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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꾼,파락호로 위장한 독립운동가의 삶 양반집 자손으로 당대의 파락호,난봉꾼 소리를 들어가며 뒤로는 묵묵히 독립운동 자금을 대던 김용환. 그는 노름을 즐기는척 하며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어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에 판돈을 걸고 돈을 따는데 실패하면 큰소리로 신호를 보내 잠복중이던 수하들과 노름판을 덮치는 수를 써 판돈을 끌어모았다. 그렇게 노름꾼으로 위장하여 알음알음 집안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자금을 대던 김용환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기고,수백년 동안 집안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현재시가 200억)도 다 팔아 넘겼다. 팔아먹은 전답들은 다시 문중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사주었고 김용환은 집안 말아먹을 종손이란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독립운동 자금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시집 간 무남독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집에 가서 장농을 사오라 시댁에서 받은 돈도 노름으로 탕진했다. 딸은 빈손으로 갈수 없어 친정 큰 어머니가 쓰던 헌장농을 가지고 울면서 시댁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김용환이 노름으로 탕진한 재산이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간줄 몰랐다. 사후에야 밝혀졌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가족에게도 철저하게 함구하며 온갖 불명예를 덮어쓰고 파락호, 노름꾼으로 위장한 삶을 살면서 군자금을 마련해 만주로 보냈다. 임종할때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 해도 되지않겠나....했지만 선비로서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없다....며 눈을 감았다. |
독립운동가 3대 지켜 낸 겨레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 '김락'
나라의 녹을 먹고도 을미년 변란 때 죽지 못하고
을사년 강제 조약 체결을 막아 내지 못했다며
스무나흘 곡기를 끊고 자결하신 시아버님
아버님 태운 상여 하계마을 당도할 때 마을 아낙 슬피 울며
하루 낮밤 곡기 끊어 가시는 길 위로 했네
사람 천석 글 천석 밥 천석의 삼천 석 댁 친정 큰 오라버니
백하구려 모여든 젊은이들 우국 청년 만들어
빼앗긴 나라 찾아 문전옥답 처분하여 서간도로 떠나던 날
내앞 마을 흐르던 물 멈추어 오열했네
의성 김 씨 김진린의 귀한 딸 시집와서
남편 이중업과 두 아들 동흠 중흠 사위마저
왜놈 칼 맞고 비명에 보낸 세월
쉰일곱 늘그막에 기미년 안동 예안 만세운동 나간 것이
무슨 그리 큰 죄런가
갖은 고문으로 두 눈 찔려 봉사 된 몸
두 번이나 끊으려 한 모진 목숨 11년 세월
그 누가 있어 한 맺힌 양가(兩家)의 한을 풀까
향산 고택 툇마루에 걸터앉아
흘러가는 흰 구름에 말 걸어본다
머무는 하늘가 그 어디에 김락 여사 보거들랑
봉화 재산 바드실 어르신과 기쁜 해후 하시라고
해거름 바삐 가는 구름에게 말 걸어본다.
*백하구려(白下舊廬): 안동 임하면 내앞마을(천전리) 고택 이름으로 김락 여사의 큰 오라버님인 독립운동가 김대락 선생이 1885년에 세운 집이다. 이 집은 이 지역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로 쓰였으며 김대락 선생의 호를 따라 백하구려로 불렀다.
*봉화 재산 바드실: 김락 여사의 시아버지인 향산 이만도 선생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현재 김락 여사와 남편 이중업은 이곳에 묻혀있지 않다. 3대에 이르는 독립운동가 가족임을 고려할 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무덤을 어서 한 곳에 잘 모셔서 일반인들도 쉽게 찾아갈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 친정 오라버니 김대락 지사가 살던 집 |
김락 여사의 유적지를 찾아 나선 끝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둘러보고 묘소에 들르고자 했으나 난관에 부딪혔다. 길찾개(내비게이션)라는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면 웬만한 산 속의 무덤도 찾아갈 수 있는 시대이건만 김락 여사의 무덤 주소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기념관 안내원조차 인터넷을 조회하더니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김락 여사의 친정 오라버니가 살던 ‘백하구려’ 집을 찾아가서 후손인 김시중 선생의 소개로 관리인을 앞세우고서야 겨우 찾아갈 수 있었다. 해마다 안동에서는 6월에 김락 여사의 뮤지컬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뮤지컬 주인공 김락 여사의 무덤은 찾기도 어려운데다가 관리조차 제대로 안 돼 몇 번이고 쓰러진 소나무 등걸이 발끝에 치여 넘어질 뻔했다.
