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증오, 분노 - 4
"아무튼 네 집 근처에 임시 파출소까지 설치해 놓았으니까 별일은 없겠지만,
조심하도록 해.그래, 그 녀석은 아직도 꼬리를 잡지 못했나?"
"죄송합니다."
"조금 있으면 한 달이 가까워."
"너무 걱정 마십시오."
걱정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허열도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백수웅,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었다.
서지아를 그렇게 갈가리 찢어 놓으면 녀석은 반드시 두 눈에 쌍심지 돋우고 나타나리라 계산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까지 녀석은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도무지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다.
"네 운명이 걸린 한 판이다. 하지만 난 너를 믿는다. 이번에 성공해야 네 출세길도 열리고"
말을 잠시 중단한 채 포도주를 따라 입에 털어 넣었다.
허열이 노범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어른이었다.
어차피 자본주의에서는 돈과 권력이다. 둘 중 하나를 움켜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이 어른은 그 모두를 손아귀에 넣었다.
더구나 자신의 장래까지 설계하고 있다.
아내 노옥진만 좀더 밝고 여성답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포도주 잔을 비운 노범호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만일 이후락 정보부장이나 대통령 각하께서 백수웅 체포 책임을
다른 부서로 이관시켜 버리면 넌 끝장이야. 무능한 사람으로 이미지가 심어질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이 세상은 끌어당기는 자와 끌려다니는 자로 양분되게 되어 있어.
낙오되지 않으려면 수단 방법을 가려서는 안 돼. 성공을 위해서는 냉혹해야 할 필요가 있어.
이기는 자만이 살아 남는게 인간사 원리라구. 어차피 넌 돈에는 재주가 없어.
하지만 투쟁심이 있고 야망이 있고 백그라운드도 든든하니 꿈을 크게 꿔. 그 시발점 이 지금이라구.
아내 때문에 잔신경 쓰는 못난이가 되어서는 안돼.
어제도 정보부장한테 말해 놓았다. 허열을 한번 믿어 보라구. 잘 들어. 서둘러 없애 버려."
"알겠습니다."
노범호는 딸 옥진이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만일 사위 열이와 백수웅 틈바구니로 옥진이가 끼여든다면 일이 실타래 얽히듯 얽힐 것이다.
딸아이 때문에 사위의 장래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속 후련히 말해 주겠다고 몇 번이나 별렀지만, 막상 사위 얼굴을 보면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 오면서 터득한 인생 철학을 들려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물려주고 싶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주변이 희생당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며,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 희생시켜야 한다는 냉혹한 삶의 원리를,
원래 권력이나 부(富)는 희생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것이라는 대원칙을
그리고 권력이나 부는 힘 있는 자가 먹어 치우는 법이라는 것을
식사를 마치고 격려를 하면서도, 그는 사위의 능력을 무조건 믿고 싶었다.
"넌 반드시 성공한다. 난 네 성공을 위해 무엇이든 다 쏟아부을 것이다."
허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준 노범호는 청와대로 돌아갔고,
허열은 수사 본부인 반도 호텔 306호로 다시 돌아왔다.
지난 밤 화재 사건 수사 결과를 남성우가 들려 주었다.
"옆집 김기태라는 사람 집에서 발생된 화재로 검사님 댁은 단순 피해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김기태 개인 리스트를 조회해 보았지만, 별다른 흠집은 없었구요."
"알았어. 백수웅 사건이 끝나면 그 집을 사들여야 되겠어. 이거야 불안해서 어디
자, 그건 그렇고, 모여서 회의나 하자구."
회의의 요점은 현재 백수웅의 은신처가 어디냐 하는 것이었다.
이미 처음 나타났던 양동은 떠나 버린 것 같고, 청량리나 종삼 일대에서도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연락관은 혹 조선 호텔이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으로 꺼낼 처지가 아니었다.
상처가 다 아물지 못해 얼굴에 반창고를 붙여 놓은 남성우가 머리를 번쩍 들어올렸다.
"왜, 의심할 만한 은신처라도 있나?"
허열이 남성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녀석은 하고자 하는 일은 다 합니다. 또 알고 싶은 건 다 알아 내고요."
"무슨 뜻이지?"
"백수웅은 우리 본부 위치도 알고 있고, 어쩌면 검사님 댁도 알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지난번 화재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히 발생된 것만은 아닌 것 같거든요."
