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가 썼다는 《오뒷세이아》를 읽었습니다. 환대가 자주 강조됩니다. “그대는 빵과 포도주로 맘껏 배를 채운 다음 그대가 어디서 왔으며 얼마나 많은 고난을 참고 견뎠는지 이야기해주시오”(호메로스,천병희 옮김,《오뒷세이아》,숲,305쪽)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의 신분이나 소속을 확인하지 않고, 그 사람이 누구이든 먼저 먹거리, 마실 거리, 입을 거리, 잠자리를 제공합니다. 식당이나 숙박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옛날, 나그네를 환대하는 건, 언젠가 나그네로 길을 나설 수 있는 자신을 위한 투자입니다. 환대하는 이유는 환대한 대로 대접받기 위함인 것입니다. 남을 환대하는 이타적 행위는 내가 환대받고자 하는 이기적 욕구와 닿아 있습니다. 남을 위한 것이 곧 나를 위한 것이라는 깨달음과 실천은 지혜롭습니다. 여기에 나를 찾아온 나그네가 ‘신’일 수 있다는 신앙으로 비약하면, 나그네라면 신적인 존재로 존숭 받습니다. 나그네가 하ᄂᆞ님이라는 신앙고백은 사랑입니다.
바울 쓴 《로마서》는 은혜를 강조합니다. 하ᄂᆞ님은 이방인을 포함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ᄂᆞ님께서 주신 은혜를 받은 이들에게 바울은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라 합니다. 산 제물은 하ᄂᆞ님에게 바치는 제물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듯,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듯 살라는 게 바울의 제안입니다. 제물은 답례나 보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답례나 보답을 받기 위해 사랑하는 게 아니라, 죽는다 해도 사랑하고, 사랑 그 자체로, 사랑은 완성됩니다.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자기를 산 제물로 바치는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다 여깁니다.(고린도전서1:18)
보답이나 답례를 바랄 수 없을 때,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사랑하긴 어렵습니다. 보답이든, 답례든, 아니면 명예든 무언가 얻는 게 있어야만 우리네 사랑은 지속 가능합니다. 사랑에 보답은 커녕 불평이나 불만을 드러낸다면, 사랑을 지속하기란 어려운 노릇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런 현실이 표현돼 있습니다. “저는 인류를 너무도 사랑하여, 정말로 가끔씩은 모든 걸, 갖고 있는 모든 걸 버리고… 간호사의 길을 떠나는 꿈을 꾸곤 합니다. … 하지만 눈을 감고서 자문해 본답니다. 이 길로 들어서서 오랫동안 견딜 수 있을까? 하고요. 만약 내가 어떤 환자의 상처를 씻겨 주는데 … 그 환자가 고마움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변덕을 부려 괴롭힌다면, 박애적인 봉사를 높이 평가하기는커녕 아예 그것을 알아주지도 않고 소리를 지르고 거칠게 요구하고 심지어 어디 상부에다 불평을 늘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랑은 지속될 것인가? 하고요”(도스토옙스키,김연경 옮김,《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민음사,126쪽)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를 산 제물로 드리라 합니다.(롬12:1~2) 인신 제사를 바치라는 건 아닙니다. 생명을 죽여 제사를 드리듯, 날마다 죽는 까닭에 보답과 답례 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죽은 제물이 보답과 답례를 받을 수 없듯, 살아서 행한 모든 선행에 대해 대가를 받을 기회를 죽음으로 차단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제물이 되려면 흠이 없어야 합니다.(레위기22:17) 하ᄂᆞ님 앞에 살아있는 제물로 나를 바친다는 건, 흠 없는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곳에 있든, 어떤 순간을 지나든 하ᄂᆞ님을 거울 삼아 자신을 살피고 가꾸는 것이 우리가 드리는 ‘영적(합당한) 예배’입니다. 돌고래는 지능이 높아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돌고래보다 지능이 낮은 동물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람은 거울을 보고 자신을 알아볼 뿐만 아니라 거울을 보고 자신을 가꿉니다. 돌고래보다 지능이 높기에 사람은 하ᄂᆞ님의 눈을 거울 삼습니다. 하ᄂᆞ님의 눈에 비친 자기 흠을 발견하고,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날마다 죽어,(고린도전서15:31) 날마다 부활하는 것이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종교 의례와 계율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유대교에 바울은 저항합니다. 의례와 계율에 엄격하기보다 하ᄂᆞ님 앞에, 사람들 옆에서 성실(faith;믿음)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게 바울의 주장입니다.(롬8:1) 종교 의례와 계율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ᄂᆞ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옆에서 ‘거룩한 산 제물’로 나를 바치는 것에 대해 모세오경은 자세히 소개합니다. 하ᄂᆞ님은 모세를 통해 “거룩하라” 명령하시며(레19: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려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 재판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레19:9~16)
거룩한 산 제물로 나를 하ᄂᆞ님께 드린다는 건, 하ᄂᆞ님께서 명령하신 거룩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내 재산과 소득에 대한 권리를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노동하는 사람이 정당한 권리를 제때 받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장애인을 혐오하지 않고, 모든 장애인이 비장애인처럼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사법 정의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행사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하게 모든 생명이 생동하며 일상을 살아가도록 하ᄂᆞ님의 눈을 거울삼아 나를 가꾸고, 이웃들의 곁에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게, 거룩한 산 제물로 나를 바치는 것입니다.
거룩한 몸으로서 살아있는 제사를 드리고 있는지 확인할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위한 섬김입니다. 얼마만큼 섬기면 될까요? 하ᄂᆞ님께 받은 것을 기준 삼는다면 한도 끝도 없을 텐데요. 바울은 모든 사람이 각자 분량대로 하면 된다고 안심시킵니다. 하ᄂᆞ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믿음의 양(a measure of faith)을 주셨고,(롬12:3) 딱 그만큼만 성도들을 위해 섬기라고 바울은 격려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만큼 섬기면 되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만큼 섬기면 되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만큼 섬기면 되겠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각자 지닌 믿음의 양을 나누고,
보답이나 답례 바라지 않고 이웃을 환대하는 순간, 그 순간 순간이 하ᄂᆞ님나라입니다. 오뒷세우스처럼, 사람은 쉬지 않고 길을 가나 끊임없이 길을 잃는 나그네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느네여서, 나그네의 정황을 이해하고,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것이 황금률입니다. “나그네를 섬기는 나그네”가 천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