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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에 대한 전설
[1]고.양.부.[高.梁.夫]
고씨는 양씨 부씨와 함께 탐라[탐羅] 지금의 제주도 이들 삼성의 시조탄생에 대해서는 삼성혈[三姓穴] 전설이 알려저 있다 .옛날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세 신인[神人]이 솟아났다.양을라[梁乙라] 고을라[高乙라] 부을라[夫乙라].그들은 수렵을 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 내려와 건져보니 세 미녀와 오곡의 종자와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있었다.세 신인은 세 미녀와 각각 결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 게 되니 그로부터 탐라는 개척 되엇다 한다....탐라 [지금의 제주도]
[2]안동권씨[安東權氏]
의 시조는 권행[權幸]이라고 한다 권행은 원래성이 김씨[金氏]였다고 한다.권행은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의 수령이었는데 후백제가 충돌하자 고려편을 들어 공로가 컸었다. 이로 인하여 권행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되고 왕건에게서 권이라는 성을 받기까지 하였다.그러니 안동권씨는 따지고 보면 그 집안이 안동김씨라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안동권씨와 안동김씨는 같은 혈족이라 하여 서로 혼사하지 않는다.성이 다르면서도 혼사할 수 없는 집안이다.
[3]김해김씨와 [金海金氏]와 김해허씨[金海許氏] 가락국에 김수로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화가 있다.수로왕의 왕비는 허황옥[許黃玉]이 었고 그 사이에서 아홉아들이 태어났는데 둘째아들은 왕비에 소원을 따라 어머니에 성을따라 허씨가 되었다는 것이다.그러니 이 설화대로라면 김씨와 허씨는 비롯 성이 다르더라도 같은 혈족이 되는 것이다.그러기에 김해김씨와 김해허씨는 한 집안이라고 전한다.朝鮮女俗考 12-9에 수록.
[4]천씨[天氏]
천씨의 본관은 연안[延安].우봉[于峯]인데 설화에 의하면 연안지방에서 냇가에 버려진 한 아이가 있어 동네사람이 거두어 길렀는데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므로 성을 천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5]제갈씨[諸褐氏]
제갈씨는 원래 중국에서 우리나라 신라 덕흥왕때 건너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그뒤 고려 고종때에 이르러 제갈홍[諸渴泓] 제갈형[諸渴瀅]의 두 형제가 복성[復姓]을 한자씩 나눠 쓰기로 하여 형은 제씨 아우는 갈씨로 분종했다 한다.그러다가 구한말[舊韓末]에 이르러서 성씨 환원운동이 일어나 일부 제씨와 갈씨가 다시 제갈씨로 복성[復姓] 했다한다.
[6]우씨[禹氏]목천[木川]
우씨에 대한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다.왕건이 고려를 세울무렵 목천..지금에 충청남도 천원군 지방 백제 유민들이 백제 부활을 간했다는 이유로 몹시 왕건이 이 지방에게 소[牛].코끼리[象].돼지[豚].노루[獐].등의 성을 억지로 붙여 주었다느데 그중 우[牛]씨가 뒷날 우[于]씨로 다시 우[禹]씨로 성이 바뀐다는 것이다.옛날 책을 보면 목천상씨[木川尙氏] 목천돈씨[木川頓氏] 목천장씨[木川張氏]가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같은 음의 다른 글자로 성을 바꾼게 아닌가 하는 신빈성을 주기도 하지만 믿을 수는 없다.
[7]승씨[昇氏]
고려 공민왕때 중국에 황족[皇族]이었으며 그의 어머니와 더불어 망명해 왔다.그는 망국 황족으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기 부끄럽다 하여 명자[明字]를 떼고 승자[승자]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우리나라 신부 예복[禮服][원삼.족도리]을 보급한 사람으로 전한다. 승씨에 시조는 시조는 명승[明昇]이라는 사람인데 그의 시조의 유언에 따라 벼슬길에는 일체 나가지 않았다.승씨에 의하면 명씨와 승씨는 같은 조상이므로 지금까지 서로 혼사하지 않는다고 전한다.
[8]안씨[安氏]
안씨의 시조는 당나라 사람인 안원[安瑗]이며 그는 원래 이씨였는데 신라 애장왕[哀莊王]때 귀화하여 그의 아들이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안씨를 하성 받았다.안씨는 죽산.광주.순흥 등 3본이 대 본으로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특히 순흥안씨가 전체 안씨 인구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한다.
