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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 |
←공(空) |
= 전(全) = 대아(大我) = 진아(眞我) |
사(私) |
사(邪) |
= 부분 = 소아(小我) = 가아(假我) |
부분을 소아(小我)라고 하고 가아(假我)라고 합니다.
전체를 대아(大我)라고 하고 진아(眞我)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가짜
나에게 속고 사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대비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공(公)이라는 것은 사(私)를 포함 합니다.
결국 공도적 삶이라는 것은 결국 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내 것은 아깝지만 공을 위해서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공도적 삶이 바로 내 삶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제가 교무를 하면서 ‘어떻게 교화 해야 하겠다’를 절실히 느낀 적이
한 번 있습니다. 제가 광주 교당에 있을 때, 광주의 동부청소년수련관을
저희가 위탁 받았습니다. 그 곳을 운영해야 하는데 초반에 돈이
없으니까 적자가 나고 되게 힘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광주 교구에 있는
각 교당 교도들이 수련관에 와서 청소를 좀 하게 했습니다.
한 번은 어느 교당 교도들이 수련관에 봉사를 왔어요. 대게 교당
교도들이 봉사를 올 정도면 그 교당에서 봉공회활동 하는 아주 신심
있는 분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 내가 잘 아는 사람이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청소하던 교도 몇 사람이 화장실에서 걸레를 빨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야 빨리 해라, 교무님도 없고만, 대충하고 가자.’
그때 당시에 수련관은 일도 바쁘고 사람도 배치 못해서
교무님이 자리를 자주 비운 상황이었습니다.
대게는 봉사하러 오면 교무님이 ‘어서 오세요. 교도님 오셨어요.’
반갑게 맞이하고 간식도 챙겨줍니다. 그러면 봉사도 잘하는데 수련관
교무님이 그렇게 못하는 거예요. 교무님이 봐주지도 않고 챙겨주지도
않으니까 대충하고 가자 이것입니다. 실화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정말 교화 잘 해야겠다. 무슨 교화를 해야
할까? 칭찬해주는 교화로써 끝내야 할 것인가? 인과의 원리를 확실히
알려 줘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때 느낀 바가 참 많았습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공익에 열심히 하는 분들을 표창합니다. 표창이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표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표창을
하게 된 진리적 근거 진리적 원리를 알려주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무님이 있어서 칭찬해주고 격려해주고 간식 주면 열심히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대충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들은 원불교적 신앙,
인과에 대해서 관념화 되어 있다. 필연으로써 내가 정말 이 일을
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대우해 주니까. 박수 쳐 주니까. 예뻐해 주니까.
지켜보니까. 상을 주니까. 점수 주니까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다 그러겠어요? 특이한 경우겠죠. 사실은 우리 교도님들은 그러지
않아요. 그러나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인과의 원리를 알지 못하면, 인과의 원리를 믿지 않으면 이것이 형식화
되고 관념화되게 된다. 내일 우리 교당에서 한국 보육원에서 봉사를
갑니다.
그럴 때도 내가 보육원에 가든 안가든 상관이 없어야 하는 것인데,
내가 가는 거와 안가는 것은 아마 다를 것입니다.
누가 간다고 하면 더 많이 가고, 누가 본다고 하면 더 열심히 하는데
그것과는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내복 내가 짓는 것이고 공적이 내가
공적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 할 때도 그렇습니다. 상사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잖아요? 있든 없든 내일 내가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것은 공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과 인과에 대해서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불교를 다니면서 그것을 확실하게 진리적으로 원리적으로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公)은 공(空)에 바탕 해서 전체(全)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성자의 마음은 두 가지로 이야기 하면 하나는 공심
(空心)이요, 다른 하나는 공심(公心)입니다. 성자는 두 마음 밖에
없습니다. 공심(空心)에서 도심(道心)이 나오고 공심(公心)에서는
덕심(德心)이 나옵니다. 도심을 갖자는 것이 수행이고 덕을 베풀자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지혜가 되고 신앙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공심(空心)은 나의 관계요 공심(公心)은 대타관계입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대타관계 |
나의 관계 |
공심公心 |
공심空心 |
덕심德心 |
도심道心 |
신앙 |
수행 |
복 |
지혜 |
이것을 모르면 어느 부분 하나만 잡고 하는 것입니다. 공도라는 것은
공변된 도리입니다. 도를 실행하면 덕이 나타납니다. 공도(公道)를
실행하면 공덕(公德)이 되는 것입니다. 공덕이 바로 공익(公益)입니다.
