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의 말씀 : 가룟 유다의 최후(마태복음 27:1~10)
* 본문요약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모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안하고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줍니다.
그때에 가룟 유다가 자기가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으나 그들이 받기를 거부합니다.
이에 가룟 유다는 그 돈을 성전에 던져 넣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 돈을 성전 금고에 넣지 않고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밭을 피밭이라 불렀습니다.
찬 양 : 182장(새 250)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332장(새 274) 나 행한 것 죄뿐이니
* 본문해설
1.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넘겨짐(1~2절)
1) 이튿날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함께 논의하고(결의하고)
2)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 새벽에 … 논의하고(1절) :
그들은 다음날이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새벽에 서둘러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형판결은 심리 후 하루 동안의 경과시간을 거쳐야 한다는 당시 재판법을
그들 스스로 어긴 것입니다.
-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2절) :
최종적인 사형판결과 사형집행은 오직 로마 총독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2. 가룟 유다의 죽음(3~5절)
3) 그 때에 예수님을 팔아넘긴(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전 30개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자(이 옳은 자)의 피를 팔아넘기는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하거늘
5) 유다가 그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 스스로 뉘우쳐(3절) : 메타멜레데이스
‘뉘우쳐’로 번역한 헬라어 ‘메타멜레데이스’는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며 과로워하며 후회하는 정도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이아’는 뉘우칠 뿐만 아니라
다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하는데,
가룟 유다는 마음에 후회의 감정만을 가졌습니다.
마음의 동요만을 일으키는 뉘우침이나 후회의 감정은 회개가 아닙니다.
- 유다가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넣고(5절) :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그의 돈을 받지 않자
그는 이스라엘의 뜰에서 제사장의 뜰 쪽으로 돈을 던져 넣었습니다.
유다는 이러한 선행으로 그의 죄를 속하려 했습니다.
- 목매어 죽은지라(5절) :
사탄은 이렇게 자기의 목적을 이룬 후에 이용 가치가 떨어진 사람을
철저하게 내동댕이칩니다.
3. 가룟 유다의 돈으로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음(6~10절)
6) 대제사장들이 그 은돈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피 값이니 성전 금고에 넣어 두는 것이 옳지 않다”하고
7) 의논한 후에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들을 위한 묘지로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로써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나니, 기록되기를
“그들이 은돈 30개, 즉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의 몸값이라고 정한 값을 받아서
10) 토기장이의 밭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렘 19:1~3) 하였더라.
- 성전고에 넣어 둠이 합당치 않다 하고(6절) :
그들이 유다가 성전에 던져 넣은 은 삼십을 성전 금고에 넣어두지 않으려 했던 것은
그들 스스로 예수님의 죄가 없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대가로 받은 돈은
성전 금고에 넣을 수 없다는 규율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 토기장이의 밭(7절) :
흰놈의 아들 골짜기에 있던 이 토기장이의 밭은 더 이상 토기를 구울 수 없는
효용가치가 떨어진 불모지의 땅입니다.
- 은 삼십을 가지고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7절) :
대제사장과 장로들 역시 그 불모지의 땅을 은 삼십이라는 매우 싼값으로 구입하여
나그네와 이방인을 위한 묘지를 만들고는,
무죄한 피를 흘린 그들의 죄를 이 작은 선행으로 감추려 했습니다.
- 그들은 은돈 30개 … 내게 지시하신 바와 같으니라(9~10절) :
마태복음은 예레미야 19:1~3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나
스가랴 11:11~13의 말씀이 마태복음 본문에 더 정확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 묵상 point
1.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공통점과 차이
1) 공통점 1 : 두 사람 다 예수님을 배반하여 두 사람 다 지옥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➀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
아무리 예수님이시라도 십자가에 달리는 위기에 몰리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기적을 행사하여
로마를 물리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결국 십자가형을 받게 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을 알았습니다.
가룟 유다의 이러한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예수님은 최종 사형판결을 받기 위해
총독 빌라도에게로 넘겨진 뒤였습니다.
당시 정치적인 역학 관계로 볼 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내린 판결을
빌라도가 다시 뒤집기는 대단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➁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향해 저주까지 한 베드로
이것은 베드로가 이미 자기 입으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否認)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더구나 세 번째 부인할 때에는 예수님을 향해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습니다.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도 없고, 베드로의 입에서 이미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을 했으니
베드로 역시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반한 자가 된 것입니다.
