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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상 15;1-24, 버리기와 바라기2. 2021. 9. 26.
9월 둘째 주일에 이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데 먼저 지난 주일에는 마25장의 달란트 비유가 의미하는 몇 가지 중요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땅에는 2개의 바다가 있는데 하나는 갈릴리 바다이고, 하나는 사해입니다. 똑같이 요단강에서 흘러 들어가는 바다인데 갈릴리는 물이 맑고, 고기도 많으며 나무가 자라고, 새들이 노래하는 아름다운 생명의 바다입니다. 그런데 사해 바다는 더럽고 염분이 너무 많아서 고기가 살 수 없고, 새들도 오지 않고 어떠한 생물도 살지 않는 바다입니다. 그러면 똑같은 요단강 물줄기에 위치한 갈릴리 바다와 사해는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왜 하나는 생명이 숨 쉬는 바다가 되고, 하나는 이름 그대로 사해 바다가 되었을까요? 요단강 때문도 아니고 토양 때문도 아니고 기후 때문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에 있습니다. 갈릴리는 강물을 받아들이면서 한 방울이 흘러 들어오면 한 방울은 흘러 보냅니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사해는 들어온 강물을 내어놓지 않습니다. 들어오면 그것을 내놓지 않습니다. 받기만 하고 주는 것을 모릅니다. 이 것이 생명의 갈릴리바다와 사해 바다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사람도 그렇습니다. 받기만 하는 사람이 있고 받으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 삶으로 사십니까요? 신발장에 신발이 늘어 가고 옷장에 옷이 많아집니다. 부엌에 그릇이 쌓입니다. 왜요? 사기만 하고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근심이 늘어 가고 머리에 생각이 많고 복잡해집니다. 몸이 자꾸만 무거워지고 발걸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왜요? 바라기만 하고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지 않는 신발은 버리고 이미 입지 않은 옷은 차곡차곡 쌓아 둘 것이 아니라 정리해야 합니다. 사용하는 것만 두고 치워야합니다. 삶이란 이렇게 바라기와 버리기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버리면 얻게 됩니다. 쓰레기와 헌 옷도 버리고 슬픔과 미련과 후회도 버리고 명예와 욕심도 버리면 새로운 것과 경이로운 것을 얻게 됩니다. 설사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버린 만큼 시원하고 공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달란트의 말씀 중에 한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속에는 버리기와 바라기의 의미가 있는데, 은혜를 잘 감당했던 사람이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한 달란트의 비교와 계산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뛰어 넘는 것이 무엇입니까?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와 비교하지 않았고, 계산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생각을 버렸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달란트의 가치를 귀중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어렵고 힘들고 고난이 길어질수록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버리기와 바라기가 잘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약속과 명령에 대하여 얼마나 간절함이 있고, 얼마나 성실하고, 얼마나 충성되는가에 따라 환경이 열리고 닫힙니다. 여러분,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고 은혜의 연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못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물이 동할 때 물속에 손만 넣으면 낫습니다. 그런데 이 낫고자 하는 의지와 생각과 행동은 없습니다. 그냥 머물러 있고 현상만 봅니다. 다른 사람의 회복과 온전케 된 기쁨만 바라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보고만 있고, 그냥 어쩔 수가 없다고 구경만 하지 않습니까? 타개하려는 그 어떤 의지와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발상의 전환이 없고 문을 닫아 놓습니다. 여러분, 이 고난의 세월 속에 나를 기억하시고 찾아 오셔서 한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5달란트를 맡기셨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으면 아니 됩니다. 기억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할 일이 무엇일까요? 허락을 하시고 맡기신 삶을 떠나면 아니 됩니다. 땅 속에 묻으면 아니 되기 때문에 우리 비전교회는 지난주에 지금까지 여느 교회가 해 왔던 유산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교우들과 함께 같은 환경과 같은 사랑을 경험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그 받은 것에 대하여 울면서 감사를 올리고 누구는 교회의 문을 닫습니까? 그래서 이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까? 묻기도 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분은 저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를 많고 큰돈인데 전 가정에 주셨습니까? 교회가 대단합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버리고 바라기를 한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어렵지만 함께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가 전통을 뛰어 넘어 함께 했더니 한 주간이 행복했습니다. 뛰어 넘어서 버리고 정리하면서 바라기를 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의 세상과 가깝고 그 영역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로 살지 않고 다섯 달란트의 소망으로 살았습니다. 버리고 바라기로 살았습니다. 고전 4;2, 맡은 사람에게 구할 것은 충성하는 사람으로서 열심과 소망과 열정으로 다섯 달란트를 사모하면서 충성했습니다. 그랬더니 10고을 권세를 받고 더 많은 것을 맡기시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요? 버리기와 바라기를 잘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각자에게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크기가 다르고 분량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문제가 아니 됩니다. 버리기와 바라기를 잘하면 이 보다 더 크고 놀라운 경이로운 기적을 경험합니다. 새로운 시온의 대로가 열립니다. 이런 은혜가 넘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인데 깊이 박힌 옹이입니다. 여러분, 미워졌다고 뒤 돌아 섭니까? 믿음의 삶을 함께 했던 끈을 상대의 잘못 때문에 쉽게 놓아집니까? 