시아버지인 향산 이만도를 비롯한 아들 이동흠 등은 봉화군 재산면 동면 바드실 마을에 묘를 쓰고 있는데 머지않아 김락 여사 부부 묘도 이곳으로 옮길 계획이라고 <향산 이만도> 책 185쪽에는 나와 있으나 1912년 이래 아직 그대로인 것으로 보아 이장까지는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이장을 할 때 하더라도 먼 곳에서 김락 여사의 무덤이나마 보고 싶어 찾아가는 길손을 위해서라도 현재의 무덤 가는 길은 안내판이라도 곳곳에 세워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덤에 이르는 오솔길의 쓰러진 소나무 등걸도 치우고 무덤 앞에서 절이라도 할 수 있게 좁디좁은 상석 자리도 약간 넓혀주면 좋겠다. 웃자란 나무들로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안동 유수의 독립운동가 김락 여사의 무덤을 안동시에서는 좀 더 신경을 써서 관리해주었으면 한다. 올해도 6월 19일 날 김락 여사의 뮤지컬 공연이 있다고 들었는데 올해 뮤지컬 출연진들은 공연 뒤에 꼭 김락 애국지사의 무덤을 찾아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 3代, 그 명가를 지켜낸 김락
김희곤 안동대교수ㆍ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여성 독립운동가는 무척 드물다. 그것도 신여성이 아니라 전통 양반 가문의 안주인이 항일투쟁에 나선 경우는 찾기 힘들다. 그런데 10년 전인 2000년 여름, 일제가 쓴 '고등경찰요사'를 읽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안동 양반 이중업의 아들 이동흠이 "내 어머니가 3·1운동 때 일제 수비대에 끌려가 두 눈을 잃고 11년 동안 고생하다 돌아가셨으니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결코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딱 넉 줄 적혀 있었다. 그 어머니는 누구인가. 추적에 나섰다. 족보에는 의성 김씨 김진린의 딸이라 적혀 있다. 그렇다면 안동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 김대락의 막내 여동생이다. 친정 제적등본에 적힌 형제자매의 이름은 모두 김대락처럼 김O락인데, 주인공인 막내만은 그냥 김락(1862~1929)이다. 하는 수 없이 그 이름으로 독립유공자로 신청하고 포상 받게 되었다.
김락이 3·1운동에만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독립운동가 3대를 지켜낸 중심인물이다. 열다섯 살에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로 시집가서, 양산현령을 지낸 이만도의 맏며느리이자 이중업의 아내가 되었다. 새댁 시절 시어머니를 여읜 그는 시누이와 시동생을 돌보며 안방 주인으로서 집안을 도맡았다. 그런데 1895년 시아버지는 예안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고, 남편도 마땅히 함께 나섰다. 일제의 공격으로 이웃 퇴계 종가가 불타는 황망한 가운데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고 집안을 지켰다.
48세 되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시어른은 24일 단식 끝에 순국했다. 장례를 치르고 상복에 눈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아버지처럼 여기던 큰오빠 김대락과 김동삼 등 친정 집안이 대거 만주로 망명길에 나섰다. 큰 형부 이상룡 집안도 함께 갔다.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떠난 고난의 길이었다. 남편과 두 아들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4년 남편 이중업은 안동과 봉화 장터에 격문을 돌렸다. 맏아들 이동흠은 대한광복회에 가담했다가 구속됐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남편은 '파리장서'라 불리는 독립청원서를 발의하고, 강원도와 경북 지방 유림 대표의 서명을 받는 일을 맡았다.
바로 이때 김락은 57세의 나이에 예안면 만세운동에 나섰다가 일본군 수비대에 붙잡혔고, 취조를 받다가 두 눈을 잃는 참극을 당했다. 앞을 못 보고 귀로만 듣고 살던 터에 다시 놀라운 일과 마주쳤다.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떠나던 남편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한숨짓는 사이에 맏사위 김용환이 일제에 붙잡혔다. 학봉 김성일의 종손인 맏사위는 만주 독립군 기지를 지원하던 의용단에 가담했던 것이다. 김용환은 '조선 최대의 파락호' 소리를 들으며 노름꾼으로 위장해 독립자금을 댔다. 그 바람에 요즘으로 치면 100억 원이 훌쩍 넘을 종가 재산이 거덜 났다. 둘째 사위 류동저는 안동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둘째 아들 이종흠은 1925년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고, 그 바람에 두 아들이 모두 잡혀갔다. 이런 사이 두 번이나 자살하려다 가족들 손으로 살아난 그는 1929년 2월 67세로 눈을 감았다.
35년 동안 시가와 친가 모두 독립운동으로 해가 뜨고 졌다. 그 한가운데 김락이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현재 그의 사진 한 장 없다. 그가 시집가서 살던 하계마을은 1970년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됐다. 쓸쓸하고 횡한 마을에 독립운동 내력을 전하는 기적비만 남아 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자취는 잊혀질 수 없다. 안동에서 그를 되살려 인형극을 공연하고, 뮤지컬을 준비하는 것은 '겨레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의 삶을 제대로 기리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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