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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풍경이 있다. 방학 하루 전 미루어둔 숙제를 하느라 진땀을 흘리던 모습이다. 일기 쓰기는 가장 힘든 과제였다. 날씨가 전혀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미디어가 발달되지 않은 시대였기에 흐리거나 비오는 날이 몇월 몇일일지 고심하며 가족들에게 묻기도 하고 머리를 뜯으며 기억을 짜내다가 기상청에 전화를 해보는 무리수도 두었다. 40일 남짓한 일기가 판에 박힌 듯 `오늘 밥을 먹었다. 참 맛있었다`와 같은 한 줄 일기와 쨍하게 맑은 날로 채워졌다. 숙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만들기, 탐구생활, 그리기, 수집 등등 필수과제가 몇 가지나 되었다. 개학 사흘 전부터 조금 일찍 각성한 친구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이리저리 곤충채집을 하는 모습을 더러 볼 수 있었다. 개학날 등교하면 탄성이 절로 나오는 과제물이 있었다. 평소 그 아이의 실력을 넘어서는 과제는 아마도 어른의 도움이 상당히 필요했으리라. 완벽하게 해낸 과제들이 상을 받고, 이후 과제를 해주는 아르바이트가 성행하고, 아이들의 일과가 바빠지면서 방학 만은 아이들이 쉬게 해주자는 의견이 팽배했다. 나 또한 의미없는 40일치 일기를 썼던 세대로서 방학 과제가 의미 없다는 것에 적극 동의했다.
초임교사 시절에는 기본적으로 방학과제가 있었다. 나는 `마음껏 놀기`와 같은 과제를 내주었고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날아갈 듯 교문을 빠져나가 집으로 향했다. 개학 전날 `정말 숙제를 하나도 안해가도 되나요?`와 같은 조심스런 질문을 받기도 했다. 지친 아이들을 마음것 쉬게 해주는 것, 그것이 아이들을 위한 나의 배려라 생각했다.
요즘에도 방학 과제가 있다. 방학 안내문 뒷장에 빽빽하게 과제가 제시되어있다. `가족과 여행하기`, `가족 신문 만들기`, `영화보기` 등과 같이 가벼운 과제다. 요즘 아이들도 "선생님, 이번 방학에 과제가 있나요?"하고 조심스레 물어온다. 그럴 때 나는 "당연하지!"하고 힘주어 말한다. 아이들의 실망한 얼굴을 뒤로하고 전에 없이 과제를 제시하는 이유는 방학 때 아이들에게 꼭 선물해주고 싶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방학이 아니면 하기 어렵다.
방학은 화살처럼 지나간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의 말처럼 방학은 흘러가는 대로 두면 목적지 없이 연료를 소모하며 도로를 주행하는 자동차와 같다. 아이들의 방학에 `내가 생각한 대로 사는 경험`을 주고 싶다. 아이들은 방학 일주일 전부터 과제를 고민한다. 평소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미루어두었던 것, 방학을 통해 성장하고 싶은 부분, 조금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할 수 있는 것들을 전제로 제시한다. 방학 전날이 되면 모두 방학 계획을 발표한다. 이때 구체적으로 과제를 제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체력 기르기`보다 `아침 먹고 30분 후에 동네 놀이터에서 줄넘기 50회 하기`와 같이 내가 할 수 있는 형태로 수정한다. 모두의 의견을 듣고 함께 수정하여 방학 당일 흰 봉투에 나의 목표를 적는다. 개학일에 봉투에 결과물을 담아온다.
개학일이 다가오면 은근히 기대가 된다. 모두의 걱정을 뒤로하고 다소 큰 계획을 한 친구가 정말 실천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아이들의 어떤 놀라운 성장을 마주하게될까 설레기도 한다. 매일 기타연습을 하겠다던 율무는 개학일에 합창부 친구 완두를 섭외해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 새벽 운동을 계획했던 녹두는 군살이 빠져 단단해진 느낌이다. 감자는 키가 크고 싶어 매일 아침 우유 한 잔을 먹고 동그라미 친 달력을 보여주었다. 현미는 그림 연습을 꾸준히 해 연습 전과 후 한층 성장한 그림을 가져와 두 그림을 비교해가며 꾸준함의 힘을 보여주었다. 매일 자기 전 일기를 한 바닥 쓰겠다던 수수는 정말 일기장을 가득 채워와 아이들의 함성과 박수를 한몸에 받았다. 여름 방학에 절반 정도가 성공했다면 겨울 방학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성공을 경험했다. 아이들은 대부분 소감으로 `무언가를 꾸준히 했더니 작은 결과가 생겼고 뿌듯했다`고 했다.
교실에서 함께 생활하며 배우는 것도 있지만, 방학 동안 내가 계획한 일에 몰입하고 결과를 얻고 나면 아이들이 훌쩍 성장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특히 성장한 친구들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보내는 모습을 보여주어 감동이 배가 되었다. 선의의 경쟁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친구의 성장을 보며 자극을 받고 어제의 나와 비교하며 스스로를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대견하면서도 학년이 바뀌면 곧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