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이공(李公) 시직(時稷) 묘갈명.
[생졸년] 1572년(선조 5)~1637년(인조 15) / 향년 65세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에 일어난 강도(江都)의 난(難)에 분조(分朝)의 대신(大臣) 이하 중에 순절한 사람으로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겨우 네 사람인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장령 이공(李公)이다. 일이 이미 정해지고 난 뒤에 상께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그 문에 정표(旌表)하게 하였으며, 강도의 사람들이 또 그 자리에 사당(祠堂)을 세워서 전 대신 이하 몇 분과 아울러 제사를 지내고 충렬사(忠烈祠)라고 편액을 걸었다. 이에 국가에서 충신을 대우하고 사론(士論)이 절의를 숭상하고 강상(綱常)을 부지하는 것이 거의 갖추어지게 되었다.
당초에 변방의 급보가 이르렀을 때 상께서 강도로 행행하는 것으로 정하였다가 급보가 날이 갈수록 급박해져 창졸간에 계획을 변경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므로, 뭇 신하들 가운데 미처 따라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공은 먼 곳에 있다가 뒤늦게 밤을 새워 달려오던 중 성 안에서 나오는 자를 만나 상께서 강도로 옮겨 갈 것이라고 들었다. 이에 중간에서 맞이하려고 하여 노량(露梁)에 도착하였는데, 또다시 상께서 끝내 옮겨 가지 않았다고 듣고는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나아가다가 적을 만나 반대로 달아났다.
그러다가 마침 처자식이 길가를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공의 큰아들이 옷깃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잠시 남쪽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의병을 일으켜 뒷날에 공을 세우기를 도모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공은 돌아보지도 않고 재차 산성으로 가는 길을 찾았으나, 길이 막혀서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에 방황하면서 통곡하다가 드디어 수원(水原)을 향해 가 한두 명의 동지와 더불어 양호(兩湖) 지방에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을 일으켰다. 그런 다음 조익(趙翼) 등과 더불어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와 합세해 의병들을 끌어 모을 계책을 하였는데, 일이 성사되기도
전에 윤계가 적들에 의해 죽고 군사가 궤멸되었다. 이에 갈 바를 서로 의논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반드시 강도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곳이 내가 죽을 장소이다.” 하였다.
이윽고 강도로 들어갔으나, 일을 주관하고 있던 자들이 모두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공은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좋은 계책을 도모하지 않으니 비록 하늘에서 내려 준 요새지가 있다 한들 장차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전례에
따라서 곡식을 주기를 청하지 않았으므로 따라간 자가 날품을 팔아서 먹을 것을 공급하였다.
적이 강을 건너옴에 미쳐서는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과 이민구(李敏求)와 유수(留守) 장신(張紳)이 앞 다투어 배를 타고 도망쳤다. 나의 백형(伯兄)인 선원(仙源) 선생이 일이 이미 잘못된 것을 알고서 성문 위에 올라가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오랑캐들이 드디어 성 안으로 들어오자, 공은 태복시 주부(太僕寺主簿) 송시영(宋時榮)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옛사람의 책을 읽었는데,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구차스럽게 살아남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오랑캐들이 사방을 빙 둘러 포위하고는 순종하는 자들은 죽음을 면하게 해 주겠다고 하자, 사람들이 모두 달려 나갔다.
그러나 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오랑캐를 따르면서 살아남기를 구한다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글을 써서 두 노복에게 주면서 돌아가 큰아들에게 주라고 하였는데, 뒷일에 대해서 말한 것이 아주 상세하였다. 또 사(詞) 한 수를 지어 부쳤는데, 그 사에 이르기를,
종묘사직 휩쓸려서 망하게 됐고 / 宗社淪亡
만백성들 모두 죽어 어육 되었네 / 萬姓魚肉
의에 있어 구차하게 살 수 없어서 / 義不苟活
맘 달갑게 내 스스로 목숨 끊누나 / 甘心自決
나의 몸을 죽여 이에 인 이룬다면 / 殺身成仁
천지간에 부끄러운 마음 없으리 / 俯仰無怍
하였는데, 사기(辭氣)가 침착하기가 평소와 같았다.
송군(宋君)이 먼저 결행을 하여 죽자, 공은 시신을 끌어안고 큰 소리로 곡한 다음 스스로 임하여 염빈을 하였다. 그리고는 구덩이 두 개를 파서 한 곳을 비워 두게 하고 종에게 명하여 자신을 그곳에 묻게 하였다. 그런 다음 옷을 벗어 관소(館所)의 사람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염습하여 뒷날 나의 아들로 하여금 시신을 찾아 장사 치르게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평상시에 활시위를 옷소매 속에 넣어 두고 있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노복이 눈물을 흘리며 저지하자, 공이 뿌리치면서 말하기를, “오늘의 이 죽음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하였다. 관소에 있던 사람이 공의 의리에 감동해 염빈을 하는 데 소용되는 물품을 갖추기를 명대로 하였다. 바로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 정월 25일의 일로, 춘추는 66세였다.
