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역사의 현장, 경교장
전철 5호선 서대문역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경교장, 막연히 중국에서 독립
운동하고 상해 임시정부 주석으로 귀국 후 분단되는 조국을 막아 보려다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격으로 서거하신 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도 하고, 당시에 전쟁 당사자 였다. 그러나 임시정
부 요인들을 미군정은 제대로 된 대우를 하지 않았다. 김구선생도 불려가 젊디
젊은 미군 장교에게 조사받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귀국 후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일제 강점에 우리나라 3대 갑중 하나인 최창학崔昌學의 주택을 제공
받아 사용한다. 금광사업으로 갑부가 된 그는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당시 아방궁이라 불릴 정도의 건물이었는데 수입한 이태리제 최고급 자재와
일본인 기술자들이 지었다. 당시 사진과 기록을 통해 복원하였다.
사업가 최창학은 김구선생 서거 후 집세를 요구하고 집기가 손상될까 간섭하고,
그 행적을 보면 진심어린 배려가 아니 었슴이 드러난다.
좌익과 우익 민족진영과 친일파로 갈라진 국내 상황은 나라가 어디로 갈지 안개
속 이었다.
우리민족이 갈라서는 일이 없어야 하며 진정한 독립은 통일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다. 김일성과 담판하려 평양까지 다녀
왔으나 분단을 막아보려는 노력은 허사가 된다.
당시 사진으로 복원한 2층 집무실은 유리창에 피격당시의 총탄 자국이 있다.
지하층에는 당시 의복과 장례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하얀 저고리에
피투성이가 된 당시를 재현하고 있다. 상의에는 우측 가슴에서 팔까지 찢은
자국이 있는데 응급조치를 위해 상의를 자른 것이다. 4발의 총탄중 2발이
인중과 목을 관통해 유언 한마디 없이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살해범 안두희 사형선고를 받고 15년 형을 받지만 이듬해 6·25한국 전쟁이
나면서 석방되고 잠시 현역장교로도 복무하였다.
그 후 군에 음식료품을 납품 하면서 잘 살았지만 정권이 바뀌고 의로운 생각을
가진 시민들에 의해 맞아 죽었다. 그러나 확실한 배후를 자백하지 않았다.
부호 최광석의 별채는 대사관저, 미군시설, 병원으로 전전하면서 쇄락해졌고
마지막에는 삼성병원의 사무실과 부속 건물로 쓰였다.
병원 증축으로 없어질 처지가 되었다. 역사의 현장을 보존해야한다는 여론에,
삼성은 서울시에 관리권을 넘긴다. 사적으로 지정된 후 복원하여 무료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고색창연 하리라 생각했는데 회의실과 집무실은 화려했다.
숙소로 사용한 곳은 다다미(일본식 돗자리)방으로 대조를 이루었다.
최대 갑부의 별채를 임원들의 집무실과 거처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해설사의 자상한 안내로 김구선생의 성장 배경과, 임시정부시절의 어려움
감동적 인 사연들을 알게 되었다.
19살 동학 접주로 해주성 전투에 참여하고 그 혼돈의 시기에 만난 인물
고능선, 앞뒤, 좌우를 헤아려 끝까지 간다는 그의 처신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사상의 뿌리가 된다.
백범白凡은 白丁과 凡夫를 의미하며 적은수의 엘리트보다는 가장 천하게
여기는 그 백성들이 나라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머리가 되려 다투지 말라, 다리가 튼튼하면 넘어지지 않고 나중에는 밀려서
머리 가 된다는 백범의 말씀이다.
큰 아들은 임정 첩보원으로 일하다 과로로 폐결핵에 걸렸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26살에 세상을 뜬다.
조선왕조를 대한 제국으로 바꾼 고종은 황제라 칭하지만 1929년 8월 29일
일제에 합방당하는 국치일을 맞는다. 국권 회복을 위한 수많은 단체들이 항일
투쟁을 한다.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무장투쟁을 벌이던 독립운동은 위축된다.
상해 임시정부는 여섯 차레 이주를 하지만 새로 만들 나라는 백성이
주인이라는 획기적인 사상을 받아들인다.
대한제국과는 체제가 다름을 밝히고 대한민국이라는 최초의 국호를 사용했다.
일본의 극우파세력은 독립 투쟁한 애국지사들을 테러범으로 여긴다.
동양평화를 깨고 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군국주의자, 그들을 처단한
독립투사들은 평화주의자다. 교육과 문화민족임을 가르치려 전 재산을 팔아
만주땅에 학교를 세운 이회영과 그의 여섯 형제들 중 일부는 굶어 죽기까지
했다.
그 영향으로 안중근 김좌진, 김구, 이승만, 신채호 등 수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다.
불안과 궁핍 속의 독립운동가 백범, 나의 평생소원은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가서 남에게 행복을 준다.” 그의 주장은 진정한 평화주자 임을 알 수 있다.
제헌국회에서 만든 일제청산 조직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부 출범후 강제 해산
되고 20일 후에 김구선생은 흉탄에 쓰러진다. 못 이룬 일제 청산, 생계를 위해
일한 하급관리까지 청산은 아니다. 일제의 고위직으로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린
이들이다.
그 후손들은 잘살고 있지만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못 배웠고 가난하다. 친일
인명사전을 만들지 못하게 교묘한 방해도 부렸다.
광복후 정치적 대립관계였든 초대 대통령의 거처 이화장과 백범 김구선생의
거처 경교장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경교장은 문화재로 서울시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초대 대통령 취임 전 거처
이화장은 추모사업회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쇄락하여 시급히 보수해야 할 형편이다. 말년에 부정선거, 독재자로 불행했지만
건국 대통령으로 예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두분의 살아생전의 모습과 사후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김구선생은 독립 투쟁의 고난의 역사와 사상을 기록한 백범 일지를 남긴다.
우리 모임을 위해 해설사는 백범일지 원본을 보여 주었다. 일기체가 아니었다.
유언이라 할까? 54세에 쓰기 시작했고 경교장에서 마무리했다.
난중일기와 백범일지는 역사적인 기록이 되었고 요즘 영화 명량이 그간의
흥행 기록을 갱신하며 상영되고 있다. 임진왜란 해전에서 23전 23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 어명을 거절 하였다 하여 고문과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칠전량에서 패한 조선수군, 겨우 남은 배 열두척으로 명량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다음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만 의문점이 많다.
조총을 쏘아대는 적 앞에서 갑옷도 입지 않았다.
경교장을 나오니 큰길가 서대문이 있었던 곳이다. 이 일대는 역사적으로
격동의 장소다. 조선 초기 계유정난, 수양대군에게 살해된 정승 김종서,
그 집터에는 농협 은행이 있다. 4대문 중 서대문은 실체가 없다.
서울시에서 복원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삼성병원 입구 언덕
길가에 있다.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4·19혁명으로 당시 부통령 이기붕,
일가는 자결 했다.
서대문역으로 향하는 대로변 그의 저택은 4·19혁명 기념 도서관이 되었다.
역사의 현장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