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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허구속의 예수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이 정말로 이 세상에 정말로 존재했는가? 예수의 역사적 실체는 너무
도 당연시 되어 왔기에 이런 의문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엉뚱한 질문처럼 들릴 것이다.
중세 시대의 암흑기를 지나 이성과 합리성을 근간으로하는 계몽주의 운동은 신학 분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자유주의신학자(liberale Theologie)들은 그동안 중세 교회의 도그마(Do
gma)에 의해서 박제(剝製)화된 그리스도에서, 살과 피를 가진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찾으려
는 신학적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많은 학자들의 노력과 추적을 거친 결과는 당혹 스러운 것이었다. 예수의 신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비판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바로, 예수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의심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가 생존했다는 당시의 기록들은 예수에 대해 일체 침묵을 지키고 있다. 방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역사적 실체를 입증 할 만한 그 어떠한 고고학적 유물이나 문서가 발굴된 적
이 없다. 예수는 동시대인들이나 당대의 역사가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언급
할 가치가 없는 인물로 평가된 것이 아니라면, 그가 실존했는가에 대한 의심은 끊이질 않는다.
현재 빌라도나 헤롯등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의 생애와 관련된 자료들은 복수적 자료에 기록되
어 예수에 비해 풍부히 남아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더군다나 복음서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저명한 신학자 이기도 한 아프리카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A.Schweitzer)는 1778~1901
년 사이에 출판된 예수생애에 관한 600여권의 책을 정교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슈바이처의
전기에 의하면 이를 위해 자신의 기숙사 방에 여기저기 산더미처럼 책들을 분류하여 쌓아놓고
연구 했다고 한다.
슈바이처는 1906년 '예수 생애 연구사'(Geschichte der Leben Jesu Forschung)라는 부제(副
題)가 달린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Von Reimarus zu Wrede)라는 책을 발표한다. 이 책
에서 슈바이처는 18세기 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저술된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한 책들
을 신학적으로 평가하고 정리하면서 "근대 기독교는 예수의 역사성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
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선언 했다.
"현대 기독교는 예수의 사실적 근거가 언제인가 밝혀지게 될 가능성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
다."[슈바이처 / Geschichte der Leben Jesu Forschung / Tubingen 1913, P.512]
결국 슈바이처 박사는, 신학과 음악계의 명성과 성공을 팽개치고 아프리카로 의료 선교를 떠
났다. 그런데 슈바이처는 그의 저서와 발언 때문에 파문의 위기 까지 갔으며, 아프리카 의료
구제사업을 하지 못할 뻔 하기도 했다. 그것은 스폰서인 선교협회에서 그를 위험인물로 지목
했기 때문 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서약하고 아프리카에 가게 된다. "나는 의사로
서만 일하고, 다른 일에 대해선 잉어처럼 침묵하겠다."
그러나 슈바이처 이후에도 계속해서 예수에 대한 역사적 비평이 이루어지면서 복음서의 실체
가 드러나게 되었다. 최근의 방대한 연구 실적들은 크게 예수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신화설)주
장 하는 류와 예수의 실체는 인정 하되 기독교 근본 주의 자들이 주장 하는 예수와는 상치된
예수를 재 구성해 내는 류로(재구성파)구분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연구들은 7장부터 8장까지에
걸쳐서 언급하기로 하겠다.
▶ 혼돈의 유대땅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가 생존했다는 시기의 이스라엘은 비록 로마의 지배를 받고는 있었지
만 평화로운 듯 보인다. 이러한 복음서속의 묘사는 과연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되는가?
기원을 전후로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무장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혼돈의 시기였다. 당시 식
민통치를 했던 로마와 로마의 괴뢰정권에 대해 반기를 든 유대인들의 무장투쟁은 예수가 태어
나기 전부터 시작되서 그가 사망한 후에도 100여년 동안 끝나지 않고 계속 되었다.
당시 유대역사를 대략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BC 141년에는 하스모니아(Hasmoneans)왕가가 통치 했으나, BC 63년에는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당하고 유다는 정복되었다. 비슷한 시기인 BC 67~63년에는 하스모니아 왕가
의 내분이 일어난다.
BC 49년에는 로마의 폼페이우스의 군대에게 팔레스타인 전체가 함락 되었으며 예루살렘의
스룹바벨 성전은 파괴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관습을 보존하는 것이 허용 되었지만,
최종적인 권위는 로마법에 따라 수행되었으며 로마군대에 의해 통제되는 식민지 정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의 영토는 너무나 광대 하였으며 로마는 자신의 사건들로 골치를 앓고 있었
기 때문에 식민지를 통치할 괴뢰정부를 세우게 된다. 괴뢰정부의 첫번째 왕은 BC 63년에 팔
레스타인의 왕좌를 차지한 에돔인(이두매 지역사람) 안티파터(Antipater)였다. 그가 BC 37년
에 죽자 그의 아들 헤롯대왕(Herodes)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는 BC 4년까지 통치했다.
이즈음, 유대인들의 무장투쟁은 끊임없이 계속 되었는데, 로마나 유대 지배계급은 이 독립운
동의 주체들을 '강도'(lestai)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강도들은 단순히 폭도들을 의미 하는것이
아니라 유대인 매국노에 항거하려는 목적이 주된 것이었다. 이들을 지칭했던 또 다른 용어는
'열심당'(Zealots)이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8권 8절에 의하면 유대인의 무장투쟁은 AD 70년 성전이 불에 타서
잿더미로 변할 때 까지 계속 되었다고 한다. 특히, 예수가 어린시절을 보내며 선교 활동의
중심지라고 말할수 있는 갈릴리는 유대인들의 무장 독립투쟁의 거점이기도 했다.
BC 47년 히스기야(Ezekias)가 일으킨 무장투쟁, BC 40~37년경에 일어난 안티고누스(Antigo
nus)의 무장투쟁에 이어서, BC 4년경 헤롯 대왕의 임종을 앞두고 일어난 성전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왕자들의 권력투쟁, 히스기야의 아들 유다가 갈릴리 세포리스 근교의 무리들을 규합해
서 궁궐을 습격하고 병기고를 약탈한 무장투쟁이 연이어서 터진다.
헤롯대왕이 사망한후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로마로 승인을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유대
에서는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으며 자칭 왕이라는 자들이 여러명 등장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전역이 무장혁명단체로 들끓게 되는데, 헤롯의 노예였던 시몬이는 자가 무리들을 규합해 스스
로를 왕이라고 칭하고 다니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에 아뜨롱게스라는 사람도 스스로 왕을 자
칭하고 다녔다.
반란이 들끊게 되자 BC 4년 로마의 바루스(Varus)는 세포리스를 공격했고, 주민을 노예로 사
로잡고 도시를 불태웠다. 바루스는 그의 다른 군대 일부를 떼어 지방으로 파견해서 유대 반란
자들을 색출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사건으로 2000여 명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이 발생했다.
*이 때 십자가에 못박힌 2000여명 사람들도 인류의 죄를 대신하였을까?
이들이 십자강[ 못박힌 것과 나사렛 예수가 삽자가에 못박힌 차이가 무엇인가?
그러나 유대인들의 무장투쟁은 끊이질 않았으며, AD 6년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구레뇨가
호구조사를 하자 가말라(Gamala)에서 골란 출신 유다(Judah)가 바리새인 째독(Zaddok)과 함
께 무장투쟁을 일으켰다.
헤롯대왕에게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의 통치권을 물려받은 아들 아켈라오의 통치 역시 혼란과
피바람으로 얼룩졌다. 이혼녀와 결혼한 아켈라오에 대해 많은 유대인들이 반발을 했는데,
아켈라오는 두번에 걸쳐서 대제사장을 해임시키고 그의 군대는 유월절에 3천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10여년에 걸친 그의 통치기간중 결국 유대인들의 반발이 끊이질 않자, AD 6년 로마는 아켈라
오를 고울 지방으로 유배시킨뒤 코포니우스 출신의 총독을 임명하게 된다.
한편, 갈릴리 유다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의 기록은 알 수 없지만 그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줄기찬 투쟁을 벌였다. 그의 아들 둘이 십자가형에 처형 되었고, 또 다른 아들인 엘르아살(Ele
azar)은 AD 68년 유대혁명이 시작되자 스스로 메시아라고 자칭하면서 자객(sicarii)들을 이끌
고 마사다 전투를 이끌었다고 한다.
헤롯대왕이 사망한 BC 4년 무렵에 예수가 태어났다는것을 고려한다면 그의 어린시절과 이스
라엘의 정치적 혼돈은 결코 무관할수가 없다. 복음서 속에는 예수의 청년시절이 등장하지 않
는데, 30세 무렵에 예수가 다시 사역을 시작한 그 때에도 갈릴리뿐만 아니라 유대 전역, 심지
어 예루살렘에서도 무장투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예를들어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루살렘으로 황제의 상을 몰래 갖고
들어오자 시골에서 농민들이 몰려 왔으며, 빌라도가 성전세를 수로관 건립에 유용하자 격분한
민중들이 빌라도를 포위했고 그는 무자비한 강제 진압을 감행했다.