오랑캐들이 물러간 뒤에 여러 아들들이 상구를 받들고 회덕현(懷德縣)으로 돌아와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다음 해인 무인년(1638) 10월 병진일에 문의현(文義縣) 형강(荊江)의 동쪽에 있는 간방(艮方)을 등진 산등성이에 묘 자리를 잡아 장사 지냈다.
공의 휘는 시직(時稷)이고, 자는 성유(聖兪)이며, 자호는 죽창(竹窓)이고, 연안인(延安人)이다. 당나라 고종(高宗)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던 이무(李茂)가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백제를 평정하러 왔다가 그대로 머물러 신라에서 벼슬하여 연안(延安)의 관적(貫籍)을 하사받았다. 그 뒤에 자손이 번성하여 대대로 고관이 이어졌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저헌(樗軒) 선생 휘 석형(石亨)이 과거 시험에서 잇달아 세 번이나 장원을 차지해 당시에 이름을 떨쳤으며, 관직이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이르렀다. 이분이 혼(渾)을 낳았는데, 장령(掌令)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수장(壽長)을 낳았는데,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기(巙)를 낳았는데, 양주 목사(楊州牧使)를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정현(廷顯)을 낳았는데,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군수를 지냈으며, 계부(季父)인 휘 의(嶬)에게 양자로 갔는데, 의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이상이 공의 가세(家世)이다.
아버지의 휘는 빈(賓)으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며, 천거되어 청암도 찰방(靑巖道察訪)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돌아와 있다가 집에서 졸하였다. 이분이 목사(牧使) 이응기(李應麒)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융경(隆慶) 임신년(壬申年, 1572, 선조 5) 8월 18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더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열 살 때 할아버지를 따라 강동(江東)의 임소(任所)에 가 있었다. 당시에 조호익(曺好益)이 그곳에 귀양 가 있었는데, 그가 사도(師道)가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종학(從學)하였다.
조호익이 한 번 보고는 대단히 기특하게 여겨 사람들에게 몹시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이 후생(後生)은 참으로 두려워할 만하다.” 하였다. 부지런히 학업에 힘쓰다가 뒤에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는데, 김 선생 역시 마음속으로 허여하였다.
무술년(戊戌年, 1598, 선조 31)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상을 잘 치른다는 소문이 났다. 병오년(丙午年, 1606, 선조 39)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계축년(癸丑年, 1613, 광해군 5)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는데, 세속에서 기휘하는 것으로 상례(喪禮)를 폐하지 않으니, 듣는 자들이 더욱 칭찬하였다.
광해 말기에 세상의 도가 날로 잘못되는 것을 보고는 과거 시험에 나아가지 않고 호서(湖西)의 옛집으로 돌아와 지냈는데, 몇 칸짜리 집을 지은 다음 주위에 고서를 쌓아 두고 송죽(松竹)을 심고 그 속에서 소요하면서 스스로 즐겼다. 당시 사람들과 더불어 교유하지 않아 오가는 이들은 친척과 친구들 몇 사람뿐이었다.
같은 마을 사람 가운데 권세에 아부하여 명예와 이익을 좇는 자가 있어 권간(權奸)을 위하여 유세(遊說)하면서 이익을 가지고 공을 꾀며 사생(死生)을 같이하기를 원하자, 공이 웃으며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사는 것은 즐거운 것이고 죽는 것은 싫은 것이다.” 하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1) 금상(今上) 초에 천거되어 사축서 별제(司畜署別提)에 제수되었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주(公州)로 어가를 호종하였다. 돌아와서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으로 전보되었다.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급제하였으며, 얼마 뒤에 호종한 공로로 6품직에 승진 서용되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
개차되어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을 지내고, 사간원 정언이 되어서는 여러 동료들과 협의하여 소인(小人)들로서 기미를 엿보고 갈등을 조장하는 자들에 대해 논계해 그들이 올린 상소를 불태우기를 청하였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사임해 체차되었다. 한참 뒤에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또다시 병조로 돌아갔다. 외방으로 나가 영남(嶺南)에서 시험을 감독하였는데, 공도(公道)로써 주관하여 부박한 습속을 진정시켰다.
