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김일태 군수가 나섰다. 월출산이 가진 기를 길로써 표현하고자 했다. 영암읍 개신리 천황사 입구에서부터 미암면 미암리 흑석산 산림욕장 일원까지 40㎞에 이르는 거리를 다섯 구간으로 나눠 ‘월출산 100리길 기(氣)체험 산책로’로 조성하기로 하고, 그 이름을 ‘기찬묏길’로 붙였다.
1구간은 천황사 주차장에서 기찬랜드까지 6.7㎞를 영암군의 ‘기(氣)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거리로 정했다. 2구간은 기찬랜드에서 월암마을까지 7.9㎞로 가야금 김창조 선생과 월출산 12대 기암, 한옥과 장승, 영암도기를 체험하는 ‘문화체험’의 거리로 명명했다. 3구간은 월암마을에서 학산 용산마을까지 7.8㎞로 왕인 박사와 도선 국사의 삶을 살필 수 있는 ‘역사 체험’의 거리로 조성키로 했다. 4구간은 용산마을에서 학산 학계마을까지 8.9㎞로 월출산과 영암의 자연 및 생태를 즐기는 ‘생태 체험’의 거리로 만들기로 했다. 5구간은 학계마을에서 미암 두억마을까지 산림욕과 영암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오감체험’의 거리로 만들어, 모든 구간을 올해부터 2013년까지 단계적으로 개방키로 했다.
그 첫 단계 사업인 탑동약수터가 있는 탑동삼거리에서 기찬랜드까지 5.5㎞를 지난 7월 초 공개했다. 천황사에서 탑동약수터까지 1.2㎞는 내년까지 완성키로 하고 곧 정비작업에 들어간다.
영암군에서는 이 기찬묏길을 월출산 100m 이하 지역에 만들었다. 100m 이상 지역은 국립공원관리지역으로, 길을 조성하려면 여러 부처와 여러 단계의 협의를 거쳐야 하므로 공사가 지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영암군청의 기찬묏길 조성 담당자인 이선규(오른쪽)씨와 유미아씨가 길에 대해 설명하면서 걷고 있다.
기찬묏길을 지도상으로 보면 전부 100m 이하 지역에 절묘하게 그려져 있다. 영암군청 도시개발과 이선규(52)씨와 유미아(39)씨가 담당이었다. 미혼여성인 유미아씨가 공사 실무담당자였고, 이선규씨는 그 업무를 상부에 보고하는 직속 상사다. 특히 유씨는 여성의 몸으로 공사를 직접 관리·감독하며 밤늦게까지 작업이 진행될 때에도 항상 현장을 지키는 열의를 과시했다. 유씨는 손때가 흠뻑 묻은 그 5.5㎞ 구간을 동행하며 일일이 설명했다.
탑동약수터 삼거리는 호젓한 숲길이다. 여기서부터 기찬랜드가 있는 용추폭포까지가 이번에 개방한 코스다. 원래 출발지인 천황사 주차장에서부터 탑동약수터까지 1.2㎞ 구간은 아직 숲 그대로였다. 지도상에 노선만 확정하고 정비작업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 숲으로 길을 낼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닦일 길을 뒤로 하고 걷기 시작했다.
요즘 어느 숲이든 매미 우는 소리가 극성이다. 우아한 소리가 아니라 시끄럽게 느껴진다. 여기도 예외가 아니다. 귀를 울리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첫발을 내디딘 길은 돌포장길이다. 옛날 우리 길이었던 박석포장이 아니고 큰 돌을 깔고 주변 공간은 시멘트로 채운 길이다. 운치는 떨어지지만 깔끔한 맛은 있다.
돌포장길이 끝나면 시멘트길, 흙길, 자갈길, 나무 데크, 다리, 다져지지 않은 작은 돌길, 벽돌길 등 5.5㎞ 구간에 걸쳐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길이 널려 있다. 맨발로 걷는다면 마사지가 아니라 지압효과를 단단히 거둘 수 있다. 작은 돌길은 발바닥 군데군데를 눌러 주고, 조금 아프면 흙길로 가고, 그러다 넓은 돌길로 걷다 발이 뜨거우면 나무 데크로 옮겨 바로 식힐 수 있다. 공사책임자 유미아씨가 여성으로서의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인지, 하다 보니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의미는 있었다.
소나무 숲길이 끝나자 대나무 숲이 나왔고, 참나무 숲도 그늘을 가려줬다. 다양한 나무들이 아직 치열한 삶의 경쟁을 벌이는 숲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텃밭에선 할머니가 땡볕 아래 허리 숙여 고추니 호박을 열심히 다듬고 있었다. 텃밭 너머로 영암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드넓은 영암평야 속에 읍내가 둥지를 튼 모습이다.