그외에도 헤롯 안디바가 본부인을 내쫓고 형제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재혼을 하자 유대인
들이 크게 반발을 했으며, 자기 딸이 강제 이혼 당한 것에 분노한 아레스터 왕은 AD 36년에
베뢰아를 침공하여 전투가 벌어진다.
예수는 이때쯤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고 하는데 유대인들의 무장투쟁은 끊임없이 일어나 이스
라엘은 망국의 운명으로 내달리게 된다. 유대인 사이에서도 맞서는 파벌들이 생겼으며, 대제
사장이 잇달아 바뀌면서 성전은 싸움과 살인으로 얼룩졌다. 벨릭스, 베스도, 알비누스, 플로루
스 등 총독들의 학정은 갈수록 그 악랄함을 더했다.
AD 44년 무렵 메시아를 자칭하는 테우다스(Theudas)는 가정과 재산을 포기하자고 주장하며
사막에서 무리들을 모아 요단강변으로 몰려가 서쪽 예루살렘을 진군하려고 했지만, 로마 총독
쿠스피우스 파두스는 기병대로 테우다스의 목을 베고 그의 부하들을 살육 한다.
AD 50년 유월절 행사가 진행되던 중 순례자들과 로마 병사의 사소한 충돌로 인해 로마의
보병군단이 진군해 들어가 2만 명이 학살 되었다.
52년에는 20년 간 산에서 투쟁경력을 쌓은 엘리자 벤 데이나이오스(Eleazaur ben Deinaios)
가 혁명을 일으켰으나, 총독 쿠마누스가 관련자들을 체포하여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러나 혁
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자 새로운 총독 펠릭스가 완전히 진압하고 엘리자를 체포하여 로
마로 압송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펠릭스가 십자가형으로 처형한 강도(무장 독립군)들의 수
효는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펠릭스에 이어 부임한 총독 페스투스(Festus)는 닥치는 대로 유대인의 무장투쟁단 들을 살해
했으나 로마군은 몇 차례 걸쳐 무장 독립군에 패배하게 된다. 그러자 네로 황제는 로마의 최고
명장 베스파시안(Vespasian)을 파견했고 6만 5천의 최신예 무기를 갖춘 로마군이 예루살렘으
로 진격해 들어갔다. 베스파시안은 네로가 죽자 아들 티투스에게 과업을 승계해 AD 70년 예
루살렘 함락시키고 성전을 불태웠다.
AD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최후의 항전 이후에도 유대인의 무장독립군은 메시아 신앙으로 저
항을 계속한다.
AD 132년에 바르 코흐바(Bar Kochva: 별의 아들)가 20만 군대를 조직하여 유대 독립국가를
수립했다. '시몬, 이스라엘의 왕자'라고 새겨진 화폐까지 유통 시킬 정도로 그 규모가 대단 했
으며, 당시 유대인들은 코흐바를 메시아로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국가는 3년 천하를
이루었다.
로마는 1개 군단이 전멸을 당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서야 코흐바의 독립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다. 증오심에 사로잡힌 로마군은 1천여 마을을 초토화 시켰으며 50만의 유대인을 학살했
다. 그 이후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는 로마의 지도에서 아예 유대라는 땅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게 된다. 예루살렘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u Capitolina)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바뀌면서 유대인의 접근이 금지 되었다.
*50만의 유대인이 학살을 당하고 있을 때 여호와, 야훼, 엘, 엘로힘, 천사들은 뭐하고 있었을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자기 후손들이 50만명이나 죽어가는데 도대체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
현재 우리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예수의 일대기를 담은 복음서들, 그리고 예수가 죽은후
의 일을 기록한 사도행전 같은 신약을 읽는다면 예수와 그의 사도들의 생애가 이스라엘 역사
에서 가장 격렬했던 혼돈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음을 눈치챌 수 없을 것이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당시 유대인들은 괴뢰정권인 헤롯일가와 로마의 세금징수에 대해 반발심
같은 것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당시 유대사회는 비교적 평화로운 듯이 보인다.
복음서와 사도행전같은 신약성경의 독자들은 예수 이전에도 예수 당대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해방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사실은 더더욱 파악하기 어려울 것
이다. 복음서에서는 이러한 당시의 긴박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다!
필자가 한가지 감을 잡은것이 있다면 복음서는 헬라화된 유대인들에 의해 헬라어로 기록되었
고, 초대교회는 로마화된 유대인들에게 크게 유행했다는 점을 놓치면 안된다는 점이다. 기독
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마침내 국교로 삼은 사람도 로마황제 였다는 점을 간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대역사를 파악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인물인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에게는 매국노와 다를바
없었다.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일으키는 동족들을 모두 강도와 폭도로 지
칭한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와 신약을 기록한 헬라화된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의 무장독립투쟁
을 아예 언급하고 싶어하지 않은것은 아닐까?
▶ 시대상황과 무관한 복음서
함부르크 대학의 동양언어 교수로 재직했던 라이마루스(H.S. Raimarus)는 생전에 훗날 역사
적 예수 연구에 기념비적인 글을 남긴다. 그 글은 그가 죽은 이후에 레씽(G.E.Lessing)에 의해
서 '라이마루스: 미완성된 유고' (Raimarus: Fragments 1774-1778)라는 제목으로 출판 되었다.
라이마루스의 주장에 의하면, 실제 예수의 가르침은 후대에 만들어진 복음서의 내용과는 상당
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가 유대 혁명가로써 심판의 날이 임박했다고 믿고 선포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보았으며, 그의 실패 후 제자들은 그의 시신을 숨기고 이후에 예수의 부활과
재림을 선포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의 시작을 일종의 '사기극'으로 보는 그의 견해는 복음주의자들의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지만, 당시 혼돈속의 유대사회를 배경으로 역사적 예수를 탐구한 점은, 훗날 예수연구의
학문적 방법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예수는 언제 태어났는가?
4개의 복음서중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이 예수의 출생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두 이
야기는 예수의 탄생 시기에 대해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먼저 마태복음서는 예수가 헤롯대왕의 통치시절에 태어난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누가복
음 2장 2절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인구 조사령을 내릴 때 예수가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때 시리아의 총독은 구레뇨(Quirinius)였다고 한다.
문제는 헤롯대왕은 BC 4년에 사망한 사람이고, 구레뇨가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것은 AD 6
년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태어난 무렵에 유아학살을 자행했다고 하는 헤롯왕은
바로 헤롯대왕(헤로데가 일반적 명칭임)이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마태복음 2장 22절]
위 구절에서 알수 있듯이 유아학살을 자행한 왕은 헤롯 아켈라오(=헤롯 아르켈라우스)의 아버
지인 헤롯대왕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은 칼비누스(Calvinus)와 폴리오(Pollio)가 지방 총독(proconsul)이었을 때
로마에 의해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때가 BC 40년이었는데 그 후로 37년을 통치했다.
또한 헤롯이 사망할때 월식이 있었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천문학적인 계산에 의하면 월식은
BC 5년 3월 23일, 9월 15일, BC 4 년 3월 12일, BC 1 년 1월 9일에 유대땅에서 볼 수 있었다
고 한다. 또한 요세푸스는 아켈라오가 통치 제10년, 즉 AD 6년에 폐위 되었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헤롯의 사망 연대가 BC 4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헤롯은 죽기 얼마 전에 유월절을
지켰다고 하는데 BC 4년의 유월절은 4월11일에 시작 했으므로 그의 죽음은 BC 4년 4월초가 될
것이다.)
반면에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17~18권에 따르면, 헤롯 아켈라오가 실각하여 물러간뒤 유대
지방을 편입한 시리아의 총독으로 부임한 구레뇨는 AD 6년에 유대의 대리 통치자인 코포니우
스(Coponius)와 함께 인구조사를 했다. 구레뇨가 시리아 총독으로 재임했던 기간은 AD 6~9
년이다. 따라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 탄생시기에는 최소한 10년간의 차이가 있다.(BC
4년~AD 6년)
엄밀히 말해서 BC 4년과 AD 6년의 년도를 따지는 것조차 불필요 하다. 구레뇨는 헤롯대왕이
죽은뒤,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10년간의 통치도중 실각한 뒤에나 시리아의 총독으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내용상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과 관련하여 호구조사는 전혀 언급 되지 않는다! 반면에. 누가
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과 관련하여 유아학살은 전혀 언급 되지 않는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난뒤, 헤롯대왕의 유아학살에 대해 천사에게
경고 받고 이집트로 피신한다. 헤롯대왕이 죽자 예수의 부모는 갈릴리의 나사렛으로 이주한다.
반면에.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부모는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으며, 인구 조사를 위해 도착
한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낳는다. 조사가 끝난후 예수가족은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온다.
예수가족의 이주경로(누가복음: 나사렛-베들레헴-나사렛 / 마태복음: 베들레헴-이집트-나사
렛)도 틀리고, 이주한 이유도 틀리다! (누가복음: 인구조사 때문 / 마태복음: 유아학살 때문)
덧붙여서 마태복음에서 헤롯이 끔찍한 유아학살을 저릴렀다는 무시무시한 그때, 누가복음은
예수가 태어난지 8일후의 할례에 이어서 33일의 정결례까지 마치고 태연스럽게 예수를 성전
에 데리고 들어갔다고 말한다. 성전에서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데, 이것은
레위기 12장 4절의 33일의 정결례가 지나간 뒤에나 가능한 일이다. 마태복음에서 헤롯이 유
아학살을 저질렀다는 그때 말이다....
