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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 산행기
주왕산 산행 출발을 위해 교대역으로 나갔다 어제 저녁 6시 35분 까지 탑승 완료해달라는 안치규 건축사의 메시를 받고 늦지 않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갔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해 차 안에 오르니 몇 분이 앉아 게셨다. 몇 분은 자리를 답아 두고 밖에 나가 한담을 한담을 하다 예정시간이 되자 들어와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30분이 지난 7시 5분이 되어도 차가 출발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일행이 어찌된 일인가하고 묻자 몇 분이 오고 있어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잠시 후 창 박을 보니 이승훈 건축사와 서울시 건축사회 회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출발 예정시간보다 30분쯤 늦게 출발했다. 이번 산행은 전국 건축사 등산동호회 행사로 치루게 되어 주왕산 주차장에서 집결하기로 되어 있는데 시간이 지체되어 주왕산에서 타 지역 일행들을 만나가로 한 것과 산행 시간 자체가 많이 부족해지게 되었다.
차가 경부 고속도로에 진입한 후 김의중 서울 건축사 등산동호회장이 인사말을 하며 이번 전국건축사 등산동호회 행사에 참석한 강성익 대한건축사협회 회장 등을 소개했다. 강히장이 먼저 앞에 나와 인사말읋 하고 금일봉을 주었다. 그 다음 현 서울건축사회장과 이창섭 전 대한건축사협회 부회장이 인사말을 한 다음 금일봉을 주었고, 이번에 참석치 않은 김영수 전 서울건축사 회장도 금일봉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개인적인 기우의 생각이지만, 벌써 연륜이 쌓인 건축사 등산 동호회의 인원이 많아진 편이라 전부터 큰 일에 나설 것을 염두에 둔 사람들이 일부러 얼굴을 보이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순수하게 등산을 좋아해서 산에 함께 가는 것이야 누구나 환영할 일이지만 혹시 그보다도 다른 뜻을 염두에 두고 임하는 경우에는 바람직스럽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일을 동호회장의 배려로 이루어진다면 더 좋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찾아가는 산이 순수하듯 그 산을 사랑하는 등산 동호회는 끝까지 순수한 동호회 모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영동고속도로로 가다 8시 6분 여주휴게소에 들러 잠시 쉬었다. 이른 시각인데도 휴일을 맞아 나들이를 하는 차량으로 너른 주차장이 분주했다. 차에서 내리며 좌측에 보이는 그리스 참전 기념비가 보여 다가가 살펴보았다. 그 뒤로 예전에 없었던 큰 박스형 건물이 들어서서 숲 속에 놓여진 장소 이미지가 달라져 있었다.
다시 버스가 출발하여 8시 50분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안동 시내를 거쳐 교외로 빠져 나갔다. 주변 모습이 산간지대 삶터의 느낌을 자아냈다. 청송이 가까워지며 더 깊숙한 산지 마을 풍경이 나타났다. 11시 1분 청송으로 가는 고갯길을 넘어 가니 길게 계곡을 형성한 곳에 첩첩한 봉우리 너머로 멀리 시선이 트여 나갔다. 청송이 오지임을 느끼게 했다. 마을로 내려와 주왕산 가까이 가다 보니 좌측으로 얼음골 표지가 보엿다. 길 주변 논에는 벼가 막 뿌리를 내려 키는 아직 그대로지만 점점 새파랗개 변해가고 있었다.
11시23분 주왕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터미널 건물 앞으로 다가가니 옆에 세워진 안내표지판에 둥근잎 꿩의 비름과 솔 부엉이가 주왕산 깃대종이라고 설명되어 잇었다. 대한건축사 등산동호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신종복 건축사 일을 보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대구 건축사회 회장도 반갑게 일행을 맞아 주었다. 신종복 총장이 뒤풀이 장소는 대전사 정문 150m 전에 위치한 수달래 식당이라고 했다.
