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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5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김소리 목사
마태복음 20:1-16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우리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적을 읽고, 그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그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묵상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적 중에는 이해하기가 쉬운 것도 있지만,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설사 이해가 되더라도, 납득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내용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래 보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포도원 주인과 품꾼에 빗대어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부분은 9절 이하입니다. 그 내용은 오후 5시부터 일한 일꾼들에게 아침 6시부터 일한 일꾼들과 합의한 임금을 동일하게 지급한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이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공정한 것 같은가요? 5시에 와서 1시간만 일한 사람과 오전 6시부터 12시간동안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는 게 공평한 것 같은가요?
만약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자신들보다 적게 일한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은 임금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애초에 합의한 계약대로 임금을 받았으니, 문제없다면서 만족해할까요? 아니면 계약대로 지급받긴 했으나, 공정하지 못하다며 이의를 제기할까요? 저는 후자의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적게 일한 사람들과 같은 임금을 준 것이 부당하고 불공정하다며 임금을 더 줘야 된다고 이의를 제기할 것 같습니다. 시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고, 계약자체가 불공정한 계약이었다며 고용노동부나 법원에 제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보다 적게 일하거나 성과가 적은 사람들이, 제대로 일하고 성과도 제법 낸 나랑 동일한 금액을 받는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저들은 저들이고, 나는 계약대로 제대로 받았으니 괜찮다며 만족할 것 같습니까? 아니면 아무리 계약대로 받은 것이라지만 불공정하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제가 회사원이라면, 머리로는 합의한 대로 받았으니 문제없다며 넘어가려고 노력할 것 같습니다만, 가슴으로는 ‘아무리 합의했다 그래도 내가 그 사람들보다 더 오래, 더 제대로 일했는데 더 받아야 되는 것 아냐? 좀 너무하네.’ 라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그리곤 어쩌면, 내가 왜 저들보다 더 받아야 하는지 조목조목 언급하며 계약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것도 같습니다. 설혹 겉으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속으로는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 불만족스럽게 여길 것 같습니다.
본문에 일꾼들 역시 부당하다고 여겼습니다. 9절 이하를 보면, 아침 6시에 맨 처음에 와서 일한 사람들은 오후 5시에 와서 일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기로 한 한 데나리온을 받자 내심 저 사람들보다는 더 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주인에게 불평하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막판에 와서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과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를 똑같이 대우했다고 말이지요.
11절에 ‘투덜거리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γογγύζω(공귀조)입니다. 뜻으로는 ‘원망하다’, ‘불평하다’, ‘수군거리다’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새번역 성경과 개신교와 가톨릭이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은 ‘투덜거리다’라고 번역했고, 개역개정 성경은 ‘원망하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한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고전 10:10 (개역개정)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새번역) “그들 가운데 얼마가 불평한 것과 같이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멸시키는 이에게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꾼들이 ‘투덜거렸다’보다는 ‘원망했다’, ‘불평했다’는 것이 더 적절해보입니다. 투덜거리는 것은 그 정도가 소극적이고 가벼운 느낌, 상대에게 말한다기보다는 혼자 중얼거린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일꾼들의 부당하다는 볼멘소리에 주인, 고용주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합의한 대로 임금을 지급했으니 전혀 부당하지 않고, 적게 일한 사람들에게 얼마를 줄지는 자신의 뜻이고 마음이지, 당신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당신들과 같은 임금을 준 게 잘못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과 처음부터 일한 일꾼들의 입장차가 나타납니다. 주인은 나는 당신들과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지급했으니 그들에게 얼마를 주건 잘못한 게 없다는 것이고, 일꾼들은 그들과 우리를 똑같이 대우한 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일한 일꾼들의 품삯은 얼마여야 적당할까요? 그들이 얼마를 받는 게 공정한 품삯일까요?
4절에 ‘적당한 품삯’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δίκαιος(디카이오스)입니다. ‘올바른’, ‘의로운’, ‘정의로운’, ‘공정한’, ‘공평한’ 등의 뜻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올바른 것을 주겠다.’, ‘공정한 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새번역 성경은 ‘적당한 품삯’으로 번역했고, 공동번역 성경은 ‘일한 만큼’으로 번역했으며, 개역개정은 ‘상당하게’로 번역했습니다.
당시 통상적인 노동자의 하루 일당은 한 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비유의 이야기에서 포도원 주인과 아침 6시에 나와 있는 노동자가 합의한 금액이지요. 그렇다면 그 이후에 일한 노동자들은 얼마를 받아야 할까요? 얼마를 받는 것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일까요?
