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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 동창 친구가 고위 공직을 은퇴하고 나름의 소신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에 뜻이 있어 "대한 사랑회 " 회원이 되었고 이 활동을 하던 일환으로 전주에서 보천교(普天敎)에 대한 호기심 과 사실이 왜곡된 보천교와 대한민국 독립 운동에 관하여 학자인 남창희 인하대 정외과 교수를 초빙해 강좌를 하는곳에 나를 데려갔다 남 교수의 강의 내용은 우리나라 독립에 추앙 받아야할 보천교의 업적은 묻힌채 사이비 종교로 낙인 찍고, 그도 모자라 친일 단채로 매도 하여 보천교를 말살 하였는데도 전라북도 도민은 물론 많은 교도들 역시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당시의 사료를 근거로 조선 총독부 에서 일본 본국에 보고 하는 기밀 문서
사본 내용을 제시 하였다 거기 있었던 내용은 보천교 가 상해 임시 정부에 비자금을 대고 있었으며 이는 보천교가 항일 저항 세력 으로서 교주 차경석의 부친 차치구는 동학 접주 로서 전봉준 총수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보고서 였다 더욱이 이어진 조선 해방후 김구 선생이 귀국하여 첫 행보한 곳은 보천교가 있는 정읍을 찿았고 이때 일성은 " 상해 임시 정부는 보천교에 큰 빚을 졌다, 보천교는 교세가 대단 했고 규모 또한 대단 했다 " 라는 말을 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 하건데 빚을 진건 지원 받은 자금 이었고 규모와 교세가 크다는건 큰 금액을 뜻하는 것이다 해방된 조국에 들어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김구 선생은 보천교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전하려 한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의하여 또는 친일 세력에 의하여 보천교가 독립운동의 대척점에 있다는 모함으로 결국 쇠망의 길을 걷고 사라져 가는데도 전라도 사람들은 물론 양식 있는 대한민국 국민은 왜 ? 침묵하고 있는가 ! ? 하는 물음에 참석 했던 청중은 침묵해야 했다 자기와는 직접적인 일이 아니여서 사실을 모르기도 했고 또한 당시의 먹고 사는 일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 이기도 했고 당시의 이승만 정부의 친일파가 자기들의 치부를 감추려 했기 때문에 자연히 수면 아래로 사실이 가라 앉졌기 때문 이다 하지만 나는 보천교가 소재한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며 다른 지방과는 다른 특별한 생활 환경(분지 안의 일정 구역 인데도 많은 인구와 절대 부족한 논전답), 문화(당시 흰 두루마기 에 상투위 갓을을 쓴 복장). 동네 지명( 행정구역상 있는 이름을 쓰지 않고 대흥리 라고 통칭), 마을의 큰 규모(보통 100가구 전후 인데 300 가구가 넘었고 인구수는 2000여명) , 어른들 간 호칭과 택호 (보천교 에서 부여 받은 작위를 부르고 택호는 전국 유명 도시가 존재하고 있었음) 등을 이상스레 생각 했었지만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알수 있었겠는가 ! 성장한 이후 생존을 위해 대도시로 가 생활했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내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곳이 보천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가방 끈이 짧아 타인을 이해 시킬수 있는 글을 쓰는 능력도, 말을 할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숫기 조차 없는 데다가 어릴때 보고 듣고 감 으로 알고 있는 것만으로 진실을 세울수는 없었다 하지만 남창희 교수님이 던진 질문에 핵심적인 정답은 아니지만 나름 대로의 사실과 내가 증언 할수 있는 소견은 아래와 같다