우리가 공덕을 베푼다고 하는데 이것이 공익심입니다. 공도자 숭배를
일상수행의 요법으로 말하면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심과 사심으로 나뉩니다. 공심도 부분 공심과 전체 공심으로 나뉩니다.
부분 공심은 자기 맡은 것만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책임 진
것만.. 그런 사람도 드물죠. 자기가 맡은 것도 못해서 위 사람들이 신경
쓰이게 만드는 사람도 많습니다. 부분 공심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체 공심은 자기가 맡은 것 외에 전체를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교구나 지구 총부에서 있는 일을 몰라라 하고 교당
일만 열심히 하면 그것은 부분 공심입니다. 교당일 이라도 잘 하면
괜찮은가.. 우리 청년 같으면 나는 교당이 돌아가든지 말든지 내 단만
처다 본다든가. 내가 맡은 것만 처다 보는 것은 부분 공심입니다.
공심도 여러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삼학이 동반된 바른 공심이 있고 삼학이 빠진 어리석은 공심이 있습니다.
바른 공심은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신 중도에 맞는 공심입니다.
자기 형편에 맞고 진리에 맞고 사실에 맞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공심은 형편에 맞지 않습니다.
제가 전농에 있을 때 책상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교당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교화협의회에서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하니
‘각 단에서 얼마씩 걷읍시다.’
‘교화협의회에서 똑같이 얼마씩 걷읍시다.’
이런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지 마십시오. 나 안 하겠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공심입니다. 이치에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 교당에는 오래 다닌 사람도 있고 얼마 안된 사람도 있고 마음에
신심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이 있고 또 형편이 좋은 사람과 형편이 안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똑같이 합니까?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공심입니다. 이기심이 그 안에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하려면 안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냥 하고 싶은 사람만 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자칫 공심이라는 미명하에 잘못하면 신심이 아직 안 난 사람
또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되게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공심은 억지로 하거나 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또, 숨은 공심이 있고, 나타난 공심이 있습니다. 숨은 공심은 모르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마음공부학사를 세우기
위해서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에 보일
때만 하고 평소에는 기도도 안 합니다. 그래서 숨은 공심이 있고 나타난
공심이 있는데, 무념 보시하고 무상 보시하고 그 분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들은 숨은 보시입니다.
때로는 나타난 보시도 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는 숨은 보시와 나타난
보시를 같이 병행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불교의 육바라밀의 첫째는
보시를 꼽습니다. 그것은 나를 놓아버리고 내 욕심을 벗어버리고
대타적인 생각을 가지라는 것들입니다.
공즉도생 空即道生
공즉덕생 公即德生 이다.
이 덕이 생긴다는 것은 아까 전체를 보는 눈에서 주인이 됩니다.
공도의 주인이 되면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주인은 시키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적극적으로 희사하는 것이죠.
희사는 정신, 육신, 물질 중에 자기 형편에 맞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희사공덕으로 모든 것이 사사불공이 일어납니다.
그일 그일에 정성되게 공적으로 정신 육신 물질로 하다 보면 실질적으로
사사불공이 됩니다. 사사불공의 결과는 성공입니다.
즉, 복이 쏟아지게 됩니다. 복혜족족입니다.