정묘년(丁卯年, 1627, 인조 5)에 오랑캐의 경보가 있자 어가를 호종해 강도(江都)로 들어갔다. 정언(正言)에 제수되어 또다시 여러 동료들과 더불어 합문(閤門)에 나아가 화의(和議)를 극력 배척하였으나, 상께서 살펴 주지 않았다. 체차되고서 전적에 제수되었다. 어가가 돌아온 뒤에 병조 정랑으로 옮겨졌는데,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얼마 뒤에 여산 군수(礪山郡守)에 제수되어 폐단과 잘못된 정사를 제거하고 호강(豪强)한 자들을 억누르니, 온 경내가 모두 기뻐하였다. 다음 해에 관직에서 떠나오자 백성들이 그리워하면서 비석을 세웠다. 뒤에 공의 초상 소식을 듣고는 서로 더불어 물품을 싸 가지고 백 리도 넘는 먼 길을 와서 부의하였다.
다음 해에 직강(直講)에 제수되었다가 사예(司藝)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정언으로 되돌아왔다. 여러 차례 바뀌어 장령(掌令)과 필선(弼善)이 되었으며, 내자시(內資寺), 상의원(尙衣院), 장악원(掌樂院), 제용감(濟用監), 태복시(太僕寺), 태상시(太常寺) 등 여러 관사의 장(長)을 지냈다.
태상시는 예로부터 간사한 자들의 소굴이었는데, 공이 그들의 죄를 엄하게 조사하였다. 그러자 동료 관리들이 합심해서 무고하여 근무 성적을 평가할 적에 이를 반영시켰다. 이에 곧바로 관직을 버리고 나왔는데, 전조(銓曹)에서 공의 억울한 사정을 알고는 위에 아뢰어 원래대로 되돌렸다.
공은 평소에 명함 한번 들이미는 것도 스스로 아꼈던 탓에 일찍이 요로(要路)에 청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벼슬길이 항상 순탄치 않았다. 공은 키가 크고 얼굴이 희었으며, 수염이 아름다웠다. 흉중은 평탄하고 곧았으며, 상대에 대한 경계를 두지 않아 표리(表裏)가 순수하여 한결같았다. 집에 있으면서는 능히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모부인께서 병을 자주 앓아 봉양하기가 어려웠는데, 때때로 깜짝깜짝 놀랐으므로 곁에서 모시는 자들이 뜻을 잘 받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유독 공이 따스한 얼굴빛을 띠고 나아가면 편안해져 평소와 같이 되었다. 이에 항상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고는 받들어 모시기에 온 힘을 다하였다.
일찍이 적들을 피해 산골짜기로 들어가서는 손수 판여(板輿)를 들고 천여 리나 되는 험한 길을 오면서도 다른 사람이 대신 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행실에 이르러서는 옛사람도 행하기 어려운 바를 공은 모두 능히 행하였다. 모부인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어머니의 형제들을 섬기기를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처럼 하였다.
한 여자 종이 아주 부지런하게 일하였으므로 모부인이 항상 그 노고를 생각하였다. 뒤에 재산을 나누어 분가함에 이르러서는 그 여자 종이
다른 형제의 집으로 가게 되었는데, 자기의 여종과 바꾼 다음 죽을 때까지 은혜로이 보살펴 주었다. 여동생이 죽고 후사가 없었는데, 재산을 떼어 주어 뒷일을 잘 처리하게 해 주었다.
서제(庶弟) 가운데 빈궁하여 기댈 곳이 없는 자에게는 생업을 잃지 않도록 해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부모에 대한 효를 미루어 나간 것이라고 하였다. 고모가 아들이 없어 후사(後事)를 공에게 의탁하려고 하니, 굳게 사양한 다음 그 종족 가운데 후사가 되기에 마땅한 자를 구해 그로 하여금 후사를 주관하게 하고는 고모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었다.
전후로 관직에 임할 적에는 털끝만치도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았다. 평소에 산수를 아주 좋아하여 좋은 경치가 있다고 들으면 친구들을 초청해 어울려 가거나 혹 홀로 가서 마음껏 즐겼으며,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면 즐거워하면서 돌아올 줄을 몰랐다.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조금만 마셔도 번번이 취하였으며, 술에 취하면 문득 높은 소리로 낭랑하게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었는데, 음조가 맑고 가락이 높아서 듣는 자들이 몹시 좋아하였다.
