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해>에 만난
보라동성가정성당 주임 서상진(바오로) 신부
-왜 ‘바오로’란 세례명을 갖게 되셨습니까? 세례명과 얽힌 일화가 있으신지요?
▲ 아마 생일과 가까운 축일의 성인으로 어머니께서 정하신 것 같아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 같네요. 대신, 사소한 에피소드 하나가 기억납니다.
대대로 천주교 집안이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이름보다 ‘바오로’로 불렸는데, 당시 저희 집이 두부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거든요. 공장 아저씨들이 ‘바오로’를 잘 모르니까 ‘빠가야로, 빠가야로!’하고 부르곤 했던 기억이 나네요. (웃음) 어쨌든, 바오로 해를 맞이하면서 바오로 성인을 주보로 모시는 것이 참으로 영광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를 이방인의 사도, 열정적인 그리스도교의 전파자로 기억합니다. 신부님은 바오로 사도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어떤 것이 생각나시는지요.
▲ 제게 바오로 사도는 ‘불굴의 투지’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던 초대 교회 공동체 내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고, 바오로 자신은 동족들에게 배척을 당하기도 하고, 선교 여행 중 죽을 뻔한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전도를 멈추지 않았죠. 이런 투지는 예수님을 전하겠다는 사명감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저도 사제로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걸림돌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주저 않고 싶기도 하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고 싶기도 하지만, 바오로 사도의 그런 모범이 저를 비롯한 모든 신부들에게 귀감이 되고 용기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의 삶, 혹은 서간에서 드러나는 그의 인성 등에 비추어 신부님과 닮은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것 같습니다. 대머리라는 것? (웃음) 천막 짜는 일을 하셨던 바오로처럼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철사로 여러 가지 용도의 십자가를 만들어 신자들에게 드리고 있는데, 특별히 본당에 신․구약성경을 다 쓰신 분께는 십자가를 도금해서 드리고 있지요. 항상 받기만 한 것 같아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대물림을 위해
-신부님의 전반적인 사목 활동에서는 ‘가정’이란 단어를 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독신의 몸으로 선교활동을 펼친 바오로 사도 역시 서간을 통해서 혼인의 중요성과 바람직한 그리스도인 가정상을 설명한 바 있지요.
현재 보라동 ‘성가정’ 성당 주임으로서 신자들의 가정 성화를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 오셨고 교구 ME 영성지도 신부도 맡고 계시는데, 신부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람직한 그리스도인 ‘가정’은 어떤 모습인지, 또 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해오시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 이 시대의 여러 사회문제를 들여다보면 그 뒤에는 늘 ‘가정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의 시발점이 가정이기에 유일한 해결책도 바로 가정에 있지요. 좋은 가정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들에게 달려있다고 봅니다. 제가 ME에 뛰어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부부들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게 돕는 ME는 사실 궁극적으로는 부부들보다는 그 자녀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성장하면, 그 아이들도 그렇게 살아가기 마련이니까요. ‘사랑의 대물림’이죠. 제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그리스도인 가정도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서로 간에 대화가 있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는, 사랑과 신뢰의 가정입니다. 우리 본당에서는 현재 매주 목요일에 가정 미사를 봉헌하고 있고 성가정상 순회기도를 진행 중입니다. 성가정상 순회기도를 위해 본당에서 사용 중인 기도문을 따로 만들기도 했는데, 효과는...글쎄요. 눈에 보이는 효과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미래를 바라보면서 하는 것이니까요.
정의를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
-최근 미산골프장 건설반대 단식 시위에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번 인터뷰 때, 최 주교님께서도, “사회정의가 지켜지지 않는 이러한 현실을 (바오로 사도도) 눈감고 지나가진 않으셨을 것 같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는데, 신부님께서 단식에 참여하신 이유도 이와 같은지 궁금합니다.
▲ 사람들의 취미와 여가 생활을 위해 골프장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골프장이 대대적인 산림 파괴와 뇌물 수수를 통해 건설되는 것을 앉아서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후손들을 생각해야 하고, 또 우리 인간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대자연을 포함해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대원칙 중에 ‘사전 예방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해가 될 것이 예상된다면, 해가 없는 것이 확인될 때까지 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뻔히 해가될 것임을 알면서도 아이들이 그 길을 걸어가도록 놔두는 것은 아이들에게 죄를 범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지난 번 저는 중고등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광우병 쇠고기를 먹게 해서, 유전자 조작 식품을 먹게 해서 , 깨끗하지 못한 자연환경을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적이 있습니다. 미산골프장 건설 문제를 비롯한 이런 미안한 일들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언제나 권력과 돈의 힘에 윤리가 밀려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러나 정의를 전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정의는 이깁니다. 그것이 하느님 뜻에 맞기 때문이죠.
-성직자의 사회 참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신 분도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각자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골프장 건설 문제나 광우병 쇠고기 문제 모두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이야기라고 봅니다. 비뚤어진 정의를 바로잡자는 것이지, 정치에 관여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신부님의 경력에 눈에 띠는 것이 있습니다. 현재 수원대학교와 수원과학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계시는데, 무슨 과목을 가르치고 계십니까?
▲ 수원대학교에서 ‘인간과 윤리’라는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크게 ‘인간이란 누구이며,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을 살 것인지’ 두 가지로 나누어 다루고 있지요. 보통 150여 명쯤 수강을 하는데,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한다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선교를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자가 아닌 학생들이 다음에 신앙을 갖게 될 때 저를 떠올리면서 ‘아, 그 때 신부님께 강의 들었었는데...’ 하면서 생각할 수 있도록 좋은 이미지를 남기고 싶죠. 처음에는 학생들도 거리감을 느끼고 가까이 다가오지 않지만, 학기가 끝날 때쯤에는 성당에 다니려면 어떻게 하냐고 묻는 학생도 한 두 명 있고, 쉬는 시간마다 종교적인 부분에 대해서 물어오는 학생들도 꼭 있습니다.
-이방인의 나라로 가서 하느님을 전했던 바오로 사도의 모습과 일반 대학생들에게 강의를 통해 하느님을 전하고자 하는 신부님의 모습이 왠지 겹쳐집니다. 그렇다면, 신부님께서 강의를 통해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인지요.
▲ 바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 입니다. 현재 이 시대 가장 큰 문제를 저는 ‘개인주의’라고 봅니다.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고 타인에 대한 배려, 공동체 정신은 점차 사라지고 있지요. 삶의 방향을 정해줄 스승이나 양심의 기준도 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배처럼 불안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이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것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정서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삶의 지혜보다는 지식만 쌓게 하고 있으니, 이 시대의 소피스트들을 키우고 있는 꼴이지요. 저는 학생들이 우리가 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가장 인간다운 것임을 깨닫길 바랍니다. 사실, 젊은이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그토록 강조했던 ‘공동체 정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역시 서로를 연결해주는 한 지체의 활동인 것이죠. 주님을 지체의 으뜸으로 모시고 있는 우리가 한 몸과 마음으로 함께 도우며 살아간다면 어떤 문제들이 닥쳐온다고 해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평소에 바오로 서간이나 사도행전에서 특별히 음미하고 계시는 구절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디모 4,7) 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 다음에 내가 죽을 때 나도 바오로 사도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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