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 창 3:8-10절
제 목 : 영적인 현주소를 알자(하나님이 나에게 물으실 때)
일 시 : 2025. 1. 29.
창세기 3:8-10/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물으시는 질문이 많지만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아담에게 물으신 질문으로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이며, 두 번째 질문은 가인에게 물으신 질문으로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자신의 영적주소를 묻는 질문이며, 두 번째 질문은 내 가족들의 영적인 주소가 어디인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질문 모두에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에게 새로운 돌파구와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가끔씩 질문을 던지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질문을 듣고 진지하고도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선다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 사람을 용서하시고 회복시킬 의향이 있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질문을 던지시는 이유는 심판이 아니라 치료와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를 점검해 보고 자신의 영적인 주소가 어디인지 발견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창 3:8-10/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1)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에 라고 했습니다.
바람이 불 때란 바람이 불어 서늘한 때를 의미합니다. 즉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던 아담과 하와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들의 행동을 되돌아보기에 알맞은 시간이었습니다. 비록 인간은 하나님 곁을 떠나 범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포기할 수 없으셨기 때문에 적절한 시간에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2)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라고 했습니다.
소리란(콜)이라고 하는데 사람의 목소리나 일반적인 소리를 모두 뜻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동산에 찾아오실 때 난 기척인 듯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의 느낌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아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찾아오시는 인기척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예민했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3)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라고 했습니다.
낯(파님)이란 문자적인 뜻은 얼굴, 앞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선 대유법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임재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려고 하지 않고 피하려고 합니다. 학교 다닐 때 시험 볼 때가 되었는데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시험을 피해서 도망가 버리고 싶었습니다. 타락한 본성입니다. 대부분의 실패한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와 힘든 현실을 도피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피하지 말고 직면해야 합니다. 막상 문제를 직면해보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마귀가 주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결코 만나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피하고 싶은 생각을 버리면 됩니다.
4)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했습니다.
숨은지라는 스스로를 숨기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지은 죄를 깨닫고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뵐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범죄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두려움(10절) 때문에 스스로를 숨겼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마귀는 아담 때부터 지금까지 두려움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도 두려움을 주면 마치 큰 문제처럼 생각하여 포기하고 도망을 갑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정말 인류의 큰 적입니다. 딤후1: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는 두려움을 물리치고 대신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도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두려움은 죄 때문에 오는 것이며, 불신앙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일4: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두려움을 받아들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믿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담대하게 살아가지 않고 두려워하는 것이 얼마나 큰 불신앙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계21:8절에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의 특징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 첫 번째가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계21: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라고 했습니다.
5)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면서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 부부에게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이처럼 물으셨습니다.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은 네가 지금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사실 아담은 지금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숨어 있지 말고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은 아담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어디에 있어야 했습니까? 평상시에 하나님과 함께 거닐던 바로 그 장소에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하던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것처럼 나도 또한 주님만을 바라보는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시16: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으며, 시25:15/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과 눈이 항상 여호와만을 바라봄으로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아니하고 내 발이 그물과 장애물에 걸리지 않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6)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라고 했습니다.
듣고(솨마티)란 솨마(주의 깊게 듣다, 복종하다, 순종하다, 이해하다)의 완료형으로 아담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서 그같은 부르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했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때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지 말고 그 즉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7)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벗었으므로란 완전 나체인 고로란 뜻입니다. 때문에 이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된 근본 원인(8절)이 아니며, 또한 그들은 부분적으로나마 무화과나무잎으로 하체를 가리우고 있었으므로(7절) 이것은 잘못된 답변이며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이처럼 아담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회개의 기회를 선용하지 못하고 도리어 변명하기에 급급하였는데, 그 결과는 가중되는 죄악(12절)과 그에 마땅한 준엄한 형벌이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17-19절,약1:15).
따라서 죄를 지은 죄인이 용서받는 첫걸음은 자신이 지은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않으십니다(시34:18,시51:17).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시는 이유는 아담부부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허물이 보이고 두려움이 찾아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고 싶어하고 숨어 버리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해결책은 아닌 되도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실수하여 범죄했을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자신의 죄를 숨기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무조건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나의 죄의 짐을 져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거나 실수할 때마다 즉시 예수님께로 가서 나의 죄를 고백함으로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입으로 솔직하게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만약 범죄했을 때 아담 부부처럼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 있으면 어떤 해결책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빨리 거기에서 나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나오면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창4: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최초로 타락한 아담에게 주셨던 질문과 동일한 성격의 질문입니다. 곧 지금이라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라는 독촉인데, 이처럼 범죄한 인간을 쉽게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때문입니다(출34:6,시33:5).
2)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알지 못하다란(로 야다티)라고 하는데 야다(알다)의 과거완료형부정으로 나는 처음으로(처음부터) 알지 못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형제에 대한 우애와 책임을 부인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만하려는 뻔뻔스런 대답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것 뿐인데 이처럼 가인은 도리어 하나님을 속이려 들었으니 그의 결국이 어떠할런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라고 했습니다.
지키는 자란 돌보는 자, 시중드는 자, 파수꾼 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은 형으로서 마땅히 동생인 아벨을 돌보며 지켜 주어야 할 인간적인 책임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혈육의 형제를 돌보아야 책임이 있으며, 영적인 형제인 성도를 돌아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가인의 뻔뻔스러운 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니이까(하)란 그렇지 아니하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는 의문사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런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아벨 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로 곧 형제간의 관계성 단절을 선언하는 뻔뻔한 반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 동생(형, 부모, 자녀)이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부모형제자녀들이 있다면 나는 모릅니다.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대답하는 가인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지키고 돌보아야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25년도 한 해 동안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하셔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예수님을 믿는 의인으로 거룩한 자로 예배자 기도자 전도자 만드시는 응답의 축복이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아멘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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