허열은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그 녀석이 내 집을 노리고 있다는 건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 아무튼 타이밍으로 보아 기분 나쁜 화재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녀석이 지금 까지 우이동을 배회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놈은 틀림없이 충북 괴산으로 내려갔을 겁니다."
자신이 백수웅에게 고백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있는 곳.
노범호의 명령으로 그녀(홍표순:백수웅의 어머니)의 행적을 뒤쫓던 중
충북 괴산의 한 촌락에 몸을 의탁한 사실을 확인했고, 그 사실을 백수웅에게 들려 준 것이다.
"괴산? 충북 산골 아닌가."
"네. 제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백수웅의 어머니가 괴산 청안면 새골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모르긴 해도 백수웅은 어머니를 찾아 당분간 몸을 숨길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
허열은 남성우와 정보부에서 파견한 요원 한 명을 즉각 괴산으로 내려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허열은 한 발 늦은 셈이었다.
남성우가 검은색 지프로 바람을 날리며 서울을 벗어날 무렵,
백수웅은 이미 서울에 도착해 그린파크에서 여장을 풀고 긴 휴식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였다.
잠을 설쳤던 지난 밤과, 어머니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지쳐 있던 백수웅은
저녁 7시까지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겨우 눈을 뜨고 조심스렵게 로비로 내려가 그릴로 자리를 옮긴 백수웅은,
웅성대며 텔레비전 앞에 모여드는 고객과 종업원들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백수웅이 유창한 일본말로 종업원에게 묻자, 종업원은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한 채 들뜬 표정으로 대답했다.
"박 대통령께서 남북 문제에 대한 중대 발표를 했는데 다시 방송한대요. 낮에 못 봐서 지금 보는 중이에요."
남북 문제에 대한 중대 발표? 그럼 벌써 이후락과 박성철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5월 하순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중대 발표는 박성철, 이후락 남북 회담의 예비 조치가 틀림없을 것이다.
백수웅은 잔뜩 긴장한 채 그릴의 의자를 당겨 홀에 설치된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갔다.
1972년 3월 30일.
이 날은 백수웅 뿐 아니라 노범호, 허열, 노옥진, 아니 온 국민 눈과 귀를
텔레비전과 라디오 앞으로 끌어모은 날이다.
그것은 녹화 방송이었는데, 화면에는 기자 회견실에서 텔레비전과 신문 기자들이 웅성대는 모습이 나왔고,
잠시 후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이 테이블 앞으로 나와 곧 대통령 각하께서
북한에 대한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흘렀다.
대통령 기자 회견용 탁상을 중심으로 좌측에 김종필 국무총리,
김용식 외무부 장관, 정래혁 국방부 장관이 앉아 있었고,
대통령석 바로 옆에는 이후락 정보부장이 앉아 있었다.
그 좌측으로는 윤주영 문화 공보부 장관, 최형섭 통일원 장관이 앉아,
대통령 각하께서 나오실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앉아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단하고 야무지게 생긴 박정희 대통령이 손에 메모지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카메라 기자들의 플래시가 터지고, 내외신 텔레비전 카메라 렌즈가 일제히 대통령에게 집중되었다.
이 날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 평화를 위한 5대 평화 원칙을 제안 했다.
백수웅은 텔레비전 화면의 대통령 모습과 북측에 제시한 5대 평화 원칙 선언을 뇌리 깊숙한 곳에 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남북한은 긴장 상태의 대치 상황을 제거시켜 평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 북한은 적화 통일의 야욕을 버리고 도발과 무장 공비 침투등 무력 도전 행위를 즉각 중지해야 한다.
3)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통일 기반 조성에 필요한 인위적 장벽(휴전선)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간다.
4) 북한이 UN을 존중하고 그 권위를 존중한다면, UN에서의 남북문제 토의에 북한이 참석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5) 남북한은 적대 관계를 벗어나 선의의 경쟁자로 국제 무대에 나서야 한다.
이상이 대통령이 발표한 5대 평화 원칙 선언이었다.
뉴스가 끝난 뒤에도 백수웅은 한동안 의자에 앉아 일어날 줄 모르고 있었다.
이는 남북 쌍방간, 군사적 이념적 대결을 절대 원칙으로 생각했던 통일 노선을 전면 거부하고
통일 조국의 올바른 원칙읏?계획을 세워 놓고 무슨 원칙 제의야,
이건 제스처야. 국민들 자신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집단이 제거된 완전한 개인 자유 국가,
그 유토피아의 창시자로 백수웅은 앞으로 전인류의 표상이 될 것이다.
