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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氏. 衛氏는 周나라 姬姓 衛康叔封 후손이다
강씨(康氏). 위씨(衛氏)의 부모가 되는 성(姓)은 周나라 왕실성(姓)인 희(姬)로 시조(始祖)는 위강숙(衛康叔) 봉(封)이고,적장자(嫡長子) 계통인 대종(大宗)이 衛氏, 차남계통 소종(小宗)이 강씨(康氏)인데,특별한 점은 康氏가 먼저 생겼고, 위씨(衛氏)가 나중에 생긴 것이다. 周의 시조 후직(后㮨)은 이름이 棄(기)이다, 그어머니는 有邰氏(유태씨) 여자로 강원(姜原)이라 하였다. 강원은 帝嚳(제곡)의 元妃(원비)였다.
棄(기)는 농사를 잘 지었다, 제요가 소문을 듣고 기를 농사(農師)로 삼았다.
제순은 “기(棄), 인민들이 바야흐로 굶고 있으니 그대가 후직(后稷=좁쌀의 왕)이 되어 때에 맞추어 백곡의 씨를 뿌리도록 하라고 했다. 기를 태에 봉하고 후직(后稷)이라 부르는한편 희씨(姬氏) 성(姓)을 내렸다.
후직(后稷) 희(姬) 기(棄)의 15세(世) 손(孫)은 중심국인 상(商)나라 주변 조공국 주(周)나라 문왕(文王), 서백(西伯=서쪽에 있는 공후백 3등급 크기중 가장 작은 좁읍(族邑)을뜻함)희(姬)창(昌)이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18명의 아들을 뒀는데,적처(嫡妻)태사(太姒)와 사이에 10명의 아들을 뒀고, 강(康)씨 뿌리가 되는 16세손 위강숙 희(姬)봉(封)은 아홉째 아들이다.
강(康)씨는 주 문왕(周 文王) 희(姬)창(昌)의 적처(嫡妻) 태사(太姒)의 둘째 아들 주 무왕(周 武王)때 희봉(姬封)의 분봉국은 강(康)나라로,희봉(姬奉)은 조카 성왕때, 주(周)나라 5단계 관작(官爵)인 공후백자남(公候伯子男)
중에서 후(侯) 관작(官爵, )강후(康候)로 불렸고,삼감이 난(三監-亂)을 주공 단(周公 旦)이 평정한후, 상(商)나라 수도 조가(朝歌)지역에 위(衛)나라를 세웠고, 희봉(姬封)을 위후(衛候)로 본봉하면서, 주 성왕(周 成王)의 숙부, 위강숙(衛康淑)으로 불리게 됐다.
위(衛)나라 왕실 대종(大宗) 성(姓)은 적장자 (嫡帳子)인 백모(伯牟 =伯髦)가 계승 희성(姬姓) 위씨(衛氏)시조가 됐다. 위강숙(衛康叔)은 형인 주공 단(周公 旦)의 충고인 강고(康誥 )에 따라서, 주(周)나라가 멸망시킨 상(商)나라 왕족인 기자(箕子)에 대한 반란 예방 감시가 필요했고, 위강숙 둘째아들이 기자(箕子)가 있던 평양(平壤=壤平),현재 요양시)에 왔고, 기자(箕子)가 강씨(康氏)성을 하사 하고 건국 공신으로 임명했다고 신천강씨 상계에 기록돼있다.
서쪽 노예국 주나라는 주인국 상나라에 BC1122년 반란 성공를 시작으로 BC1043년 발생한 삼감의 난을 3년 걸려서 상나라 재기 시도를 완전 평정한 BC1046년 건국 시점이 유동적인 이유는, 주모왕 반란이 역성혁명을 앞세우지 않았고 상나라 왕실을 존속 시켰기 때문에, 상나라가 완전 망한 시점을 BC1046년으로 보고, 주나라 건국 시점으로 본다.
상나라 왕족 기자는 왕족 대접받던 BC1122년에 평양으로 이동 했고, 상나라 사람들은 BC1046년부턴 강제 이주 사민정책 노예로 전략했다.
한국 신천강씨 대종회 중국 강(康)씨와 교류 조사 내용에 따르면, 중국 길림성 금주국사-중국 국가 박물관에 소장된 서주시대 초기 청동기, 군권을 상징하는 강후부(康候斧)가 출토되면서 강후(康候)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희성(姬姓) 강씨(康氏)는 강후(康候)에뿌리가 있다. 모(髦)는 어릴 때 짓는 아명(兒名)으로, 보통 한 글자만 짓고, 백(伯)중(仲)숙(叔)계(季)현(顯)혜(惠)아(雅達)유(幼)를 순서대로 붙인다. 따라서 둘째 아명은 중모(仲髦)가 되고, 성인이 되는 관례(冠禮)후 관명(官名)이나 관작(官爵),또는 별호(別號)로 불리게 된다, 위강숙의 둘째 중모(仲髦)는 강(康)나라 출신으로, 위강숙에 의해 후(候)로 배치됐기에 기자로부터 강후(康侯)로 불린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의 강(康)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1,625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56위이다. 본관은 신천,곡산,재령,충원,제주,진주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하나, 고려 태조 왕건의 외가 6대조인 강호경(康虎景)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있고, 강호경(康虎景)은 주 문왕(周 文王) 희(姬) 창(昌)의 손자인 희성(姬姓) 강씨(康氏) 득성조 강후(康候)의 68세손으로, 어릴 때 (兒名)은 강기(康騎), 강호경(康虎景)은 관명(冠名)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 작제건(作帝建),작제건(作帝建)의 아버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작제권(作帝建)의 어머니이자 왕건의 증조모 정화왕후(貞和王后) 강한진의(康韓辰義)아버지인 강보육(康寶育)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존했고, 강보육(康寶育)의 조부 강호경(康虎京)을 국조대왕(國조대왕)으로 추존했다,
신천강씨는 강보육(康寶育)의 형인 강보전 (康寶甸)의 후손이다.
강보육(康寶育)은 손호술(損乎述)로 불렸고 개명했다. 신천강씨 가계도엔 아버지 강충(康忠)아들은 보전(寶甸) 보육(寶育)2명으로, 이제건(伊帝建)은 없다. 강보전(康寶甸)의 별호이다.