[9]문씨[文氏]
감천문씨[甘泉文氏]와 정선문씨[旌善文氏]는 원래가 타성으로 성만 같을 뿐 본관은 다르고 조상도 다른 것으로 전해온다. 감천문씨의 시조 문원길[文元吉]은 원래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경주 김씨였는데 그의 선대[先代]에서 중국에 갔다가 이름을 날려 문씨 성을 사성받아 문씨로 갈았다고 전한다. 정선문씨의 시조 문임간[文林幹]은 본래 김씨였다고 한다.그도 중국에 들어가 글로 이름을 날리게 되므로서 문씨성을 얻어 귀국 하였다고 전한다.
[10]남씨[南氏]
남씨의 시조는 남민[南敏]인데 본명은 김충[金忠]이다.원래 당나라 사람인데 사신으로 일본으로 가다가 풀랑을 만나 경북 영덕군 바닷가에 표착 신라 사람이 되었다 한다 신라 임금은 그에게 [남쪽에서 왔다]는 뜻으로 남성을 사성 호를 내리고 영양현[경북영양땅]을 중심으로 살 게 되었다고 전함.
[11]차씨[車氏]
차씨의 시조는 신라 애장왕 때 충신이었다 애장왕의 숙부가 왕과 왕자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좌승상의 벼슬을 버리고 전 왕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그러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몸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왕의 체포령을 피해 황해도 구월산에 들어가 성을 유씨로 바꾸고 이름도 색으로만 했다.차씨와 유씨는 윗때 이처럼 한 집안이었다.
[12]왕씨[王氏]
해주 왕씨의 시조 왕유는 본성이 박씨였는데 왕건[王建]이 박유에게 왕이라는 성을 내린 것이다 이조가 생기고 왕씨들에게는 대대적인 멸족의 위기와 고난을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13]서문씨[西門氏]
본관은 안음[安陰] 단본인데 이성은 중국 청나라 대부[大夫]가 살던 지명을 따서 지은 성씨다 시조 서문담은 고려 공민왕때 원나라 위왕[衛王]의 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따라우리나라에 들어와 살았다고 전한다.
[14]능성구씨[陵城具氏]시조는 검교상장군인 구재유다 그는 송나라 한림학사 주잠[朱潛]의 사위인데 주잠이 우리나라에 귀화할 때 사위인 그도 따라온 것으로 전한다.
[15]덕수장씨[德水張氏]
장씨의 본관은 안동인데 고려 공민왕때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따라온 아라비야 사람 장백창[張佰昌]이 우리나라에 귀화 함으로서 덕수장씨가 하나 더 생기게 된 것이다.
[16]일본계인[日本系人]
우록김씨[友鹿金氏]의 시조 김충선 [金忠善]이다.우륵김씨 세보 및 모하당전집[慕夏堂全集]에 의하면 그는 일본 사람으로 본래의 성은 사씨[沙氏]요 이름은 야가[也可] 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익[益]이요 조부[祖夫]는 沃國이며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우선봉장[右先鋒將]이 되어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침공해 왔으나 조선의 문물과 인정풍습을 흠모한 나머지 경상도 병마 절도사 박진[慶尙道 兵馬節度使 朴晉]에게 귀순한후 귀화 하였다.
그는 1597년 선조[宣祖] 30년에 왜군이 재침 하였을 때와 1627년 인조[인조]5년에 정묘호란[丁卯胡亂]때에 도원사 [都元師]권율과 어사 한준겸 御使[韓浚謙]의 간으로 성명을 하사 받고 정이품[正二品]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 하였으나 그의 무덤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 삼정산에 그의 부인에 무덤과 나란히 있음.그의 묘비앞에 [贈 正憲大夫 兵曺判書 金海公 諱 忠善之墓라고 쓰여저 있음.
[17]영천 황보씨[永川皇甫氏]
영천황보씨는원조 황보경 후손인 금강성장군 황보능장이 영천부원군에 봉해져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영천이라 하였으나 그후 세계가 실전되었다가 황보안을 1세조로 계대하고 있다.
[18]당인후씨[唐寅后氏]
후씨는 원래 중국성씨로서 한나라 때에 후예라는 사람이 있었고 또 노나라 때에 후씨가 있었는데 그후 읍[읍]변을 떼고 후[후]씨가 되었다고 한다.우리나라에는 없던 성씨였으나 1930년 국세 조사때 강원도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에 3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었다 본관을 당인으로 하고 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는 고증할 길이 없다.
[19]궉씨[궉氏]
지봉유설에 의하면 전북 순창에 궉씨가 있으나 내력은 미상이다.1930년도 국세 조사에는 경기도 용인과 충남 보령.청양.예산.천안 등지에 몇가구 살고 있다고 되어 있다.주요 본관은 순창. 선산이다.
