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은 우리의 토속 신앙지였으나 불교가 들어와서 불교의 성지로 바뀐 것도 분명하다.일반적으로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면 후발 종교는 종교의례의 터를 선발 종교의 성지에다 마련하는 경향이 있다. 신라의 토속 종교의 중심지는 천경림이었다. 오늘의 경주 오능 자리이다. 선산지역에서 숨어서 불교를 포교하던 아도는 공주의 병을 치료해 준 보답으로 사찰을 짓는 것을 허용받았다. 아도는 천경림에 띠집을 지어서 사찰로 삼고 불교 포교의 교두보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토속신앙의 사제들이, 즉 무당들이 들고 일어나서 반대를 함으로 아도는 견디지 못 하고 선산지역으로 도망을 갔다. 이 전설은 불교가 신라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토속 신앙과 마찰이 아주 심하였음을 말한다. 이 전설은 팔공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팔공산은 중사를 지낼 만큼 토속신앙의 성지이다. 불교가 팔공산에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토속 신앙과 많은 마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차돈이 불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천경림에 흥륜사를 지었다. 그 때문에 이차돈은 목숨을 잃었다. 목숨까지 잃으면서 천경림에 절을 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의 뇌 속에 신성한 장소라는 개념이 각인 되어버리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후발 종교가 선발 종교의 성지에 자기의 성지를 만들려는 까닭이다.
삼국유사 등의 고 문헌이나 전설에 의하면 불교가 이 땅에 자리를 잡기까지 토속 신앙과 많은 마찰을 빚었음을 증언한다. 삼국유사에 진주에서 희경스님이 이웃에 있는 신사(神祠)에서 제목을 뻿어다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불교의 스님인 아도가 도망을 갔고, 이차돈이 목숨마저 잃었던 불교가 세력을 확장하여 힘이 더 세어진 역전의 현상이 나타났음을 말하는 전설이다. 토속신앙 터 또는 토속신앙의 신사가 불교의 사찰로 바뀌어 갔다. 팔공산에도 그런 흔적이 많다.
우리나라의 곳곳에 있는 유명한 사찰의 창건 설화는 토속신앙 터가 절로 바뀐 사실을 암시한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지을 때 아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 와서 절을 짓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의상대사가 신통을 부려서 바위를 공중에 떠도록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의사대사의 신비한 힘을 두려워하여 모두 흩어졌다. 이 자리에 절을 지어서 부석사라고 하였다. 창건설화이다.
이 설화를 해석하면 의상대사는 바위를 신으로 모시는 토속신앙 터에 절을 지으려 하였다. 아마도 무당이 선두에 서서 마을 사람을 데리고 왔을 것이다. 바위를 건드리면 신의 노염을 산다고 엄포를 놓았을 것이다. 의상대사가 그 바위를 공중에 뜨게 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었지는 모르지만 마을 사람을 불교도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을 것이다. 즉 토속신앙 지를 불교신앙지로 삼았다는 이야기이다. 그 과정에서 토속 신앙과 마찰을 빚었음을 보여주는 창건설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