기찬묏길 옆으로 가끔 야생화가 눈에 띈다. 숲, 물, 바위와 더불어 시름을 잊게 하고 심신을 안정시켜준다. 월출산의 기가 숲, 물, 바위, 그리고 길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하다. 자연이 주는 신선함으로 갑자기 몸이 짜릿짜릿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기찬묏길인가.
▲ 계곡에는 나무다리를 놓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도록 했다.
남부지방서 드문 적송 군락지도 보여
쉼터와 정자도 여러 군데 있다. 어디서든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숲이 없는 길은 그늘도 없어 햇볕이 따갑지만 반면 월출산의 불꽃을 뿜는 듯한 암봉들을 볼 수 있어 그 또한 매력이다.
기체육공원과 계곡 위로 놓인 나무다리를 건너 절반쯤 갔을까? 적송 군락지가 펼쳐졌다. 남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적송이다. 한두 그루가 아니고 군락을 이루고 있다. 키가 쭉쭉 뻗은 걸로 봐서는 수령도 수십 년 된 듯하다. 뭔가 사연이 있을 법했지만 어디에도 그런 안내가 없어 아쉽다. 전문가의 설명이 곁들여진 안내판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월출산의 기를 받은 기찬묏길에서만 생육할 수 있는 적송 군락이라든지 하는 등의 그럴 듯한 설명이 가능할 텐데.
다시 작은 돌길, 나무 데크, 흙길 등을 지나 사거리가 나왔다. 영암실내체육관이 바로 옆에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산성재 방향으로 월출산으로 등산하는 코스도 있다. 그러나 정상 1㎞ 부근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통제한다고 안내판에 설명돼 있다. 기찬랜드까지는 1.4㎞ 남았다.
잘 손질된 몇 개의 무덤과 향나무, 참나무가 가로수처럼 늘어진 길을 지나니 돌고래바위가 나왔다. 꼭 돌고래같이 생겼다. 눈 위치엔 정확히 눈이 표시돼 있다. 인공으로 만든 게 아니면서도 참 절묘하다. 마치 돌고래가 고개를 쳐들고 월출산의 기를 많이 받았는지 묻는 것 같다.
▲ (좌) 탐방객이 흙으로 조성된 기찬묏길을 따라 걷고 있다. (우) 군데군데 쉼터에는 의자와 함께 시도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곧바로 마지막 쉼터와 정자를 지나니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기찬랜드가 나왔다. 현재 개통된 1구간 기찬묏길의 끝부분에 있다.
기찬랜드 옆으로 기찬묏길은 계속된다. 수영장뿐만 아니라 주변 숲속도 인산인해다. 수영장은 ‘사람 반 물 반’이고, 주변 숲은 ‘사람 반 나무 반’이다. 기찬랜드에서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기찬묏길을 따라 올라갔다.
전망대 같은 조그만 쉼터 앞에 앉기 좋은 너럭바위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깨금바위’다. 가야금 산조를 창악한 김창조 선생이 이 바위에서 가야금을 즐겨 연주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야금을 깨친 바위란 뜻인가. 노을 진 월출산 자락 깨금바위에서 가야금을 타면서 두둥실 떠오르는 달과 음률을 상상해보라. 계곡에 비친 그 모습과 울려 퍼지는 음률에 학이 그냥 날아와서 춤출 것만 같다. 잠시 꿈 같은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그래서 월출산, 가야금과 ‘영암아리랑’은 불가분의 관계인가.
기찬묏길 1구간의 끝이 이제 불과 200m 남짓 남았다. 올라가는 중간에 커다란 정자가 있다. 이미 한 가족이 점령해 있다. 몇 십 미터 더 올라가면 ‘출입금지’란 푯말이 있다. 이 위로는 해발 100m 이상으로 월출산국립공원 구역이다. 바로 앞에는 높이 40m 이상 되는 용추폭포가 흘러내린다. 기찬랜드의 수원(水源)이기도 하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날 이곳을 찾으면 용이 승천하는 듯한 신비로운 광경이 연출된다고 한다. 월출산 12경 중 하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시의 감성’이라면, 용과 계곡과 바위와 달은 ‘월출산의 기성(氣性)’이다. 월출산에 가면 그냥 기를 막 받을 것 같다. 그 기를 전국에 팔기 위해서 영암군이 나섰다. 손에 쥐어 줄 수는 없다. 직접 가서 체험해봐야 한다. 그 길이 월출산 둘레길인 ‘기찬묏길’이다. 화승조천의 지세와 화체의 산, 월출산을 바라보며 걸으면서 힘찬 기를 한번 느껴보는 게 어떨까? 늦여름과 초가을에 말이다. 그래야 올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