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변진갑 조부님은 회산공 변승기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회산공은 성균관에서 동제 제장하면서 수학하셨고
균세 운동을 주도한 항일운동가였다. 균세운동은 일본이 한국의 재정을 식민지 체제로 바꾸기 위해 화폐정리 사업의 하나로 엽전 정리하는과정에서
경기도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가
균등하지 않음을 아시고 체계적으로
반대하며 납세를 거부한 운동으로
균세가되겠끔 관철시키어 노동운동사에
한획을 쓰신분이다
(구한말 일제의 옆전정리와 한민족의 저항
논문 문학석사 학위 논문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김혜정 )
회산공은 독립운동가인 장지연선생의 천거로 대한매일기자, 호남학회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장성 성산초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한 독립운동가이자 선각자이기도 했다. 고암(蠱巖) 변진갑선생은 지금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인 경성법전을 졸업하고, 모두가 선호하는 법관이나 관직을 마다하고 고향인 장성에 돌아와 향교 직원으로 일하며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이후 독립촉성단을 결성한 고암은 초대 장성읍장에 취임했고,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장성출신인 고암은 10여 년 간의 의정생활에서 주로 농촌문제와 공직사회 기강을 개혁하는 일에 앞장섰다. 쌀 생산을 높이기 위해 볍씨 개량, 비료유통에 대한 개선에 관한 법률 개정에 앞장서고, 농촌 경제에 많은 기여를 한 양잠(養蠶)육성을 위한 법과 제도 개선에 힘썼다. 공무원의 처우 개선과 근무태도 재확립을 위해 출근시간 엄수, 배정안건 처리 기한제 실시, 점심시간 외출 금지(구내식당이용), 요정 등 출입 자제, 공무원의 영리행위 금지 등을 법으로 규정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공무원 등용에 있어 공정성을 기하고, 공무원의 신분 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암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는 매우 획기적인 주장으로 정부 여당은 고암의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였다고 한다. 고암은 당시까지만 해도 적잖게 있었던 중혼제(重婚制)를 금하는 법률안을 상정하였고 간통제에 대해 쌍벌규정을 두어 여성 지위향상을 이루었다. 고암은 죽산 조봉암, 해공 신익희 등 개혁적인 인물들과 교유하며 자신의 개혁의지를 지켜가는 초심을 잃지 않았다. 고암의 청렴함과 정직, 그리고 성실한 자세는 세 번의 국회의원을 지낸 고암의 일화에서 쉽게 짐작하고도 남는다. 어머니가 “끼니때가 되면 이웃집에 보리쌀을 꾸러 다닌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고암의 손자인 세심원의 변동해씨가 말할 정도다. 고암에게는 2 분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서 태어난 11명의 손자들이 대부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8명이 교육과 행정직 공무원으로 있다. 자손들에게 물려 줄 재산이 없었던 것이다. 고암은 정계를 은퇴한 뒤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와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암에게서 정치인들이 갖추어야할 도덕성과 능력, 그리고 성실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경성법전을 졸업하고도 일제 아래서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고위 공무원이나 법관의 자리를 스스로 마다하고 고향에 돌아온 그의 민족성과 애국심 그리고 개혁을 추구하며 일생을 가난하고 청렴하게 살다간 고암은 세월이 지나도 오래도록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장성군민신문 발췌
조부님께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정치를 청렴하게 하셨고
5 .16 군사 구테타성공후
공화당 당의장 요청이 왔으나
군인은 정치하는것 아니다면서
거절하고 고향 안평으로 낙향하신후
맑은 마음으로 사시다가
1977년 7월14일 저세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정부수립후 유일한 수출품이
생사 (명주실 )라 제사공장에서
값싸게 사들여 이윤을 많이 남기는
제사업계의 횡포가 있는것을 아시고는
잠사법을 제정하여 국가가 수매
농민에게 소득이 있게함에 있어
1년만 법제정을 보류하여 달라하면서
그때돈으로 30억을 뇌물로 가지고왔으나
거절하셨다고합니다
소인이 지금꺼지 살아오면서
제 조부님이라해서 미화하려고
이글을 올리는것이 아니라
현정객들을 보면서
닮으신분 단한분도
찾아 볼수가 없어 이글을 올림니다
저에 삶에 신조는.맑게 사시다가 저세상으로 가신
선조님 얼굴에 화장을 못하여
드릴 망정 상처를 내지않는다는
마음으로 살면서
세심원과 축령산 휴림
세심비 조형물을 세웠습니다
국회 의정활동 발언 발췌록
증조부님 일기와 회산유고 문집
소인 삶 기록물
회산 증조부님때부터 이어져온 화로
죽은재가 산불을 보호합니다
첫댓글 소생도 어른께서 생존해 계실때 가까이서 몇번 뵌적이 있는데 너무나 인자하시고 근엄하셔서 똑바로 쳐다보기 조차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참으로 훌륭하신 어른이셨죠. 요즘 정치인(국회의원)들은 왜 이런 어르신을 닮은 분이 안나오는지 안타깝고 한심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글을 올리것도 조부님께
누가될까봐 망설였습니다
시국을 보면서
올려야 되어야 겠다는 마음이 생겨 올리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의 행적은 우리 역사에 길이 길이 남으실겁니다.
삼가 (고) 변진갑 어르신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