고려 태조 22번째 신주원부인 아버지인 강태주(康泰周)와 둘째 아들 8세손 강조(康兆)가 고려 목종 퇴위, 김치양을 죽이고 대량원군을 세우면서 거란이 세운 요나라 성종이 정변을 구실 삼아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 전투에서 패하면서, 처형됐다. 이후 목종 퇴위 역적으로 몰리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몽고 침입으로 고종(高宗)이 강화도로 몽양 할 때,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관력(官力)이 뚜렷한 중시조(中始祖)14세 강지연(康之淵)공이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에 봉해지면서, 신성(信城)=신천(信川)이 본관이 됐다. 평강파(平康波)가 강지연(康之淵)공의 적장자(嫡長子) 대종(大宗)이다.
16세손 강원(康遠)의 셋째 아들인 17세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득함(康得咸)의 큰손자 19세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서(康庶)를 모시는 상산(象山)=곡산파(谷山派)를 이루고, 적장자(嫡長子)강윤귀(康允貴)후손인 평양파(平壤派)가
대종(大宗)이다.
강서(康庶)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신덕왕후 아버지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20세 강윤성(康允成)의 적장자(嫡長自)21손 강득룡(康得龍)이 조선이 개국 되자 불사이군, 고려조에 충절을 지키기 위해 낙향하자, 조선 태조가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하고 안정공(安靖君)이란 시호를 내렸다, 21세손 강득룡(康得龍) 후손인 안릉(安陵)=재령파(載寜派)를 이루는 3본은 같은 혈통이고, 강지연(康之淵)공의 후손은 57개 분파가 있다.
평안남도 편안북도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한국 신천강씨 대종회는 매년 10월3일 과천에서 세향제를 지낸다.
신천강씨 시조인 강호경(康虎景)을 성(姓)을 뺀, 호경(虎景)으로 부르려는 시도가 있다. 강씨(康氏) 시조 성씨를 빼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 상계가 불 분명한데다. 외가로 보이는 강보육(康寶育)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씨와 시대 상황을 고려 후기와 현대 상황에 꿰 맞추기 하기 때문에, 혈통이 불편해 보이기 때문이로. 2가지 이해 해야 할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성(姓)은 나라를 창건하면 소종(小宗)인 씨(氏)로 새 성(姓)을 창성(創姓)하는 것이 성씨(姓氏)란 것으로, 후기 국가로 오면서 분파로 구분 바꾸지 않게 된것이고, 두 번째는 康忠의 두아들은 신라 시대 사람으로 信川康氏 직계 조상 기록인 상계에 따르면, 관작 이동이 마한(馬漢)-강주 (康州)=가야(伽倻)-신라(新羅)흐름으로 벼슬이 기록돼있고, 마한 왕실이 백제에 망한 후 일정 기간 동안 강주 지역엔 가야가 있었다. 신라에서 첫 벼슬은 이벌찬으로 기록돼있고, 마한 왕실이 백제에 망한 후 일정 기간 동안 강주 지역엔 가야가 있었다.신라에서 첫 벼슬은 이벌찬으로 기록돼있고, 이벌찬은 성골귀족이 받는 벼슬이다. 신천강씨가 북쪽인 평양 인근에 정착하게 된 것은,김유신 고구려 정벌 때 58대 강치상(康致祥)이 총관(總管)으로 참전한 것이 평양, 신천지역 토착 호족이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태봉국 김궁예(金弓裔) 왕후 강비(康妃)의 아버지 강연창(康衍昌)은 강호경(康虎景)의 6세 손이다. 신라가 망할 때부터 태봉국까지,강호경 후손은 신라에서 관직을 했다. 신라는 사로 6촌장 = 왕이 6명인 형태로, 씨족 권력을 지키기 위한 진골 성골 귀족이 존재했고, 신라가 망할 때 근친 혼인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해 죽은 뒤에 추봉되는 갈문왕(葛文王)이 있었다. 강보육(康寶育)의 형인 강보전(康寶甸)의 딸인 조카 강덕주(康德州)다. 강보육(康寶育)의 딸인 강한진의(康韓辰義) 아들은 작제건(作帝建)이고, 강보전(康寶甸)의 별호는 김관의 편년통록을 참고하면 이제건(李帝建)으로 보인다. 신라 시대엔 어색한 일이 아니였지만, 고려 중기 송나라와 교류하면서, 성씨(姓氏) 족내혼을 금기시 하는 송(宋)나라 문화를 숭상하는 문신들 영향으로 고려 왕조 상계는 불편한 진실이 됐다.
신천강康씨 57개 분파도
고려의 국조와 관련 있는 내용 링크
고려의 역대 국왕 = 초존된 왕을 보면,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의조 작제건은 직계 조상이니 당연해 보이는데, 국조는 작제건 어머니 정화왕후(貞和王后) 강한진의(康韓辰義)의 아버지인 강보육(康寶育)을 국조(國祖)로 표시하고 있다. 손호술(損乎述)로 표시하고 있는데, 김관의 편년통록은 왕국조는 손호술(損乎術)이며 보육(寶育)으로 나중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의조로 추정되는 작제건의 외조부라 하였다. 이제현의 사론에 따르면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에는 말하기를 왕국조는 태조의 증조모 정화왕후는 왕국조의 왕후라고 하였다. 또 《성원록(聖源錄)》에는 말하기를 보육성인(寶育聖人)이라는 자는 원덕대왕의 외조부라고 하였다.“라 하여 김관의의 설을 부정하였다. 정화왕후 강씨가 강보육의 딸이라면 국조는 보육이 될 수가 없다.
당연한 얘기로, 아버지를 남편으로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 안되는 것인데,
김관의(金寬毅)는 그의 책 편년통록에서 강충이 두 아들을 낳아 이제건,강보육이라 했는데, 강보육은 일찍이 곡령에 올라 남쪽을 향하여 오줌을 누워더니, 삼한의 산천이 은빛바다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다음날 보육은 그의 형 이제건에게 말했더니 이제건이 꿈을 해몽하며, ”너는 큰 인물을 낳으리라“ 하고 그의 딸 덕주를 아내로 삼아 뒤에 두 딸을 낳았다, 이제건은 딸 덕주가 있었고 보육에게는 딸만 둘 있었는데 그 중 둘째딸 진의는 언니의 꿈을 산 뒤 고려 국조 또는 당숙종(또는 당나라 선종)과 동침하여 작제건을 낳았다고 한다. 이제건의 딸 덕주는 그의 친정어머니이면서 사촌언니가 된다. 작제건은 왕건의 할아버지이다. 뒤에 증손자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정화왕후로 추존하였다.
