을 준(晙), 밝을 호(晧), 밝을 석(晳), 밝을 탁(晫), 밝을 장(暲), 밝을 료(瞭), 밝힐 천(闡),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꺼질 멸(滅), 어두울 혼(昏), 어두울 암(暗)이다. 용례로는 명백하고 확실함을 명확(明確), 밝고 맑고 낙천적인 성미 또는 모습을 명랑(明朗), 분명히 드러내 보이거나 가리킴을 명시(明示), 분명하고 자세한 내용을 명세(明細), 밝고 말끔함을 명쾌(明快), 밝음과 어두움을 명암(明暗), 명백하게 되어 있는 문구 또는 조문을 명문(明文), 밝은 달을 명월(明月), 분명하고 똑똑함을 명석(明晳), 세태나 사리에 밝음을 명철(明哲), 똑똑히 밝히어 적음을 명기(明記), 일정한 내용을 상대편이 잘 알 수 있도록 풀어 밝힘 또는 그 말을 설명(說明), 자세히 캐고 따져 사실을 밝힘을 규명(糾明), 사실이나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내서 밝힘을 천명(闡明), 날씨가 맑고 밝음을 청명(淸明), 흐리지 않고 속까지 환히 트여 밝음을 투명(透明), 틀림없이 또는 확실하게를 분명(分明), 마음이 어질고 영리하여 사리에 밝음을 현명(賢明), 어떤 잘못에 대하여 구실을 그 까닭을 밝힘을 변명(辨明), 의심나는 곳을 잘 설명하여 분명히 함을 해명(解明), 의심할 것 없이 아주 뚜렷하고 환함을 명백(明白), 어떤 사실이나 문제에서 취하는 입장과 태도 등을 여러 사람에게 밝혀서 말함을 성명(聲明), 불을 보는 것 같이 밝게 보인다는 뜻으로 더 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는 말을 명약관화(明若觀火),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이라는 뜻으로 사념이 전혀 없는 깨끗한 마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명경지수(明鏡止水), 새를 잡는 데 구슬을 쓴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손해 보게 됨을 이르는 말을 명주탄작(明珠彈雀), 아주 명백함이나 아주 똑똑하게 나타나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말을 명명백백(明明白白), 맑은 눈동자와 흰 이라는 말을 명모호치(明眸皓齒)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