적어도 그 순간의 상황으로 보면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둘 다 똑같이 지옥에 빠질 수밖에 없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2) 공통점 2 : 두 사람 다 괴로워하며 뉘우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➀ 두 사람 다 예수님을 배반한 후에 괴로워하며 뉘우쳤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두 번째 공통점은
이들의 뉘우침이 아직 회개에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는 심히 통곡했고 가룟 유다는 그저 뉘우치기만 했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베드로의 통곡 역시 회개의 통곡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을 배반한 자기 연민에서 나온 통곡이었기 때문입니다.
➁ 그러나 그들의 괴로움과 뉘우침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후에 방향을 바꾸어 다시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하는데,
가룟 유다가 스스로 뉘우쳤다(3절)는 것은
단지 괴로워하며 후회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괴로워하며 예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괴로워하는 마음을 갖기만 한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이때에는 심히 통곡하는 마음을 가졌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순간의 상황으로 보면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뉘우침은 둘 다 똑같이 후회하는 감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 묵상 : 종교적 감정 놀음에 조심하십시오.
➀ 회개와 단순한 뉘우침의 차이는 ➠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주님 앞에 그 죄를 고백한 후에,
이제 그 죄를 떠나 주님 말씀대로 살게 해 줄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고 또 구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원하시는 신실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까지가 회개입니다.
이렇게 회개를 해야 죄 용서함을 받고 천국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단순한 뉘우침의 차이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인 것입니다.
➁ 그러나 많은 사람이 단순한 후회와 슬픔에서 멈춥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를 하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마음의 갈등과 아픔도 많이 겪게 됩니다.
내 죄를 깨닫기 위해 말씀을 묵상해야 하고,
죄를 깨닫는 대로 회개하며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을
간구하는 일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든 회개에까지 이르지 않고
단순히 후회하고 괴로워하며 슬퍼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만든 그 괴로운 감정을 은혜받은 것이라 말하면서
슬픈 감정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➂ 편하게 은혜 받은 감동만 느끼게 해 주는 편리한 교회들 ➠ 지옥의 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길고 긴 회개의 시간과 아픔의 시간을 겪기를 싫어하니
적당히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교회를 찾고,
또 빨리 부흥하기를 원하는 목회자들이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음악과 분위기 등으로
마치 회개한 것과 같은 후련한 마음을 제공합니다.
얼마나 편하고 좋습니까?
갈등도 아픔도 겪지 않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자칫 종교적인 감정놀음에 빠질 염려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 없는 은혜만 강조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지옥문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 문 앞에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목회자나 성도나 다 조심해야 합니다.
회개란 주님 앞에 내 죄를 고백하고
다시 주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그러나 베드로는 용서받았고, 가룟 유다는 지옥에 갔습니다.
➀ 베드로는 회개를 했고, 유다는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후회하고 괴로워하며 통곡을 했더라도
한 차례 울고 났더니 참 시원했다면서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베드로 역시 가룟 유다처럼 배반자로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를 바라는 간구의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께서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질문을 세 차례 받았을 때에
참된 믿음의 고백을 함으로써 다시 그 신령함과 제자의 위치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➁ 배반했다는 공통점을 가졌으나, 끝까지 회개한 자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동일한 죄를 범한 자들입니다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계속해서 간청하여
끝내 죄 사함을 받고 천국 백성의 자리를 회복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살하여 영원히 지옥 자식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의 아픔을 느끼며 통곡의 몸부림을 하는 베드로와,
단지 마음에 있는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는 가룟 유다의 뉘우침의 차이를
우리는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➂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은 5:3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부터
계속해서 자기의 죄를 심각하게 깨닫고 절규하듯 통곡하는 것을
구원의 시작점으로 증거 해왔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 묵상 :
적당히 마음의 때를 벗기고는 한껏 자신의 세련됨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신앙인을
주님은 회개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심각한 마음의 통증을 느껴야 합니다.
2. 정의로 위장된 추악한 악
1)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6~7절)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준 은 삼십을 성전의 금고에 넣지 않으려 한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대가로 받은 돈은
성전 금고에 넣을 수 없다는 규율을 말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 스스로 무죄한 자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2) 모든 죄를 가룟 유다에게 뒤집어씌우고(3~4절)
그들은 이 끔찍하고 흉악한 죄에 대한 죄책감을
가룟 유다가 되돌려 주려 한 은 삼십을 받지 않는 것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참으로 기가 막힌 해결 방법입니다.