이렇게 하려고 믿음의 공동체로 관계를 했습니까? 하지만 미워졌고 이별로 끝난다 해도 하나님은 그 깊이 박힌 사랑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사무엘도 사울 왕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던 사울 왕에게 깊이 박힌 옹이와 같은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울 왕은 14장 마지막 부분에서도 눈에 보이고 생각한 그 것을 그대로 옮깁니다. 힘이 센 사람과 용감한 사람만 보면 용사에 편입을 시켰습니다. 항상 능력위주와 힘의 원리와 수의 우위에 마음이 있습니다. 버려야 길이 열리는데 버리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런 사울에게 지금까지의 불순종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날 만한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십니다. 이 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인데 그 내용은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아말렉이 어떤 민족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지도 아래 출애굽을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홍해를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으로 건너고 광야생활을 시작하면서 전진할 때인데 그 당시에 이스라엘의 진로를 막고 아주 괴롭히던 민속입니다. 아말렉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대열의 뒤를 따라오던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무참하게 몰살했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아말렉을 이기고 기도의 손을 내리면 졌던 광야에서의 첫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당시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그냥 두고 계시다가 거의 400년이 지난 지금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데 아말렉 족속을 치되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합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들까지도 다 죽이라고 합니다. 승리의 전리품을 취득하지 말고 남겨두지 말라는 모두 버리기입니다. 승리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셨지만 참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달라서 그 넓이와 깊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신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명령이 사울 왕에게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쟁은 대 승리를 거뒀지만, 사울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분부하신 명령을 어기지요? 버리기를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약속과 명령을 어기는 것도 정상참작이 되는 사안이 있어요. 모르고 그랬다든가 바쁜 와중에 잊었다든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불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악의에서가 아닌 불순종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사울은 완전히 고의적이었습니다. 왕을 사로잡고, 짐승들 중에 살찌고 기름진 것들은 다 챙겨놓고, 하찮은 것들과 별 쓸 모 없는 것들만 죽였습니다. 버리기와 바라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공로를 위하여 승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면 사울이 이렇게 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버리기를 못한 까닭입니다. 무엇을 버리지 못했나요?
1-1. 버리지 못한 탐심입니다. 좋은 것은 그냥 갖고 싶고 내 소유로 남기고 싶은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위하여 남겨두는 것이 내 자신을 무너뜨릴 때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버리기를 해야 하는데 바라기로 남겨 두었습니다. 사울만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렸던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자기를 위하여 남겨 두었을 때 버리기를 바라기로 바꾸었을 때에 쓰러지고 넘어졌습니다. 탐욕(greed)이 무엇입니까? 탐욕은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물질과 권력을 가지려는 강한 욕망입니다. 그러면 사울의 탐욕이 무엇일까요? 사울은 가장 좋은 가축과 전리품은 자신이 가지고 가치가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했습니다. 여러분, 사울이 정말 하나님을 경외했다면 여호와의 명령을 먼저 준행하고, 그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은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일까? 19절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여러분, 버리기를 못하는 것은 조그만 것에서 부터 시작이 되고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한 그릇 더 먹으려는 것에서 시작이 되고 물질, 하나 더 얻으려는 것에서 시작을 합니다. 어느 날 레오날드 다빈치에게 플로렌스의 큰 홀에 그림을 그리도록 부탁을 하고, 젊은 미켈란젤로에게 스케치를 부탁했는데, 두 사람이 다 잘 그렸지만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더 힘이 있고 잘 그린 것을 보고, 한 사람이 말하기를 레오날드도 이제는 늙었구만!!! 그때 레오날드는 그 말 한마디에 자기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느끼고 그 이후부터 우울한 생애를 보냈다고 합니다. 사람이 늙었다고 한 말 때문에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버리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독선과 고집과 편벽으로 좁아지기 쉽습니다. 버려야 하는 것에서 버리기를 못하고 바라기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스스로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사람이 있는데 오늘 사울 왕이 그렇습니다. 어디에서 옵니까? 교만과 명성에서 옵니다. 교만은 마음이 좁아지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비판하고 타인을 용납지 않습니다. 마음이 바늘구멍처럼 좁고 돌과 같이 마음이 딱딱해서 주의 말씀을 흡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버리기와 바라기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포용력이 커지고 누구에게나 기쁨과 행복을 선사하고, 스펀지처럼 흡수력이 강하여 주의 말씀을 잘 흡수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의 장막 터를 넓히고 믿음의 장막 터를 넓히시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잘 실천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버리지 못한 자기의 영광 때문입니다. 