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 스님의 금강경 강설
23.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 정토를 장엄함)
법신은 분별을 떠난 절대적인 자리로 청정본심이며 중도의 몸
보신은 우리 중생들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몸
화신은 부처님께서 중생 위해 여러 모습으로 변해 나타낸 몸
개인의 업이 청정해지면 함께 짓는 공업도 더불어 청정해져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위대부(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만일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몸을 크다 하겠느냐?”
수미산왕(須彌山王)이라 함은 산의 높기와 넓기는 3백3십6만 리나 된다고 한다. 지금의 계산법으로는 8십4만Km. 지구를 157바퀴 반을 도는 높이와 넓이이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물론 상징적으로 크다는 표현을 하기 위함이다. 수미는 묘(妙)히 높다는 뜻이요, 산왕(山王)이라 함은 뭇 산 가운데 가장 크다는 뜻이나, 마음이 그만큼 한량없다는 표현이다. 부처님께서는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불(三身佛)로 나뉜다.
법신은 청정자성(淸淨自性)을 가리킨다. 청정자성은 있다거나 없다의 분별과 인과를 떠난 자리이므로, 불과(佛果)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니, 얻었다고도 할 수 없고 얻지 않았다 할 수도 없으며, 깨달았다고도 깨닫지 않았다 할 수도 없는, 생각을 붙이거나 말을 할 수 없는 중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부처가 따로 없고, 상대적인 것을 떠나 절대적인 자리이니, 이름 하여 피안(彼岸)이요, 실상(實相) 그 자체요, 해탈이요 열반이며, 청정자성(淸淨自性) 또는 청정본심(淸淨本心)이라고 부른다. 보신은 천장(千丈)의 노사나신(盧舍那身)이시다. 우리 중생들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몸이시다. 우주 전체가 부처님의 몸이시니, 부처님 몸 아닌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를 보신이라 하고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 이름 한다. 즉, 비유하자면 파리가 우리의 몸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우주 전체의 부처님 몸을 보지 못하는 격이다.
화신은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하여 화작(化作)한 몸이시다. 우리가 보는 대상 하나하나가 모두 부처님의 모습이시다. 내가 보는 대상이 부처님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나를 돌봐 주심에도 업이 두터워 부처님의 모습으로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화작(化作)하여 우리들을 인도하여 주심이다. 세계보건기구 WHO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에 대해 세계적 대유행이라는 ‘펜데믹’을 선언했다. 바이러스는 역사적으로 인류사에 있어서 대재앙으로 이어져 왔다.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MERS)를 비롯하여, 2014년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창궐해 1만1310명이 숨졌다. 2015년 지카(Zika) 바이러스가 84개국에 퍼졌다. 또 2009년, ‘신종플루’에 의해 한국에서는 76만여 명이 감염되어 270명이 사망하였고, 2002년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는 중국 349명, 홍콩 299명 등 750여 명을 사망케 했다. 문헌에 등장하는 가장 오랜 ‘공포의 감염 질환’은 나병(癩病)이다. 11세기 십자군전쟁 도중 중동 지역에서 처음 발생한 나병균은 유럽으로 옮겨진 이후 무려 200년간 인류를 집단적 공포에 빠뜨렸다.
‘페스트’(pest)로 불리는 흑사병 역시 유럽 인구의 3분의1 가량을 앗아간 전염병이다. 흑사병으로 유럽의 총 인구의 30-60%가 죽었다.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4세기를 거치며 3억 5천만 명~3억 7500만 명 정도로 거의 1억 명이 줄었다.
천연두는 인류 역사에서 아즈텍제국과 잉카제국을 사라지게 한 주범이다. 1492년 스페인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발을 디딘 뒤 천연두 등 전염병이 같이 넘어가 면역력이 없던 현지 30만 명의 원주민 절반 이상이 천연두로 사망했다. 20세기에 가장 크게 유행한 것은 스페인 독감(Spanish influenza)이다. 1차 세계대전 뒤 귀환 병사들을 통해 세계에 전파되기 시작한 1918년부터 2년여 동안 창궐한 스페인독감으로 동서양을 망라해 5000만 명이 숨지는 참사가 터졌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죽은 사람이 1500만 명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 인명 손실을 가져왔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국에서는 흔히 무오년 독감(戊午年毒感)이라고 하는데, 740만 명을 감염시켰고 14만 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1957년에는 아시아독감, 1968년에는 홍콩독감으로 각각 100만 여명, 80만여 명이 숨지는 참사가 이어졌다. 이 밖에도 인류 역사이래 창궐한 전염병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찌 보면 인간끼리의 싸움인 전쟁보다도 훨씬 공포스러운 죽음의 안내자다.