일행은 주왕산을 오르는 A조와 계곡 옆길로 3폭포까지 왕복하는 B조로 나눠 진행하기로 했다. 차 안에서 A조를 택한 사람은 9명이었다. 산행을 시작했다. 주왕산으로 굽어 진입하는 곳에서 개울과 대전사 뒤로 우뚝 솟은 암봉이 어우러진 모습이 바라보였다.
주왕산 일대는 1976년에 주왕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영덕군의 일부지역을 포함한 청송군 청송읍·부동면·진보면 일대의 총면적 105.6㎢ 가운데 청송군은 75.7㎢, 영덕군은 29.9㎢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식물로 망개나무·솔나리·노랑무늬붓꽃·복장나무 등이 자라며, 약 555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어 희귀동식물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서쪽의 대전사에서 주방천 상류에 이르는 곳에는 주왕산 국립공원의 중심을 이루는 주왕계곡이 있으며, 계곡을 따라 기암, ·아들바위,· 학소대, ·급수대, ·망월대 등의 기암괴봉이 늘어서 솟아 있다. 특히 입구에서 3㎞ 지점에 있는 기암(旗岩)은 정면에 200m가 넘는 7개의 봉우리 가운데 최고봉이다.
안쪽으로 가다보니 입구에서부터 대전사 조금 전까지 식당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보였다. 조금 전 알려준 뒤풀이 식당도 보였다. 대전사 입구에 당도하니 집행부 회원이 안으로 들어가라고 안내했다. 대진사 경내로 들어서니 전보다 건물 한 채가 더 지어져 달리진 모습이었다. 대전사는 주왕산을 드나드는 길목에 위치해 주왕산을 오를 때는 언제나 지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왕산 안쪽에 설치된 주요 이정표에도 이 절까지의 거리를 기준 삼아 표시해 놓았다.
대전사(大典寺)는 최치원·나옹화상·도선국사·보조국사·무학대사·서거정·김종직 등이 수도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군(僧軍)을 훈련시키기도 했던 곳이다. 경내를 가로 질러 개울 옆 길로 나왔다. 잠사 후 좌측 개울을 건너는 다리 앞 갈림길에서 곧바로 직진하여 주왕산 정상을 행해 갔다. 어느새 무성해진 녹음이 흙길에 짙은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코스로 주왕산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이 쪽으로 오르는 길은 주왕산을 올라 후리매기 삼거리로 내려오는 일정한 코스로 되어 있어서 올 때마다 같은 길을 지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코스에서 펼쳐보이는 풍광도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다.
오름길이 시작되는 지점의 계단길을 지나 한동안 걷다보니 좌측 위로 한 곳에 머물러 쉬는 사람들 소리가 났다. 주왕산 풍광이 한눈에 펼쳐 보이는 전망대가 있는 곳이었다. 그 곳에 이르러 보니 충남지역 회원들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거기서 펼쳐보이는 풍광을 스케치했다.
바라보이는 풍광은 방금 들어온 입구로부터 느미기재까지 길게 이어진 주왕계곡이 협곡을 이루며 놓여 있고 그 좌우로 나한봉, 지장봉,·관음봉,·옥순봉,·칠성봉,·호암봉 등 병풍처럼 솟아 있는 기암괴석의 산세가 첩첩히 둘러친 모습이다 자하성(紫霞城)이라고도 하는 주왕산성은 대전사에서 약 1㎞ 들어선 지점에 있는데 그 성은 주왕이 고려군을 방어하기 위해서 3년에 걸쳐 쌓은 것이라고 한다.
잠시 후 서울 일행이 뒤따라 도착해 잠시 쉬면서 단체 사진을 찍고 다시 앞서 출발했다. 그리고 다른 일행이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앞을 바라보며 스케치를 하는 사이 그 일행이 혼자 온 여성분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케치를 마치고 다시 오름길을 올라가다보니 앞쪽 봉우리에 아까 사진을 찍던 사람들이 보였다. 거기서 건너에 주왕산 정상부 봉우리가 바라 보였다. 안부를 지나 오름길을 오르다 아까 보았던 충남 건축사회 회원들을 만났다. 간식을 먹으며 쉬다가 시원한 맥주를 따라 주었다. 땀을 흘리며 걷는 도중 마시는 얼려진 맥주 맛이 일품이었다. 그분들에게 앞서가겠다고 인사를 하고 오름길을 걸었다.