비유는 보통 일상에서 찾기 쉬운 것, 흔히 일어나는 것에 빗대어 표현합니다. 당시 하루의 노동 시간은 해 뜰 무렵부터 해 질 무렵까지 약 12시간 정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약 12시간의 노동에 대한 대가가 한 데나리온이면, 이보다 적게 일한 사람은 한 데나리온보다 적게 받았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한 데나리온을 12시간으로 나누어 시급으로 환산한 후, 시간당 얼마씩 계산하여 지급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는 자든 받는 자든, 그것이 공정한 대가, 공정한 보상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즉 당시 사회는 그것이 정당하고 공정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며, 크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달랐습니다. 막판에 와서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도에게도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그것이 정당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운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말하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적 통념과는 다르고, 그래서 일꾼들은 불평합니다. 우리의 기대와도 다르고 말이지요.
포도원 주인이 늦게 일한 노동자에게도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아마 그 노동자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4-5인 가족의 최저생계비 정도 됐을 것입니다. 그마저도 없다면 생계를 유지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입니다. 특히나 오후 5시까지 고용되지 못한 노동자들은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가 게을러서 한나절이 지나고 나서야 장터에 나온 사람이든, 아니면 아침 일찍 나왔지만 능력이 없어 고용되지 못한 사람이든 말이지요. 포도원 주인은 이런 사람까지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거둬들이고, 하루 일당을 지급합니다. 예수님께선 하늘나라가 바로 이와 같다고 빗대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정한 하나님나라, 공의로운 하나님나라라는 것입니다. 어떤가요? 납득이 가시나요? 받아들일 수 있겠나요?
포도원 주인의 이 행동을 불만스럽게 여긴 일꾼들을 15절에선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개역개정) “내가 선하다고 네가 악하게 보느냐?” 새번역은 “내가 후한 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라고 번역합니다. 원문은 ἀγαθός(아가도스)와 πονηρός(포네로스)가 쓰였습니다. ‘아가도스’는 ‘선한’, ‘좋은’이라는 뜻이고, ‘포네로스’는 ‘악한’, ‘나쁜’이라는 뜻입니다. 즉, 포도원 주인은 막판에 온 일꾼들에게 동일한 삯을 줬다고 처음의 일꾼들이 자기를 악하게, 나쁘게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악한 게 아니라, 선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는데, 그 보상으로 무엇을 받겠냐는 베드로의 질문 다음에 이어집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것을 통해 마태 공동체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요? 이 비유는 마태 공동체에겐 어떤 의미였을까요?
이 비유의 앞뒤엔 19:30과 20:16절이 감싸고 있고, 그것은 비슷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들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마태 공동체는 유대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시작됐다가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합류한 공동체로 여깁니다. 마태복음은 첫 시작부터 유대적인 색채가 강한데, 나중엔 이방선교에 호의적인 부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마태 공동체의 회중은, 이 비유의 청중이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함께한 제자들을 말이지요. 그리곤 온종일 수고한 일꾼으로 제자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나중에 온 일꾼으로는 세리와 창기 같은 사람을 떠올렸을 테고요. 그런데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께서는 이 두 부류에게 동일한 보상, 동일한 은혜를 주셨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불공평하다며 불평하지 말라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민족적으로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긴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제 막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한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은혜를 주신다는 것으로 이해됐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공동체에서 급을 나누어 다르게 대우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됐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나라의 방식이기 때문에 불공평하다며 실족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먼저 믿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든 아니면 공동체에 공이 많은 신자든 말이지요.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로와 수고, 능력에 따라 차등지급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어떤 기관이나 지자체의 장이 되거나 대통령이 되면, 그 측근들 혹은 그들과 관계된 사람들을 요직에 앉히거나 한자리 챙겨주곤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자기가 그 자리에 앉는 데에 수고한 게 많고 기여한 게 많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공로의 보상으로 챙겨주는 것이지요. 만약 그 사람이 소신이 있어, 그것을 하지 않으면 당장 잡음이 들려옵니다. ‘내가 한 게 얼만데 이렇게 푸대접하네, 서운하네, 몰인정하네.’, 어쩌네 하면서 말이지요. 또 소위 말하는 개국공신들끼리 누구 공이 더 큰지 다투는 것도 자주 봅니다. 그 공로에 따라 더 높은 자리, 더 주요요직에 앉는 등의 보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며, 달라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폐해를 주고 있는지 우리는 몸소 겪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나중에 온 자도 처음에 온 자와 동등하게 대우하십니다. 그가 언제 왔든, 그동안 무엇을 했든, 동일하게 하나님나라에 들어와 영원한 생명 가운데 살 수 있도록 대우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공정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선 나중에 온 자도 처음에 온 자와 동일하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대우하십니다. 이것이 공정하신 하나님의 뜻이자 통치방식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공정한 하나님나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선 꼴찌들과 첫째를 동등하게 대우하심으로써 꼴찌들이 첫째가 되게 하시고, 첫째들이 꼴찌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관리인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맨 나중 온 자부터 시작하여 맨 처음 온 자에게까지 삯을 주라 하니, 오후 5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옳지 않으냐. 내가 선하다고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