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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겨울이 지나가고, 파릇파릇한 색깔이 세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살을 얼어붙게 만든 추운 바람 역시 한껏 너그러워져 살랑살랑 불기만 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시기.
누리와 지혁의 일상은 변함없었다. 늘 그렇듯 출근하고, 내조하고, 저녁이 되면 같이 저녁을 먹었고 여가 시간을 함께 보내다 침대로 뛰어들기 일쑤였다.
누리의 수영 실력은 나날이 일취월장을 이루고 있었고, 지혁은 일주일 내내 회사로 출근해야 하는 바쁜 일상을 지내야만 한다는 것을 빼면 아주 좋은 일상이었다.
"이것들이 지금 장난하나."
"투자금을 모두 돌려주겠다는 의사도 전해왔어."
"미친."
소나기업과 관련된 자료를 째려보던 지혁은 한숨을 내쉬며 냅다 책상에 내다던졌다.
정리되어있던 서류들이 흔들리더니 바닥으로 흩어져내렸고 그걸 빤히 보던 지혁은 화가 풀리지 않는 듯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상황은?"
"소나 기업한테로 완전히 돌아선 상태야. 우리가 투자금을 준다고 해도 안 받는다 하고."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글쎄. 정확한 건, 이런 짓을 할 놈은 소나 기업에서 단 한 명 뿐이지."
"손은결."
누리에게 접근한 걸로도 화가 치미는데 이렇게 회사 일에 방해까지 하는 걸 보니 폭삭 망하고 싶어 환장했나보다.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앉은 지혁은 곰곰히 고민에 빠졌다.
늘 웨딩쪽에만 심혈을 기울이고 손을 뻗고 있었다. 그게 수십년이고 지속됐고, 이제는 1인 가구가 늘어날 정도로 비혼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여태까지는 웨딩으로도 충분히 원탑을 먹을 수 있다면, 이제부터는 빠르게 다른 쪽으로도 손을 뻗어 기반을 다시 다져야만 했다.
쉽게 무너질 BH 그룹이 아니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흔들릴 게 분명했다.
젠장, 뭐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군.
"이 새끼 요즘 뭐하는지 아나?"
"일 벌려놓고 놀러 다니던데."
"하. 간도 큰 놈이군."
이를 빠득 간 지혁이 눈을 감았다.
주말 내내 회사에 나와 서류를 처리하게 된 이유도 이곳에 있었다. 투자금 반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처음으로 웨딩이 아닌 의상으로 시선을 돌렸고 주 분야를 넓혀갈 계획이었다.
그 첫단계가 바로 현재 투자금을 대주고 있던 KM 기업이었다. 요 몇 년 사이, 다양한 디자이너들을 채용하면서 인기를 넓혀가고 있는 기업이었다.
덕분에 첫 패션쇼를 연다고 했고, 그 준비기간은 자그마치 1년이 넘는 시간이라고 했다. 얼마나 큰 무대를 꾸밀 계획인 건지 전국 투어를 한다고 선언까지 한 상태였다.
전국에 무대를 설치하고, 1년 넘도록 모델들을 고용하는 것도 모자라 의상을 수백벌 만드는데 드는 비용은, 아무리 인기가 급상승 하고 있는 KM 기업이라고 해도 무리라는 걸 알았다.
빠르게 그 정보를 입수한 지혁은 그들에게 투자금을 원없이 대줄테니, 우리가 원하는 단 한명의 디자이너 이직을 허락하라는 조건이었다.
디자이너 부자라고 불릴 정도인 그쪽에서는 손해볼 일이 없는 조건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람 한 명과 몇 십번의 무대를 맞바꿔치는 셈이었다.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할 땐 언제고, 이제와서 투자금 필요없다고 다 반환을 해?
이렇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조사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현재 패션계를 아우르고 있는 KM 기업과의 협상이 결렬됐으니, 쉽게 들어설 수 있을리도 없었다.
젠장.
"소나 기업 다 뒤져와."
"어디까지?"
어느 부분까지 손을 대야 하냐는 의미었다.
"전부 다. 더러운 것도 전부. 하다 못해 손은결 전과까지."
"알았다."
"이틀."
"사흘로 합의 보자. 이틀은 너무하네 정말."
"삼일."
"콜."
강산은 할 일이 생긴 게 마냥 기쁘지는 않은지 표정을 구기며 사장을 밖으로 나갔다.
날은 이렇게 화창하건만, 지혁의 마음은 화창하기는 커녕 먹구름이 가득 껴 비까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이 모든 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시 누리를 보러 가는 일밖에는 없었다.
*
*
"요즘 지혁 오빠 많이 바쁘지 않나요?"
"그걸 당신이 왜 궁금해 하죠?"
하나와 마주 앉은 채 차를 홀짝이던 누리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더 이상 이 사람 때문에 흔들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고, 실제로 그랬으니까.
"회사 일로 많이 힘든 것 같던데."
"그래요?"
"어머…, 설마 지혁 오빠 회사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고 있는 거에요?"
이 여자는 분명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사실에 내 기를 죽이고 싶은 거겠지.
"네, 몰라요. 지혁 씨가 얘기 안 해주거든요."
"이런…. 회사 정보가 빼나갈까봐 걱정하는 모양이에요."
"이미 회사 정보가 빠져나간 것 같은데요?"
"…네?"