공즉도생 |
>전체=주인=희사=사사불공=성공=복혜족족 |
공즉덕생 |
사람들은 이 공식을 잘 모릅니다. 처음엔 공심 내려고 하는데 전체가
안되어서 주인이 안 됩니다. 주인이 되었다 안 되었다 합니다. 주인이
되면 적극적이 되고, 자기 형편에 맞게 불공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든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공은 그 단체만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앞에 복과 혜가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 여기까지를 가지 못 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내가 주인으로써 여기저기 불공해보세요.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다 환영합니다. 내가 일할 때 누가 싫어하겠어요.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는데 자신의 가게 앞에만 딸랑 씁니다. 그것이 아니라,
내 가게 앞 쓸 때 옆 가게 앞도 같이 쓸어주고 정리해줍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한테 떡도 있으면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다 나를
좋아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손님도 소개해주고 돈도 벌고 결국은
나에게 복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청소부가 하겠지 아니면 누가 하겠지.. 결국은 공적인
일을 함으로써 내가 복이 되고 내가 혜가 되는데, 많은 사람들은
공적으로 하면 내가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는 온갖
욕을 먹으면서도 눈이 뻘게가지고 하려고 하는데 종교가에서 공적으로
임원 하라고 하면 잘 안 합니다. 단장하라고 하면 안 하려고 하고 중앙
하라고 하면 시험 본다고 핑계대면서 일 있다고 한다. 청년회에서 돈 다
벌고 직업이 안정된 사람 어디 있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속에서도
주인 된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 자기 형편에 맞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이기심으로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사은의 은혜를 받은 것에
비해서 보은 하는 것이 적습니다.
대종사님은 공심 있는 사람은 천록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사람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돈을 얻고
사람을 잃어 버리면 안됩니다. 돈은 물질이고 이용물일 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 사람을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돈을 얻으려고 하면 결국은 사람을 놓치게 되고 사람의 마음을
잃게 됩니다. 결국은 천록은 도망가게 되고 재앙이 따라옵니다.
그 다음 숭배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제목만 하면 끝날 것 같습니다.
-ㅎㅎㅎ
- … ㅎㅎㅎ
뉴스를 보니까 세종대왕 동상을 저녁에 옮겨서 시민들에게 보여준다
하는데 우리 돈을 봐도 세종대왕이나 충무공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역사를 통해서 후손들이 이런 분은 정말 훌륭하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선조는 찾아보면 별로 없습니다. 신하를 상대하고 시기한 임금으로 욕만
얻어 먹습니다. 그런데 그때 백의종군 했던
통해서 얼마나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 받습니까? 그래서 광화문에
선조는 임금이었고 그 당시에
마음이 우리나라를 품고도 남을 정도의 큰 그릇이었다. 그러니까 나라를
살리고 후세에서 숭배를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자연적 숭배입니다.
대종사님 생각하면 저절로 숭배가 되잖아요. 우리 구인 선진님, 간디,
링컨, 모두들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은 국한을 지어서
대부분 포기합니다. 그러데 이분들은 그 포기를 넘어선 것입니다.
여러분 조금만 뭐 하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별 시비이해가
천지입니다. 정말로 엎어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무님 저 단장 그만 하렵니다. 중앙 그만 할래요. 이런 사람 꼭
나옵니다. 왜? 그거 하나 해도 힘든 것입니다. 물론 그 실수를 경험
삼아서 더 잘 할 수도 있지만 제가 미루어 놓고 보면 자기가 어떤 일을
맡았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크게 대성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떤 시비이해 속에서 자기가 공심보다는 사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은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할 것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링컨의 정신은 대단한 것입니다. 링컨 동상은 반짝 반짝 하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옷으로 직접 닦는답니다. 이것이 자연적 숭배입니다.
서가모니 부처님은 일국의 왕으로써 다 갖추었습니다. 예쁜 아내와 자식
그리고 권력까지 다 있었습니다. 서가모니가 사성제를 타파하고
깨달음을 얻어서 일체 사생의 자부가 되지 않았다면 역사 속에 남아
있겠어요? 한 때 잘 먹고 잘 살다 간 사람일 뿐입니다. 서가모니의
공도심, 깨침을 통해서 일생을 중생을 제도 하겠다는 제생의세의 마음,
공심을 역사를 통해서 지금까지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적 숭배입니다.