공은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써 대하였으며 착하지 못한 사람을 만났을 경우에도 엄하게는 하였으나 미워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그리워하였다. 죽은 뒤에는 향리 사람들 역시 사당을 세워 송 태복(宋太僕)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
부인 숙인(淑人) 이씨(李氏)는 족계가 용인(龍仁)에서 나왔는데, 부덕(婦德)과 모의(母儀)가 모두 법식(法式)이 될 만했다. 공이 죽은 뒤에 예제를 넘어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무인년(戊寅年, 1638, 인조 16) 4월 5일에 죽었으니 향년은 61세였다.
공은 3남을 두었다. 장남 경(憬)은 감역(監役)으로, 학생 송전(宋銓)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으며, 다시 봉사(奉事) 송갑조(宋甲祚)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차남 엄(㤿)은 사인 성하정(成夏挺)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일찍 사마시에 급제하여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공보다 먼저 죽었으며, 후사가 없다.
삼남 후()는 군수 김근(金瑾)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다. 또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비들의 온갖 행실 열거해 보면 / 士列百行
충과 효가 그 가운데 가장 크다네 / 忠與孝臨
공께서는 이 두 가지 겸하였으니 / 公兼有之
만대토록 우러르며 바라볼 거네 / 萬代仰瞻
밝고 밝아 해와 별이 될 것이고 / 皎爲日星
매섭기는 가을 서리 같이 될 거네 / 烈爲秋霜
산등성이 골짜기가 될 때도 있고 / 陵有時谷
바다가 또 뽕밭이 될 때도 있으나 / 海有時桑
공의 이름 공의 절개 두 가지 모두 / 公名公節
이 천지와 더불어서 길고 길리라 / 蓋壤久長
[주-D001] 송 태복(宋太僕) :
태복시 주부 송시영(宋時榮)을 가리킨다. 송시영은 병자호란 때 강화(江華)에서 순절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7
---------------------------------------------------------------------------------------------------------------------------------------------------------
[原文]
司憲府掌令 李時稷 墓碣銘[金尙憲]
丙子江都之難, 自分朝大臣以下, 殉節最所明白表著者廑四人, 而其一掌令李公也。 事旣定, 上命有司旌其門, 江都之人又卽其地建祠, 幷祀前大臣以下數公者, 揭之曰忠烈。 於是國家之所以待忠臣, 士論之尙節義、扶綱常者, 庶幾備矣。 初, 邊遽至, 上定幸江都。 羽報日急, 倉猝變計, 入南漢城, 群臣多不及從。 公居迴遠, 竟夜追赴, 遇有自城中來者, 聞上移蹕江都。 要候中路, 到露梁, 又聞上不果移, 冒死更進, 遇賊反走。 適見妻子扶服道上, 公長子挽衣泣曰: “事至此, 暫歸南鄕, 起義旅圖後效, 未晩也。” 公弗顧, 再尋山城路, 路塞不得入。 彷徨痛哭, 遂向水原, 與一二同志檄兩湖, 以鼓義士。 仍會趙公翼等, 合南陽守尹棨, 謀聚義師, 事未集, 棨死賊, 軍潰。 義所往, 公曰: “必欲以江都爲歸者, 是吾死所也。” 旣至, 主事者俱不事事。 公歎曰: “人謀不臧, 雖有天塹, 將安恃也? 惟有一死耳。” 不隨例請廩, 從者行傭以給。 及賊渡江, 檢察使慶徵・敏求、留守紳爭船遁去, 吾家伯衮仙源先生知事去, 登譙門自焚。 