12시 54분주왕산(722m)에 도착했다. 정상이지만 거기서는 주변 풍광이 시원스레 바라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만날 줄 알았던 일행도 보이지 않았다 주왕산에는 주왕에 관한 두 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간단히 말해 주왕이 이 곳에서 왕국을 이루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전설은 주왕산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상(城)처럼 되어 있는 특별한 지형에서 비롯되었을 것 같다. 옆으로 길게 이어진 계곡을 험준한 기암 괴석이 둘러치고 있어 마치 천연 요새처럼 범접하기 어렵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왕산의 원래 명칭도 그러한 형세를 뜻하는 석병산(石屛山)이었다.
주왕산 전설가운데 하나는 왕위를 놓친 김주원이 주왕산에 들어가 성을 쌓고 주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김주원은 신라시대 37대 선덕왕이 죽은 후, 그 후대 왕으로 추대되엇다가 우연한 사건으로 왕위를 높치고 경주를 떠났던 사람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왕(金良相)이 후사 없이 죽 은 후 무열왕계의 직게직손인 김주원과 선덕왕의 킹 메이커 역할을 했던 상대등 김경신이 후계 물방에 올라 있었는데 회의에서 품계가 높았던 김주원을 왕위에 추대해 왕이 될 듯 했으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어긋나고 말았다.
당시 김주원은 왕경(서라벌)의 북쪽에 있는 알천(閼川 대종천으로도 불림) 건너편에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왕궁에 들어와 왕위에 오르도록 연락을 하였으나 큰 비가 내려 며칠 동안 입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 조정에서 새로운 논의를 하여 김주원이 오지 못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며 김경신을 왕으로 다시 추대하였다. 일설에는 김경신 측에서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오지 못할 것을 예측하고 재빠르게 회의를 진행시켰는데 그 때 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대신 선덕왕과 같이 내물왕의 후손인 김경신(내물왕의 12대손)을 왕으로 추대했다는 말도 있다.
그 때 김주원은 왕위를 포기하고 강릉으로 가서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왕위에 오른 김경신(원성왕741~798)은 그를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하고 강릉 일대를 통치하게 했다. 그 후 김주원의 장남인 김종기는 부친의 직위를 물려받아 원성왕을 인정하는 자세를 취했으나 그의 둘째 아을 김헌창은 반란을 을으켰다가 실패했다. 그리고 그 후 김헌창의 아들인 김범문이 다시 한차레 반란을 꾀하다 실패했다. 그러한 역사적 사건을 감안할 때 어쨌든 주왕산의 주왕 전설은 앞서 말한 김주원의 일화와 어느 정도 관계가 일을 것처럼 보인다. 청송의 향토사학자 김규봉씨는 920년경에 낭공대사가 썼다는 주왕사적(周王事蹟)의 연구를 통해 주왕의 전설은 신라 말기 반역을 꾀했던 김헌창(憲昌)과 김범문(梵文)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시기상의 차이를 두고 마장군이 고려의 장군으로 주왕이 최후를 맞은 것이 그 시대로 보는 설도 있다.
그런 데 또 하나의 주왕산 전설이 있다. 그 이야기는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당나라때‘주나라’를 재건하기 위하여 자신을‘후주천왕’이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킨 진나라의 후손인‘주도’라는 사람이 있었다.'주도’는‘당나라를 무너뜨리고 옛 ’주나라‘를 다시 세우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자칭 주나라 왕이라 칭하고 세력을 모아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공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도는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당나라 장수 곽자의에게 패해 반란에 실패하고 군사들과 함께 요동을 거쳐 신라로 도망을 온뒤 석병산(주왕산의 옛이름)으로 숨어들어갔다. 그 후 당나라는 주도가 주왕산으로 숨어들어 갔다는 것을 알고 신라왕에게 주도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그러자 신라왕은 마일성 장군과 그의 다섯 형제들에게 석병산에 숨어 있는 주도와 그의 병사들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주도와 그의 군사들은 마장군의 군사들에게 쫒기자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주왕굴로 숨어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주도가 폭포수에 세수를 하러 나왔다가 마일성 장군에게 발각되어 후주천왕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고 하는 이야기다.