이 같은 현상은 왜 일어날까? 부처님의 말씀에 의한 불교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부처님 말씀 가운데 ‘금강경’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현상, 이런 모습들 또한 바다의 파도가 철석거리는 현상일 뿐이다. 만약 이 엄청난 일들을 파도에 비유하냐고 의문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다면, 이는 그분의 업성(業性)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업들이 한꺼번에 나타난 현상을 공업이라 했다. 또 업은 인과라 했다. 인과는 좋고 싫은 고락(苦樂)이다. 고락은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는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이라 했다. 그러므로 더 좋거나 더 나쁠 수가 없다. 고락의 총량은 똑 같다. 그러므로 공업의 고락과 인과는 역사적으로도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된다. 평화로운 공업이 있다면 그에 상응한 불편한 공업이 나타나게 된다. 이는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고락의 업은 항상 한다.
따라서 그 가운데에서도 자업(自業)이 공업(共業)에 속하는 이도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고 공업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자업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업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업이야말로 아무리 큰 공업일지라도 범접치 못할 것이다. 청정한 자업은 분별하지 않는 중도(中道)의 마음이다. 중도의 마음은 인과가 닿지 못한다. 공업의 마구니를 물리치려면 기도와 참선, 보시 정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내 자업이 청정하면 공업도 청정해진다.
수보리언 심대 세존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須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수보리가 답하길 “대단히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큰 몸이 큰 몸이 아니고 이름 하여 부르기를 큰 몸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미산을 비유하여 “이 몸이 크다 하여 장엄(莊嚴)하다 하겠느냐? 크다는 것이 정말 큰 것이냐?” 이에 수보리가 답하기를 “심히 큽니다. 세존이시여!” 하였다. 그러나 수보리가 심히 크다고 말씀드린 것은 사량(思量-생각)으로서 크다는 말이 아니다. 수미산왕(須彌山王)이 다함이 있고 상(相)이 있는 이상, 아무리 크다 해도 사량으로서 크다는 것이니, 큰 것은 더 큰 것에 의해 작은 것이 되고, 크다는 상이 있으면 작다는 상이 생기므로 크다 작다라는 사량과 상은 분별된 생각과 말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법신과 보신, 화신의 삼신(三身)부처님 역시, 상이 있고 사량으로서 삼신불(三身佛)이라고 한다면, 이는 법신과 보신, 화신의 삼신불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수보리는 “세존이시여! 다함이 없고 상이 없는 몸 아닌 몸이라야 비사량(非思量) 비언설(非言說)의 큰 몸입니다” 하고 이를 일러 “이름 하여 심히 크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10대 교회 가운데 여섯 개가 우리나라에 있고. 또 50대 교회 중에 36개 전후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통계도 있다. 아마 단일 교회 가운데서는 여의도에 있는 모 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설도 있다. 알 만한 교회 가운데, 위에 언급한 여의도에 있는 모 교회를 비롯하여 몇몇 큰 교회들은, 단일 교회 신도수가 수만 명에서부터, 교파적으로는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교단의 수십만 명에 이르기까지, 그 신도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그 큰 교회들은 내면적으로 세습논란에 빠진 교회들이 적지 않고, 신천지교회 등은 요즘 논란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정치인이나 유명인들, 특히 명예와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을 비롯하여, 특히 고학력의 스펙을 가진 젊은 신자들이 많다고도 한다.
이에 비해 불교 쪽은 한마디로 맹숭맹숭하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한마디로 멀쩡한 사람들이 이 모든 문제들을 차치하고 광신적으로 몰려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물질만능주의에 입각한 더 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일환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대다수의 신자들이 아닌 일부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특정 종교를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치열한 경쟁과 물질에만 기반을 두다 보니 무조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종교적인 신앙조차도 득실을 따지는 이해관계와 더불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지나친 기복적 신앙으로 흐르는 것은 아닌지 강한 우려와 함께 정신사적 차원에서의 염려 또한 금할 수가 없음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도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뜻 역시, 분별을 완전히 버린 그래서 둘이 아닌 자성의 자리, 그러므로 하나라고 하는 표현을 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욕심을 부린 만큼의 과보(果報)를 얻게 되는 인과법(因果法)을 벗어날 수 없음이니, 불교 신도이든 기독교 신자이든, 고락의 인과는 피할 수 없음이다.
그러므로 어떤 신앙일지라도 분별하지 않는 중도의 마음이 되지 않고서는 인과는 물론, 괴로운 마음의 고업을 면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이런 올바른 신앙의 방향을 더욱 정확히 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종교, 내지는 신앙의 본질을 잘 알고 바르게 믿는 마음을 갖춰야 할 것 같다.
[1660호 / 2022년 12월 7일자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