賊遂入城, 公謂太僕主簿宋時榮曰: “吾輩讀古人書, 今日到此, 尙可苟生乎?” 賊環兵四圍, 聽順者免死, 人皆趨之。 公笑曰: “從賊求生, 獨不心愧乎?” 作書屬兩僕人歸付長子, 其言後事甚詳。 且寄一詞, 略曰: “宗社淪亡, 萬姓魚肉。 義不可苟活, 甘心自決。 殺身成仁, 俯仰無怍。” 辭氣從容若平生。 宋君先決, 公抱持大哭, 自臨爲殯。 鑿兩坎而虛其一, 命僕人“殯我於是”, 解衣授館人, “以此爲斂, 他日使吾兒得以收葬”。 先是, 常以弧弦寘袖中, 用以雉經, 僕人泣止之。 公揮去曰: “今日之死, 榮也。” 館人感公之義, 備物斂殯如命。 是丁丑正月二十五日也, 春秋六十有六。 賊退, 諸孤奉轊歸懷德權厝, 至明年戊寅十月丙辰, 卜葬文義縣荊江之東負艮之原。
公諱時稷, 字聖兪, 自號竹窓, 延安人。 唐高宗時, 中郞將茂從蘇定邦平百濟, 留仕新羅, 賜籍延安。 子孫蕃衍, 世襲圭組。 入本朝, 樗軒先生諱石亨連捷三魁, 名振一時, 官至延城府院君。 傳子渾, 掌令、贈吏曹判書: 傳子壽長, 大護軍、贈兵曹判書: 傳子巙, 楊州牧使、贈左贊成。 傳子廷顯, 通政、郡守, 出後季父諱嶬, 司憲府監察。 是公之世家也。 考諱賓, 中司馬, 薦爲靑巖道察訪, 棄官終于家。 娶牧使李公應麒之女, 隆慶壬申八月十八日生公。
自幼聰敏邁倫。
十歲, 從大父在江東任所, 時曺公好益謫居其地, 聞其有師道, 往從焉。 一見大奇, 亟稱於人, 曰: “此後生可畏也。” 勉以學業, 後從沙溪金先生遊, 先生亦心許之。 戊戌, 丁內憂, 以善喪聞。 丙午, 中司馬。 癸丑, 丁外憂, 不以俗忌廢禮, 聞者益稱之。 光海末, 見世道日非, 不赴公車, 歸臥湖西故里, 結數椽, 環以圖書、松竹, 逍遙自適。 不與時人交, 所還往戚故數三而已, 鄕有趨羶者爲權奸游說, 啖以利, 願與同死生, 公笑謝曰: “生可樂而死可厭也。” 其人慙沮而退。 後十年癸亥, 今上初, 薦授司畜別提。 李适叛, 扈從公州, 還轉宗廟直長。 登
文科別試, 尋以扈從勞敍陞六品, 授成均典籍。 改司憲府監察、兵曹佐郞、司諫院正言。 協諸僚論小人之投機傾軋者, 請焚其疏, 忤旨辭遞。 久之, 拜工曹佐郞, 又還兵曹。 出監嶺南試, 能以公道鎭浮習。 丁卯虜警, 扈駕江都。 拜正言, 又與諸僚叫閤, 力排和議, 不省, 遞授典籍。 駕還, 移兵曹正郞, 棄官歸鄕。 尋授礪山郡守, 爬剔弊垢, 抑黜豪强, 一境胥悅。 明年, 去官, 民思碑之。 後聞公喪, 相與負載, 會賻百舍之外。 明年, 拜直講, 陞司藝, 復還正言。 屢遷掌令、弼善, 歷內資、尙衣、掌樂、濟用、太僕、太常諸司長。 太常故奸藪, 公覈其罪, 同僚、吏合誣, 中考績。 卽棄官, 銓部知其枉, 白之還原。 平生自愛, 其一刺, 未嘗有要路跡, 故仕宦常在通塞間。 公爲人長身白晳, 美鬚髥。 胸中坦直, 去町削畦, 表裏純一, 在家能得父母心。 母夫人善病難養, 有時失驚, 傍側侍者莫能順適。 獨公和色以進, 則怡然如平常, 以是不離左右, 務盡承奉。 常避寇入峽, 手扶板輿, 歷險千餘里, 不許人代。 至它行, 在古人以爲難者, 公皆有之矣。 母夫人歿, 事母之兄弟如母在。 有一婢服勤甚至, 母夫人常念其勞。 後當析箸在兄弟家, 以己婢易之, 惠養終其生。 姊亡無嗣, 割産處後事業, 庶弟之貧困無歸者, 使不失所, 人謂孝推。 姑氏無子, 欲以后事爲託。 固辭, 求其族子之宜爲后者, 俾主之, 而盡還其貲財。 前後居官, 不以一絲自浼。 雅喜山水, 聞有佳境, 命儔携侶, 或獨往不倦, 遇會心處, 樂而忘返。 不好飮酒, 飮小輒醉。 醉輒高歌朗詠, 音調淸越, 聽者可悅。 待人無貴賤, 一以誠信, 其遇不善, 嚴而不惡, 以是所至, 人皆懷之。 歿後, 鄕人亦立廟, 與宋太僕俱俎豆焉。
配淑人李氏, 系出龍仁, 婦德母儀, 皆可法式。 公歿, 毁戚踰制, 戊寅四月初五日歿, 得年六十一。 生三丈夫子: 曰憬, 監役, 娶學生宋銓女, 無子。 再娶奉事宋甲祚女。 曰㤿, 娶士人成夏挺女。 早中司馬, 有雋才, 不幸先公歿, 無后。 曰
, 娶郡守金瑾女, 生一男。 側室一男一女, 皆幼。 銘曰:
士列百行, 忠與孝臨。 公兼有之, 萬代仰瞻。 皎爲日星, 烈爲秋霜。 陵有時谷, 海有時桑。 公名公節, 蓋壤久長。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