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타노 다케시를 처음 만난 건, 아마도 <소나티네>였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에 2000년 1월 국내 개봉한 것으로 나오니까 시사회는 아마도 1999년 연말 즈음일 듯한데, 그 즈음 난 일기 쓰기를 작파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여서 불행히도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아무튼 난 허주 언니와 함께 그 시사회에 참석했었고, 그 때는 서로 얼굴을 알지 못했던 슈퍼채터 오빠와 같은 공간에 있었을 것이다.
난 <소나티네>를 보고 흥분했었던 것 같다. 당시에도 유혈낭자한 영화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시도 때도 없이 총을 쏘고, 피가 솟으며, 사람이 죽는데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기타노 다케시의 그 무덤덤한 표정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매료시켰던 것은 바로 히사이시 조의 그 음악. 사운드트랙을 찾아 얼마나 헤맸던지. 아직도 국내에 라이센스 발매가 되지 않은 그 음반을 나는 수소문 끝에 입수했고, 지금 정말 아끼는 소장 사운드트랙 중 하나가 되었다.
스물아홉 번째 생일을 맞은 오늘. <키즈 리턴>과 함께 그의 필모그라피에서 예외적인 작품으로 여겨질 만한 또 다른 작품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를 보았다. 집에 와서 손꼽아 보니 솔직히 다케시 감독 영화 중에 내가 본 작품은 몇 되지 않는다. <키즈 리턴>, <기쿠지로의 여름>, <자토이치> 정도. 아마도 그가 출연했던 <배틀 로얄>, <고하토> 등이 뇌리에 남아 있어 그의 작품들을 많이 보았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년 시게루는 청소차를 타고 다니면서 쓰레기 수거를 한다. 여자 친구와 해변을 서성이던 어느 날, 우연히 서핑 보드를 주운 그는 날마다 해변에 나와 파도 타기 연습을 한다. 제대로 된 서핑복도, 코치도 없이, 낡아 빠진 보드를 들고 열심히 바다로 뛰어드는 그.
서핑하러 가는 그를 매일같이 보는 동네 청년들이나 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본다. 귀머거리 청소부 주제에 서핑은 무슨. 낡아 빠진 서핑 보드도 부러져 버리고, 시게루는 여자 친구와 자기가 가진 돈을 긁어모아 보지만 새 보드를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그리고 드디어 월급날! 두 사람은 예전에 할인해 달라는 요구를 거절당했던 그 가게에 다시 찾아가 당당하게 서핑 보드를 구입한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려는데, 기사가 차내가 복잡하다면서 승차를 거부한다. 시게루는 보드를 들고 뛰어서 집으로 가고, 버스를 탄 여자 친구는 그보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해 자기가 온 길을 되돌아 뛰어간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만나서 함께 걷는다. (특별한 장면도 아니고, 멋진 대사 한 마디 없는데, 그런데 이 장면이 왜 그리 가슴이 찡하던지.)
두 사람은 항상 말이 없다. 앞뒤로 나란히 서서 서핑 보드 앞쪽은 시게루가, 뒤쪽은 여자 친구가 붙잡고 해변으로 향한다. 매일 같은 길로. 그 길 한 편에는 운동장이 있고, 축구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비웃는다. 해변에 도착하면 시게루는 혼자서 바다에 뛰어들어 파도 타기 연습을 하고, 여자 친구는 뒤에 남아 시게루가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을 잘 접어서 한켠에 놓고, 아직 초보라서 매번 넘어지기만 하는 시게루를 보며 말 없이 웃는다.
잠수복도, 코치도 없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면서도 시게루는 꿋꿋하게 서핑을 한다. 그리고 조금씩 나아진다. 그에게 비싼 값에 서핑 보드를 팔았던 가게 주인은 그런 그의 모습에 감명을 받아 잠수복도 주고, 코치도 해주고, 서핑 대회 참석을 권유하기까지 한다. 참가 신청서를 엉망으로 써 놓고(이 장면에서 사람들이 많이 웃던데, 나는 일본어를 하나도 몰라서 사람들이 왜 웃는지 그 이유가 매우 궁금했다는. 어흑) 뒤로 벌렁 자빠지는 시게루. 지우개로 시게루가 써 놓은 부분을 지우고 또박또박 다시 써 주는 그의 여자 친구.
드디어 처녀 출전. 차가 없는 두 사람은 배를 타고, 다른 사람의 차를 얻어 타고 대회장에 도착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시게루는 출전을 알리는 소리를 듣지 못해서 물 속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대회는 끝나 버린다.
해변가에서 종종 마주치는 다른 커플이 있다. 남자애는 항상 보드를 들고 바닷가로 뛰어들어가다가 항상 물에 들어가기 직전 너무나 우스꽝스럽게 넘어진다. 그리고 그의 여자 친구는 항상 먹을 것을 들고와서 시게루에게 껍질을 벗겨 달라 한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두 번째로 목격한 시게루의 여자 친구. 그녀는 말도 없이 뒤돌아서 가 버린다.
며칠째 여자 친구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시게루는 몇 번씩이나 그녀의 집을 찾아가지만. 벨을 눌러도, 그녀의 방 창문 앞쪽으로 운동화를 몇 번씩이나 던져도 그녀는 아무 소리가 없다. 시게루는 돌을 집어들고 창문을 향해 던진다. 하나, 둘, 쨍그랑~ 역시 아무 소리가 없는 그녀의 집을 뒤로 한 채 시게루는 발걸음을 되돌리는데. 그 때 달려나오는 그녀.
