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가케인 보고서, 백 년을 쓰다 (외 2편)
Daisy Kim
국경을 넘은 한랭전선이 편적운을 몰고 태평양을 건너온다
두고 온 족보가 꽃 파도로 일렁이는 호놀룰루항, 어금니를 꼭 깨문 하늘이 생의 물살 위로 설탕가루 같은 유성우를 뿌려준다
타국의 낱말이 밴 쓴 커피를 여물지 않은 초록 막대로 저어야만 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들, 막대의 연골이 녹아내렸다
이민을 연 사탕수수 한 껍질을 벗겨내면 시야 가득 상실과 고립이 발아된 청춘의 늪지와 나라의 독립이 설탕이 되어 꾸덕꾸덕 말라 붙어있다
눈물마저 태워버리던 열대우림 속 모국어로 뱉어낸 마른 숨이 잘라낸 밑동마다 끈적끈적 맺히고 먼 곳을 맨발로 건너온 노동이 떫었던 사탕수수의 숨통으로 하루하루를 동그랗게 거두어들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의 흰 계절은 젖은 흙 속 사탕수수와 함께였다
긴 막대마다 풀 비린내의 활자들을 익숙한 화법으로 뱉어내고, 나는 씹을수록 단맛을 우려내던 그 끝없는 노동의 하얀 결정체를 받아 적는다
해안선의 즐비한 녹색 막대를 따라가다 보면 갤릭호*가 들어오던 바닷길로 연결되고 설탕으로 밀봉된 독립자금을 나르던 물너울은 사탕수수의 뿌리에 닿아 하나로 이어지려는 내 핏줄이다
그 설탕 길로 햇귀 같은 봄이 다시 들어오고 있다 * 최초의 하와이 한인 이민선 올리브 숲 올리브 나무가 푸르렀을 땐 흔들리기를 멈추지 않는 나뭇잎 사이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의 지저귐이 나무의 직선을 타오르고 햇볕 줄기의 후렴구가 장래희망처럼 흘러내렸다
검은 숲에서 너는 조용하게 팔이 길어지는 오늘을 아침 안개처럼 쏟아내는 중이었다
깊은 여름의 속도로 푸른 가지의 관절마다 덜 여문 열매를 가득 달고 너는 내내 흐린 마음이었다
길을 모르는 어둠 앞에서 부서진 어제를 보려고 숲속에 걸어 두고 온 낡은 램프의 손목을 생각했다
꼬리를 잘라낸 토막말이 눈꺼풀의 방향으로 까만 눈물을 밀어내고 있는 여름이었다
스무 살의 작은 잎사귀에 구름 주머니는 줄무늬를 그려 넣고 햇살의 뼈를 발라낸 숲의 흉터는 검은 맛이 나는 열매로 그늘을 채우고 있었다 아메리카에서는 파프리카가 잘 자라니까 할 말이 있어요 어깨가 개수만큼, 파프리카의 색으로 하오의 좁은 창문으로 초록이 홍수처럼 흐르고 있어요 빈 집의 무표정이 쓸쓸할까요, 파프리카의 빈속이 배고플까요, 도망칠 수 없어 뿌리 속 뿌리로 멈춰 있었어요 혼자는 싫어서 쪼그라진 엄마의 얼굴을 심었어요 아메리카에서는 더 많은 비타민이 필요하니까, 뿌리는 떠나도 뿌리니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처럼 빨리 붉어지기로 했어요 노랗게 깨문 어제를 긁어모아 무게를 달았는데 고장 난 저울이었어요 첫인상을 변장하면 비겁일까요, 버려질 당돌함일까요, 깔 껍질도 없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헬로 하면서 어깨를 두드려요 깜짝 놀란 몸속의 씨앗들 여섯 개의 어깨가 볼록해지는 소리를 들어요 씻으면 거울처럼 반질반질한 오늘은 주홍, * 애니메이션 영화
—시집 『올리브 숲』 2024.2 --------------------------- Daisy Kim / 202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올리브 숲』. daisykim@hawaii.ed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