"지혁 씨 아내인 저조차도 모르는 사실을, 회사도 다니지 않는 당신이 아는 걸 보면 말이에요. 이미 누군가 빼돌린 것 같은데."
"… …."
이상한 곳에서 물고 들어오는 누리의 말에 입을 다문 하나였지만 금세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다시금 우아한 미소를 띄웠다.
이렇게 쉽게 물러날 줄 알아?
"그건 단지, 지혁 오빠가 누리 씨를 믿지 못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무렴요. 상관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지혁 씨가 당신에게 직접 말한 건 아닐테니까."
"…어디서 나오는 확신이죠?"
"글쎄요…."
누리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머그컵을 들고 다시 한 번 차를 들이켰다. 여유로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하나는 기어코 표정을 와락 구겼다.
"지혁 오빠 회사 상황이 안 좋아요."
"네."
내가 굳이 이 얘기를 저 여자한테 들어야 하나 싶었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지혁에게 물어보면 늘 괜찮다고만 하기 일쑤니.
걱정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게 말이나 되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쩐지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모를 것 같았다.
"KM 기업에게 투자했지만 기업측에서는 투자금을 전액 반환해주겠다고 했죠. 투자금을 대가로 KM에 있는 디자이너 한 명을 이직 시켜주겠다는 협상 역시 박살났죠."
"그렇군요."
회사일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KM이 패션 쪽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일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투자금 반환이면 디자이너를 데려오려던 것도 물건너 갔다는 건데….
근데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잘 알고 있지? BH 그룹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니 BH 사람이 아닌 하나가 이렇게까지 잘 안다는 건 분명 수상한 일이었다.
"웨딩에만 몰두하던 BH에서 처음으로 패션계에 들어서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었어요."
"… …."
"그런데 KM기업과의 투자금 문제로 인해 그 조차도 물거품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난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어요."
"하."
누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결국 또 같은 일들의 반복이었다. 나는 가능하지만 너는 불가능하지? 사람 속이 이렇게 꼬여있을 수도 있는거구나 싶었다.
"원하는 게 뭐죠?"
"지금이 아니면 BH가 패션에 손을 뻗기 위해선 또 몇 십년을 기다려야 할 지도 몰라요."
"… …."
"지금 이 상황을, 당신은 해결할 수 있나요?"
"아뇨."
"그럼 BH를 위해서라도 지혁 오빠를 놔주세요."
"BH랑 지혁 씨를 놔주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아주 큰 상관이죠. 제가 KM 기업 회장의 딸이니까요."
어쩐지, 지나치게 자신만만해 하더라니. 그런 이유가 있으니 그럴만도.
픽 웃은 누리는 팔짱을 끼며 하나를 쳐다봤다. 물론 저 사람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가끔은 정공법보다는 비열한 수가 필요할 때가 있었다.
"이혼해요."
바로 이런 때.
"이혼이 장난인 줄 아시나봐요?"
"아뇨. 저는 지혁 오빠를 좋아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서요?"
"당신이 지혁 오빠와 이혼한다면 KM은 전적으로 BH에 협력한다고 약속하죠."
저 약속을 믿을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누가봐도 자신이 밑지는 장사였다.
"잘 생각해요. 이대로 가면 몇 년 안에 BH는 무너질거고, 그럼 일자리를 잃게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될 거에요."
지혁은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일을하는 게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본디 사장과 회장이라는 자리는 그랬다. 그걸 알기에 누리는 섣불리 싫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알겠다고 대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하나는 가방에서 종이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열어보지 않아도 무슨 봉투인지 뻔히 보였다.
이혼 서류겠지.
죽어도 싫지만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한 번 쯤은 비열해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누리는 흔쾌히 서류를 집어들었다.
"그러죠."
"… …."
"이혼, 할게요."
"… …."
"만약 그쪽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땐 가만 두지 않겠어요."
"하. 당신이 뭔데 날 가만 안 둔대요?"
"안타깝게도, 제 아버지가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라서요."
"아버지?"
"할 말 끝난 것 같으니 실례할게요."
"… …."
누리는 빠르게 카페를 벗어났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하나는 찜찜한 마음이었다. 분명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루었건만, 어째서인지 내기에 진 것마냥 찝찝하고 기분이 더러웠다.
그러나 원하는 걸 얻어냈으니, 하나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 하며 카페를 빠져나갔다.
지혁 오빠를 되찾아 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
어이없네 진짜.
불 꺼진 집 안, 거실 테이블 위에 이혼 서류를 올려놓은 채 빤히 쳐다보기만 하던 누리는 불타오르는 속마음을 진정시키며 차분히 생각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KM 기업을 속여야 한다는 거야. 어떻게 속이지?
누리는 지혁과 이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눈속임으로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우선 언론부터 우리쪽으로 끌여들이고, 그 다음에….
빠르게 굴러가던 누리의 머리속은 탁, 켜지는 불에 모든 생각을 멈춰야만 했다.
"…지혁 씨."
"… …."
지혁이 테이블 위에 놓인 이혼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첫댓글 허 ㅡㅡ 참 유부남을 돈으로 빼앗을려고 ㅎㅎㅎ
앞으로가 궁금해집니다 어떠한 사단이 일어날지
기대해볼께염^^~~~
기다리고 기다렸어용 ㅋ ㅋ 명절 잘 보내세용 지혁이 오해 하지 않기를....
잘 읽고갑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