고려사절요에서는 국조의 비(妃)를 정화왕후로 기록하고 있고, 고려사에서는 정화왕후를 강보육의 딸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국조를 강진의의 친정아버지인 보육이라고 하는 설이 있어서 이 설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한 정화왕후의 아들인 의조의 아버지를 당숙종과 정화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은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를 인용하며 의조(작제건)의 아버지가 당 숙조이라는 이야기를 허구로 규정하였다.
김관의가 편년통록 내용에서 강충의 두 아들
이제건과 강보육을 표현은 신천강씨 족보와 강보육, 두 아들, 작제건의 외조부, 3가지가 일치하고, 이제현의 사론에 다르면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에는 말하기를 왕국조는 태조의 증조모 정화왕후는 왕국조의 왕후라고
하였다. 또 《성원록(聖源錄)》에는 말하기를 보육성인(寶育聖人)이라는 자는 원덕대왕의 외조부라고 하였다.
이제현의 사론이 인용하는 왕대종족기는 왕국도가 누군지 언급하지 않고 있고, 성원록에서 보육성인(寶育聖人)이 국조인 원덕대왕의 외조부라는 것은, 자체 모순 틀린 얘기로, 신천강씨 족보를 보면 ,보육은 정화왕부의 아버지로 표시돼있다. 정화왕후 남편의 외조부란 얘긴데,남편이 누군지도 불분명한데, 남편의 아버지와 어머니 외가를 어떻게 알 수 있나? 신천강씨 족보상 성원원은 오르가 100%입니다. 고려사에서 정화왕후를 강보육의 딸로 기록한 것은 신천강씨 족보와 일치하고, 국조가 보육이라는 것을 설일 뿐이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강충의 아들 강보전 강보육 2명 뿐이란 것이고, 강보육은 편년통록에 따르면 강보전으로 생각되는 이제건 딸인 조카 강덕주를 부인으로 삼았고, 강보육은 딸만 둘 있었는데, 강덕주의 딸이란 언급은 없으며, 남편인 강보육의 딸로만 기록돼있다. 이제현은 당숙종 설이 허구란 것을 증명한 것이지, 국조가 누군지를 규정하지 않았다. 또, 강보전으로 생각되는 이제건과 의조 작제건(作帝建), ‘제건’일치 되는 것을 보면, 국조(國祖)는 강보육이 아닌 강보전일 가능성 있다. 정화왕후가 강덕주의 딸이란 명시된 것이 없는 것을 보면, 강보전 강보육 형제는 별호로 생각되는 손호술, 이제건 관련 내용을 참고하면 별호가 이제건인 강보전이던, 변하지 않는 사실은 강씨(康氏)란 것으로. 강성왕씨(康姓王氏)는 성씨(姓氏)가 분파 구분으로 바뀌지 않는 후기와 달리, 엣날엔 성씨가 바뀌었고, 성(姓)에서 씨(氏) 바뀌는 시점이, 가문이 있는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새 일가를 이뤘을 때, 나라를 창업했을 때, 지역을 분할 받아 왕으로 분봉 됐을 때, 나라 왕실이 망했을 때입니다.
당 선종(당선종,810년~859년)은 당(당)의 제16대 황제(제위:847년~859년)이다. 13살 823년 궁을 떠났고, 847년 재위했으니, 24년 사이에 작제건을 만들었다는 얘기, 왈륭은 847년 왕건을 나았으니 적어도 20살은 넘었을 테고, 그럼 857년, 작제건이 20살에 왕륭을 낳았다면 837년, 국조가 20살에 작제건을 낳았다면 817년, 당 선종 7살 정도? 즉위하기 전 출가해 중이 되어 하남(河南)의 절전(浙川)에 있던 향엄사(香嚴寺)라는 절에 피신해서 법명을 양준(양俊)이라 하였는데, 절천 향엄사는 중국 서쪽 끝에 있는 절로, 비행기가 없던 그 시절에 7살 어린 나이에 한국까지 올 순 없고, 신라에서 성골 벼슬 했던 지역 호족 신천강씨가 많아야 7살 어린 소년에게 딸을 내줬을까? 7살도 20살에 다들을 출산했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나이, 따라서 중국 기록에도 없는 당 선종 국조 설은 고려 후기 송나라 성씨 문화 유입, 어색해진 족내혼을 덮기 위한 전설 일 뿐이다.
고려 추존왕 국조가 강씨던, 달라지지 않는 사실은, 왕씨 부계 조상이 작제건 윗대가 뚜렷하지 않은 지역 호족 기반이 없다는 사실, 그럼 작제건-용건-왕건 왕씨 3대를 뒷받침 할 호족은 외가인 康氏 밖에 없다는 사실, 신천강씨 족보에 왕건 이름 올라와 있다는 자체가 바뀌는 성씨 특성을 고려하면, 강성왕씨(康姓王氏)는 유전적으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강씨(康氏)
위강숙(衛康叔) 희성(姬姓)에서 파생된 강씨(康氏) 성씨(姓氏)가 있고, 사마르칸트 계통으로 만주에서 진출한 강국(康國) 소무구성(昭武九姓) 왕실 성(姓) 온성(溫姓)에서 파생된 강씨(강씨), 돌권,선비,소그드,만주족,부여,만주지역과 관련 있는 국가들은 강씨(康氏)와 연결 고리가 있는 중앙시아 유목 혈통에 뿌리가 있다.
안녹산의 계부 안씨(安氏), 친부 강씨(康氏)는 모두 소무구성 강국(康國) 온(溫) 안(安) 조(曹) 석(石) 미(米) 하(何) 심(燖) 무지(戊地) 사(史)에 포함돼있고, 나라가 망하면 왕실 대종(大宗) 성(姓)은 보통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쓴다. 소무성은 중국 서쪽 간수성에 있는 거리가 먼 지역이지만, 장사를 잘하는 특징 있고, 공통 분모가 있는 온성(溫姓)은 온조 고구려 전신인 부여와 연결 고리가 있는 백제 왕이고, 온달(溫達) 고구려 장군이 존재, 무관할 수 없다. 동부여(東夫餘) 대소왕 막내 동생 갈사왕이 세운 갈사국(葛思國),22년~68년)은 갈사수(葛思水)가에 세운 나라이다.갈족葛族,말간(靺鞨),갈葛갈찌, 강가에 있는 돌 자갈 = 석씨(石씨)
희성(姬姓) 강씨(康氏), 온성(溫成) 강씨(康氏) 2계통이 있습니다.