더더욱 웃긴것은 누가복음안에서도 엄청난 역사적 오류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복음 1장 5~27절에 따르면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때에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6개
월 간격으로 임신한뒤, 이어지는 누가복음2장에서는 구레뇨가 호구조사를 할때 예수가 태어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 1장에 언급된 헤롯은 분명히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다. 즉, 두 여자가 임신
을 하게 되는 때를 가르켜 누가복음 1장5절에서는 헤로데가 유대의 왕이었을 때라고 말하고
있는데,이 구절에서는 헤로데를 분명히 왕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다른 지배자는 아무도 언급
되지 않는다. 반면에 예수가 성인으로 등장하게 되는 누가복음 3장 1절에 따르면 유대의 통치
자는 빌라도 였으며, 나머지 영토는 헤롯의 아들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에게 분할 되었다
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알수 있는것은 누가복음1장에서 헤로데가 통치했던 유대아는 3장에서
빌라도에게 넘어갔고, 나머지 영토를 다스리게 되는 헤롯의 아들들 에게는 분봉왕이라는 호칭
을 붙이고 있다. (공동번역판에는 영주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 1장 5절의 헤로데는 BC 4년에 사망한 헤롯 대왕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셈인
데, 그렇다면 마리아는 헤롯대왕의 통치시기에 임신해서 구레뇨가 호구조사를 할때 예수를
낳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처구니 없게도 누가복음은 마리아가 최소한 10년 동안이나 임신 했
다는 역사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것이다!
이에 대해서 보수적인 기독교계 학자들은 구레뇨가 두번이나 시리아의 총독으로 부임했거나,
또는 로마가 정치와 군사를 따로 담당하는 두명의 총독을 임명했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고 주장한다.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라는 말을 주목하기 바란다.)
이는 역사적인 사료를 전혀 찾아 볼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반박에 불과하다. 초대교회의 변증
가인 터툴리안에 의하면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Sentius Saturninus)가 BC 9~6년까지, 쿠인
틸루스 바루스(Quintilus Varus)가 BC 7년~ AD 4년까지 시리아의 총독이었다고 한다. 이 두
사람 사이엔 1년이 겹치기는 하지만 그 이전엔 구레뇨가 총독을 지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헤롯대왕이 살아 있을때 시리아 총독은 유대땅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다시말해, 헤롯대왕의 아들 아켈라오가 실각하고 난뒤에나 시리아 총독이 유대땅을 접수하게
된다. 게다가 위에서 지적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상치되는 점은 무엇으로 설명을 하겠는
가? 덧붙여서 헤롯대왕의 유아학살사건 또한 역사적으로 근거를 찾을수 없다.
(2) 바리새인은 위선자인가?
당시 유대땅에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유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세력들이었다.
복음서속에서 예수는 여러번에 걸쳐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새끼들이라고 욕하며 그들을 위선자
라고 칭했다. 그러나 정작 예수의 질타를 받아야 할 집단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사두개 파였다.
당시 동족들의 분노를 받았던 것은 사두개파였고, 바리새인들은 로마에 저항을 했던 민중의
지지를 받았던 지식계층이었다.
사두개(Sudducees)라는 명칭은 히브리어 사딕(Saddig : 의로운)에서 비롯되었거나, 혹은 사
두개파가 성전 제사장직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솔로몬의 제사장이었던 사독(Zadok)에서 비롯
되었다고 여겨진다.
사두개인들은 숫자가 적었지만 부유한 지주계급이었고 당시 거의 모든 제사장들이 사두개인
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로마의 식민통치에 협조했던 무리로 이 때문에 유대동족들의
분노를 샀다. 이들은 왕정 시대와 유배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안티오쿠스 4세와 하스
모니안 왕가시대에는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들은 매우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이었으며 성향은
보수적이었는데, 부활이나 영혼불멸, 천사론에 대해서 거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들은 바리
새파들의 가르침에 끼친 너무나 많은 페르시아의 영향과 앗시리아의 영향을 보았으며, 바리새
파는 유대 전통의 반역자들이라고 느꼈다.
벨하우젠(Wellhausen)에 따르면 사두개파는 종교적인 집단이라기보다는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성직자 계급 및 집권귀족계층과 밀착되어 있는 정당에 더 가까웠다고 평가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사두개인들은 낡은 성직제도와 지주 귀족층을 대표하는 보수 종교단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극히 현실 타협적이어서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국가에
충성을 맹세했다. 당시 사두개파는 유대인들의 무장독립항쟁을 막는데 힘을 쏟아붓게 되고,
이것이 열심당과 민중들의 증오의 표적이 되었다. 결국 AD 70년의 유대전쟁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이 전쟁에서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동족들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사두개 파는 괴멸되
었고 그 이후로는 세력을 얻지 못했다.
반면에 바리새인(Pharisees)들은 유대교에 많은 개혁을 도입하였으며 복음서들에 있는 묘사
와는 달리 소극적이긴 하였지만 로마에 저항 했던 진보적인 무리였다.
바리새인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이 낱말의 기원을
'분리되어 있는 사람'(파루쉬parush, 페리쉬perish)의 뜻인 히브리어 파라쉬(parash , 아람어
페라쉬 perash)로 파악하고 있으나, 다른 해석으로는 히브리어 파루쉬는 '거룩한, 신성한'을
뜻하는 카도쉬(qadosh)와 관계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또 다른 설명에 의하면 '페르시아인'을
뜻하는 아람어 프리쉬(perishi')의 헬라어 형태라는 것이다. 이는 바리새파의 반대자인 사두개
파가 바리새인이 외국의 교리를 유대교에 도입하는것에 대해 붙인 별명 이었다는 설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영혼불멸과 육신의 부활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는 사두개
파의 사상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22장 23절에서도 확인할수 있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히브리어 파라쉬의 뜻 중에는 '가르치다, 쪼개다, 분할하다'의 뜻을 살려
'해석자'라는 주장도 있으나 바리새라는 이름이 수동형이라는 점에서 이 이론은 설득력이 부
족하다.
바리새파는 마카비혁명에서 유래하고 있다. 안티오코스4세의 유대교 탄압에 반발해서 경건한
유대인들(하시딤)이 혁명에 동참했는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스모니안의 지도자들이 예루
살렘 제의를 회복한 이후에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직을 겸임하
고 그것을 세습하게 되자 이에 반대해서 그들과 결별하게 되었다.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자면 예수가 활동했다는 시기에는 6000여명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보수적 집단이었던 반면에, 바리새인 역시
율법에 대해서 보수적이기는 했으나 새로운 사상에 대한 개방성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요세푸스는 바리새인을 가르켜 '합리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핑켈슈타인(Finkelstein)은 바리새 집단을 가르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정당으로 비교하기도 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종교집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유대교 에서 지배권을 장악하려고
분투했던 권력단체이기도 했다. 다만 사두개인은 옛 방식 과 현상 즉 구질서를 유지하려는
관료주의에 귀착된 반면, 바리새인은 BC 2세기부터 줄기차게 유대에서 국민을 대변하는
자유주의자요 또한 진보주의자였다.
바리새인의 대부분은 중산층의 수공예인들과 직공들 가문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농부들 집단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바리새파는 어느 집단보다 민중들에게 가장 강한 영향을 미쳤는데,
BC 2세기 이후부터 유대 사회의 민중들은 이들에 의해서 주도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괴뢰정권이면서 동시에 율법을 무시하고 불륜과 패륜을 일삼는
헤롯일가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사두개파처럼 현실타협적인 정치관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여러번에 걸친 유대인의 반란도 바리새인들에 의해 지휘되었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사두개파들이 로마의 식민통치에 순응했던것과는 다르게, 유대인의 무장독립투
쟁은 대부분 영혼불멸과 부활의 사상을 외치고 다녔다.
예를들면, 유다와 함께 무장투쟁을 일으킨 혁명동지 바리새인 째독은 제 4의 철학(The Fourth
of Philosophy)을 설파하고 다녔는데,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 18권 23절에서 '제 4의 철
학'에 대해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바리새인의 사상과 같았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그들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면 로마에 대한 항거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유대사회의 역사적 정황을 파악하지 못한채 복음서를 읽다보면, 독자들은 바리새인들이
당시 유대사회의 집권층으로 여겨지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끔 만든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당
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것은 사실이지만 유대사회의 주요 집권층은 사두개파였다.
사두개파들이 성전 예배를 강조한 반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개인적인 수행을 강조했다. 이는
헬라사상이 침투하면서 유대인이 민족성을 잃는것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으로 인한 반작용 일
수 있다. 따라서 율법을 너무도 소중하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의 행태에 대해 복음서에서 예수
가 비판을 한것은 이해되는 면도 있다. 그러나 사두개파에 대한 비판보다, 바리새파에 대한
비판이 너무도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만들
정도다.
필자가 성경에서 바리새와 사두개라는 단어로 검색을 했다. 복음서를 기준으로, 바리새라는
단어로 압도적인 숫자의 수많은 구절들(대부분 부정적인 내용)이 등장했는데, 반면에 사두개
라는 단어로 검색된 구절은 그 다지 많지 않았다.