나는 1946년 보천교 (普天敎) 교당(전북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 이 소재한 마을에서 태어나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누구나 겪어야 했던 생활사(生活史) 로 알수 있듯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살았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 하더라도 우리 마을은 인구수에 비하여 논밭이 별로 없는 분지 형태의 마을로, 국도 1호 신작로(도로)가 관통하고었어, 앞 동네 는 입암산이, 뒷동내는 얕으막한 산들이 중첩해 있었고 우측으로는 전남,북을 가르는 장성 갈재가 있는 방장산이 있었으며 좌측 으로는 정읍으로 연결된 국사봉에 둘러 쌓여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식거리(농산물) 부족 으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비교적 일찍 도입된 가내 수공업(누얘 고치 에 서 실을 뽑아 황라, 명주 같은 비단 옷감을 생산)이 신기 했고 어느 마을에도 없던 전기(電氣)가 들어와 편리한 문화 혜택이 주어진건 우리 바로 옆 집이 조선 총독부 소속 강씨 성을 가진 순사부장이 살고 있었던 이유라 했다 그래서 얼마 안되는 지역을 구분 하여 강구장 (강부장을 편하게 한 말) 마을로 불렀다 시골 마을에 순사부장이 사는것도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시골 답지 않게 아래 동네는 신작로를 물고 입암산을 향하여 길게 뻗은 길 이름을 종로 (당시 서울 에 있는 종로를 연상 하게하려고 붙인 이름) 라 불렀고 양 옆에 주택들은 당시 흔하지 않던 양철 지붕 또는 기와 지붕을 한 집들이 늘어저 있었다 그 끝 자락에 보천교 본당 건물이 성곽속에 웅장한 기와 전각을 이루어 위용을 보이고 주위에는 상당 길이와 3 m 높이의 화강암 성벽이 위용을 더했다 마을 어르신들 복장도 특이 했다 우리 전통 흰색 한복 바지 저고리 위에 두루마기 외투를 입고 머리에 상투를 하고 망건과 갓을 썼다 각자의 신분도 인정 하고 통용되어 보천교 직위로 호칭 하였다 예를 든다면 칠선하사, 하포정, 남방, 자주 목방 남주 등 으로 불렀다 뿐만 아니라 각 집의 호칭도 가지 각색으로 불렀다 예를 들면 함남집, 함북집, 평남집, 평북집, 강원집, 충청집, 경남집, 경북집, 상주집, 쟁기집(장기곶) 이북집 등 이었다 사람들을 호칭 하는 직위와 가구를 구분 하는 택호(宅呼) 가 보여주듯 보천교 교도 중심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전체를 압축해 놓은 마을 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전국 각지의 지식인(특히 한학,유학자)이 살던 고향을 등지고 가산을 정리해 보천교에 모여 만든 마을 이었다 특히 유학자가 많았다고 짐작 할수 있는 이유로 천자문을 한석봉 김정희 글씨 못지 않게 썼던 노인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그러던 마을이 무슨 이유로 굶주린 생활을 했으며 보천교 교당 건물이 헐리고 마을은 활력을잃고 떠나는 사람도 많아져 전형적인 농촌 마을도, 어촌 마을도, 소도시도 아닌 마을로 전락해 버렸단 말인가 ? 전국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기탁한 재산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
내가 아는 지식 으로는 해방전 일제 식민지 시절에 많은 구국 인사들이 있었고 이에 반하여 일본 세력에 빌 붙어 먹고 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나라를 빼앗긴 양심 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해외에 터전을 마련하여 독립운동을 한건 같지만 그 방법과 효과는 서로 달랐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세계 열강의 나라 대표에게 대한민국의 독립 당위성을 알리는 문신 역을 했다면 김구는 중국 에서 일본 정부의 요원을 공걱 하거나 독립군 지원을 하는 무신 역활을 한 것처럼 - - - 따라서 독립운동 유공자의 효과를 각기 계량 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전봉준 녹두장군, 도산 안창호, 안중근 열사 , 홍범도 장군 김죄진 장군등 을 어찌 서로 비교 할수 있겠는가 ? ! 