한편 주도에게는 '대전'이라는 아들과 '백련'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후에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이 그의 전설을 전해 듣고 주도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산 입구에 있는 절에는 아들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붙여 주었고, 개울 건너편에 서있는 암자에는 딸 이름을 따서 '백련암'이라고 붙여 주었다고 한다. 또한 주도의 꿈이었던 '후주천왕'을 줄여 '주왕'이라는 이름을 그가 숨어들었던 석병산에 붙여 그 때부터 석병산을 주왕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주왕산에서 후리매기 삼거리 쪽으로 조금 가다가 인천에서 오신 회원분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인천 회원들과는 백운산 겨울 산행을 함께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예기치 않은 폭설이 내려 함께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다시 길을 가다 안부를 지난 오름 길 우측 안쪽에서 일행이 모여 식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충북의 오긍균 전 대한건축사 등산동호회 회장과 몇 분의 일행이 보여 반갑게 인사했다. 박기현 전 회장이 안쪽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아까는 9명이 이 코스로 가겠다고 했었는데 20명이나 보였다. 버스 좌석에 함께 앉았던 나상학 건축사가 마음을 바꿔 이리 왔다고 했다. 자리를 앉으니 이득우 재무가 막걸리를 한잔 권했다. 밥과 김치 오이 상추 그리고 제육 복음까지 다양한 메뉴로 모두 즐겁게 식사를 하는 모습이었다. 남상길 건축사는 특유의 양푼 비빔밥을 만들어 주변에 권하였다. 이동훈 건축사가 저렇게 큰 양푼을 어떻게 가져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성환 경남화장, 전상기 경북직전회장, 신종복 사무총장도 함께 식사를 했다. 김성환 경남회장은 지방 특산품 소주를 한 병 가져와 돌렸다.
1시 10분 박기현 건축사에게 말하고 앞서 출발했다. 날씨가 맑아져 키 큰 소나무 숲과 산세가 아름답게 겹쳐 보였다. 앞이 휜히 트여 보이는 내림길을 걷다 아까 보았던 오회장 등 충북 회원들을 만났다. 충북 회원들과는 월악산 북한 산 등으로 상호 초청 산행을 한 적이 있었다. s가 백두대간과 낙동 정맥을 종주할 때 산행기마다 댓글로 격려해준 최종철 건축사, 박성식, 이진희, 김성진 건축사 등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앞서 걸었다.
계속해서 내림길을 걸어 후리매기 삼거리가 0.5km 남은 지점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는 계곡 옆으로 평평하게 길이 나 있었다. 잠시 후 1시 41분 후리매기 삼거리에 도착하니 길 좌측 계곡에서 경북 회원분들이 탁족을 즐기며 함께 하자고 했다. 그분들과 인사를 나무다 한 분이 나에게 “스케치도 잘 하더라”며 반갑게 대해 주었다. 오늘 주왕산 도착은 늦었지만 산행중 충남, 충북, 인천, 경남, 경북 회원님들을 차례로 만나 인사를 나누니 전국에 계신 회원님들과 모두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당초에는 후리매기 삼거리에서 들머리로 내려가려 했었다. 그런데 후리매기 삼거리에 세워진 이정표의 가매봉 표시를 보고 서둘러 들러갈 마음을 먹고 그곳으로 향했다. 전에 낙동 정맥 종주중 다른 일행이 길을 잘 못 알려주어 너구마을과 달기폭포사이로 내려갔다가 정맥길로 복위하기 위해 가매봉으로 올라간 적이 있었다. 너구마을-금은괭이삼거리- 제1폭포-내원마을- 가매봉- 왕거암- 왕거암삼거리에 이르는 16km 정도를 오직 벗어난 정맥길로 복구하겟다는 일념으로 급하게 찾아갔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맥에 접어들어 그날 오후 늦게 피나무재까지 가서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일이 있었다. 그런데 결국 그 때 꼬인 일정이 결국 땜빵길에 다시 큰 낭패를 불러올 줄은 미처 몰랐다.
