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산책을 나설 때면 골목길을 유심히 살핀다.
마주치면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삼십 대 후반 처자 때문이다.
덩달아 미소는 짓지만,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아 나는 매번 곤혹스럽다.
현지인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떡니 네 개가 없는 긴 얼굴의 처자.
이것이 어디 예사 모습이던가. 그런데 왜 나는 기억을 못할까. 그렇다고
인제 와서 “우리가 언제 만났었나요?” 묻기도 객쩍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밤 자고 나서 문안하기가 아니겠느냐.
사노라면 때로는 시간만 한 약도 없다는데, 동창이 밝고 노고지리 우지지는 날이 왔다.
산책을 나서려고 골목을 살피는데 문제의 처자가 윗집 사람과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처자의 정체를 파헤치려고 그들 곁을 스치다가 그만 ‘풋’ 하고 입꼬리를 말았다.
그들은 복권 당첨 여부를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자의 궁금증이 풀려서
가볍던 발걸음은 골목길을 벗어나기도 전에 또 다른 의문으로 꼬여 버렸다.
‘거참, 복권을 많이 팔려면 광고를 해야 질 않나? 왜 나도 모르게 행동했을까.
허! 스핑크스에게 잡힌 나그네 꼴이구먼, 저 처자 전생에 나하고 척지고 살았나?
하나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났더니 또 다른 수수께끼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다니.’
두 번째 궁금증을 안고 여행을 다녀온 저녁이었다. 대문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채소 봉지를 든 처자가 나타났다. 이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마는 반가운 마음을
‘마네키네코’ 인형처럼 손끝에 모았다. 나의 신호를 감지한 처자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대뜸 자신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쑥 밀어 넣었다. 빛바랜 티셔츠 속으로 사라진 손은
꼬물꼬물 배꼽을 지나 젖가슴 쪽으로 접근했다.
자기 가슴속으로, 그것도 자기 손을 집어넣은 것을 누가 탓하랴 마는 문제는 장소였다.
*개와 늑대의 시간대라서 행인은 뜸했지만, 오토바이는 라이트를 켜고 오르내리며 외눈박이
가로등 아래 남녀를 염탐했다. 생뚱맞은 처자의 행동에 무의식중에 상체를 뒤로 당겼다.
<안전거리 확보>나의 기호화된 몸짓 언어를 의식한 처자가 눈을 내리감고 중얼거렸다.
“시장 다녀오는 길은 가로등이 없어 어두워요. 그래서 강도를 만날까 봐….”
‘아하! 그래서 복권 파는 티를 안 냈구나.’ 두 번째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 책장
위의 꿩이 생각났다. 꿩을 기르다가 조류 인플루엔자가 창궐해 박제로 남은 것이다.
제주도까지 날아가서 품어 온 알들이기에 기르면서 많은 정성을 쏟았는데 그때 알았다.
꿩은 병에 걸려도 내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신이 아프다는 걸 동족이 알면 쪼아서
괴롭혔고 그래서 더욱 빨리 죽었다.
처자도 동족에게 당하지 않으려고 꿩처럼 위장한 것이다. 삼십 대 중반에 밟은 사이공에서
이제 지천명의 고빗사위를 오르는 나까지 속아 넘긴 처자의 연기는 오스카 연기상 3회
수상한 배우 ‘캐서린 헵번’(1907-2003, 미국)을 능가할 만큼 훌륭했다.
삶이란 주제의 인생 무대는 주연·조연이 따로 없고, 단 한 번의 연습도 허용치 않는다.
처자에게는 이제 찾을 수 없는 네 개의 떡니와 개방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쫓기며
가족들을 애면글면 부양하다 가뭇없이 사라지는 역이 맡겨졌을 것이다. 사회주의가
“잘살아 보세!” 소리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 정책을 무대에 올린 결과였다.
흥행은 썩 좋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명암이 존재하듯이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병폐,
즉 분배가 바닥짐 없는 배처럼 한쪽으로 대책 없이 쏠려 버렸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이웃보다 더 많이 가지도록 계약하는 이가 능력자로 대접받는 제도가 아니던가.
버스에 오르려다 먼저 탄 사람 발을 밟아버린 사람처럼 어쭙잖은 몸짓으로 처자는
가슴에서 꺼낸 복권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든 종이 다발은 처자의 가슴 온기로
따뜻했다. 돌멩이도 오래 품고 있으면 따뜻해지는데 하물며 한때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뿜으며 하늘이 시리도록 우듬지로 쓸던 숨탄것이 아니던가.
내일까지 팔려고 떼어온, 내 손바닥보다도 작고 밥 한 공기 무게에도 못 미치는 종이
뭉치가 처자의 전부일터. 그렇지 않고서야 젖가슴 속에까지 넣어서 관리할 리 만무고,
어느 시인이 노래한 “신이 가시면서 어머니를 조금 남겨 두었다”는 배꼽까지 훌렁
드러나도록 손을 넣어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도 외국인 사내 앞에서.