주 문왕(周 文王) 서백 희姬 창昌
18명의 아들을 뒀고, 본처 태사(太姒) 형제는 10명
1. 백읍(伯邑) 고(考): 상(商)나라 왕 제신 (帝辛)이 문왕 희창을 유리에 있는 성에 가뒀을 때 죽여 죽을 쒀 먹였다.
2. 주周 무왕(武王) 발(發): 당, 진, 위, 한, 정, 공손, 석, 주나라가 망할 때 희성 주(周) 씨로 바꿨다.
3. 관숙(管叔) 선(鮮): 관(管) 삼각의 난 가담(망한 상나라 태자 무경 감시자, 동생 주공 단에 불만 무경과 함께 반란) 반란 진압 후 처형 됨
4. 주공(周公) (旦) 노(魯), 게손,숫손, 맹손, 공(공) 9주 무왕 사후, 성왕 섭정, 삼감의 난 평정)
5. 채숙(蔡淑) 도(度): 채(蔡) 삼감의 난 가담(망한 상나라 태자 무경 감시자, 주공 단 불만 무경과 함께 반란), 진압 후 유배, 형 주공 단이 채숙 도 아들을 채나라에 분봉함.
6. 조숙(曹淑) 진탁(振鐸): 조(曺)
7. 성숙(成淑) 무(武): 성(成)
8. 관숙(籗淑) 처(處): 곽(霍) 삼각의 난 가담(망한 상나라 태자 무경 감시자, 주공 단 불만 무경과 함께 반란)
9. 강숙(康淑) (封); 강(康) 위(衞), (주공 단 삼감의 난 평정후,위 국에 봉함)
10. 담계(聃季) (載): 심(沈)씨
후 처 아들
모숙 정(毛叔 鄭). 곡숙(郜叔).옹백(雍伯).착숙 수(錯叔 繡).필공 수(畢公 繡)필씨에서 위(魏)씨로 바뀜.원백(原伯).풍후(豊侯).십팔남:순백(郇伯)
희姬성姓 위衛씨氏
위(衛,wei)씨는 주무왕의 동생으로 전하는 강숙(康叔)이 위나라에 봉해지고 후손들이 성으로 하였다고 전한다. 인물로는 전국시대 위나라 출신의 진나라 전략가 위앙(衛鞅)이 있었다. 그는 위나라에서 태어나 진나라에서 관적하였다.
위만(위만)이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준왕(準王)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위만조선(衛滿朝鮮)의 국왕이 되었다.
다른 계통으로는 5호 16시대 복위 선비족 위씨로 창성했다고 한다. 위(衛)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8명으로 조사되었다.
희姬성姓 강康씨氏
주周)무왕武王 ~ 주 성왕 삼감의 난 발생전 9남 희姬 봉封은 강康국에 봉해져 강康叔 (성왕의 강국 숙부)으로 불렸고, 삼감의 난 평정후 형인 섭정 주공 단은 반란 상나라 지역을 위(衛)와 송宋, 둘로 나눴고, 송나라는 상商왕족 미자 계를 봉했고, 상商나라 수도 조가가 있는 위나라는 강康숙 희姬봉封을 봉했다.
성姓씨氏가 관작명, 분봉 지역 국國명名과 같은것에서, 지금 성씨로 치면, 희姬성에서 강康씨, 위偉씨가 된 것인데, 두 번째 분봉국 위衛나라 1대 군주로 위衛씨 시조가 된 것이고 첫째 아들 백모(아명)는 위나라 2대 군주로 희성위씨를 이었고, 둘째 아들 중모(아명)는 기자 서여와 함께 평양(넓고 평평한 땅, 양평 요하 요동)에서 기자 조선 기(한)씨,상나라 왕족인 기자 반란을 감시하는 주나라 희성 제후인 강후로 주변에 봉해젔으나, 기자가 건국 공신으로 임명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기자 후손들을 왕으로 모시는 신하로 변했고, 희성 강康씨 시조가 되면 1,000년 이상 기箕(한韓)씨 흥망성쇄를 함께 했다.
중시조 14세손 강지연공, 고려태조왕건 외 6대 조상 강호경은 한국 역사서에서 확인 가능한 관력이 분명하기 때문에, 일가 친척을 모두 기록하는 족보에, 68세손 강호경을 신천강씨 시조로 삼고 있는 것이고, 그이전 조상은 전쟁으로 인한 사망고 피난으로, 상세한 기록이 아닌, 직계조상 목록만 기록한 세보(세대, 이름, 관직,또는 사건만 기록) = 상계 기록만 보면, 기(箕)씨 조선에서 대대로 벼슬이 나타나고, 멸망한 후, 마한에서 벼슬, 마한이 망한 후 신라에서 관직이 쓰여져 있습니다.
강康씨 세보인 상계는, 38세손 자양이 위만 반란에 전사했고,39세손 영숙이 마한에서 벼슬했고, 40세손 정휘는 지사 관직으로 BC57년 신라 태동을 살폈고, 41세손 사조는 마한 효왕 때 대상 벼슬했고, 42세손 승청은 사공으로 상장군이 되어 백제군을 방어하다 전사했다고 나옵니다. BC17년 한씨 왕조는 계왕에서 망했고, 43세 아감 벼슬, 44세 상국 벼슬 45세 벼슬 없고,46세 상장군 벼슬 47세 내주승상 벼슬 나오는데, 마한 한씨 왕실 망한 후에도 벼슬이 계속 나오는 관직명이, 백제 신라엔 없는 관직명으로, 강康주가 있었던 지역에 가야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야 벼슬로 생각됩니다. 48세손 낙사 때 이벌찬 벼슬은 신라 성골 귀족 벼슬입이다. 마한 54개국 중 한씨 왕실이 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 된 것으로 보이고, 이후 신라에서 성골 귀족 벼슬들을 했습니다. 시조 강호경 별호 성골장군 표현은 신라 성골 귀족을 뜻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김관의 편년통록에 고구려 출신으로 쓰면서, 이상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상계에 표시된 직계조상 세보는 강기康觭, 아명이고, 강호경康虎景 성인이 돼서 쓰는 관명인데, 호경虎景은 호랑이와 관련된,
호경은 한동네 사람들과 평나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굴에서 자던 중 호랑이 한 마리가 굴에 나타났다. 굴 안에 일행은 어쩔 수 없이 갓을 벗어던져 제물이 될 사람 또는 호랑이와 싸울 사람을 결정하기로 했다. 이때 호경이 던진 갓을 호랑이가 물자 호경은 싸우려 나갔고, 때마침 동굴이 무너져 오히려 동굴 속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되었다.