험한 계곡으로 간신히 이어진 산행로를 따라 가다 경사가 급한 오름길에 접어들었다. 전에 내원 마을에서 오를 때도 힘이 들었었다. 저 위로 높은 산세가 멀리 느껴졌다. 게곡 지점부터 오른 길이라 882m 높이의 가매봉 정상까지는 큰 고도차가 생긴다.
2시 35분 가매봉 정상이 바로 위로 보이는 곳에 계단이 놓여 잇었다. 그 아래 “이 물품은 시설물 보수용입니다.“라는 표지가 써 있었다. 그 표지를 보며 영화‘고지전’ 장면이 떠올랐다. 수 없이 주인이 반족되는 고지전에서 어차피 다시 점령할 거라 생각하고 군수물품을 땅에 묻어둔 것을 적이 꺼내 사용한다는 내용이 있다.
게단길을 올라 가매봉 정상이 0.2km 남은 지점에 도착해 물과 김밥을 먹었다. 정상부가 바로 앞이었지만 우선 허기를 면해야 할 것 같았다. 산행에서 배가 고프면 뭐든지 먹기부터 해야 한다. 배가 고프면 걷기가 무척 힘들어진다. 마치 자동차가 운행중 기름이 떨어지기 전에 주유를 해야 하는 것과 같다.
가먀봉 20m 앞에 표지가 있었다. 젊은 남녀 두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 펀득 생각이 나서 저 위에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없다고 했다. 그럼 정상에서 사진을 좀 찍어 줄 수 있느냐고 하자 여자분이 흔쾌히 대답하며 함께 올라섰다. 정상에 올랐다. 날씨가 더 맑아져 주변이 훤출하게 바라보였다.
이 봉우리는 나와 개인적인 사연이 깃들어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낙동정맥 종주중 길을 잘못 들어 7시간을 헤마며 다시 정맥길을 찾아가는 도중 올라와서 길을 가늠하던 곳이다. 날씨가 점차 맑아지며 훤출한 시선이 멀리 펼쳐 보였다. 앞에 바라보이는 산맥이 낙동 정맥이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듯이 정맥을 걷는 도중에는 볼 수 없는 풍광이다. 지도상에서 정맥은 가매봉을 조금 비켜선 위치에 있다.
너르게 펼쳐보이는 산세를 배경으로 여자분에게 사진촬영을 부탁했다. 그녀가 바위위에 선 포즈를 찍은 다음 다시 소나무를 배경으로 찍어주겠다고 햇다. 아까 자기를 찍어분 분이 여기서 삑으면 멋있다고 알려 주었다고 했다. 그 친절한 마음이 고마워서 사진을 찍어주고 내려가는 것을 뒤따라가 남자 친구에게 큰 소리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하산길 코스의 선택을 망설이다 올라온 길과 다른 내원마을 앞을 지나는 길을 택했다. 3시 29분 가매봉 아래 200m 지점으로 내려왔다. 아까와는 다른 방향으로서 정맥을 찾아들때 왕거암으로 가던 길이다. 그런데 전에 길을 확인하며 보았던 안내판이 철거되고 없었다. 아예 갈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한 것 같았다. 그 때도 출입 금지 표지가 있었으나 나는 정맥 길을 찾아가는 길은 그 길 밖에 없었다. 왕거암에 도착해 정맥길과 만나는 왕거암삼거리를 찾아들어갔었다. 무더위에 긴 거리를 헤면 끝에 다시 정맥에 접어들자 알바를 하며 속상했던 마음이 금새 가라앉았다.
