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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2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집회 48,1-4.9-11
복 음 : 마태 17,10-13
산에서 내려올 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깨달음의 여정
-무지의 치유와 구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우리의 영적 여정은 그대로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주님과 나와 이웃을 깨달아 알아 가면서 일치의 관계도 깊어지면서
점차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집니다.
깨달음의 은총이요 깨달음을 통한 무지의 치유요 구원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와 하느님을 잊고 지내는 망각이 정말 마음의 큰 병입니다.
깨달음을 통한 무지의 치유와 더불어 영육의 치유입니다.
참으로 영육의 건강을 원한다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깨달음의 여정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소개되는 엘리야 예언자는 깨달음의 정점에서 하느님과 일치의 삶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신바람 나는 하느님과 일치의 삶을 보여주는지
엘리야의 삶 전체가 하느님의 현존이자 하느님의 기적이요 하느님의 증거입니다.
이런 하느님과 일치의 삶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이 또한 우리가 목표하는 소원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우리의 소원을 그대로 반영하는 오늘 미사 중 화답송 시편 후렴의 기도입니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다시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주님 얼굴을 비추시어
날마다 새롭게 구원의 삶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배밭 곳곳에 쌓여 있는 무려 2500개의 비료 포대를 보면서
새삼 농사의 끝은 새로운 농사의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똑같은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입니다.
참으로 삶의 엄숙함과 진지함을 배웁니다.
배 수확의 열매들 역시 은총의 산물임과 동시에 인간 노력의 산물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삶의 위대함은 이런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성과 지속성에 있고
이는 우리 정주의 삶의 위대함이기도 합니다.
이런 소소한 깨달음과 더불어 알게 모르게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일치도 깊어질 것입니다.
별난 기적이 아니라 엘리야처럼 주님과 일치의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그 삶 자체가 그대도 기적입니다.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 보냈다.”
참으로 주님과 일치의 삶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를 본 이들의 행복에 가득한 고백의 증언입니다.
“엘리아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볼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정말 자랑스런 엘리야입니다.
구약에 승천한 인물이 셋인데 에녹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입니다.
주님과 일치의 절정을, 깨달음의 절정을 보여주는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삶에 고무된 자의 다음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일치의 삶을 살 때 그대로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보는 우리들이요, 사랑 안에서 잠들게 되리란 확신과 더불어
반드시 부활의 삶을 살게 되리라는 확신을 선물로 받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예수님과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세례자 요한이 이런 엘리야의 재림임을 확신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정체를 밝히심으로 제자의 무지를 일깨우시는 주님이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이 무지의 병으로 인해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임을 모르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는 고백입니다. 계속되는 무지의 악순환입니다.
무지로 인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요, 이어 구원자이신 메시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입니다.
지금도 무지와 탐욕에 눈멀어 자행되는 불의한 일들로 고통 받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말 그대로 자업자득입니다.
참으로 무지로부터의 해방에 깨달음의 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 처방인지 깨닫습니다.
한 두 번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길뿐이 없습니다.
여기 깨달음의 여정에 필히 동반해야 하는 것이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무지의 병의 치유와 구원으로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며 우리 모두 빛의 자녀로서 살게 하십니다.
집회서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바치며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집회48,11).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종종 손익계산이 빠른 사람을 봅니다.
계산이 빨라서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절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시장의 상인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나 수녀가 손익계산에 빠르다면 어떨까요?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신부, 수녀가 뭐 저래?”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은 “계산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로 계산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들판에 버려둔 채
산속을 헤매는 목동 이야기를 기억해보십시오.
계산하지 않는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몸으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하느님께서 세상의 죄인들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당신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곧바로 벌을 내리실 수도 있었지만,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몸으로 직접 속죄양이 되셨습니다.
하느님 편에 서기로 한 사람은 세상과 분리되는 삶,
대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만을 바라볼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사람의 아들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말이 맞다고 하시면서, 엘리야가 이미 왔음을 확실하게 전해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지요.
누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 예언자가 환생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 예언자로 부르는 것은
그가 엘리야라서가 아니라 엘리야의 일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일, 주님의 길을 환하게 닦아놓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일이 늘 뒤처집니다.
나의 일만 할 뿐입니다.
엘리야의 일을 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타볼 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라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당신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 받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할 일입니다.
특히 우리는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않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우리들 가운데 서 계시고 형제들 안에 계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고 제멋대로 다룬다면,
바로 우리에게 구세주께서는 고난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더 이상은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13)
또한, 바오로 사도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29).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산책을 하면서 길을 포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먼저 주차된 차량을 옮기도록 안내장을 부쳐놓습니다.
낡은 길의 포장을 걷어냅니다. 2주일 정도 지나면 새롭게 길을 포장합니다.
그리고 2주일 정도 지나면 횡단보도 표시를 합니다. 2주일 정도 지나면 드디어 중앙차선을 칠합니다.
동네 길을 새롭게 포장하는데 대략 2달 정도 걸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시가스 배관 공사는 작년에 시작되었는데 아직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을 보았던 제게는 조금은 낯선 풍경입니다.
아마 한국에서 길을 포장했다면 1주일이면 충분했을 것 같습니다.
불편함을 일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여유 있게 하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서두르다가 실수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작년에 거주자 등록증을 받고, 운전면허증을 받고, 신용카드를 받으면서 경험했습니다.
생각보다는 조금 느리지만 결국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3시간이 행복하려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됩니다.