북한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아버지나, 현 남한 정권에 의해 아들을 잃고 촌가에서
폐병으로 피를 토하고 운명하신 어머니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어디선가 눈물의 세월을 보낼 노옥진,
자신을 위해 피살당한 서지아, 이 모두는 새로 태어날 이 땅의 유토피아를 위한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어차피 한번 흐른 시간은 되돌아오지 못한다. 하지만 비극적 역사는 되풀이할 수 없다.
이제는 잊을 것이다. 사랑도 증오도 분노도 모두 잊을 것이다.
남북의 전면 전쟁 한 번이면, 이 땅에는 새로운 이상 세계의 꽃이 활짝 필 것이다.
그러자면 연약한 감상 따위로 시간을 보낼 순 없다. 이제 석달정도 남았다.
4월, 5월, 6월. 그 안에 총력을 기울여 정보를 입수하고 양국의 회담 대표를 무참히 폭사시킬 것이다.
가슴 속에서 피가 끓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자기의 살인 행위와 살인을 통한
전쟁 발발을 정당화시키려는 자기 도취에 빠져 있었고, 다시는 헤어나지 못할 망상에 젖어 있었다.
"죽여야 한다. 그들을 죽여야 한다. 내 자신이 행동하고 싶은대로 주저 없이 움직여야 한다.
더 이상 생각하고 사고하다가는 바보가 될 것이다."
그는 본능만이 강력한 힘을 유발시키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고있었고,
마침내 포악한 살인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백수웅은 이후락, 박성철을 비롯한 회담 진행 요원을 테러하기 위한 다짐을 하며 앞일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런 뜻에서 자신을 추적하는 허열은 좋은 미끼일 수밖에 없다.
허열 뒤에는 노범호가 있고, 노범호 뒤에는 이후락이 있다. 정보루트는 허열 하나면 충분하다.
허열의 코앞에서 혀를 내밀며 그를 흥분시키고, 그가 이성을 잃을 때쯤 뒤통수를 칠 것이다.
뒤통수를 치는 무기로 그 녀석의 어린 딸이 이용될 것이다.
백수웅은 허열의 어린 딸을 희생시키기로 결정했다.
백수웅이 이후락, 박성철 테러와 어이없게도 노옥진의 딸 미라를 살해하기로 결심하던 시간,
그린파크 건너편의 대저택 응접실 의자에 앉아 있는 노옥진은 상처투성이의 영혼을 끌어안은 채
이날도 잊을 수 없는 비통한 추억의 늪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지난 시간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 주지않았다.
백수웅에 대한 그리움이 체념이라는 지우개로는 도무지 지울수 없는
그림이라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의식하기 시작했고,
그리움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채 놓아 주지 않았다.
"휴우"
그녀는 습관적으로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응어리진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운명도 참혹한 것이었다. 이 불행의 근본 원인은 남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책임을 묻고 상처받은 영혼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백수웅을 찾아 집을 떠나 버릴 수도 없고, 애정 없는 가정에 더 이상 얽매여 살기도 싫었다.
사랑스러운 어린 딸 미라만 아니었다면, 언젠가처럼 수면제라도 털어 넣든가
한강에 달려가 투신자살 이라도 했을 것이다.
소파에 엎드려 놀다 그대로 잠들어 버린 미라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가슴을 후비며 들려 왔다.
미라의 뺨에 볼을 댔다. 따뜻한 피가 볼에 흘러, 싸늘하게 식어버린 노옥진의 감정을 덥혀 주었다.
사랑이란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다. 지금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이며 희망인 것은 이 미라뿐이었다.
그리고 아기의 숨소리는 언제나 절망 속에서도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미라야, 너는 내 삶의 전부이며, 살아 있는 이유의 전부란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의미는 그보다도 훨씬 더 크단다.
미라야, 사랑하는 미라야, 어서 자라거라.
이 세상은 알고 배우고 이해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단다.
네가 세상을 깨우치고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면,
이 엄마의 아픈 모든 이야기를 네게 들려 줄 작정이란다. 어떤 경우라도 엄마를 욕하지는 마라.
지금 이 엄마는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단다.'
그렇다. 그녀는 지금 누구에게도 아픔을 호소할 수 없었다. 철없는 어린것을 바라보며,
그녀는 내면 깊이에서 솟구치는 외롭고 힘든 심정을 털어놓고 있었다.