당시, 낙동 정맥을 홀로 종주할 때에는 그 의미를 매우 크게 여기고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도시의 길들여진 일상에서 벗어나 시원의 감각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국토의 등줄기를 걸어 체험하면 지리를 바탕으로 한 각 지역의 풍토와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깊고 큰 산맥을 걸으며 대 자연을 홀로 대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살아 있는 대자연 안에 살아 있는 미미한 존재로서의 내 자신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매 구간 하루 40km 정도를 고절함 속에서 걸었다. 막막한 가운데 깊고 큰 산세를 몸으로 체험했다. 그게 참답게 자연과 만나는 순간이라 여겼다 산줄기를 따라 걸어 국토의 끝까지 이동하며 몸으로 느끼는 일이 의미 있는 일로 여겨졌었다. 긴 거리를 걸으며 한 고을에서 다른 고을로 접어들며 주변의 지형 지세등을 직접 대하며 입지의 차이를 느끼고 싶었다. 또한 깊은 산중에서 홀로 본연의 감각을 느끼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이끌려 들어간 산행은, 결국은 돌아 나오는 여정이었다. 산행의 목적지는 언제나 돌아나올 날머리이고 일상의 집이였다. 하루 종일 혼자 걸으며 물이나 먹을 것이 부족하고 지친 상황에서 매번 어서 무사히 구간의 끝 지점에 이르고 싶었다. 깊은 산이 그리워 찾아가서 다시 그로부터 빠져나가는 여정이 되었다.
산행 중에는 온통 산에 몰입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위험에 빠질 때도 있었다. 이 곳 주왕산에서 가장 큰 위험에 빠졌었다. 하지만 위험을 미리 염려해 소극적인 태도로 임하고 싶지 않았다. 오지의 깊은 산을 홀로 걸을 때는 짐승을 만나 위함에 빠질수도 있었다. 길을 잃고 헤메거나 부상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위기를 의식한 적은 없었다. 날씨가 사납거나 근거리서 맷돼지와 조우할 때도 있었으나 스스로의 결심이 컸던 탓인지 위험감은 크지 않았다.
2010년 8월 15일 정맥에서 벗어났던 대둔산에서 느미기재 까지의 길을 걷기 위해 밤 6시 30분에 올랐다가 느미기재까지는 무난히 마쳤으나, 그곳으로부터 주왕산 입구로 나오려한 지도상에 표시된 길이 없어 계곡으로 탈출하다 3시간 가량을 헤메며 뒹굴어 상처를 입고 손목시게가 풀려나가 잃어버인 일이 있었다. 그 때 가매봉으로 오르던 길을 찾아 산 쪽으로 오르다가 길을 찾지 못하고 계곡으로 내려가다 경사지에서 썩은 나무 가지가 부러지며 넘어지기를 반복했었다. 휴대폰도 연결이 안되어 구조를 요청할 수도 없고 안개가 끼어 랜턴 불빛도 약한 상황에서 무사히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던 긴박한 순간이었다.
당시 그런 위기의식 속에 앞으로 나가다 다리를 보게 되었다. 순간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리 앞이 바로 ‘팀빙로 없음’이라는 표지를 세워 느기미재로 가는 길을 막아논 곳이었다. 산길은 인적이 끊기고 세월이 가면 지워지고 마는 것이다. 이정표에 거기서 입구의 대전사까지 5.6km로 나타나 잇었다. 길이 있다는 것이 안심이 되었다. 입구만 나가면 쉴 곳이 있을 것 같았다. 그 기대 속에 밤길을바람을 가르고 나는 듯 걸어갔었다.