복음서의 저자는 로마에 매국행위를 했던 사두개파는 별로 부각시키지 않고, 바리새인들에게만 집중적으로
공격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복음서에서는 바리새인의 율법주의를 그토록 비판하면서도, 정작 예수를
모함하기 위해 바리새인은 로마에 납부하는 세금문제로 질문을 해온다. 사두개파에 대한 복음서의 비판은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정도뿐 이다.
역사적인 정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복음서를 그냥 읽는다면, 바리새인이 당시 유대사회의 매국
노이자 제사장 그리고 권력자로 여겨지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복음서가 이렇게 기록된 이유에 대해 필자는 2가지 추측을 해본다.
첫번째로 추측하기로는 복음서의 저자가 당시 유대사회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복음서는 유대땅이 아닌 곳에서 헬라파 유대인이 기록했기 때문에, 당시 유대사회의 정황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번째로 추측하기로는, 복음서를 기록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헬라화 되어, 유대율법을
중시하는 바리새인에 대한 혐오감이 작용했을수 있다. 이 때문에 매국을 일삼았던 사두개파는
별로 거들떠 보지도 않고, 바리새인들만 주로 공격하는 방식으로 복음서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어쨋든간에 수천년간 기독교인들에게 위선자의 대명사 처럼 되어버린 바리새인의 이미지는
이제 버려야 할때가 온것같다. 매국을 일삼았던 사두개파는 어디로 가고, 사두개파가 들어야
할 욕까지 바리새인이 한꺼번에 듣고 있다. 이는 복음서는 역사가 아닌 허구이거나, 그렇지 않
다면 저자의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볼수 밖에 없다.
(3) 예수재판의 허구성
예수가 체포된 후에 벌어지는 재판 과정 역시 납득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첫번째로, 사형선고를 내릴 권한을 갖고 있던 산헤드린 공의회가 어째서 예수를 로마총독에게
넘겨주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마가복음 14~15장, 누가복음 22장에 의하면 체포된 예수는 먼
저 산헤드린(Sanhedrin)의 대제사장들에게 심문받은 다음 빌라도에게 보내 졌다고 한다. 예수
를 건네받은 빌라도는 그가 무죄임을 인정하고 풀어주려 했으나 성난 유대인들이 예수를 처형
하라고 부르짖으며 폭동이라도 일으킬 기색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점은 바로 유대인들은 굳이 빌라도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산헤드
린의 공의회에 따라 돌로 쳐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 학자들의
반론은 산헤드린 공의회가 대부분의 형벌을 내릴수 있었으나 사형 판결만큼은 내릴수 없었다
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산헤드린 공의회의 역활이 축소된것은 AD 61년에 유대인들
스스로가 야브네 법정을 만들었을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일화들은 기독교 학자들의 반박을 한순간에 무색케 한다.
예를들면, 예수가 사망한후 얼마 되지 않아서 예수의 추종자 중 한명인 스테반은 산헤드린 공의회에
끌려가 사형을 선고 받는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사도행전 6장 12절]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 [사도
행전 7장 58절]
이와같이 스테반은 산헤드린 공의회에 끌려와서 유대인의 처형 방식에 따라 돌로 쳐죽임을 당
하게 된다. 또, 예수가 살아있을 때인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스테반에게 사형을 내릴 만큼 권한이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는 어째서 예수를 처형하지 않았을
까? 스테반이 위험인물이라면 예수는 그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 아닌가? 어째서 예수를 빌라도
에게 넘겨주고, 유대인들이 빌라도 앞에 몰려가서 예수를 사형시켜 달라고 부르짖는것일까?
이는 어처구니 없는 모순일수 밖에 없다. (또는 복음서의 저자가 로마 제국을 자극하지 않기위
해 날조를 했을수가 있다.)
두번째로 가야파의 집에서 행해졌다는 심문과정의 의구점이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가 한밤중에 취조를 위해 대제사장 가야파(Caiaphas)의 집으로 붙들
려갔다고 한다. 이곳에서 예수를 취조하던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이 그의 말을 듣고 격분하여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때렸다.
이 이야기에는 유대의 율법을 무시했다는 문제들이 있다. 우선, 산헤드린의 지정된 회의소(Ha
ll of Hewn Stone)에서 모이지 않으면 그들의 결정은 구속력이 없었다. 그리고 산헤드린은 밤
에는 만날 수 없다는 특별한 규정이 있었는데 정의는 한 낮의 빛(light of day)에서 수행되어야
만 하기 때문 이었다.
또한, 산헤드린의 원로들은 피고를 때리거나 그에게 침을 뱉았다는 것은 복음서의 저자가 유
대 율법에 대해 놀랄 만큼 무지함을 보여준다. 고문에 의한 자백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율법이다.
세번째로 복음서에 묘사된 빌라도의 모습은 역사속에 기록된 빌라도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복음서에는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알고 어떻게든 그를 살려주려고 노력하지만 분노한 유대
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기세를 보이자 두려움에 떨며 할수없이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는 나약
하고 소심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유대인 전쟁과 유대인 연대기에 기록에 의하면 폰티우스 빌라도(Pontius P
ilate) 두 번에 걸친 유대인 무장투쟁을 대학살로 응징했던 무자비한 폭군이었다. 빌라도의 포
악성은 아그립빠 1세까지도 그의 인상을 찡그리게 만들 정도였다고 하며, 필로(Philo)는 가이
우스 시저(Gaius Caesar)에게 "빌라도는 굽힐 줄 모르는 잔인한 괴물"이라고 보고 했을 정도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AD 36년에 사마리아인 대학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시리아의
지방 총독이었던 비텔리우스(Vitellius)에 기소되어 로마로 소환 되었으나 끝내 자살을 했다고
한다.
빌라도는 공공연하게 선동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망설임 없이 처형했던 통치자 였다.
복음서에는 빌라도가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인가?" 라고 묻자 예수가 "그렇다"고 대답한
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빌라도는 예수를 선동죄로 즉시 처형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속의
빌라도는 예수를 어떻게든 살려주려고 유대인의 유월절 관례까지 들먹이는데 유대인의 관례
중 유월절에 죄수를 풀어주는 관례는 없었다.
정말로 이상스러운점은 복음서들에서 로마에 대한 비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예수를 음해한것도 유대인이고,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하라고 부르짖는것도 유대인들이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이 목소리를 모아 빌라도에게 대답한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하거늘." [마태복음 2
7장 25절]
이 구절은 이후의 역사에서 벌어지게 되는 이스라엘 멸망과 유대인 탄압의 당위성을 실어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복음서들에서는 로마 제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
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4) 기타 의문점
당시의 유대관습은 남자의 결혼이 할례와 마찬가지로 의무적이었고 독신은 비난 받았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어떻게든 예수를 해꼬지 하려는 무리들이 등장하는데, 어느 누구도 예수의
독신을 트집잡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의문점일수 밖에 없다. 유대교의 미슈나 율법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교사가 될 수 없다라고 상당히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예수가 독신
이었다면 예수를 해꼬지 하려는 자들이 "그는 결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라고 주장 했을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게자 베머스'(Geza Vermes) 박사도 이점을
지적하면서, 예수의 결혼여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예수가 그 시대의 관습과 문화에
적응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마가복음 15장 43절, 마태복음 27장 58절등에는 아리마데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여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당시 십자가 처형으로 죽은 시체의 반출은 금기시
되었다. 보통 십자가 형을 받은 사람은 까마귀밥으로 그냥 놔두었던 것이다.
▶ 복음서안에서 엇갈리는 예수의 행적
예수에 대해서 그의 실존성을 논함에 있어서 4복음서는 증거자료가 될 수가 없다.
앞서 소개드린 바와 같이 복음서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으며, 4개의 복음서
안에서도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무수히 존재한다.
예수에 대해서 묘사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를 4복음서라고 말하는데, 이중 요한복음
은 영지주의 적인 저술이라는 이유로 요한복음을 뺀 나머지 3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복음서들은 예수에 대해서 세세한 점에서는 서로 어긋나고 있다.
AD 180년경에 타시안(Tatian)이라는 사람이 여러 복음서를 종합한 디아테사론(Diatessaron)
이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다. 한동안 이책의 영향이 매우 컸으며, 기존의 복음서를 대신할 수
있는 것같이 여겨졌지만 결국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우선 예수의 혈통과 출생에 대해서 알아보자. 오로지 두 복음서들만이, 즉 마태복음 누가복음
만이 예수의 혈통과 출생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두 복음서들도 서로 크게 상충되어 있다.