두 번째는, 진리적 숭배입니다. 이것은 인과의 이치를 말합니다.
묘하게도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다
도와줍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하려고 하면 사기꾼이 있어서 계속
당합니다. 사실은 그것도 알고 보면 연관이 있습니다.
인과의 이치란 책에 나오는데 옛날 정읍 쪽에서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거나, 애기 낳은 사람 집에는 꼭 곡식이나 미역을 갖다
주곤 했습니다. 이분이 나중에 죽어서 부산에 태어났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대기업이요. 그 기업에 직원들이 옛날에 얻어 먹었던
사람들이 직원으로 많이 왔나 봅니다. 회사를 위해서 죽어라 일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적으로 받은 사람들은 도와주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들 대개 보면 육영 사업회에 장학금을 많이 냅니다.
내가 어머님 이름으로 전무 출신 장학금을 내겠습니다. 꽤 많이 냅니다.
육영 사업회 운영이 그렇게 돌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꽤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 사람 돌아가셨는데, 그분의 정성과 공도에 희사한
그것으로써 그분은 여러 전무 출신들과 세세생생 인연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거꾸로 제비도 안 내는 사람도 있다. 제비가
아까워서 못 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빚을 졌기 때문에
누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빼앗아 갑니다.
세 번째는 법리적 숭배, 인위적 숭배입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표창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공무원들도 열심히 하면 훈장을 받습니다.
국가나 사회나 단체를 위해서 하면 주는 것이죠. 우리 원불교도
대봉도나 대호법이 되면 법훈을 드립니다. 이것은 인위적인 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유림 복지관에 가면 동상이 있고 봉도 수련관에 가면 봉산님과
도타원님 동상이 있습니다. 오덕 훈련원도 엄마와 따님인데 오타원님과
덕타원님 동상이 있습니다. 정원 교무님이 어저께 훈련을 중도
훈련원으로 가셨는데, 중산님과 도타원님 두 분이 희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해서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물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많이 돼서 쭉 지나가려고 합니다.
공도자 숭배입니다.
공도자를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라 우대하고 숭배하자는 것입니다.
공도자 숭배의 강령.
세계와 국가 사회와 종교에서 공도자를 숭배를 하면 공도자가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도자 숭배는 극진히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어머니가 고마운 줄 모르지만 철 들면 어머니가
고마운 줄 압니다. 그렇듯이 원불교 처음 만나면 공도자 숭배가
안됩니다. 이기적 삶으로 살다가 서서히 정신 세력이 확장되고
공부방에 와서 공부하고 법회보고 경전 공부하고 연마하다 보면
‘아. 나라는 존재는 공이구나.’
나의 삶을 살아야겠다. 손님의 삶이 아니라 내가 주인 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공도의 삶으로 가게 됩니다. 그 숭배를 함에
따라서 거기 거기에 그만한 공도자가 많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 공적에 따라서 자녀가 부모에게 하는 도리로써 숭배하자는 것입니다.
숭배한다는 것은 극진히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공도 정신을
체 받아서 능동적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때로는 제 스스로 알아서
‘교무님 제가 이것을 이렇게 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그래야지..
시켜도 안 하겠다고 도망가는 것은 공도 정신과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다 알아서 시킵니다. 그 사람의 환경을 보아서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복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이것도
내생에 가지고 갑니다. 이런 공도 정신이 실 생활 속에서 이루는 사람은
큰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이기적 삶은 두 배로 죄를 짓는 것 같습니다. 본인이 복을
짓지 않아서도 복이 안되지만 사실은 복을 짓고 있는 사람들의 심경을
모릅니다. TV 프로그램에서 6명이 화면에 나오니까 스텝진이 10명 되는
것 같지만 80명이 서포트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공도자로써 공익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애환과 아픔과 정성, 땀과 노력과 눈물을
모릅니다. 그래서 쉽게 아는 것입니다. 짓지 않아서 복이 안되지만 쉽게
알아서 숭배가 안됩니다. 그래서 쉽게 비난합니다.