범 호虎 경치 경景, 별명으로 생각되고, 신라 성골聖骨 귀족 출신 강기康觭, 별호 호경장군虎景將軍, 또는 성골장군聖骨將軍으로 불렸습니다.
강康씨 상계에 둘째 아들 중모 이름이 강康후候로 전해지고 있고, 위衛강康숙 희봉이 첫 번째 분봉국 강康국國 군주 강康후侯로도 불려졌기에, 강康씨 시조가 위강康숙이냐? 혼선 있을 수 있는데, 기자 조선왕으로 봉해진 것이 아닌, 상나라 왕족인 기자 서여 반란을 감시하는 주변 제후로 분봉된 것이고, 기자가 건국공신으로 임명하면서, 기자의 신하란 위상으로, 위강숙 희봉 강康후候의 아들임이 강조 됐을 수도 있습니다. 위衛강康 숙 아들 이름이 모髦이고, 첫째를 백伯모髦 둘째를 중 仲모髦 중국 아명 이름 부여 순서.관작명은 위衛강康숙의 아들 강후, 商나라 왕족 기자 서여가 주나라에 망해 본향으로 돌아 온 것으로, 후候는 주나라가 제후들에 부여하는 관작등급명입니다. 위강숙은 위衛씨 시조도,강康씨 시조도 될 수 있지만, 위衛나라 1대 군주 시조가 됐으므로, 강康씨 시조는 둘째 아들 중모(관작명 강후康侯)입니다. 중국에 강康씨에서 파생된 성씨 후손이 3,000명이 넘는 것은, 상나라와 연결고리가 있는 부여계에서 파생된 소무구성 강국과 연결 고리가 있는 강康씨가 포함된 숫자입니다.
위키 자료
강康씨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1,625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56위이다. 본관은 신천, 곡산, 재령, 충원, 제주, 진주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하나 현존하는 본관은 신천,곡산, 재령 3본이 대종을 이룬다, 평안남도, 평안북도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신천 강씨(信川 康氏)의 비조 강후(康侯)는 중국 주나라 무왕의 아우 강숙(康淑)의 둘째 아들로소 198년(BC122년 상계 기록)에 고조선 평양에 들어와 왕실을 교화한 공으로 기자로부터 강씨 성을 받았다고 한다. 강후(康後)의 67세손 성골장군(聖骨將軍) 강호경(康虎京)을 시조로 하고 있다. 중시조 강지연(康之淵)은 강호경의 14세손으로 고려 고종때 호성공신에 오르고 신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신천강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5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52,945명이다.
곡산 강씨(谷山 康氏)의 시조 강서(鋼庶)는 신천 강씨의 중시조인 강지연(康之淵)의 6세손으로 상산백(象山伯)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29,107명이다.
재령 강씨(載寜 康氏)의 시조 (康得龍)은 신천강씨의 중시조인 강지연(康之淵)의 8세손으로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는 그의 친누이동생이다. 강득룡은 고려 공민왕 때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결심, 관악산에 들어가 암자에 살면서 매일같이 산에 올라 개성을 향해 통곡하였는데, 이곳이 연주대(戀主臺)와 연주암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조는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하여 안정공(安靖公)이란 시호를 내렸고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재령으로 하였다. 2015년 3,401명 이다.
영강 강씨(永康 康氏) 시조 강증(康拯)은 고려 예종때 병마판관(兵馬判官)을 지냈는대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이 있어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강康씨 본관
강령(康翎) 곡산(谷山) 신천(信川) 임실(任實) 진주(晉洲) 충주(忠州)
강령강씨(康翎康氏)
시조: 강극(증)〔康極(증拯)〕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보면 그는 고려 예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경양(景襄)이라 시호(諡號)되었다고 하였다.
강령(康翎)은 황해도 장연군(長淵郡)에 있던 지명으로 영강현(永康縣)과 백령형(白翎縣))을 합한 이름이다. 주요 성씨로 강康씨가 있었다. 강극(康極)은 고려조에 병마판관(兵馬判官)을 지냈는데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이 있어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강령(康齡)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후손으로 강호경(康虎京)이 전해온다
- 강호경(康虎京)의 후손으로 전해온다 -
한편‘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보면 시조는 고려고 예종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경양공(景襄公) 강증(康拯)인데 일선에 그는 강인우(康仁祐)의 후손으로 전한다고 쓰여 있다.
谷山康氏(곡산강씨)
시조: 강서(康庶). ‘중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보면 상산백(象山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本貫地)
상산(象山)은 곡산(谷山)의 별칭으로 고구려 때에는 십곡성(十谷城)이라 불렸고,940년(고려 태조23) 곡주(谷州)로 개편되고,1393년 (태조 2)에는 곡산으로 개칭하고 부(府)로 승격하였으나, 태종 때는 곡주(穀州)에서 다시 곡산군으로 격하였다. 1669년(현종10)부로 승격되었으나 1896년(고종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곡산군(谷山郡)이 되어 개성부(開城府)에 속하였다.1914년 군면 폐합으로 황해도로 편입되었다. 별칭으로는 덕돈홀(德頓忽).고곡(古谷).곡성(谷城).진서(鎭瑞).상산(象山)등으로 불리고 있다.
주요 성씨로 康,禹,盧,韓,延씨 등이 있었다.
〈氏族史의 개요〉
아들 강윤성(康允成)은 조선 태조 국구(國舅)로서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985년 현재 전체인구 14,020명
신천강씨(信川康氏)
시조:강후(康侯)
〈氏族의 연원〉
득성조 강후(康侯)는, 강성호소록(康聖湖所錄)에 따르면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무왕의 아우 강숙봉(康叔封)의 둘째 아들이 함께 평양(平壤)에 와 백성의 교화에 공을 세워 강자(康字)로 사성(賜姓)하고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에 봉함으로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위의 소록(소록)은 제주현감(濟州縣監)을 지낸 강익보(康翊甫)가 가장(家欌)하여 왔던 보첩(譜牒)에 따른 것으로, 오음(梧陰)윤두수가 쓴 ‘평양지(平壤誌)’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己米譜‘(1979)에는 시조를 강호경(康虎京)으로 하여 분파도(分派圖)를 만들고 그 13세손인 강지영(康之衍)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물론 앞서의 강후동래설(康侯東來說)을 전제로 한 계통도(系統圖)인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된 까닭은 그 사이 여러 병화(兵火)를 거쳐 승첩(乘牒)등이 없어져 강후(康侯)이후는 계대(系代)를 확연히 밝힐 수 없었던 사정 때문이다.