3일이 행복하려면 백화점에서 좋은 물건을 사면 됩니다.
3달이 행복하려면 친구들과 여행을 가면 됩니다.
3년이 행복하려면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하면 됩니다.
평생 행복하려면 선행을 베풀면 됩니다.”
2020년은 코로나19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실내에서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백화점으로 물건을 살 여유가 없었습니다. 여행하려던 계획도 대부분 취소되었습니다.
결혼식도 미루어 졌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의 엄중함 중에도 행복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웃에게 선행을 베푼 사람들입니다.
미사가 끝나면 성당을 소독하는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정성껏 마스크를 만들어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분도 있습니다.
세입자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월세를 감면해주는 분도 있습니다.
몇 달씩 집에도 못하고 환자들을 돌보았던 의료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기쁘게 할 때 우리 곁을 찾아옵니다.
곧 백신이 나온다고 하니 2021년은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을 때에는, 견디어 낸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명예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베드로 전서 2, 19 –20)”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불의한 고난을 참아내면 은총이 된다고 합니다.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하느님의 은총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신앙인들이 따라야 할 ‘이정표’와 같은 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거짓 예언자와 싸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렙다 과부에게 기적을 베풀어서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다른 것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들 마음이다.
사로잡혀 있기에
부자연스럽고
답답한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요한 세례자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뜻과 멀어지면
불행한 삶이 된다.
아프게도
제멋대로 다루는
이 어리석음을
지금껏 우리는
반복하며 저지르고 있다.
메마른
우리 마음을 위해
간절히 기도드린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묵상하게 된다.
하느님의 뜻을
감히
우리가 지배할 수 없다.
하느님의 섭리에
떼어놓을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진정한
하느님 사랑에
눈을 뜨는
대림시기여야 한다.
눈을 떠야
하느님의 뜻을
놓치지 않는다.
알아보아야
사랑은
깊어지고 넓어진다.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대림의 본질이다.
대림은
주님의 뜻
알아보기 위해
우리의 닫힌
눈을 뜨는 시기이다.
성령의 땔감은 우리 자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의 주제는 ‘왜 구원자보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야 하는가?’입니다.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변모하시며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은 엘리야를 생각하며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율법 학자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요한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당신도 박해할 것이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깨닫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는 어떠한 관계일까요?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성령은 불입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바알 예언자들과 시합을 할 때였습니다.
엘리야 시대는 우상숭배 시대였습니다. 진정한 우상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을 섬길 때 자신이 원하는 돈과 육체와 명예를 섬기게 됩니다.
그런 이들이 제단에 바치는 소는 아깝게 바치는 소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불이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물을 바칠 때 감사한 마음으로 세속-육신-마귀의 육체적 욕망을 바쳐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악의 뿌리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1티모 6,10 참조).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4)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육과 영은 반대가 되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고 높여지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일입니다(루카 16,15 참조).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려와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려면
그 성령께서 태우실 땔감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입니다.
나를 봉헌하려는 마음 없이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 세상에 이런 일이’에
‘온몸을 집어삼키는 각질의 공포, 씻지도 눕지도 못한 채 건선으로’란 내용이 있습니다.
한 청년이 돈이 없어서 건선이 온몸을 뒤덮을 때까지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내용이 나옵니다.
혼자 살아야 하는 처지에서 이 청년은 처음엔 고시원에서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건선이 심해지자 고시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피시방 의자에 앉아서 밤을 새워야 하는 처지로 살아갑니다.
돈을 벌어야 하지만 누구도 취직시켜주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목욕탕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몸을 씻을 수조차 없습니다.
겨우 인력사무소를 통해 막일을 할 수는 있지만,
발의 각질들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조금만 걸어도 발이 퉁퉁 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두려운 것은 외로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너무나 착한 사람임에도 순서를 모르면 이런 상황까지 올 수 있습니다.
몸이 준비되지 않으면 사람과 관계가 되지 않고 그러면 돈도 벌 수 없습니다.
몸을 치료하는 것보다 먼저 사람과의 관계나 돈부터 생각하면
하느님께 땔감은 준비하지 않고 불만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도와줄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돈도 벌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행히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 팀에서 병원도 데려가 주고
복지센터를 통해 치료가 완료될 때까지 드러누워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꾸준한 치료를 마치고는 완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기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인관의 관계를 통해 돈도 법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는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입니다. 그리고 불은 땔감이 필요합니다.
내 육체, 육체의 욕구를 끊임없이 봉헌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가르친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세례자 요한을 거치지 않으면 사랑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와한 비디오’에 ‘힘을 내요! 기적을 들어 올리는 남자, 영복 씨’가 나옵니다.
영복씨는 소뇌위축증을 앓고 있습니다.
여동생도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이 병을 앓고 있습니다.
소뇌가 위축되는 병으로 균형감각을 잃고 말도 어눌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복씨는 아내와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기 위해 하루 8시간 이상씩 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보디빌더 대회에서 우승까지 합니다.
물론 병은 진행 중이지만 자신이 무너지면 가족과의 관계도 무너지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운동하는 데 씁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이도 이와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것을 가르친 마지막 사람입니다.
이 구약을 통과해야 그리스도와의 마지막 계약인 신약이 체결됩니다.
나 자신을 주님께 감사의 제물로 먼저 봉헌합시다.
그래야 성령의 불을 받고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도 좋아질 수 있습니다.
탈 수 있는 것을 바치지도 않고 불을 달라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땔감은 우리 자신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