자기 잘못은 엄청 많아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은 용서를
못합니다. 공익심 관계도 마음 공부를 통해서 이야기해보면,
우리가 사실은 이기심이 있잖아요. 저도 있고 여러분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공부심으로 잘 승화시키느냐. 때로는 인과를
통해서 때로는 깨침을 통해서 때로는 사은을 통해서 우리의 이기심을
얼마나 변화시키는가가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높은 잣대를
들이대서 비난 할 것인가 아니면 숭배를 할 것인가?
대산 종사님 법문에 내가 좋아지려면 가정이 좋아져야 하고 가정이
좋아지려면 국가가 좋아져야 하고 국가가 좋아지려면 세계가 좋아져야
한다. 즉, 세계가 좋아져야 국가도 좋아지고 가정도 좋아지고 개인도
좋아지는 것이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나라가 언제부터 잘 살았습니까?
6.25 끝나고 얼마나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 나라에
외국 사람이 와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데 임금도 안주고 두드려
패기도하고 못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동남아 사람들에게 못되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우리 나라를 저주합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의 위신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거 공도사업의 결함 조목.
1) 과거에 사•농•공•상의 전문 교육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능력을 함양해야 한다.
2) 사•농•공•상의 시설 기관이 적었다. 즉, 사업장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3) 그 다음 종교의 교리와 제도가 대중적이지 못하였다. 이것은 대중과
함께하지 못하고 분리 되었다. 불교는 출세간 위주로 문제가 있고
도교도 출세간 위주로 무위자연만 하고 유교는 차별법으로 너무
관료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배타적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의 교리가 대중적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4) 정부나 사회에서 공도자의 표창이 적었다. 왜 표창이 적었냐 하면
첫째 모릅니다. 둘째는 시기 질투 때문입니다. 공도자 숭배 어렵고 시기
질투 안 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완도에 근무 할 때 도지사 상을 받았어요. 도청 국장과 과장이
와서 상 받으라고 하는데 상 받으러 못 갔습니다. 왜? 내부에서는 시기
하니까. 상 받았다고 시계가 오고 마패가 와도 아무도 추앙도 안 합니다.
‘왜 너만 받냐 같이 고생했는데..’ 이렇게 생각합니다.
시기 질투 때문에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시기와 질투는 잘 보이지만
여러분의 주변에서 그것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음 공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상을 주는 사람은 표창을 해야 하고 공도에 복을 짓는 사람은 무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상을 주는 사람이 너는 무상으로 하라고 한다면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유념할 자리에 무념하고 무념 할 자리에 유념하게
되는 것입니다.
5) 모든 교육이 자력을 얻지 못하고 타력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습과
조상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운명론 때문에 타력을 벗어나지 못했다.
교육을 하면 잘 살게 됩니다.
6) 타인을 해하여서까지 자기를 유익하게 하려는 마음과, 또는
원•근•친•소에 끌리는 마음이 심하였다. 국한이 좁았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충신은 목숨을 제대로 부지하지 못했습니다. 충신은 제 자신이
모함 받는 것도 힘든데 자신을 모함한 사람은 더 잘 사는 것이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공도 정신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삶 속에서 보면 잘 하는 사람 있으면 시기 합니다.
우리 교당에서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박수 쳐주어야 하는데 뒤에서
‘그렇게 열심히 할 것은 뭐 있냐?’ 이것이 똑 같은 짓이다. 옛날에
임금님 밑에서 편을 갈라서 잘하는 사람 시기하는 것과 이 안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 뒤통수 치는 것이 알고 보면 똑 같은 짓입니다.
진정으로 공도자를 박수 쳐주는 것이 숭배입니다.