신천강씨(信川康氏) 시조 68세손 강호경(康虎景)은 신라 때의 고관이었고 그가 충(忠)을 낳았으며, 보전(寶甸)과 보육(寶育)은 손자가 되며 이렇게까지 세계가 이어졌다.
그리하여 강씨(康氏)는 전국에 사는 누구이든 모두 중시조 강지연(康之淵)의 후손이라고 .己未譜’에 밝히고 있다.
강지연(康之淵)은 고려 충렬왕조의 인물로 몽고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신으로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신성(信城)은 신천(信川)의 옛 이름으로 후손들이 그곳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후대에 와서 곡산(谷山).재령(載寧).충원(忠原).진주(晉州).등의 별관(別貫)이 생긴 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라고 한다.
곡산(曲山)의 경우, 신덕황후(信德皇后)가 곡산(曲山)에서 탄생하여 그 아버지를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象山은 曲山의 옛 이름)에 봉함으로써 조선시대에 신덕황후(信德皇后)의 적(적)을 곡산(曲山)으로 한 까닭에 후손중 곡산(曲山)으로 별관(別貫)하는 파가 생겼다.
재령(載寧)인 경우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아들 강득룡(康淂龍)을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安陵은 재寧의 옛이름)으로 봉했는데 태종의 왕자란(왕자란) 때 그 자손이 선조의 봉읍(封邑)인 재령(載寧)으로 낙향하여 살면서 별관(別貫)으로 정한 까닭이라 한다. 충원(忠原)이나 진주(晉州)등도 모두 자기 직계조상이 낙향하여 살았던 지방을 별관(別貫)으로 삼은 데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강씨(康氏)는 신천(信川)이 근원으므로 본관을 신천(信川)으로 통일하였으며 오래 전의 세보(世譜)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本貫地 연혁〉
고구려 때 승산군(升山郡), 고려초에 신주(신주)(信州)로 고쳤다. 조선 태종13년에 신천(信川)으로 바꿔 불렀고, 예종1년 군(郡)으로 승격시켰으며 1914년 문화군(文化郡)과 합하였다. 한산군(漢四郡) 때는 낭랑군(娘娘郡) 혹은 대방군(帶方郡) 소명현(昭明縣)으로 불렀다.
〈주요 世居地와 변천〉
‘송도지(松都志)’에 장단부(長湍府) 오관산(五冠山)은 강충(康忠)이 살던 곳이라고 씌어 있다.
강충(康忠)은 시조 강호경(康虎京) 의 아들로 신라 때부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신천군지(信川郡誌)’에는 강씨(강씨)가 이 고장 토착인으로 신수(信水) 북쪽에서 세거했는데, 고려 때 몽고의 외란에 중시조 강지연(康之淵)이 충렬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신성군(信城君)에 봉해졌느데, 신천(信川)에 세거해 온데서 봉호(封號)가 된 것으라 하였다.
그러나 고려말의 홍건적(紅巾賊)의 침략으로 강씨(康氏)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옛 번거(繁居)의 영광이 사라졌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강씨(康氏)는 장단(長湍)과 신천(信川) 등지에서 여러 대 세거 하였는데, 11세손 강문(康文)이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낸 뒤 철원(鐵原)에 터를 잡음으로써 평강파(平康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그런데 평강(平强)에 시거(始居)하기는 13세손으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강필(康弼)에게서 비롯되었다.
해주파(海州派)는 10세손 강집(康諿)의 자손이 해주(海州).임천(林川).양천(陽川)등지로 흩어지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임천파(林川派)는 번성하여 11세손 강효업(강효업) 이하 21세손 대에 이르기까지 세거의 터를 굳게 지켜왔다.
임천파(林川派)의 파조(派祖) 강수문(康秀文)의 큰 아들이 강설(康設)에게 입양자(入養子)함으로서 해주파(海州派)로 이거해 감으로써 세거지가 이루어졌데 20세손 이후까지 세를 누렸다.
강씨(康氏)가 전남 영광(靈光)으로 세거지를 넓혀간 것은 6세손 강류(康旒)때다. 그는 단종조의 대관(大官)으로 있다가 세조의 등극을 마땅치 않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영광(靈光)에 둔거(遯居)의 터를 잡은 것이었다.
강진파(康津派)는 그의 9세손인 강응록(康應祿)이 이조정랑(伊曹正郞)에서 물러난 뒤,강진(康津)에 터를 잡음으로써 자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안주파(安洲派)는 9세손 강연(康延)이 성종 때 박천(博川)에게 이거한 뒤 큰 아들 강순석(康順碩)이 안주대가촌(安州大街村)에 옮겨 터를 잡음으로써 세거지가 되었고,
임실파(일실파)의 강적(康積)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치임한 뒤 가산(嘉山)땅에 들어가 살았다.
보령파(保寜派)의 강영(康永)은 강지연(康之淵)의 8세손이다. 고려 공민왕 때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냈는데, 그 뒤 제주도에 들어가 제주파(濟州派)의 파조(派祖)가 되었고, 그 큰 아들 강귀존(康貴尊)은 호서(湖西)땅 보령(保寜)에 터를 잡았다.
영변파(寧邊派)는 강자인(康自仁)이 성종18년 영변(영변)에 처음 터를 잡았고, 아우 강자의(康自義)는 운산(雲山)에 살게 되었다.
정주파(定州波)는 강맹문(康孟文)이 정주(定州)에 터를 잡았는데 그는 10세손이 된다.
임피파(臨陂波)는 8세손 강민(康민)이 임피(臨陂)로 옮겨 감으로써 시작되었고, 강덕관(康德寬)은 해주(海州)에 살게 되었는데 9세손이 된다. 서흥(瑞興)에 강씨(康氏)가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5세손 강건(康健)때 부터이고,
평양파(平壤派)는 13세손 강필(康弼)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물러난 뒤 평양(平壤)에 정착함으로써 번거(繁居)의 터가 되었다.
氏族史의 개요
강씨(康氏)의 득성조(得成祖)는 기자(箕子)가 조선에 올 때 따라온 周나라 무왕의 아우 강숙(康叔)이라 한다.