그들이 무죄한 피를 흘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모든 죄를
그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에게 모두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3) 그 돈으로 나그네를 위한 묘지를 만들고(8~10절)
그리고는 자기들은 그가 성전에 던져 넣은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샀습니다.
이 땅은 과거에는 토기를 구웠으나 이제는 더 이상 토기를 구울 수 없는
효용가치가 떨어진 불모지의 땅입니다.
그것을 매우 싼값에 구입하여
나그네와 이방인을 위한 무덤으로 사용하기로 한다고 기자회견을 하여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은 참으로 정의로운 사람들임을 과시하려 합니다.
4) 정의로 위장된 흉악한 악(8절)
그러나 모든 죄를 가룟 유다에게 뒤집어씌우고
자기들은 정의로운 집단이 되는 이 기가 막힌 방법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밭을 피밭이라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얄팍한 속셈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완벽하게 홍보를 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을 속이는 데 성공을 하여
사람들이 그 묘지를 피밭이라 하지 않고 은혜의 밭이라고 말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의 약은꾀에 속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 중심에 있는 진짜 그의 속셈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5) 가룟 유다의 어리석은 선택(5절)
또 가룟 유다 역시 알량하게도 그가 받은 돈 은 삼십을 성전 안에 던져 넣음으로써
그의 마음에 있는 죄책감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 돈을 성전에 도로 던지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처벌하여 자살하면
자기 죄를 얼마간 용서받을 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에 대하여 자신이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당시 열심당원들의 습관처럼
장렬하게 자신이 자신을 스스로 처벌하는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마치 일본 야쿠자들처럼 이렇게 스스로 자결하여
스승을 배반한 자기를 스스로 처벌했다고 하는 것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멋있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었을지는 모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 묵상 :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적당히 뉘우침이나 후회 정도로 넘어가려 하지 마십시오.
베드로처럼 진정으로 당신의 죄에 대하여 마음의 아픈 통증을 느끼며 하는
진정한 회개를 하십시오.
3. 죄책감을 없애려 하지 말고 나의 존재를 변화시키려 하십시오.
1) 죄책감에서 끝내려 하지 마십시오.
죄를 지었으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양심에 화인을 받아서 살아 있으나 이미 심판을 받은 자와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를 지었을 때 죄책감이 생깁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죄책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죄책감이 생겼을 때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하는 등
환경의 변화를 통해서 죄책감을 없애려 합니다.
또는 본문의 가룟 유다나 대제사장과 장로들처럼
작은 선행으로 자기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려 합니다.
2) 죄책감을 적당히 해결하려 하지 마십시오.
더 나쁜 것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장된 정의와 위장된 회개입니다.
속은 그대로 둔 채 겉으로만 적당히 회개한 척, 정의 편에 선 척하는 것입니다.
이런 위장된 정의, 위장된 회개를 하는 이유는
아직도 그가 놓지 않으려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경우엔 로마로부터 부여받은 정치적인 세력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지막까지 열심당원이라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3) 참된 회개와 위장된 회개를 분별하십시오.
참된 회개란 죄에 대하여 심각한 아픔을 느끼는 것과 함께
죄를 짓게 한 그 죄의 본류에서 떠나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죄의 본류에 그대로 남아있는 채 적당히 회개하는 흉내만 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적당히 포장하여 알리고는
자기는 여전히 죄의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위장된 회개입니다.
● 묵상 : 흉내가 아닌 진짜 회개를 하십시오.
그러나 마치 술이나 담배나 약물 등에 중독된 것처럼
이미 그 죄가 습관이 되어 벗어나려 해도 잘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나의 연약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죄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것을 간구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 마음 중심이 그 죄를 떠나려는 간절함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간절함이 없이 마치 상가(喪家)에서 우는 흉내만 내듯
그렇게 회개의 흉내만 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당신의 간절함을 주께 드렸다면
세리나 창기의 기도도 받으신 주께서 당신을 주님의 백성으로 기뻐하며 받으십니다.
흉내가 아닌 진심을 주께 드리십시오.
* 기도제목
1. 적당히 신앙의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2. 위장된 회개, 위장된 정의로
적당히 나를 포장하는
외식하는 신앙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3. 이미 습관이 되어 잘 벗지 못하는
죄의 중독증을 치유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