7) 견문과 상식이 적었음이요. 견문과 상식이 적어도 공도자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시기합니다. 공도자의 뜻을 이해 할 수 없어서 동의
하지 않는 것입니다.
8) 가정에 헌신하여 가정적으로 숭배함을 받는 것과, 공도에 헌신하여
공중적으로 숭배함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적었다. 가정적인
것을 넘어선 공도 지향을 알지 못했다.
공도자 숭배의 조목
1) 공도 사업의 결함 조목이 없어지는 기회를 만난 우리는 가정 사업과
공도 사업을 구분해라. 가정을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분해서 같은
사업이면 자타의 국한을 벗어나서 공도 사업을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가정 사업은 어떻게 하라고? 그러니까 공도자에게 가정 사업은 지원해
주라는 것입니다. 지원을 하지 않는데 누가 공도 사업을 할 수 있겠어요.
2) 대중을 위하여 공도에 헌신한 사람은 그 노력한 공적에 따라
노쇠하면 봉양하고, 열반 후에는 상주가 되어 상장을 부담하며, 영상과
역사를 보관하여 길이 기념할 것이니라. 공도에 헌신한 사람은 그만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박수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 세계위인전집 15권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처음으로 책을 저에게 사준 것입니다. 시골에 도서관이
없으니까 그것만 저녁에 읽은 것입니다. 그때 당시 읽었던 것이 지금도
다 생각이 납니다. 그것이 저희 아버지가 저에게 준 커다란 선물 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역사를 읽어서 당연하게 받아 들인 것입니다. 그런
역사를 읽지 않으면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하고 특이한 사람이고 나와 다른 사람이고 나와 다른 삶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원불교에서는 법은사업회라고 있는데 전무 출신의 노후와 병고가 있는
분들의 요양을 돕는 곳입니다. 정산 종사님의 회갑잔치를 준비 하는데
정산 종사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은 회갑도 못하고 돌아가시고 집안에서 아픈
교무님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회갑 잔치를 하겠느냐?’
하시고 회갑 잔치할 돈을 받아서 법은사업회를 만드셨습니다.
이런 성자가 어디 있습니까?
보세요 회갑 잔치하는 사람들은 외국도 갔다 오지 않습니까?
정산 종사님은 당신의 회갑 잔치는 안하고 아픈 교무들 지원하는 법인
단체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공도자 숭배입니다. 열반한 사람들은
공적에 따라서 교단 전체장, 교회 전체장. 교회장 이렇게 있습니다.
제가 참 마음이 아픈 것이 있는데, 교단 전체장을 지내는 대호법 대봉도
출가위가 돌아가시면 우리 교당에서 당연히 매주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런데 교당에서 그것을 지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 마음이 아파서 영혼의 안식을 찾으려고 왔는데 저 사람이 누군데
맨날 제사를 지내라고 하느냐?’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아직 정착이 안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영모전을 세워서 세세생생
그분의 공적을 기리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공도자가 되고 또 그런
공도자를 기뻐해주고 박수 쳐주고 숭배해주는 것이 큰 마음씨다.
여러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수의공덕이라고 하는데 우리 교당에서
누가 큰 희사를 했다면 정말로 박수 쳐 줄 수 있어요? 내가 낸 것 같이
기쁘십니까? 그것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먹을 빵을 주었다면
박수 쳐 줍니다. 그런데 나하고 상관없는 교당에 내고 어디에다
장학금을 냈다면 별 신경 안 씁니다.
사실은 우리는 그런 공덕자들의 은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공도에 헌신한 사람들은 결국 나를 위해서 산 사람들입니다. 국가와
사회와 교단을 위해서 산 사람은 나에게 도움을 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분들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고 나도 정신 육신
물질에 합력을 하는 것이 인과적으로도 진리적으로도 맞는 것이고 내가
주인으로 사는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복이 있는 삶은
보은 하는 삶인 것입니다. 공도자 숭배도 일종의 보은입니다.