먼저 축복을 합니다. 주의 영광이 이 곳에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 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 곳에 가득해. 우린 주님과 함께 해.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 여러분, 영광은 하나님께서 주셔야 내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광은 바라기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바라는 영광 때문에 버려야 하는 불순종을 합니다. 여러분, 전쟁에 이긴 것은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의 전략과 전술이 좋아서 이긴 것이 아닌데 자기 기념비를 세웁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도우셔야 승리를 가져옵니다. 생각나게 하시고 지혜 주셔야 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 영광을 스스로 받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를 우습게 알게 됩니다. 버리기를 못합니다. 사울의 문제는 12절에 갈멜 산에 승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아말렉에 대한 승전이라는 자신의 업적을 후세에 길이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승리한 사울은 에배를 드리기 위하여 길갈로 직행하지 않고 갈멜로 가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제사보다는 기념비가 더 급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갈멜과 길갈까지 가서 사울을 불러다가 최후의 통첩을 합니다. 요약하면 당신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택해서 왕을 세울 것입니다. 중간에 사울 왕이 아각 왕을 살려 둔 것과 짐승을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하여 변명을 할 때에 사무엘은 오늘의 핵심 같은 말씀을 합니다. 22, 23절,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여러분, 실수는 할 수가 있고 잘못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위한 계획 가운데 주신 말씀에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습니다. 영광을 위하여 버려야 하는 것에 버리기를 못하면 사술의 죄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영광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가득한 주의 영광을 보며 날마다 복 받은 인생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3. 사람의 인정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전리품을 없애지 않았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전쟁에 참가한 부하들과 백성들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24절에서 사울은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다고 사무엘에게 고백을 합니다. 백성들의 말을 청종했습니다. 백성들의 말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 보다 더욱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전리품에 기대를 걸었던 백성들에게 적당히 전리품을 나누어 줌으로써 왕으로서의 체면과 인기를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행동은 순종해야할 지도자인 왕으로서 자격미달이었습니다. 누가 자기를 왕으로 세워주셨는지를 잊어버렸습니다. 백성이 자기를 지켜준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이익과 자신의 목적 앞에 버리기와 바라기를 혼동합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 알면서도 바꿉니다. 그런데 복을 받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이 것을 합니다. 사람에 대한 인정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버려야 합니다. 이 것을 못하면 거짓을 정당화 시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먼저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보이면 사실을 말합니다. 시146;3-5,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방백들을 또한 의지하지 말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버려야 하는 백성들을 의지하고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사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흡이 코에 있고 수에 비길 가치가 없고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복 주시고 책임져 주실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셔서 남은 인생 아름답게 결실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4. 버려야 하는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사울왕은 처음부터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처음에는 순종을 했습니다. 순종이 쉽기는 합니다만 그 순종을 이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자기의 한 일 앞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사실을 이야기 하면 되는데, 기회가 주어졌는데, 끝까지 시치미를 떼고 거짓말을 합니다. 고집이 셉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여러분, 잘못과 허물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순종해야 답을 얻고 사실을 말해야 승리를 하고 경이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잘못된 순간에 주신 기회를 바라기로 돌리면 불순종의 버리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사울 왕은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마다 실수를 합니다. 왜요? 바라기와 버리기가 정확하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썩은 동아줄을 잡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울의 미래에 큰 전환점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불순종의 예입니다. 잘못을 하고 허물이 되었습니다. 9절에,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가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문제는 적의 왕 아각을 살려두었고, 좋은 소와 양을 전리품으로 남겼습니다. 