처자의 앙가슴에서 꺼낸 복권의 온기가 팔을 타고 메마른 광야에 울려 퍼지는
북소리되어 나의 영혼을 두드렸다. 거칠게 들이쉰 호흡이 가슴을 압박하는 바람에
고개를 들고 가로등에 달려드는 불나방을 향해 기어이 뜨거운 숨을 토해내고 말았다.
“허,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병든 동족을 쪼아 죽이는 꿩하고 대체 무엇이 다른가?”
‘후비가 700명이오. 잠자리 수청드는 빈장이 300명이었다는 솔로몬의 부와 재물이
들에 핀 꽃보다 못한 영광’이라고 생명의 말씀으로 남겼는데, 지천명이 훌쩍 넘도록
켜켜이 쌓아놓은 생명의 신비와 인간의 존엄성이 처자 가슴에서 나온 따뜻한 복권
앞에서 오뉴월 장마에 토담 무너지듯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구매한 복권 한 장을 넌지시 건네자 처자가 갈무리하던 복권 다발을 다시 내밀었다.
다른 번호로 바꾸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얼른 손사래를 치고 내밀었던 복권을
처자의 손에 쥐여 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이것은 당신에게도 행운이 함께 하기를 바라며 드리는 거예요.”
고개를 주억거리던 처자가 복권을 꺼낸 그곳에 오롯이 두 손 모아 “깜언 옹!”
(감사합니다. 선생님!)라고 인사하며 방시레 웃었다. 앞니가 사라져 텅 빈 검은
동공이 끝을 알 수 없는 폐광의 갱도처럼 깊어 보였다. 등 뒤에 푸른 반딧불이를
달고 멀어지는 처자의 뒷모습을 보며 내 마음 깊은 우물 속에 이렇게 되뇌어 보았다.
‘당신의 삶을 누가 주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복권 한 장은 나의 마음입니다.’
처자의 손에 든 채소가 가족들의 속을 따뜻하게 채워주면 오늘의 막은 내려질 것이다.
처자의 가슴 속 땀에 젖은 복권을 들고 골목길을 나섰다. 나의 체온으로 복권은 다시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제주 산 장끼
첫댓글
*개와 늑대의 시간: 빛과 어둠이 서로 바뀌는 / 언덕 너머에서
다가오는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대.
우문하나, 고향 : 태어난 곳 이라고 정의 한다면.
꿩알은 제주 산이고 부화는 사이공에서 했는데
그렇다면 저 박제 꿩은 어디가 고향일까요?
떡니 : 앞니의 가운데에 위아래 두 개씩 나 있는 넓적한 이.
애면글면 : 힘에 겨운 일을 이루려고 온갖 힘을 다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
순수한 우리 말이 돋보입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글 한 줄 쓰겠다고 사전을 들다보다가
아름다운 우리글이 참으로 많아서 놀랐습니다.
힘겨운 운명의 처자?
이빨 빠진 처자 오늘 하루 행복하면 만족 하는 가난한 사람들 가난 유전자로 살아온 나지만 가난이란 불편하긴 했어도 현재보다 만족하는 순간들
기뻐하고 내일을 기대 하는 꿈도 잦았다는 거 아주 소소한 것에 슬퍼하고 애태웠지만 그 작은 것들이 기쁨도 데려 왔다는 기억
아프리카 오지 흙 물 한 통 퍼오려고 하루를 허비하며 일생을
살지만 자살률은 제로 라는 현상
자살률 높은 우리 나라
그외 선진국들 삶의 질은 어떤 기준에서 출발하는지 생각해봅니다
자살률 높은거는 깊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빈부 격차를 줄이면 그만큼 자살률이 줄텐데요.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하듯이 너무 몰아세웠습니다.
참고 말씀 감사합니다.
저에게
보고를 하지 않으셔도
하테스님의 마음나눔은
계속되리라 생각합니다..ㅎ
오만동 용처가 다소
애매하긴 하지만..ㅎ
꼭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wait ~ㅎ
시장에 가면 마주치는 사람들이 행상이거나 복권 파는 이들입니다.
더러는 불편한 몸을 앞세워 적선을 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그냥 지나칠수 없어서 이야기 거리가 생긴거네요.
답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하테스 그 복권들
종이가 얇아서
당첨되어도
날아가버릴 것
같더만요..ㅎ
치열한 삶속에
그나마 순수함이 묻어 있는듯하여 다행스런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하루 되시길 바랍니다._()_
읽고나니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물소나라 아주 맑은 아침입니다.
맑은아침님께 감사드립니다._()_
복권을 그렇게 행상처럼 팔기도 하는군요.
다음번에는 돌려주지 마세요.아마도 복이 따라서 올 것 같네요.ㅎ
같은 번호가 여러장인 "등가적 공산당 복권" 이라서
처자가 맞으면 하테스는 자동으로 여러장이 맞는 복권입니다.
아 ~~ 감격이 넘쳐 흘러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자연이다님 복많이 받으세요._()_
삭제된 댓글 입니다.
재주 많은 삼족오님도 물소나라
복권처럼 "등가적 동지" 하입시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