[마태복음 1장 1절 ~16절]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유다 - 베레스 - 헤스론 - 람 - 아미나
답 - 나손 - 살몬 -보아스 - 오벳 - 이새 - 다윗 - 솔로몬 - 르호보암 - 아비야 - 아사 - 여
호사밧 - 요람 - 웃시야 - 요담 - 아하스 - 히스기야 - 므낫세 - 아몬 - 요시야 - 여고냐 -
스알디엘 - 스룹바벨 - 아비훗 - 엘리아김 - 아소르 - 사독 - 아킴 - 엘리웃 - 엘르아살 - 맛
단 - 야곱 - 요셉 - 예수
[누가복음 3장 23절 ~38절]하나님(=야훼) - 아담 - 셋 - 에노스 - 가이난 - 마할랄렐 - 야렛
- 에녹 - 므두셀라 - 레멕 - 노아 - 셈 - 아박삿- 가이난 - 살라 - 헤버 - 벨렉 - 르우- 스룩
- 나홀 - 데라 -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유다 - 베레스 - 헤스론 - 아니 - 아미나답 - 나
손 - 살몬 - 보아스 - 오벳 - 이새 - 다윗 - 나단 - 맛다다 - 멘나 - 멜레아 - 엘리아김 - 요
남 - 요셉- 유다 - 시므온 - 레위 - 맛닷 - 요림 - 엘리에서 - 예수 - 에르- 엘마담 - 고삼 -
앗디 - 멜기 - 네리 - 스알디엘 - 스룹바벨 - 레사 - 요아난 - 요다 - 요섹 - 서머인 - 맛다
디아 - 마앗 - 낙개 - 에슬리 - 나훔 - 아모스 - 맛다디 - 요셉 - 얀나 - 멜기 - 레위 - 맛닷
- 헬리 - 요셉 - 예수
이것이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족보로,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내림차순으로 누가는 오름차순으
로 기록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윗에서 예수까지의 족보인데, 마태는 다윗이 예수의 27대조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42대조라고 기록했다. 같은 성경내에서 이럼 모순이 있을 수 있을까?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솔로몬을 비롯한 왕을 중심으로 족보를 전개했으며, 반대로 누가복
음의 예수의 가문은 장자를 중심으로 족보를 전개했다. 누가복음의 예수족보는 마태복음의 족
보와 비교하면 약간 지위가 낮았다고 볼수 있다.
특히, 두복음서의 저자들은 수비학(numerology)에 기반을 두고 신비감을 조장 하려고 한 흔
적이 있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를 42대로(7 X 6) 제시했는데 이것을 각각 14세
대(7 X 2)로 나누었다. 이어서 마태복음은 14세대가 3번 지난 후에 예수께서 나온 것으로 제
시하고 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마태복음 1장17절]
유대인들에게 7은 상징적인 숫자이기 때문에 예수의 계보를 7로 나누어지는 묶음으로 만들고,
그렇게 묶음으로써 예수의 탄생이 바빌론 유배와 다윗 왕 자신 만큼이나 중요한 역사적 사건
임을 표시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누가복음도 예수의 족보를 일련의 이름들을 7의 배수 형태로 기록하
고 있다고 볼수 있다.
마태복음이 다윗 시대로부터 포로기까지를 14세대(7 X 2)로 보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21세대
(7 X 3)로 보고 있으며 포로기로부터 예수까지도 21세대로 보고 있다. 마태가 다윗부터 예수
까지를 28세대(7 X 4)로 보고 있는 반면 누가는 42세대(7 X 6)로 보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예
수는 아담의 77대손(7 X 11)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누가복음은 중요한 인물들을 7의 구조
에 맞추어 제시하고 있다. 즉 에녹은 7대, 살라 14대, 아브라함 21대, 아비나답 28대, 다윗 35
대 ...예수 77대로 제시한다.
초대교회시절 이교도 비평가들은 기독교도가 이집트 학자들로부터 배운 궤변(속임수)과 마법
을 수행한다고 비난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족보와 묵시문학등을 살펴보면 초기 기독교에 수
비학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태복음의 저자는 반으로 나뉘면 7이라는 숫자의 마법적인 특성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완전한 세 묶음의 14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열왕기상 3장의 계보에 나오는 요아스, 아마지야,
아조리야를 빼먹었고, 여고니야를 두 번 세는 실수를 범했다.
마찬가지로, 누가복음에서도 스룹바벨을 스알디엘의 아들로 기록했는데 역대상 3장 19절에
따르면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학개 1:1, 12, 14; 2:2, 23, 에스라 3:2,
8; 5:2, 느헤미아 12:1 그리고 마태복음 1:12 등이 스룹바벨을 스알디엘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역대상이 틀린 것일까? 아니면 역대상이 맞고 다른것이 틀린 것인가?)
또한 스룹바벨이 나단을 거쳐 나오는 것으로 누가가 기록한 반면에 역대상 3장 10~19절에 따
르면 그가 솔로몬을 거쳐 나오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레사가 스룹바
벨의 아들로 나오자만 역대상 3장 19~20절까지 스룹바벨의 아들 중에 레사라는 사람은 나오
지 않는다. 게다가 누가복음은 아박삿의 아들로 가이난을 첨가하고 있다.
다른 족보와 누가복음을 비교해 볼 때 다윗 이후로는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다윗과 요셉 사이에서 스알디엘과 스룹바벨만 일치할 뿐 다른 부분은 일치하지 않는다.
어쨋든간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족보의 불일치 부분에 보수적인 기독교인 학자
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쪽이 요셉의 계보이고, 다른 한쪽은 마리아의 계보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그런주장을 하려면 마리아가 다윗 가문의 후손일 수밖에 없지만, 누가 복음은 레위 가문의
엘리사벳(요한의 어머니)을 마리아의 사촌으로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다른 복음서에서는 세례
요한과 예수는 안면이 없는 모르는 사람으로 나온다.)
또한 두복음서 모두 예수의 아버지를 요셉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중 하나가 마리아의 족보
라면 어째서 마리아의 이름이 없고 요셉의 이름만 등장하는가? 이러한 주장은 두복음서의
불일치를 어떻게든 입막음 하려고 무던히 애쓰는 헛수고라고 말해두고 싶다.
그리고 복음서들 사이의 불일치는 예수의 가문과 족보에 관한 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누가 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출생했을때 목자들의 방문을 받았지만,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는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또한,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 가족은 나사렛에 살고 있었으며, 인구 조사를 위하여 나사렛에
서 베들레헴으로 여행을 떠나 그곳의 구유속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가족은 유복한 생활을 하면서 쭉 베들레헴에서 살아 왔었고, 헤롯대왕의 유아학살 때
문에 이집트로 피신하게 되었으며 그들이 나사렛에 정착한 것은 이집트에서 돌아온 후였다.
정리하면, 누가복음서는 '나사렛-베들레헴-나사렛'이라는 장소 이동을 따라 예수 탄생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반면, 마태복음서는 '베들레헴-이집트-나사렛'의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마태복음 20장 29~34절에 따르면 예수는 여리고를 떠날 때 맹인 두명이 눈을 뜨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예수가 그들의 눈을 손으로 만지니 앞을 볼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가복음
10장 46~52절에 따르면 바르티매오라는 맹인 한명이 예수에게 자비를 구한다.
두 사건은 똑같은 사건을 언급한 것으로, 두 복음서 모두 여리고를 떠날 때 예수가 베푼 기적
이었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는 맹인의 하소연이나, "나
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예수의 말이나 모두 똑같다. 똑같은 사건이지만 맹인
의 숫자와 그 치료방법도 각기 다르다.
마태복음 20장 20~21절에 따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와서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반면에 마가복
음 10장 35~37절에 따르면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에게 부탁을 하게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예수를 모욕하였다." [마태복음 27장 44절,마가복음 15
장 32절]
십자가 사건때 누가복음에는 두 강도 중 한 강도는 회개해 구원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강도 모두 예수를 모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마지막말에 대해서도 불일치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에서는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의 하는것은 저들이 알지 못하나이
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서는 단지 "다 이루었다"라고만 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의 승천 역시 문제가 있는데,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승천에 관한 말이 없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만이 예수의 승천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승천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건
을 왜 기록하지 않았는가? 참고로 가장 오래된 마가 복음의 사본에서는 동굴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 하는 장면에서 끝을 맺는다. 즉, 예수의 승천은 후대에 추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도 역시 제각각이다. 마태복음에는 두 마리아가 예수에 무덤에 갔다고 하였으나,
마가복음에는 두 마리아와 살로메가,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 혼자서 예수에 무덤에 갔다
고 나와있다.
그때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가에 부활한 예수가 나타났다고 기록한 것은 마태복음뿐이다.
새벽에 무덤에 가본 사람들의 숫자와 정체가 불분명 하고, 동굴 문 바위가 치워지는 데 지진이
나기도 하고 이미 치워져서 조용 하기도 하고, 문지기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무덤 안에
한 천사, 한 청년, 두 사람, 두 천사가 각각 서 있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하고, 보고 만지기도 하고 만지지 말라 하기도 하고, 베드로도 달려가 보기도
하고 가지 않았기도 하고, 베드로 외에 또 다른 제자가 있다고도 하고....부활 후 예수가 나타
내 몸을 보인 횟수, 보인 무리, 장소, 승천 하기 까지의 시간 등등에서 4 복음서는 모두 다르게
기술 하고 있다.
