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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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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고전번역원산문.극단적생각을견제하는,영조의용병술.
이장희 추천 0 조회 11 14.06.17 15: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기,이조선말고,다른조선이,도있단말이냐???

      영조가,김재로에게당부한말.(승정원일기중에서)

조선 시대 가장 오랜 재위기간을 가진 영조는 극심한 당쟁을 겪었다.

임금이 되는 과정부터가 당쟁의 연속이었으니, 당쟁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임금이었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그 스스로도 자신의 가장 큰 치적으로 탕평(蕩平)을 들었겠는가.

복잡한 저간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던 본래 시비(是非)를 다투던 당쟁이 즉위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충역(忠逆)으로 변질되었으며,

 영조 4년에 일어난 반란[무신란]은 충역이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실재하는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물론 반역은 반역으로 처단하면 되었지만, 그것의 출발이 당쟁이라는 점에서 충과 역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맞물면서 끊임없는 정쟁으로 치달았다. 영조의 탕평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김재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상이 말씀하셨다.
  “내가 마땅히 하교를 내리겠다.

경의 마음이 여전히 막힌 곳이 있어서

그러는데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군군신신(君君臣臣)의 의리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당시에 다른 일은 없었고

 다만 교서 글귀의 문제*가 있었을 뿐이니, 의리상 피혐하지 말아야 한다.

경이 대사헌으로 있었을 때 시민당(時敏堂)에서 진달했던 말을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말하기를, ‘만약 명명백백하고 정정당당하다면 어찌 자신에게 관계되었다고 하여 혐의롭게 여기겠는가.

’라고 하지 않았던가.

 모든 당파에게 난역의 종자가 있다는 교서를 내렸는데, 이것이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겠는가.

 백세의 공론이 있을 뿐이다.

경 등이 충성입네 반역입네 하면서 비록 나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면 신축년**에 또한 반역이 없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 조선 말고 또 다른 조선이 있다는 것인가? 우리 선왕의 골육이 몇이나 되는가?

 다만 황형[경종]과 내가 있을 뿐이다.

군군신신의 도리가 황형에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미 나를 신하로서 섬겼으니, 지나간 일일랑은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 교서 글귀의 문제란 김일경의 찬술한 반교문을 말한다.

 거기에는 영조가 경종을 모해한 듯이 빗대어 쓴 글귀가 들어 있었다.
** 신축년의 일이란 노론이 경종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목호룡이 고변한 사건을 말한다.

 이 일로 노론의 많은 인물이 죽임을 당했다.

 영조가 신축년을 언급한 것은 완전한 무고는 아니라는 뜻이며, 비록 자신에게 충절을 바쳐 죽었지만,

 노론에게도 일정한 문제가 있다고 한 것이다.


語未畢。上曰, 予當下敎矣。卿心尙有所阻而然, 君君臣臣之義, 非不知也。其時無他事, 而只有敎文事, 則勿避嫌之義。卿之都憲時, 時敏堂所達, 尙今記有之矣。若明明正正, 豈以關係於予, 而爲嫌也? 諸黨俱有亂逆之敎, 予非容易言之也, 百世公議在焉耳。卿等, 曰忠曰逆, 雖曰爲予, 而辛丑年, 又豈不有逆乎? 朝鮮外, 又有朝鮮乎? 我聖考骨肉, 有幾? 只是皇兄與寡躬, 君君臣臣之道, 於皇兄何哉? 旣臣事於予, 則旣往之事, 竝皆棄之可也。
 
- 『승정원일기 영조 10년 7월 13일 引見記事』

    ▶ 창덕궁 희정당 (昌德宮 熙政堂), 영조가 김재로 등 재신들을 인견하던 곳이다.

  영조 10년 7월 13일 희정당에서 당시 이조판서인 김재로가 영조의 인사처리 원칙에 반발하며, 그것을 계기로 상대 당을 역(逆)이라고 비판하자 영조가 이를 설득하며 한 말이다.

 이른바 쌍거호대(雙擧互對)라는 탕평 방식은 이편 한 명을 쓰면 저편 한 명을 쓰는 매우 고식적 방식이었다. 당연히 신료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어있다.

왜냐면 어느 쪽도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조라고 모를 리가 없고, 그래서 저렇게 다독거리고 있지만, 조정의 신료들이 시(是)와 비(非)를 다투다가 충(忠)과 역(逆)으로 갈려진 상태에서는 어느 한 쪽의 완전한 패퇴(敗退)가 아니고서는 도대체가 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말이 탕평이지 화합의 상태를 의미하는 탕탕평평(蕩蕩平平)과 근본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영조는 말한다.

 “너희는 충신입네 역적입네 하지만 도대체 역적이 누구이고 충신이 누구더란 말이냐?

 나나 황형[경종]이나 모두 선왕[숙종]의 혈육이며,

 나는 황형을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나에게 충신이 황형에게 역신이 되며,

 나에게 역신이 황형에게 충신이 된다는 것이 도대체가 말이 된다는 것이냐?

” 그러면서 영조는 크게 탄식한다.

 “그렇다면 황형의 조선과 나의 조선이 다르다는 것이냐?

어떻게 갈려도 이렇게 갈릴 수가 있는 것이냐.

 내가 말하지 안 터냐.

 이쪽이고 저쪽이고 모두 역적의 종자가 있어서 그것이 문제라고.

 너도 알다시피 이런 말을 하기가 쉽더냐.

 이제 이미 나를 임금으로 섬겼으니 지난 일일랑은 모두 떨쳐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영조의 달래는 말이 참으로 간곡하기 하지만, 씁쓸한 맛은 지워 버릴 수가 없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저처럼 고식적인 탕평이 실효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하게 어느 당이건 극단파를 배제했기 때문이었다.

 정쟁 속에서 자라나는 극단파는 정쟁이 심할수록 선명 투쟁을 하고,

그럴수록 더욱 극단화된다.

 이런 경우 대개는 극단파가 득세하는데, 왜냐면 극단파의 논리는 분명하고 통쾌하여 쉽게 여론의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단파에겐 타협이란 없으며, 권력의 독점을 목표로 끝없이 정쟁한다.

영조가 말한 이 조선과 저 조선이란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영조는 어떻게 극단파를 배제할 수 있었을까?

 온건파를 등용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 줌으로써 자당 내의 온건파가 극단파를 비판하고 구축(驅逐)하도록 한 것이다.

말하자면 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당 스스로가 극단에서 벗어나게 해줌으로써 타협이 숨 쉴 수 있게 한 것이다.

영조라고 하여 자신에게 충절하는 것이 싫었겠는가만 .충성으론 충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정문 src 글쓴이 : 서정문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저역서
      - 조선시대 당쟁사를 공부했고, 논문으로는 「고전번역의 역사적 맥락에서 본 비문 문제」 2009, 「고전번역사업의 새로운 목표설정을 위한 시론」 2010 등이 있으며, 번역으로는 『명재유고』공역, 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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