[20]애씨[艾氏]
1930년 국세조사에서 밝혀진 성씨로 안성 .수원.시흥 등지에 4가구가 있었다.본관은 한양.연풍.전주등이다.
[21]강씨[彊氏]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 밝혀진 성씨로서 경남 통영군 광도면 우동리에 강선악 1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 그곳에서 왔다고 할 뿐 내력은 미상이다.본관은 진주로 쓰고있다.
[22]영동장씨[永同張氏]
시조 항[沆]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 두정을 거쳐 좌사의 대부에 이르러 충숙왕이 1321년부터 5년동안 원나라에 양유 되었을 때 시종한 공으로 귀국후 나주목사가 되었다.충혜왕 때 평양윤 등을 지낸 뒤 영산[영동별호]군에 봉해졌다.영동에 화암서원에 제향 그의 선대나 후손에 분포상항은 미고이다.
일본의 성씨[日本 姓氏]
일본의 성씨는 복잡다단하다. 그 숫적으로 보아서 세계 일위다.복수로 되어있는 것 이 보통이고 단자로 되어 있는 것도 있고 세자로 되어있는 것도 많다.같은 성씨라도 가문에 따라 여러 음으로 부르기도 한다.현존 13만2천여 성씨가 살고 있다
일본에서는 각 가문[家門]마다 가문[가紋] 이라는 것이 있다.자기 가문[家門]을 표시하는 도안[圖案]으로된 약도[略圖]가 있어 대대로 이어오고 있다.가문[家紋]외에 신문[神紋].문장[紋章].기인[旗印] 등이 있다 묘자[苗字]라는 제도가 가문마다 있다 특별한 예식 명절에는 예복이나 모자에 남녀모두 착복[着服]하여 행동한다.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日本家系圖學會가 전국적으로 本 支部가 있고 매월 정기적으로 姓氏와 家紋이라는 雜紙를 發刊하고 있다.그 외에도 姓氏家紋 硏究所가 있고 각 地方別로 이에 대한 硏究가 전개되고 있다.
외국의 성[外國姓]
외국에서는 시집을가면 남편성을 따른다 일본에 민법에서는 [家]는 우리에 姓을 나타내는 법률상에 명칭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반듯이 一家 一氏 주의였다 따라서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은 곧 다른 [家]에 입적[入籍]하는 것이므로 일단 시집을 가면 그 집에 성[姓]을 따르고 개가[改家]하게되면 다시 개가한 집에 성으로 바꾸게 된다.서구나라 [西歐]이탈리아.오스트리아.독일.스위스.브라질.등도 원칙적으로 아내는 남편에 성을 따른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은 법률상의 업무는 아니며 아내는 결혼전에 성을 그대로 가질 수도 있고 자유로이 바꿀 수도 있다.소련[蘇聯]에 경우는 부부가 서로 의논하여 어느 한쪽에 성을 공통으로 채택 사용하거나 아니면 결혼전의 각자의 성을 그대로 지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법률상의 규정이 그럴 뿐 실제 관습은 아내가 남편에 성을 따르는 것이 통례임은 물론 이다.같은 공산국가인 중국에서는 부부는 [각자 자기에 성명을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中華民國]에 경우는 독특하다.아내는 자기의[本姓]위에 남편에 성을 덧얺어[合冠]사용하는 복성주의 [複姓主義]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그래서 결혼한 여자에 성명은 [남편에 姓+자기 姓+이름]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세계[世界]에서는 이름만 있고 성이 없는 國民도 많고 혹은 정치 지도층만 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선진국에서는 없는 일이다.東南 아시아 미얀마나. 인도네시아.사람들이 그렇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대통령이건 일반 국민이건 모두 이름만 가지고 있는데 다만 개인적인 필요나 취미로 이름위에 이것저것 덧붙여 쓴다고 한다 .버마에서는 전 유엔 사무총장[우.탄트]처럼 이름위에 [우]를 붙이는 일이 많고 또 이름위에 [몽]자를 붙이는 일이 많다고 한다.그래서 미얀마에는 우씨와 몽씨가 우리나라 김씨나 이씨만큼 많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이다.그러나 [우]자는 나이가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붙이는 경칭 이라는 것이고 [몽]자는 미혼의 젊은이에게 붙이는 경칭으로 영어의 미스터에 해당한다고 한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드립니다. 지금현재 일본의 성은 일본성씨대사전에의하면 29만 1129개성이 올라있습니다. 원래귀족이나 무사만 성이 있었으나 메이지유신이후 납세징병을 위해서 성을 갖게되었습니다. 그 성을 보면 아름답고 야릇한 일본의 현주소를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은 절대 우리와 마인드가 다르다는 사실을 확실히 아시고 정책등을 수립시 제고해야 할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