그러나 그 뒤에 소목(昭穆)은 문헌 등의 인멸로 밝혀지 있지 않았고, 다만 신라 때 성골(聖骨)이란 자호(自號)를 지닌 강호경(康虎景) 장군의 아들이 강충(康忠)이고 이어 세계(世系)의 맥을 이었다. 중조(中祖)인 고려 때 인물 강지연(康之淵)의 선계(先系)는 이런 연유로 강호경(康虎景)까지의 상계(上系)는 13세가 된다. 이들 상계(상계) 인물들은 모두가 신라도와 고려조에서 현관(顯官)을 지냈다. 강충(康忠)이 상사찬아간(上沙餐阿干)을 했고 강보전(康寶甸)은 문하태학사(門下太學士), 강순산(康淳山)은 좌정승(左政丞), 그에 아들 강만루(康萬嶁)는 대장군(大將軍), 강연창(康衍昌)은 우정승(右政丞),
7세손 강태주(康泰周)는 형부상서(刑部尙書), 강억(康億)은 이부상서(吏部尙書), 그리고 강지연(康之淵)의 아버지는 문하좌참찬(門下左參贊)을 역임했다.
그런 명문의 출신답게 강지연(康之淵)도 충렬왕을 호종(扈從)한 공신(功臣)으로 신성군(信城君)에 봉해졌고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다. 그 무렵 신천강(信川康) 이북에 강씨(康氏)가 대성을 이루어 세거했다고 한다.
그 아들 강부전(康富傳)은 집현전전한(集賢殿典翰)이었고 아들 또한 신원부원군(信原府院君)에 봉해질만큼 관직이 높았다. 이런 관력(官歷)은 대를 이어오면서 끊임이 없었다.
관열(官閱)의 화려한 강씨(康氏)의 계통이었지만 특히 3세손 강유(康旒)의 경우는 특기할만 할 곳이다. 그는 전과중시(殿科中試)에 합격, 단종의 특명으로 제포첨사(薺浦僉使)를 지냈으나 단종손위(端宗遜位)에 따른 불만으로 벼슬을 버리고 영광(靈光)으로 남하(南下), 음거해버린 인물이다.
신천강씨(信川康氏)가 7세손인 강윤성(康允成)의 딸이 이태조의 계비(繼妃)로서 신덕왕후가 된 벌열(閥閱)의 배경을 지녔으면서도 자기대로의 명문을 지킨 인격이 고매하다고 하겠다.
그런가 하면, 6세손인 강곤(康袞) 단종조 병사(兵使)로서 3등급신 되었는데, 세조조 정란공신(靖亂功臣)으로 중추부사(中樞副使)에, 신천군(信川郡)에 봉해졌다. 이어서 예종조에 3등공신이 되었고 성종조에는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어 충무(忠武)라 시호된 분이다.
금천파(金川派)의 인물로 7세손인 강치성(康致誠) 세조조에 문과에 급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한림(翰林)으로 있을 때 민수(민수)의 사초(史草)사건으로 화를 입은 분이다.
화려한 환력(宦曆)을 지닌 이들은 강씨(康氏)에게 많다. 이를테면 6세손인 강서(康庶)는 고려 충숙한 때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뒤, 조선조에 들어와 순성보리삼중대광(巡城補理三重大匡)이었고,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에 봉해진 인물로 그이 아버지 강숙재(康淑才) 역시 벽상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을 지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강씨(康氏)의 흘륭(興隆)을 돋운 이로는 아무래도 강윤성(康允成)을 꼽아야 될 듯 싶다. 그는 강지연(康之淵)의 7세손이며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아버지가 된다.
신덕왕후 이태조의 계비(繼妃)로 뒤에 고황후(高皇后)로 추존되었다.
왕비의 오빠인 강득륭(康得龍)은 추성좌리공신(추성좌리공신)으로 삼중대광첨의정승(三重大匡僉意政丞)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이 되었고 안정(安靖)이라 시호되었다.
그의 아우 순룡(舜龍)은 고려 공민왕 때 찬성사지밀직사사(贊成事知密直司事)로 은성부원군(銀城府院君)이었다가 조선 건국에 따라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재령백(載寧伯)에, 신천군(信川郡)에 봉해진 분이다.
6세손 강도(康度)는 봉익대부(奉翊大夫) 순성보절(純誠輔節) 사공상주국(司空上柱國)으로 충원백(忠原伯)이었고, 아우 강제(康濟)는 부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이었고,15세손 강성문(康聖文)은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낸다. 벌족(閥族)인 경우, 대개가 그렇듯이 강씨(康氏)도 문한(文翰).효행(孝行)등에 걸출한 인물이 없지 않았다.
강원기(康元紀)는 신덕왕후와 4촌 사이로 강윤의(康允誼) 아들이다. 길재(吉再),권근(權近),정몽주(鄭夢周)등 석학9석학)들과 어울려 경학(經學)과 문한(文翰)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이태조 등극을 못마땅히 여겨 끝내 두릉(杜陵)에 은거(隱居)해 버리고 말았다. 문헌(文獻)리라 시호됐다.
강영(康永)은 8세손으로 문과에 합격,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냈으며 문장(文章).기절(氣節).강개(剛介)의 인물로 알려졌던 인물이다.그 아들은 유훈(遺訓)을 받들어 불사(不仕)하고 제가창업(濟家創業)에 평생을 보낸다.
후세에 내려와, 15세손 강후진(康候晋)도 박식(博識)과 경사(經史)에 밝아 저술도 여러 권 남겼다. 강석운(康錫運)도 그와 비슷한 인물이었다. 특히 효행으로써 종문(宗門)을 빛낸 인물의 보기를 들자면, 강지수(康智水), 그는 무장파(茂長派)의 강귀생(康貴生)의 아들로 13세손이다. 효성이 지극하다고 알려졌던 강경도(康經道)는 18세손으로 향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여 평생을 형제가 같은 옷을 입었다고 하다. 강귀중(康貴中)은 12세손으로 천성이 효심에 차 어머니의 병환에 할지진혈(割指進血)로써 병을 낫게 하고, 아버지의 상(상)에는 3년 동안 여묘(廬募)살이를 하였고, 청빈한 살림 속에서도 홀어머니의 봉양에 지극했다고 한다.
신천강씨(信川康氏)는 고려조에서 벌족(閥族)의 세(世)를 이어오다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배출되으로써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을 비롯한 현관(顯官)과 봉작(封爵)이 여러분 나왔다. 그러나 태종 때의 왕자란(王子亂)으로 신덕ㄹ왕후 소생인 두 대군(大君)이 화를 입게 됨으로써 강씨일문(康氏一門)에 까지 미쳤다.
그러나 영재는 끊임없이 적어도 조선시대 중기까지 이어왔다.