이들 모두는 대한민국 독립에 절대적인 공이 있을뿐 이다 각자가 추진하는 방법이 달라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는 불편한 일이 있기도 했고 서로의 이념도 가치관도 달랐다 따라서 처세도 달라 해방된 이후 이승만은 미국 군정청 의 지원을 받아 지도자 이미지로 국민 대중에게 친숙하고 정권을 잡기에 적합한 환경에 있었지만 뒤 늦게 귀국한 김구는 독립운동의 주역 이었음 에도 여의도 비행장 에서 부터 언행이 활발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이는 서로의 인과 관계 보다는 볼성 사나운 추종자들에 의해서 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쨋던 이승만 측은 김구측을 정적으로 여기는 중에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살해 되었다 살해범은 현역 육군 장교 출신 이었는 데도 특별히 구속 하지 않았다는 점은 정치 권력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 이리라 미군정청이 독립 대한민국에 자주권을 주자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가 아니면 정부를 이끌어 갈수 없는 상태 였다 다른 사람은 당장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쩔수 없는 선택으로 친일파를 수족으로 정부를 운용 하다 보니 인적 청산 되어야할 친일파가 주류를 이루었고 그들은 어떻게든 반일 감정을 갖고 있거나 독립운동가 들을 사지(死地)로 내몰아야 했던 상황 에서 독립운동에 자금을 후원한 보천교, 교도들은 항상 없애고 싶은 대상 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 조류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승만 장기 독재가 존재 할수 있었다 결국 4,19 혁명은 윤보선 내각이 과도정부를 담당 했으나 무능으로 국민들의 불만 속에 쫏겨나다 시피 했고 경제부흥을 내세운 박정희 5, 16 군사혁명으로 제 3 공화국 군부 독재가 들어 섰을때 국민들의 관심은 민주주의 발전 보다는 먹고 사는 빵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말을 선호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최고 권력자 에게 밉보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살 얼음판에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독립운동 유공자와 친일파를 가리려 한다는건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 특히 박정희는 만주 사관학교를 정세 판단에 의해 자진 탈영한 이후 일본 사관학교에 입대한 경력이 있는데 - - -
박정희 대통령 서거후 전두환 역시 10, 26 사태를 계기로 명분 없는 졸지의 대통령에 취임 하다 국민들 반발이 전국 각지 에서 들불처럼 번지자 광주 민주화 항쟁을 북한 괴뢰 폭도들의 난 으로 매도 하며 애국 시민들을 살육하는 우를 범 하고도 모자라 국민 대다수가 외치는 대통령 직선제 요구에도 귀를 막고 후임자 노태우 에게 힘을 실어 주어 체육관 대통령을 하려 했지만 전국 각지 특히 광주 힝쟁 목소리와 김영삼 야당 당수가 말했듯 "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라는 말대로 서울의 봄은 보통 사람을 내세운 노태우(물태우) 가 직선제를 수용하여 가까스로 대통령이 되어 3당 합당을 하고 국정을 운영 할수 있었다 다음 김영삼 대통령 이 문민정부를 열면서 국민의 자유(특히 언론자유)가 숨통을 열고 기지게를 키기 시작 했고 뒤 이은 김대중 참여정부에서 국민의 자유가 신장 하였다고 말 할수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부는 언론의 자유가 없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생각해 본다면 보천교의 자리매김은 제대로 이루어 질수 없었다 분명 다시 조명해 우리 역사에 오류를 줄일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할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보천교를 알릴수 있는 증인들 증거물이 아직은 남아 있기 때문 이고 많이 배운 사람과 양심 있는 사람들이 목적 의식만 갖는다면 희망은 이루어 질수 있다 참고로 전문 학자가 보천교에 관해 쓴 글을 소개 한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차경석은 동학혁명 당시 동학 접주(接主) 중의 한 명으로 관군(官軍)에 의해 처형당한 차지구(車致久)의 장남으로, 일찍부터 동학운동에 가담하여 전라북도 순회관(巡廻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증산교를 창교한 강일순(姜一淳: 호는 甑山)을 만난 뒤로는 자신의 이종사촌 누이인 고판례(高判禮)를 강일순의 부인으로 추천할 정도로 착실한 제자가 되었다.