모든 짐승의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고 하신 3절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면서 15절에서 그는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는 신앙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변명하고 둘러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의 항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셨을까? 사울은 지금 자기가 한말도 모순이 되는 것을 모릅니다. 신앙적 동기였으면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바라기가 없습니다. 변명과 대충의 버리기를 못했습니다. 버려야 되는 거짓말을 합니다. 14절,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이르되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이 소의 소리는 어찌됨이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리고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약속한 모든 짐승을 죽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양의 소리가 들리고 소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사무엘이 몰랐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르십니까? 이미 10-11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근심하여 밤새도록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기도한 이후에 사무엘이 사울 왕을 만나기 위해서 갈멜에 있는 줄 알고 갈멜에 갔는데 사울 왕은 기념비를 다 세우고 벧엘로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다시 벧엘로 가서 사울 왕을 만납니다. 그런데 양의 소리가 들리고 소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마나 시청각적으로 좋은 기회 아닙니까? 그래서 이 양의 소리와 이 소의 소리가 무엇이냐고 사울 왕에게 물었습니다. 알고 물었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고 물었습니다. 근심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사울 왕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허물과 잘못을 시인할 기회 아닙니까? 이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주신 또 다른 사랑 아닙니까? 사무엘의 가슴이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못해서 사울 왕에게 다시 베푸는 은혜 아닙니까? 미워졌다고 갈 수 있나요? 그 끈을 놓을 수가 없어서 갈멜로 벧엘로 찾아 온 것 아닙니까? 차라리 저 멀리 두면 좋았을 것이라고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기회를 줍니다. 이 양의 소리와 이 소의 소리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태연하게 사울 왕은 거짓말을 합니다. 변명을 하고 대충 이야기를 합니다. 거짓말로 사랑을 차버리고, 거짓말로 참회의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다시 사는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 짐승도 거짓을 하지 않습니다. 울어야 할 때 웁니다. 사람은 깨닫지 못해도 짐승은 있는 그대로 존재합니다. 양이 울고 소가 울었습니다. 닭이 세 번 울었을 때까지 베드로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짐승은 깨닫는데 사울 왕과 수석제자 베드로가 깨닫지 못합니다. 거짓말의 버리기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다시 얻은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여러분, 진실보다 더 큰 재산이 없습니다. 정직하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삶을 짧게 보기 때문입니다. 더 크고 더 넓게 보면 진실함보다 값지고 귀한 것이 없습니다. 잃어버린 기회를 다시 살릴 수 있는 현장이 정직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세계적인 극작가 섹스피어도 정직보다 영원한 재산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야기 하나합니다. 한 젊은이가 어느 장터 길가에 떨어진 가방을 주웠습니다. 그 가방 안에는 누구라도 욕심을 부릴 만큼 상당한 거금이 들어있었습니다. 돈 가방을 들고 주변을 살피던 젊은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방을 바닥에 툭 던져 놓고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아 한가로이 햇볕을 쬐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따스한 햇볕에 졸기 시작한 젊은이 앞에, 눈에 불을 켜고 땅 위를 살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젊은이는 그 사람에게 혹시 무슨 찾는 물건이라도 있으신지요? 내가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아무래도 여기에다 놓은 것 같아요. 그러자 젊은이는 깔고 앉았던 가방을 남자에게 툭 던지며 당신이 찾고자 하는 가방이 이거 아닙니까? 가방을 보고 깜짝 놀란 남자는 너무 고마운 마음에 젊은이에게 큰돈을 사례하고자 했지만 청년은 딱 잘라 말을 했습니다. 돈을 가지고 싶었으면 그 가방을 들고 벌써 가버렸을 거예요. 필요한 사람이 요긴하게 잘 써야지요. 이 젊은이가 바로 대한민국의 독립선언서 주창자 33인의 민족대표 중 한 분인 손 병희 선생님입니다. 여러분, 오늘 날 정직한 사람들을 바보라고 하지만 가장 강한 힘은 바로 정직입니다. 정직은 집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집을 세울 때 약삭빠르게 요령껏 쌓아 올리는 것을 현명하고 효율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의 튼튼하고 안전한 집을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직하고 우직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쌓아 올린 인생이 오랜 가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머슨은 Honesty is the most obvious capital. 정직은 가장 확실한 자본이라고 말했습니다. 신30:9-10,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 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율법을 준수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사랑하면 나의 손으로 하는 산업의 모든 것과 자녀와 재산에 복을 주시겠다는 복된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버리기가 어렵습니까? 버리기가 힘이 드십니까? 이 땅에 살아가면서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있습니까? 주신 비전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까? 버리기를 잘하시는 순종을 통해서 여러분의 손으로 하시는 모든 산업과 재산과 자녀와 여러분 자신이 복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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