그 때 내원마을 앞을 지나는 사이 맹수의 눈빛으로 보이는 불빛이 보였다. 하지만 두려움이 별로 생기지 않았다. 길가에 서서 그 쪽으로 랜턴 불빛을 한참 비추니 잠잠해서 다시 걸었다. 위기에서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어서 그랬는지 입구에 도착하기까지 40분도 걸리지 않았다. 주왕산 입구로 나오니 막 문을 닫으려던 식당에서 급히 물수건을 가져와 상처를 닦아주고 더운 음식을 내 주었다. 마치 위급한 환자를 돌보듯 음식 값도 받지 않았다. 그 곳에서 민박을 하고 다음날 서울로 가는 차 시간이 2시간 30분 정도 남아 있어 내가 위기에 처한 곳이 어디였는지 확인하러 다시 왓다 갔었다. 2시간여만에 왕복 12km 정도를 오갔었다. 오늘도 그 때처럼 빨리 걸으면 뒤풀이 식당에서 일행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산을 내려오면서 보이는 주변이 뒹굴며 찾으려 했던 길이 아닐까 생각했다. 길을 따라 아래 계곡쪽으로 내려와 걷다보니 다리가 나타났다. 그러나 주변 지형이 달랐다. 조금 가다보니 다시 다리가 나타났다. 어둠 속에 헤매다 안도감 속에 바라보았던 바로 그 다리였다.
평평한 길이지만 위기상황이 아니어서인지 그 때보다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내원 마을로 이어지는 개울 옆 길을 걸었다. 너른 공터 같은 곳이 나타났다. 내원마을 앞을 지났다. 임진애란 당시 피난을 와서 생성되었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이처럼 깊은 곳에 사람이 사는 곳이 있으라리고 생각하기 어려운 위치지만 물이 있고 그리 넓진 않지만 식량을 경작할 터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옥들이 다 철거 되고 빈 터만 남아 있다.
빠른 걸음으로 이동해 3폭포에 닿았다. 근래 가뭄이 심해 폭포수를 볼 수 없을 것처럼 생각했는데 제대로 폭포 형상을 갖추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2폭포, 1폭포를 차레로 지나 빠르게 걸었다. 입구가 1km 정도 떨어진 주왕굴 표시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쫓기는 주왕과 쫓는 신라 마장군이 격전을 치룰 때 신라 마장군이 깃발을 꽂았다는 기암이 올려다 보였다. 다시 한번 주왕산이 천연의 상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요새의 입지가 결과적으로 주왕의 슬픈 한(恨)의 전설을 간직하게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앞에서 시계를 보니 5시 5분 전이었다. 인치규 사무총장에게 현재 상황을 알려주려고 전화를 걸었다. 모두 타고 있으면 그냥 출발하라고 했으나 그가 다시 식당으로 가서 선물을 챵겨야 하니 같이 가도 괜찮을거라고 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가 수달래 식당 앞을 지나다 안을 보니 신종복 사무총장과 조성복 건축사 등이 보였다. 계산을 하다 나를 보고 식사 했느냐고 물어 아까 산위에서 먹었다고 했다. 이번 행사를 치루느라 수고 많았다고 인사를 하고 급히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장 100m 전 쯤에서 전화를 받고 바로 근처에 다 왔다고 하며 주차장으로 뛰어가 돌아보았다. 그런데 타고온 보이지 않았다. 안치규 건축사에게 전화를 거니 바로 받지 않다가 다시 거니 출발했다고 했다. 방금 전까지 전화를 주고받으며 바로 앞까지 왔다고 예기하니 출발했다고 했다. 아침에는 늦게 온 사람을 기다리며 30분이나 늦게 출발해 놓고 사무총장이 기다리겠다고 해서 도착하니 그냥 출발했다니 어리둥절했다.
그러면서 그가 서안동 IC로 택시를 타고 오라고 했다. 114로 번호를 불어 부남 택시기사에게 물어보니 30분 후에야 갈 수 있다고 했다. 너무 지체될 것 같고 5만 5천원쯤 나온다는 택시비도 부족하여 안치규 건축사에게 그냥 가라고 하려고 전화를 거니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거니 김준식 건축사가 대신 받아 기다리지 말고 올라가라고 했다. 하지만 서울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끊겨 올라갈 일이 막막한 느낌이었다.
(20120609)
첫댓글 김석환건축사님의 게시글에 제가 6월 11일 오후 5시경 올린 일련의 댓글 5개는 이와 관련된 김석환건축사님의 게시글 본문 수정으로
당초와 달리 댓글의 의미를 상실했기에 삭제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양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