강일순의 사망에 따라 흩어졌던 그의 제자들이 1911년 고판례의 종교 체험을 계기로 재집결하여 선도교(仙道敎: 뒤에 太乙敎라 함)라는 신종교를 세울 때, 차경석은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신도들이 크게 늘어나게 되자, 차경석은 교권을 장악하고 신도들과 고판례와의 접촉을 차단하였다. 이에 고판례는 그를 떠나 별개의 종단을 설립하였다.
차경석은 천지개벽의 문로(門路)가 자기에 의하여 열린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동방연맹(東邦聯盟)의 맹주가 될 것이고 조선은 세계통일의 종주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1920년에는 전국의 신도를 60방주(方主)의 조직으로 묶고, 55만 7,700명에 달하는 간부를 임명하기도 하였다.
1921년 차경석은 일본 경찰의 체포령과 비상망 속에서도 경상남도 덕유산 기슭의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의 천제(天祭)를 올리고 국호를 <시국 時國>, 교명을 <보화 普化:뒤에 보천교라 함.>로 선포하였다.
이 때부터 교단 안팎에서는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할 것이라는 소문이 크게 떠돌아 갑자등극설(甲子登極說)·기사등극설(己巳登極說)로 구체화되고, 민간에서는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라 부르게 되었다. 1922년에는 ≪보광 普光≫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1924년에는 ≪시대일보 時代日報≫를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 대규모 교당을 신축하였는데, 건축자재를 백두산의 원시림에서 가져다 쓰면서 6백만 신도를 호칭할 정도로 교세가 대단하였다.
보천교의 세력이 커지자 일제는 교단에 대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 회유하기 시작하였다.
차경석은 종교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내각총리대신에게 친일사절을 파견하는 한편, <시국대동단 時局大同團>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국토를 순회하면서 보천교의 소개와 함께 대동아단결(大東亞團結)을 강조하는 친일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이에 반대하는 보천교혁신운동이 일어났고, 고위간부들이 신도를 이끌고 별도의 교단을 세우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어 교세는 크게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분파는 신현철(申鉉喆)의 태을교를 비롯하여 동화교(東華敎)·삼성교(三聖敎)·수산교(水山敎)·보화교·선도교·무을교(戊乙敎)·임무교(任務敎)·서상근파(徐相根派)·금산사미륵불교포정소(金山寺彌勒佛敎布政所)·인천교(人天敎)·원군교(元君敎) 등이었다. 1936년차경석이 죽고 이어 조선총독부가 <유사종교해산령>을 선포함에 따라 교단은 해체되고 말았다.
8·15광복 후 다시 조직화되었지만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어 있다. 신파는 차경석의 아들 용남(龍南)이 주축이 되어 차경석의 교의를 신봉하고 교조로 받드는 반면, 구파는 강일순을 교조로 하고 본부에서 떨어져 나와 같은 마을에 별파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신파와 구파를 합하여 1만여 명의 신도가 있다.
신앙대상은 초기에는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구천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칠성성군하감지위(七星聖君下鑑之位)를 써 붙이고 경천(敬天)이 위주였으나 지금은 삼광영(三光影)을 받든다.
삼광영이란 일(日)·월(月)·성(星)을 말하며 이는 모든 조직의 기본이 된다. 기본교리는 인의(仁義)이다. 즉, 인으로 생하고 의로 이룬다는 것이다. 끝
첫댓글 정읍의보천교역사는내고장의역사에관심을가져야만훌륭한지역의역사로탄생될수있을거라생각하며금번보구자네와의쎄미나동행이나의정읍역사바로새우기에큰전환점이된겄같아뿌듣하네
보천교,전라도천년사 ,차경석과증산도,동학과관련성등쉽게머리에정리가잘않되네좀시간을내서보천교와저라도천년사중심으로글을써서기고하고내용을보내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