신천강강씨 대종회 57개파 정리, 매년 10월3일 강호경 14세손 중시조 강지연 세행제를 지낸다. 곡산(谷山)시조 강서(康庶), 아들1강윤귀 2강윤성 3강윤의 4강윤휘 5강윤부 강윤성 5자녀중 장남 강득룡은 재령(載寧)파 시조로, 다른 가족과 달리 고려조에 충절 지켰고, 중시조 세향제 후 재령 후손들은 강득륭 제를 따로 지낸다.
임실강씨(任實康氏)
시조: 강리(康理)
임실(임실)은 전북 동남에 위치하여 본래 백재의 임실군(任實郡)이다. 주요 성씨로 康氏가 있었다.
강리(康理)는 조선조 태종8년 문과에 급제하여 박천군수(博川郡守)를 지냈다고 한다.
한편 문헌이 없어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
진주강씨(晉州康氏)
시조: 강여읍(康汝揖) ‘증보문헌기보(增補文獻備步);에 보면 조선조에 郡守를 지냈다고 하였다.
진주(晉州)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이다. 주요 성씨로 康,姜,金,柳,朴,蘇,河씨 이 있었다. 전해오는 문헌이 없어 정확한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 다만 후손들이 조선조에 군수(郡守)를 지낸 강여읍(康汝揖)을 시조로, 진주(晉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한편 후손으로 강홍제(康弘濟)자 전해오는데 그는 영조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풍기군수(豊基郡守)를 역임했다고 한다.
충주강씨(忠州康氏)
시조:강도(康度).’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시조를 강이(康儞)라 하였다. 선조때 문과에 올랐으며 아버지는 강세운(康世雲)이라 하였다.
〈本貫地〉
충주(忠州)는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 일명 未乙省,亂長城)이다. 주요 성씨로 康,金,梁,龍,石,魚,崔씨등이 있었다.
강도(康度)는 강씨(康氏) 득관조(淂貫祖) 강지연(康之淵)의 5세손으로 충원백(忠原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한편 강세운(康世雲)의 아들로 조선조 선조18년 문과에 급제한 ’강이(康儞)‘를 시조로 삼기도 한다. 1985년 현재 전체인구 15명
강康씨는 고대 역사를 고려하면 모두 위강숙 후손이지만, 장남이 衛씨 종가를 계승했으므로, 강康씨를 계승한 것은 둘째 중모 =강후의 후손이다. 한국과 중국 강康씨는 둘째 중모 = 강후를 시조로 함께 제를 지내는 것이 맞다. 생각되고, 기자조선 – 마한 – 신라 –고려 문중 조상 이동 경로를 고려하면, 상계가 불 분명한 문중 역사가 짦은 신천강씨 시조 강호경 연결 고리가 없는 강康씨들과 공통분모 역시 둘째 동일합니다. 강후가 위강숙이던 둘째 아들 중모 여부는 할아버지 제사냐 아버지 제사나처럼 다릅니다. 신천강씨 세향제는 중시조 강지연공 후손들이 지내는 것으로, 어차치 Y유전자는 동일하겠지만, 계통도가 불분명하면, 삼촌 제사는 지내며서 아버지 제사는 안 지내는 후손도 될수도 있습니다.^^
위강숙세가(衛康淑世家) - 사기37 –사마천
위(衛) 강숙(康淑)은 이름이 봉(封)이고, 주나라 무왕고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이다.
그 밑으로 염계(冉界)가 있는데, 염계가 가장 어렸다.
무왕이 은(殷) 주왕(紂王)을 물리치고 은나라의 유민과 그 땅을 주왕의 아들 무경녹부(武庚錄父)에게 봉하여, 제후와 동등하게 해주고 주나라 선조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받들도록 했다. 무경이 그래도 따르지 않자, 그에게 난을 일으킬 마음이 있지 않을까 두려워 무왕은 동생 관숙(管淑)과 채숙(蔡淑)에게 무경녹보를 보좌하게 하여 그 인민을 화합시켰다.
무왕이 세상을 뜨고 성왕(成王)은 어렸기에 주공(周公) 단(但)이 성왕을 대신 하여 나라를 맡아 다스렸다. 관수과 채숙은 주공을 의심하여 무경녹보와 함께 난을 일으켜 성주(成周)를 공격하려고 했다. 주공 단이 성왕의 명을 받아 군대로 은나라를 정벌하여 무경녹보와 관숙을 죽이고 채숙을 추방했다. 그리고 은나라 유민들을 강숙에 봉해주어 그를 위의 국군으로 삼고,황하(黃河)와 기수(淇水)사이 옛 상의 터에서 관할하게 됐다,
주공 단은 강숙이 나이가 어린 것이 마음에 걸려 강숙에게 “은나라으 현인과 군자 그리고 장자들을 찾아 그 선조인 은나라가 흥하고 망한 까닭을 반드시 묻고 인민을 사랑하는 데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라고 당부했다. 은나라 주왕이 망한 것은 지나친 음주로 정치를 그르치고 여자 말만 들었기 때문이며, 주왕의 난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 주었다.주공은 〔자재(梓材)〕를 지어 군자가 따라야 할 법을 보여주었다. 주공은 이에 따라 〔강고(康誥)〕,〔주고(酒誥)〕, 〔자재〕 라는 이름의 글을 지어 가르쳤다.강숙이 나라로 가서 이 가르침을 실천하여 인민을 화합시키고 안정시키니 인민이 크게 기뻐했다. 성왕이 장성하여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자, 강숙을 주나라의 사구(司寇)로 임명하고 위에는 보물과 제기를 내려 그 덕을 널리 드러냈다. 강숙이 주고, 아들 강백(康伯)이 위衛를 이었다. 강백(강백) 은 강성(康姓) 적장자(嫡長子)란 뜻이지, 공후백(伯)자남 작위 백작이 아니며, 주공 단은 강숙을 위후로 봉했고, 강숙의 적장자는 그 뒤를 계승했습니다.
첫댓글 엄청난 자료네요.ㅎㅎㅎ
아직은 추정에 불과하니 많은 연구가 필요할듯 합니다.
하나씩 밝혀다 보면 언젠가는 나오겠지요..
사학계 에서는 지자조선도 부정 하니..
삽입만 한다고 될일은 아닐것 같네요..^^
방대한 자료를 읽고, 알기쉽고, 연구하기에 좋은 자료 잘 읽었읍니다. 감사드립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소책 한권 읽는 분량정도 되겠습니다
좋은자료이나 너무 복잡하게 나열되어있는 듯 합니다
정리되어서 종친 누구든지 쉽게 이해되도록 정히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