또한 마태복음 27장 5~8절에서 가롯유다는 예수를 판 댓가로 받은 은전을 성소에 내동이치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대제사장들은 그 은전을 주워들고는 "이것은 피값이니 헌
금궤에 넣어서는 않되겠소" 말하고는, 의논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
지로 사용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사도행전 1장 18절에 가롯유다는 예수를 판 댓가로 받은 은전으로 밭을 샀으나 땅에
거꾸러지고 배가 갈라져 내장이 터져 나오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예루살렘의 시민
들은 가롯유다의 초현실적인(?) 죽음에 대한 말을 전해 듣고 그 밭을 아겔다마(피의밭)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마태복음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12제자를 파견하면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명령하는 대목중에 사소하게 어긋나는 것도
있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마가복음 6장8절]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태복음 10장 10절]
마가복음에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말했으나, 마태복음에는 지팡이 마져도
소유하지 말라고 나와있다. 그리고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1장의 주기도문도 사소하게 어
긋나고 있다.
또한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에서 30년 동안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 예수의 공생애,
즉 전도활동은 얼마나 오랫동안 행해졌을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공생활은 약 1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의 전도는 3년에 걸쳐 행해졌
다.
공관복음들은 예수의 공생애가 대부분 갈릴리에서 이루어졌으며, 예루살렘에는 죽기 얼마 전
에 1번 방문한 것으로 기록한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의 공생애 대부분이 유대아에서 행해
졌으며, 예수가 3 번에 걸쳐 예루살렘에 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갈릴리와 유대아 사이에는 사마리아 지방이 놓여 있다. 만일 예수의 전도 중 마지막 몇
주를 뺀 전부가 그의 고향 갈릴리 지방에서 수행되었다면, 그 전도의 상당 부분이 두 지방이나
떨어져 있는 유대아에서 행해지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성전에서 환전상들을 쫓아 낸 것이 전도 초기에 일어난 일이지만,
공관복음에 따르면 그 사건은 그의 전도가 끝날 무렵에 일어났으며, 이 행위로 인해 그에게 분
노한 제사장들이 그를 처형시킬 방법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이사야 34장 16절의 "말씀이 서로 짝이 맞는 말, 즉 다른 구절과도 서로 뜻이 통하는 말이어야
하며, 반대가 되는 말이 있다면 가짜요, 짝이 있는 말이라야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하는 구약의 구절을 무색케하는 신약의 복음서들이 아닌가! (사실 구약도 마찬가지 이지만)
기독교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그 복음서중에 하나만이 사실이던지 아니면 4복음
서 모두 잘못된것이라는 사실을 인정 해야 한다. 복음서들이 서로 상충되고 있는데 어떻게 신
성불가침의 것이 될수 있는가?
▶ 억지로 끼워맞춘 예수신화
예수에 대해서 복음서들의 저자들은 물론 사도들 까지 구약을 자주 인용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용들은 대부분 잘못 인용하는 실수를 저질렀거나, 고의적으로 구약을 왜곡시킨 흔적이 여실
히 드러난다. 신약의 저자들은 유대교의 정경인 구약에 대해서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것 같다.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신자의 부활'의 논란에 답하기 위해 바울은 아래와 같이 대답한다.
이 구절은 초대교회의 어떻게 구약 성경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
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린도 전서 15장 3~5절]
*그런데 “성경대로”가 의미하는 내용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어디에도 없다.
즉 예수의 제자도 아닌 바울이 예수를 가지고 민중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말에 따르자면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이 모두 구약속에 기록 되어 있다는 말이다.
특히, 바울은 "성경대로"(kata. ta.j grafa,j)라는 문구를 두 번이나 사용하면서 매우 강조한 흔
적이 있는데, 초대 교회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구약 성경의 해석을 통해 설명하려는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 예수 일대기의 사건들을 구약과 관계 지어서 '예언과 성취의 모델'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난 부활의 예수는 '자신의 고난과 영
광'이 필연(必然)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복음 24장 26~27절]
여기서 누가복음의 저자는 필연성을 가리키는 동사'dei/'를 사용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반
드시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었던 일이라고 강조했으며, 예수의 부활 사건은 "성경 전체에"(evn
pa,saij tai/j grafai/j) 예시(豫示) 되어 있고 그것을 예수가 두 제자에게 깨우쳐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도 구약의 어느 부분을 가리키는지 구체적으로 상술하지는 않고 "성경 전체"가 예수의
케리그마의 사건과 부합하고 있다고 기록 하고 있다. 이러한 예언과 성취의 모티브에 대한
관점은 실제로 누가복음의 말미를 장식하면서 누가의 예수 이야기의 목적과 결론을 구성한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4장 44절~49절]
누가복음속에서 예수 스스로가 말하길, 예수사건은 '토라'(모세의 율법), '네비임'(예언자의
글), '케투빔'(시편이 속한 성문서) 모두에 예수사건이 예언 되어있다고 확언하고 있다.
또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솔로몬의 행각에서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중략)....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사도행전 3장 18~24절]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 18절에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의 필연성을 여호와
가 '미리 선포'(prokath,ggeilen)했고 그것을 이제 성취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고난이 성경의 어디에 예언 되었는가는 그의 설교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도행전 3
장 22~23절에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서 구약의 신명기 18장 15절의 모세와 같은 선지
자를 거론하면서 그 예언된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구체적 예언의 문구나 성경의 부분에 대한 직접적 지적은 없다.
(1) 처녀탄생설의 잘못된 인용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탄생을 가르켜 구약 이사야 7장 14절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예언
이 실현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장2
3절]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사야 7장 14절을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70인역에는 파르테노스(parthenos), 즉 '처녀'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인 히브리 성경(Tana
kh)에는 '알마'(almah),즉 젊은 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 어로 젊은 여인은 "ha'almah",
처녀는 "ha'bethulah"이다. [오강남 / 예수는 없다 / 현암사]
개역한글판이나 표준새번역의 난외주, 또는 주석성경에 보면 '젊은 여자' 또는 '젊은 여인'이라
고 나와있을 것이다. 젊은 여인과 처녀와의 차이는 엄연한 것이다.
또한 이사야서의 그 구절은 앞으로 올 메시아에 대한 예언도 아니었다. 예언자가 아하즈 왕에
게 시리아와 에브라임이 유대와 전투를 벌이지 않게 될 것임을 확신시키면서 시간과 장소를
언급한 것이다. 즉, 이사야는 아하즈에게 젊은 여인이 곧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
러한 일이 일어나는 시간이 되면 정치적인 위험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구절이
다. 이사야서 8장 2절에 따르면 이 예언은 이사야의 아내가 낳은 아들에게서 성취 되었다.
지금은 주석에라도 이렇게 달아 놓았지만 초대 교부들은 이 실수를 알면서도 완강히 고집을
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메시아를 증거하기 위해서 구약의 내용을 위조한다고 비난하
기도 했으며, 그들 나름대로의 아퀼라역 이라는것도 내놓기도 했다. 라틴역 벌게이트(Vulgate)
를 내놓은 제롬은 이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Almah가 처녀가 아니고 젊은 여인이라고 항의하는 것에 대해 알고는 있다. 사실
처녀는 Bethulah라 불리지만, 젊은 여인은 almah가 아니고 naarah라 불린다" [Jerome, Adv.
Javianum I, 32; N&PNF, vi, 370.]
"처녀가 성령으로 잉태 한다고 썼다면 그 당시 누가 믿었겠는가?...(중략)...수잔나와 같이 간
통한 여인으로 몰릴 것이 아닌가?" [Jerome, The Perpetual Virginity of Blessed Mary, N&P
NF, vi, 336.]
카톨릭 백과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현대 신학은 이사야서 7:14 절이 그리스도의 동정녀 잉태에 대한 예언 이라는 것을 인정 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 마태가 '보라 처녀가 잉태 하여 아이를 낳으리니 그 이름을.....' 한 것은 이
사야 구절을 잘못 이해 한 것 으로 판정 된다." [Catholic Encyclopedia. xv, 451.]
또한 이 동정녀 출산 문제는 단순히 마태복음 저자의 헬라어 번역판에서 오는 번역상의 단순
한 착각이라고만 볼수가 없다. 다음장에서 이어지게될 예수신화설에서 언급하겠지만, 신약성
경이 쓰여졌던 당시는 조로아스터와 미트라등의 태양신 구세주전설이 유대인에게 유입 되면서부터
동정녀 탄생이 구세주 전설의 빼놓을수 없는 모티브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결국 헬라 사상에 영향을 받은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신의 아들로 믿기를 원했고, 이교도적인 요소가 하나둘씩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2) 유아학살과 예수의 어린시절 끼워맞추기
헤롯대왕의 유아학살 사건에 대해 마태복음 저자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구약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마태복음 2장 18절]
여기서 우선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레미야가 라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무시
하고 있다.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8킬로 떨어진 마을이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으로
8킬로 떨어진 마을로 두 마을은 딴 마을이다.
예레미야 31장 15~17절을 살펴보면 라헬의 통곡은 어린 아기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 아
니라, 성장한 자식들이 적군의 땅으로 포로가 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죽은 것이 아
니라 다시 돌아올 터이니 '최후의 소망'을 버리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던 것이다. 즉, 두 이야기
는 전혀 상관이 없다.