두 사람은 다시 예전처럼 아무 말 없이 서핑 보드를 들고 해변으로 향하고, 여자 친구는 그의 옷을 개켜 주고, 그가 서핑하는 모습을 구경한다. 서핑에 몰두하느라 일 나가는 것도 잊어버린 시게루. 직장에서 짤릴 위기에 놓인 시게루에게 함께 일하는 선배가 찾아와 서핑복 입은 채로 그를 끌고가 일하는 장면은 다케시다운 유머가 엿보이는 장면.
드디어 두 번째 출전. 청소 일을 같이하는 동료를 포함하여 주변 사람들과 서핑 가게 주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그. 스페셜 클래스도 아닌, A 클래스도 아닌, 비록 B 클래스이긴 하나 결선에 진출하는 시게루. 그리고 시상식. 감독은 시게루가 상 받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기는커녕, 그가 몇 등인지도 알려 주지 않고 스리슬쩍 지나가는 장면으로 처리한다. 곧바로 스페셜 클래스 시상식을 보여 주면서 1등 먹은 사람의 수상 장면만 보여 주니까. 시게루의 트로피는 1등상 트로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담하고 귀엽다. -_- 그렇지만 시게루와 그의 여자 친구는 그 작은 트로피를 보면서 뿌듯해하고 기뻐한다. 동료들의 축하와 기념 촬영. 그 작은 소동이 다 끝나고 나서야 ‘6위’라고 쓰인 트로피를 살짝 보여 주는 감독.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았다. 청각 장애인 청소부가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끈기로 주변 사람들의 호의를 얻어 작은 승리를 일구어 내는 휴먼 드라마. 그러나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대회도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그들. 비가 오는 날에도 시게루는 서핑복을 입고 서핑 보드를 들고 해변으로 향하고, 조금 뒤 어김없이 그의 여자 친구도 해변으로 향한다. 그러나 해변에 시게루는 없다. 그의 서핑 보드만 해변가에 떠돌 뿐. 그 날따라 거센 파도가 시게루를 덥쳐 삼켜 버렸다.
여자 친구는 서핑 보드에 뭔가를 열심히 붙인다. 대회에서 우승한 날 함께 찍었던 사진. 보드를 들고 물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그녀. 그리고 시간은 다시 두 사람이 함께 있던 시간으로 되돌아 가서 즐거웠던 그 시절을 보여 준다. (이 장면들은 앞선 장면에서는 나오지 않은 장면들인데,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들만 보여 주고 있다)
주인공이 말을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는 대사가 거의 없다. 그 공간을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메워 준다. 이미 다른 영화들을 통해 그의 음악에 익숙해진 탓인지 처음 스코어곡이 흐를 때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의 음악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키즈 리턴>과 함께 기타노 다케시의 작품들 중에서 야쿠자가 등장하지 않는 그리고 다케시가 등장하지 않는 예외적인 영화다. 그가 감독한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서정적이고 비폭력적이다. 하지만 <기쿠지로의 여름>이나 <키즈 리턴>에서도 일견 엿볼 수 있었던 그만의 유머 감감이 작품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예를 들면, 축구장에서 시게루를 비웃다가 그를 따라 서핑을 시작하는 덤앤더머라든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시게루가 겪게 되는 몇몇 우스운 상황들.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너무 심심하다. 둘 다 항상 심드렁한 표정에, 수화로 나누는 대화도 손에 꼽을 정도로 두 사람은 말이 없다. 게다가 여자애는 서핑도 안 하고 매번 모래사장에서 시게루 옷만 챙기고, 구경만 하는데 그래도 좋은 걸까? 아무리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지만, 변변한 직업도 없는데 자신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서핑을 하려는 벙어리 남자 친구라니. 그런데 계속 시게루를 보고 있노라니 이 총각, 요즘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진국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진 피터슨의 [한길 가는 순례자]의 원제인 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는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을 의미한다.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탄탄대로를 달려 하루아침에 반짝 스타가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요즈음. 그것이 크건 작건 무엇이 되었건 간에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을 위해 말 없이, 꾸준히, 매일같이 그 길을 달려가는 인내심. 그리고 그런 친구를 곁에서 항상 지지해 주고, 말 없이 응원해 주는 동역자. 눈빛만으로 모든 것이 통하는 친구. 짧기에 더욱 아름답고 행복했을 두 사람이 함께했던 시간들.
이 영화는 코아아트홀에서 마련한 기타노 다케시 감독 특별전의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을 놓쳤는데, 많은 관객들의 성원에 힘입어 다음 작품 <3-4x10월>이 끝난 이후 앵콜 상영을 한다고 하니 기타노 다케시를 좋아하는 분들은 놓치지 마시길. 상영작 소개 및 상영 일정은 홈페이지 참고. http://www.kitano.co.kr/index.htm
첫댓글저도 봤는데 너무 좋았어요. 치바서핑대회 신청서 적을 때 사람들이 웃는건, 키와 몸무게에 해당되는 란인데 엉뚱한 숫자를 적어서에요. 키는 너무크고 몸무게는 너무 작게쓰거든요. 시게루가 눈치 못채게 살짝 고쳐주는 장면, 너무 좋았져? 또 손잡고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두요. :)
첫댓글 저도 봤는데 너무 좋았어요. 치바서핑대회 신청서 적을 때 사람들이 웃는건, 키와 몸무게에 해당되는 란인데 엉뚱한 숫자를 적어서에요. 키는 너무크고 몸무게는 너무 작게쓰거든요. 시게루가 눈치 못채게 살짝 고쳐주는 장면, 너무 좋았져? 또 손잡고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두요. :)
아, 그렇군요. 슈퍼주인님 감사해요. 시게루가 뭘 엉뚱하게 썼다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그게 뭔지 너무너무 궁금했었거든요. 맞아요. 그 장면, 저도 좋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