공도에 헌신한다고 하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집에서
맡은 것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빨래 청소 설거지 미루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교당에서도 내가 맡은 것 누군가 할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원불교 교리가 사요는 평등 세상을 건설한다든가 하는 교리를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직장 생활도 공적 활동입니다. 내가 주인으로서 삼학을 들이대서
알뜰하게 하면 그것이 주인 된 삶이고 환영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화요 공부방을 보더라고 아까 음악 연주한 사람들 몇 시간
연습했을 것입니다. 나는 잠깐 들었지만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아까 빵과 우유 드셨잖아요? 그것 교당 유지비에서 나간 것입니다.
누구 하나 공양한 사람이 없어서 교당 돈으로 했습니다. 전기 요금
어디서 나옵니까? 내가 이런 소리 쩨쩨하게 안 하려고 했는데
해야 합니다. 안 하면 모릅니다.
어디를 가나 나라는 존재는 많은 손이 필요합니다. 나 하나 물 한 잔
먹고 어떤 것을 잠깐 이용하는 것이 다 누군가의 도움에 의해서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도 정신을 갖고 이기심을 버린다는 것은
공부심이 필요하고 한꺼번에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이타적으로 서서히 변해 갑니다. 자기 스스로 이기적이라고 해서 학대할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원래 이기적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때 그때 공부심 챙겨서 해보자. 오늘도 공익심으로 살았는가
이기심으로 살았는가 대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식당번을 해도 공도 정신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릅니다.
공도정신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지 내가 먼저 와서 우리 교도들에게
좋은 것을 공양할까? 또 주무님 손이 안 가게 깨끗하게 잘 치울까?
어떤 사람은 최대한 늦게 와서 누가 하겠지 그리고 무엇이라도
가져가려고 하고 아니면 대충해서 다른 사람의 손이 가게 만듭니다.
이 안에서도 공도 정신이 문제입니다. 공도 정신은 크게 국가 사회의
문제만 아니라 내가 있는 장소 장소에서 공익심을 발휘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고 내가 있는 곳에서 공도자에게 박수를 쳐주고 대우해 주는 것이
가까이서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명절 때 아무 연락 없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개인주의,
가족주의입니다. 공도주의가 아닙니다. 세상에 내가 다니는 교당에
명절인데 모른 체 하면 그것은 공도정신이 아닙니다. 남이잖아요.
그러잖아요. 교당은 아까 먼저 와서 청소한 사람, 준비한 사람도 있고,
끝나고 나면 치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손님이 각각
나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정말 항상 조금 미리 준비해서 주인으로서
도움 주고, 어떤 일이 끝나고 나면 치워드리는 것이 공도 정신이고
복 받는 일입니다.
출가단 단회 가면 교무님 아주 바쁩니다. 심고문 쓰고 일기 준비하고
청소하고 간식 준비하고 좌복 깔아야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조금 일찍
가서 좌복 깔아주고 혹시 도와 줄 것 없냐고 물어보고 끝나면 좌복
정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나까? 손님은 때 되면 나타났다 때 되면
사라집니다. 네가 주인이니까 네가 알아서 치워라. 그것이 아닙니다.
다른 집에 손님으로 갔어도 내가 주인입니다.
언제 우리가 주인으로 살 것이냐? 그때 그때 그 장소에서 주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당에 오면 교당에서 주인으로 살아야 하고 집에 가면
집에서 주인으로 살아야 하고 직장에 가면 직장에서 주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손님, 교당에 와서도 손님, 집에서도 손님. 이것은
공도 정신이 아닌 이기주의입니다. 공도 정신은 주인 정신입니다.
주인 정신은 손님으로 가서도 주인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은 일원상의 진리를 감 잡을 것 같으면 필연이 되고 내일이 됩니다.
감을 못 잡으면 남의 일이 됩니다. 기분이 좋으면 하고 기분이 나쁘면
안하고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안 합니다. 이것은 아직 공에
대한 이치를 모르고 신심과 국한을 넘은 서원으로 정립되지 못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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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넘넘 감사합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