게다가 예수의 탄생시 헤롯 대왕에 의해서 베들레헴 아기들이 죽임을 당한 이야기는 역사적인
허구이다. 우선 역사적으로 그러한 일은 유대인의 역사와 로마의 역사, 주변국의 역사에서 찾
아볼수 없다. 또한 베들레헴이라는 그 작은 마을에 별이 그 집 위에 머물고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경배하고 갔다는 그 큰 사건을 모를 집이 없었을 것이다. 헤롯이 염탐자들을 파견해 추적
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를, 어째서 그 지역의 2살까지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무자비
한 대학살을 저질러야 했는가? 게다가 더욱이 헤롯대왕은 BC 4년에 죽었다. 마태복음의 저자
는 왜 이렇게 무리를 하면서 까지 헤롯의 유아학살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했을까?
성공회의 스퐁 주교(John Shelby Spong)은 그의 저서 '자유로운 복음' (Liberating the Gosp
els) 신약속에서의 예수의 생애는 미드라쉬적(midrash) 기술방법으로 서술되어있다고 밝힌바
있다. 즉,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태어 났을때 이집트의 파라오가 유아학살을 자행했던 이야기
를 다시 한번 예수의 일대기 속에 반복 시키면서, 예수를 유대인들을 해방시켜줄 '제2의 모세'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기 2장 12절에서 모세가 이집트 십장을 죽이고 파라오를 피해
피신하는 것과 같이, 예수도 헤롯 왕을 피해 피신을 가도록 한 것이다.
(3) 나사렛예수 끼워맞추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를 가르켜 '나사렛 예수'라고 말한다.
누가복음에는 호적조사 때문에 베들레헴에 간 요셉과 마리아는 원래부터 나사렛 사람들이다.
반면에 마태복음에 따르면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 지방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요셉부부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하던중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가라는 지시를 꿈속에서 받게 된
다. 그러면서 마태복음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복음 2장 23절]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하는 말이 히브리어로 된 구약의 어떤 곳에서도 발
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현대 신학계에선 세가지 견해를 보이고 있다.
첫 번째는 마태복음 기자가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의 이사야 11장 1절을 잘못 인용했다는
해석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사야 11장 1절]
위의 이사야의 구절 중 '가지'라는 말의 헬라어가 '네제르'(nezer)인데 마태복음의 저자는 그것을
'나사렛 사람'(Nazarene)으로 잘못 읽었다는 것이다. [오강남 / 예수는 없다 / 현암사]
두 번째 해석 으로는, 삼손을 "나지르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는 사사기 I3장 5~7절에서 가져
온 미드라쉬적 기술 방법 이라는 해석이다. 이 해석은 마태복음의 저자가 예수가 메시아 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대인을 구한 삼손의 속성을 예수에게 적용시켰다는 견해이다.
세번째 해석으로는 점성술(astrology)에서 12궁도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자로트'(Nazaroth)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어근이 된 동사 '나자르'(nazar)는 "둘러싸다"는 의미이며, 이 단어는
욥기에서 확인할수 있다.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욥기
38장 32절] -공동번역판에서는 "성좌"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태음력을 사용했지만, 사해 근처 쿰란에 거주하던 에세네파들이 태양
력을 사용했던 사실이나, 뒤에서 소개하겠지만 케루빔의 모습이 상당부분 점성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구약과 관련된 예언을 억지로 찾는것보다 다른방면에서 접근 하는것이 현명하
다고 본다. 즉, 당시의 '나사렛'은 독특한 분파적인 용어이며 어떤 지역이나 마을이름과는 아
무런 관계도 없다는 점이다. 나사렛분파는 유대교의 이단으로 취급당하던 종파로, 뒤에서 언
급할 영지주의적인 성격의 에세네파와 영지주의적인 종교들과 너무도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두산세계대백과의 나사렛파에 대한 설명을 옮겨보자.
"나사렛파에는 유대교 나사렛파와 그리스도교 나사렛파가 있다. 유대교 나사렛파를 나사라이
오라고, 그리스도교 나사렛파를 나조라이오니라고 한다. 유대교 나사렛파는 유대교의 이단종
파로 규정되었는데, 유대교의 절기와 안식일, 할례 등은 지켰지만, 모세오경을 위조문서로 취
급했고 고기를 먹는 것과 희생제사를 거부했다.
그리스도교 나사렛파는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초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추
종자들이다. 이들은 헤브라이어로 구약성서를 즐겨 읽고 안식일을 준수하고 할례를 행했다.
그들이 예수의 인격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예수를 인간
으로 여겼는지 아니면 그 초월성을 인정하고 믿었는지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지금도 그리스도
교 나사렛파 일부가 '붓소'나 남부 바빌로니아 일부 지역에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두산세계
대백과 EnCyber / 나사렛파 Nasaraei항목]
즉, 다시 말해서 나사렛이라는 말은 지명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분파의 이름이다.
또한, 고고학적으로 예수 당시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없었고, 로마의 지도, 문서, 그리고 기록들에도
나타나지 않으며, 탈무드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복음서들보다 먼저 작성된 사도 바울의 어떤 기록속에도 언급 되어 있지 않으며, 예수와 관련 되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갈릴리의 군단들을 지휘했으며 그 지방의 마을들을 목록으로
작성한 저명한 역사학자 요세푸스도 나사렛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나자렛은 성서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마을은 3세기 전까지는 존재한 것 같지 않다.
'나자렛의 예수'는 성서 학자들이 원래 그리스의 구문인 '나자레안의 예수'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지역성을 표시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그것은 특별한 종교적, 정치적인 기원을
가진 특별한 단체 또는 분파 내의 회원으로서의 예수를 언급하는데 현대 전문가는 '나자레안
모임'이라고 부른다." [김원 / 아틀란테스 / 도서출판 와우 / P.244]
우스운 사실은 오늘날 성지로 불리워지는 나사렛이라는 마을은 예수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AD
3세기쯤에 갑자기 등장한 지명이다.
(4) 예수의 이집트거주 끼워맞추기
예수가 이집트에서 거주했다는 것을 구약에서 인용한 구절도 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
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태복음 2장 15절]
위 구절은 호세아 11장 1절의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험을 인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호세아
11장 1절]
그러나 호세아서 11장의 전반적인 글 맥락에서 본다면 이것은 유대 민족의 출애굽을 말한 것
이다. 어떻게 이 구절이 예수의 이집트 체류의 사실에 적용 될수 있을까?
표면상으로 볼 때 두 사건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단지 예수와 유대 민족이 모두 이집트
를 떠났다는 사실에서만 공통점을 갖는다. "내 아들"이라는 호칭역시 유대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출애굽기 4장 22~23절에서부터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5) 찾을수 없는 예언
복음서의 저자들은 한술 더 떠서 가롯유다가 예수를 은화 30냥에 팔아서 밭을 샀다는 일화까
지 구약에 예언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
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태복음 27장 9~10절]
그러나 예레미아서, 또 예레미아 애가 및 그의 제자 바룩의 모든 문서에서 그런 예언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것은 또 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한복음 7
장 37~38절]
이런 예언 역시 구약 어디에도 없다.
(6) 사도행전의 궤변
복음서 뿐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예수의 일대기와 구약을 연관시키려는 흔적을 찾을수 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예수의 부활이 구약에서 예언되었다는 것을 증
거하기 위해 시편 16장을 인용했다. 문제는 베드로의 시편해석이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점인데
, 오늘날 사도행전의 해석을 배제하고 시편 16장 자체로만 볼 때는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찾아
낼수가 없다. 또한 이 시편이 당대에 메시아의 부활에 대한 예언으로 읽혔다는 증거도 없다.
시편 16장은 여호와의 보호를 확신하는 '신뢰의 시'로서, 시인이 자기 수명(壽命)에 합당치 않
은 횡사(橫死)에서 건짐을 받기를 소원하는 기도인것이다. 베드로는 시인이 자신의 생명이 보
전 되리라고 확신하는 내용이 담긴 부분을 시편 16장 8~11절을 인용한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
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
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사도행전 2장 25절~30절]
아래는 베드로가 인용했다는 시편16장의 전문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
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
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
동치 아니하리로다.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
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
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장 전문]
시편16장 전체를 놓고 아무리 읽어 봐도 예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수가 없다.
그런데 시편16장과 예수부활을 연관 짓기 위해 사도행전 2장 29~36절에서 베드로가 펴는 논
리는 다음과 같다.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분명히 죽었고 그 증거로서 그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
따라서 '음부에 버림을 당하지 않고 시신이 썩지 않으리라'는 언급은 다윗 자신의 몸에 대한
것이 아니다. 사무엘하 7장 12~13절에 기초한 시편 132장 11절에서 여호와가 다윗에게 그의
자손을 영원한 왕위에 앉히겠다고 했다. 다윗은 선지자로서 자신의 후손으로 올 영원한 왕에
대해 그의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예언한 것이다. 다윗의 후손인 예수를 여호와가 다시 살렸다.
따라서 이 시편 구절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행전 2장 29~3
6절에서 베드로가 펴는 논리이다.