허열과의 결혼, 미라의 출생으로 이어지는 평범한 가정을 이끌어 왔지만,
아무리 마음 잡아도 남편 허열로부터 사랑을 느낄 수 는 없었다.
미라가 태어나고 성장해 가면서 오히려 가정은 더욱 건조해 가기만 했다.
그래도 서로 헤어지지 못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허열은 먼 장래를 생각하여 자신의 살아가는 발자국을 깨끗이 남겨 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고,
노옥진에게는 어린 미라를 위해서였다.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참고 견디고 침묵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미라가 태어난 후 노옥진은 다시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건강을 핑계로 일본으로 건너가 불임 수술을 받았다.
이제 자신은 일생을 통해 다시는 아기를 잉태하지 못 할 것이다. 미라 하나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1964년 12월 24일 실종되었던 백수웅이 1972년 봄 홀연히 서울에 모습을 나타냈다.
스무 살 어린 나이의 감성에 불을 지르게 했고 첫 몸을 열어 주게 했던 남자.
그 목숨처럼 사랑하던 남자가 지금은 남편과 목숨 건 사투를 벌이고 있다.
누구든 희생된다는 건 정신 파멸을 뜻한다. 두 사내의 틈바구니에 낀 노옥진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아 아!"
그녀는 또다시 견딜 수 없는 비명을 질러 댔다. 가슴 속에서 응어리진 피를 토해 내는 고통스러운 절규였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남편의 서재로 들어갔다. 책상 위의 고무판 밑에서 열쇠를 꺼내 서랍을 열었다.
허열의 호신용 권총이 들어 있었다. 권총을 집어 머리에 댔지만,
차마 방아쇠를 잡아당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린 미라의 웃는 모습이 머리를 스쳐 갔기 때문이었다.
힘 없는 발길로 되돌아와 2층 소파에 걸터앉았다. 시선이 피아노 위로 옮겨 갔다.
미라의 웃는 사진이 있던 자리는 아직도 비어 있었다.
틀림없이 백수웅이 가져갔을 것이다. 그가 왜 그 사진을 가져갔는지,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밖은 여전히 어둠에 싸여 있고, 가까이 있는 그린파크 호텔의 네온이 현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시간, 그린파크의 백수웅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품속에 넣어 두었던 아이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
반으로 접었던 탓에 얼굴이 구겨져 있었고, 칼로 찍었던 자리는 크게 구멍이 나있었다.
아이는 참으로 귀엽게 생겼다. 얼굴에 미소를 함빡 띤 채 손으로 개나리꽃을 쥐고 있었다.
백수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쁘고 귀엽지만 어쩔 수 없어. 네가 허열의 딸로 태어난 것이 운명의 전부지.'
눈을 감았다.
만일 노범호에 의해 일본에 버려지지만 않았다면, 자기도 지금쯤 이만한 아이와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무등을 태우고, 손에 솜사탕을 쥐어 주고, 창경원으로, 덕수궁으로 행복을 뿌리며 다닐 것이다. 옥진이와 함께
아---아, 그러나 부질없는 생각.
아무리 몸부림쳐도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아. 그건 신(神)조차 불가능한 일이야.
'그래,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너도, 나나 옥진이나 내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이 나라를 위한 밑거름이 되는 거야.'
그러나 차마 사진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건 참으로 이상한 감정이었다.
벌써 네 번째 꺼내 보며 살의(殺意)를 다짐하지만,
다짐이 끝나면 혹 다칠세라 조심스럽게 접어 지갑에 넣어 두곤 했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누워 있으니 서늘한 고독이 외투처럼 휘감아 오기 시작했다.
아내와 어린 딸을 데리고 여기저기 놀러 다닐 허열을 생각하면 미쳐 버리고 말 것 같았다.
견디자며 아무리 다짐하고 맹세하고 약속해도, 아이의 사진을 보고 난 뒤에는
언제나 이런 뼈저린 고독감에 진저리쳤다.
그 많은 세월과 엄청난 고독과 고통을 참고 견디며 살아 온 백수웅이었지만,
요즈음 그는 정말 견디기 힘든 고독감에 몸부림쳐야 했다.
벌떡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허열의 집 창문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첫댓글 정말로 노옥진의 딸을 납치하게 될런지 다음이 궁금하네요
핏줄은 서로 당기는것일까?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