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등화관제 훈련하듯 바닥을 비추는 흐릿한 홍등아래서 우리는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안주가 도착하기전 벌써 서너잔의 술잔이 돌았다. 그는 내가 따르기도 전에 서둘러 자작을 하고 만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드디어 안주가 도착하였으나 그는 젓가락은 잡지도 않고 냉장고에서 소주 한병을 꺼내왔다.
평소 대략은 그의 사정을 알았고, 만나자는 전화에서도 분위기를 읽을 수가 있었다. 나는 연거푸 마셔대는 그의 술잔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건너다 보았다. 모자를 쓴 그의 얼굴은 침울해 있었다. 이럴 경우엔 차라리 취해 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빼앗았던 그의 술잔을 드밀어 주었다. 오늘 만큼이라도 잊어버리길 바랬다.
그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후 가볍게 그의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가볍게 토닦였다. 세상살이 다 그런것 아니냐?는 무언의 위안이고 싶었다.
그는 한동안 지속해온 장사가 잘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루에도 손님이 거의 없을 때도 있었고, 자신의 인건비는 물론 가계의 달세를 내기에도 부담스러워 인수자를 구하려고 하는데도 거들떠 보는 이가 없다고 하였다. 그기에다 아이들과의 불화도 심하고 엇그저께 가깝고 소중한 이를 보냈다 하였다.
평소의 옥죄는 생활에 누군가의 죽음이 울분의 뇌관을 건드리고 말았나보다. 요즘세상 실직, 그리고 자영업으로 이어지는 뭐 그런게 아니냐?고 반문해 버리기엔 가장이라는 그의 처지가 남의 일 같지 않고 가슴아픈 순간이었다.
눈동자가 개슴츠레해지고 대여섯의 빈술병이 탁자 귀퉁이에 제멋대로 진열되자 그는 노래방을 가자고 하였다. 평소 같으면 무슨 노래방이야?며 단번에 거절을 할 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러지를 못하였다.
내가 노래방을 싫어하는 것은 특별히 노래를 못불러서가 아니라 침침한 등불아래서 노래제목을 찾는 것이 못마땅 해서이다. 한구석에라도 좀 밝은 불을 켜두지 않고서 왜그리 컴컴한지 마치 폐쇄공포증이 생겨날 기분이었다.
둘이는 어깨동무를 하고 비틀거리며 호프집을 나왔다. 가까운 곳 노래방, 기기가 작동하자 그는 벽에 붙은 애창곡 중에서 몇곡을 선곡한 뒤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노래는 슬픔내지는 허무 일색이었다. 두곡을 연이어 부르더니 나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가 선곡해준 나의 노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소리를 높이어 노래를 부르자 그는 혼자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보였다. 이거 노래를 계속해서 불러야하나? 아니면...
그렇게 한 시간여를 보내고 그를 택시잡아 보냈다. 가기 전에 가족과 통화를 하고 마중 나오기를 부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창문을 내리고 시원한 밤공기를 마셨다. 양극화, 만유인력에 의하여 작은 것이 큰 것에 의하여 끌려 형체가 작아져버리는 순간 같이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 속에는 좌절하고 분노하는 삶. 문득 아까 그가 내게 선곡해 주었던 노래가사가 떠 올랐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그래도 우리 힘내고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