정말 이보다 더한 아전인수(我田引水)격 해석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시편 16편의 아전인수
격의 황당한 해석은 또 등장한다. 사도행전 13장 33~39절에서의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한 회당에서 베푼 권면에서도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하여 시편 16장 10절이 예수의 부활을 가
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사도행전 13장34절에 따르면 바울은 사무엘하 7장 12~13절의 다윗
의 자손에 대한 약속을 이사야 55장 3절 후반절을 통해 상기시키고 그것을 시편 16장 10절의
'썩음을 당하지 않는 은사'에 연결 시키는 황당한 억지 논리를 펴나간다.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
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 하였나니." [사도행전 13장 35~37절]
아마도 초기교회의 교리적 핵심을 이루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구약의 예언성취적 이해에는
시편 16장의 억지 해석이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에서 나타난 궤변(詭辯)은 오직 부활의 확실성을 당
시의 성경, 즉 구약으로 설명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취한 해석상의 고육지책(苦肉之策)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신약이 등장한 것은 예수의 시대가 훨씬 지난후 1세기가 지나서야
구두전승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예수의 행적이 기록되어지기 시작한 연유에서다.
(7) 유대교 영지주의자들의 아전인수격 경전해석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복음서들이 예수의 생존시에 생겨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모두 의견을 일
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복음서는 유대의 폭동 66년에서 77년 사이의 폭동과 그리고 132년에
서 135년사이의 폭동이 일어난 중간 기간에 기원한다고 추측한다. 복음서들 중 최초의 것은
일반적으로 마가복음이라고 생각되고 후대의 그럴 듯한 추가물인 부활에 관한 기사를 제외하
면 66년~77년의 기간중의 작성되었다. 아무리 빨리 쓰여 졌어도 AD 90년 보다 빠르지는 못
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다시말하면 신약이 등장하지 못한 당시의 초대교회 사람들에겐 구약과 간약적 문헌들이
초대교인들에게 널리 읽혀졌다.(간약적 문헌들은 신구약의 중간시기에 등장했던 경전으로
조로아스터교의 메시아 신앙과 묵시문학의 상당한 영향을 받은 문서들이다.
나중에 외경으로 버려지게 된다.)
따라서 예수를 목격하지 못한 초대교회의 신도들에게 사도들은 예수의 존재를 구약을 통해서
증거 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보여주는 시편 16장의 해석은 정통 유대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
기 위한 논리로서는 무의미 했을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성경에 무지했던 당시
의 예수 추종자들에겐 그럴듯한 해석으로 이해 되어 졌음에 틀림없다. (당신도 사이비 종교에
심취해 보라. 성경을 이상하게 연결시켜서 말도 않되는 종말론을 주장한다 해도, 일단 중독되
면 교주의 말이 전부 그럴듯하게 들릴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것은 기독교가 유일할까?
그렇지 않다. 기독교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등장한 유대교의 영지주의자들도 구약을 자신들의
교리에 따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다. 다음장에서 필자는 예수의 일대기 상당부분이 이교도
의 신화속에서 가져왔다는 자료들을 여러분께 설명할것이다.
특히 에세네파는 예수보다 150년 가량 앞서서 예수와 유사한 행적을 보이는 '의로운 선생'이
라는 메시아를 숭배하던 유대교의 영지주의자들 이었다. 이들은 기독교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
터 정통 유대교와는 거리가 먼, 중근동의 메시아 신앙과 영지주의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던 집
단이었다.
최근에 발견된 사해문서는 에세네파의 것으로 추측되는데, 사해문서에서는 현존하는 최고로
오래된 성경의 사본들은 물론, 구약의 주석서까지 다양하게 발견 되었다.
그중 구약의 주석서는 쿰란의 에세네파의 독단적인 해석방법과, 그들이 믿었던 메시아를 구약
속의 구절들과 연결시키기 애를 쓴 흔적이 있으며, 이것은 위에서 지적한 초대교회의 사도들
의 잘못된 구약 인용과도 일맥상통한다.
쿰란의 사해문서 중에는 '페샤림'(myrvp)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18개의 문헌이 있다. 이 '페
샤림'은 구약 성경의 개별서들에 대한 주석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페샤림'은 구약의 구절들
을 쿰란 공동체와 그들의 메시아에 대해서 구약을 연결시키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
서 나타나는 쿰란 공동체의 독특한 구약 읽기와 해석 방식을 '페쉐르'(rvp)라 한다.
쿰란의 '페쉐르'는 일정한 유형을 따르고 있다. 페샤림의 기본 유형은 '레마'(lemma)를 구성하
는 성경 구절이 적힌 부분과 그것에 이어지는 인용 구절 해석 부분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부 불규칙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해석 부분은 rbdh rvp 또는 wrvp로 시작된다. 쿰란의 독특
한 성경 해독 방법의 이름이 된 이 rvp라는 단어가 뜻을 정확하게 확인할 길은 없다.
히브리 단어로서의 rvp는 구약에서 오직 한번 전도서 8장 1절에서만 등장한다. (rb'D' rv,Pe y
miW ~k'x'h,K. ymi 지혜자와 같은 이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전 8:1a)
쿰란문서에서 주로 숨겨진 성경 구절의 뜻을 해석하는 작업에 사용된 이단어는 전도서의 구절
에 기초해 '해석'(解釋)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게 정형화된 도입부 다음에는
레마의 성경 구절에 있는 사건이나 인물들을 쿰란 공동체와 관련된 사건이나 인물과 연결 시키
는 해설의 작업이 뒤따른다.
'레마'와 해석 사이의 연결점을 찾는 방식은 다양하다. 호르간(Horgan)은 네가지로 분류된 페
쉐르 해석의 방식을 발견했다.
① 레마의 구절에 있는 행위, 생각, 단어들과 유사한 현재의 상황을 찾아 맞추어 설명한다
② 레마의 기술과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어, 어근, 개념 등의 연상(聯想) 작업을 통해
현실 상황에의 적용을 유도한다
③ 레마에 있는 인물이나 사건과 은유적인 동일시(同一視)를 유도하기도 한다
④ 레마와 그 해석이 드러나는 연관성을 갖지 못하고 억지로 연결된 느낌을 줄 때도 있다
이와 같이 에세네파는 구약속의 예언이 자신들의 공동체와 현재 일어나는 사건과 연관되어 있
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이렇게 아전인수격으로 구약을 끼워맞추는 페쉐르의 형태를
롱게넥커(Richard N. Longernecker)는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This is that) 방식 이라고 정
의를 내렸다.
또, 쿰란의 에세네종파는 그들의 교리를 합당화 시키기 위해서 구약속의 문장이나 단어를 변
경시켜 인용하기도 했다. 티모시 림(Timothy H. Lim)은 하박국 주석에서 원문을 변경시키는
경우를 두 차례 찾아냈다. 사해문서의 하박국 주석 12장 1~10절에 보면, 하박국 2장 17절이
인용되고 '사악한 제사장'에 대한 페쉐르가 주어진다. 여기서 레마에 인용된 본문과(1QpHab
12.1a) 해석에서 다시 인용하는 본문이(1QpHab 12.6b-7a) 다르게 나타난다.
해석의 재인용에서는 일부 단어들을 생략함으로써 원문의 "사람들의 피 때문에"를 "도성(都城)의
피 때문에"로 읽어 그 내용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사악한 제사장'의 사건에 맞도록
조정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박국 1장 13절의 주석인 1QpHab 5.8-12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본문 변경이 발견된다.
주석가는 단어를 변경하여 여호와 대신 '압살롬 집'이 문장의 주어가 되게 했다. 그래서 '의
(義)로운 선생'이 핍박 받을 때 침묵한 것은 여호와가 아니고 '압살롬의 집'으로 해석한다.
여호와가 하박국에게 계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하박국 2장 2절의 주석인 1QpHab 7.1-5
에서도 하박국이 받은 계시가 '의로운 선생'에 대한 내용 이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이런 아전인수격 구약의 인용은 에세네파가 자신들만의 공동체 중심의 '페쉐르'로 구약을 읽
어야 한다는 신학적 부담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페샤림의 주석가들에게 암
시되어 있는 논리는 신약성경의 구약 인용법과 유사하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역시 상당히
영지주의적이었다고 할수 있기 때문이다.
스텐달은 마태복음의 구약 사용 방법을 "페쉐르 유형"(pesher type)으로 정의했고 롱게넥커는
"페쉐르 처리법"(pesher treatments)이라 명명(命名) 했다. 물론 신약과 사해문서의 페샤림은
형식상으로는 서로 다르다. 신약은 내러티브(narrative)나 서신의 형태로 전개되고 이야기 진
행이나 설교 중간 중간에 구약이 인용되어 예언 성취를 증명한다. 반면에 사해문서의 페샤림
은 주석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구약을 예언으로 보고 그 예언이 자신의 공동체 속에 성취 되었다고 보는 해석학적 관점에
있어서는 양자가 동일하다. 좀더 이야기를 발전 시키면 에세네파와 같은 유대교 영지주의자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로 진화 했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신약속에서의 잘못된 구약인용, 즉 예수의 행적에 억지로 구약끼워 맞추기는 기독교의 원류가
영지주의였다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명확하고 분명해 진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유대교와 기독교는 엄연히 다르며,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은 예수를 증거하지 않는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장 23절]
이것은 구약에 등장한 사형에 관련된 구절이다. 이 구절을 가지고 예수는 여호와의 저주를 받
은 사람이라고 주장 한다면 얼마나 황당 하겠는가? 구약의 저자가 예수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기록했음은 위의 구절로써도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